3·15 마산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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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15 마산 의거는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마산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화 운동이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국회 조사 결과 경찰의 과잉 진압이 밝혀졌으나, 이승만 정부는 이를 공산당의 사주로 몰아갔다. 이후 국립 3·15 민주묘지가 조성되고, 3월 15일이 기념일로 지정되어 의거의 의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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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5일 - 3·15 부정선거
3·15 부정선거는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저지른 대규모 부정행위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선거 결과 무효화로 이어졌다. - 3·15 부정선거 - 최인규 (1919년)
최인규는 연희전문학교와 뉴욕대학교를 졸업 후 대한교역공사와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 자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제4대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3·15 부정선거의 총책임자로 지목되어 4·19 혁명 이후 구속, 5·16 군사정변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3·15 부정선거 - 박용익
박용익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예천군 군수를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자유당 원내총무와 국회 예산결산위원장, 그리고 제3대 및 제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3.15 부정선거 연루 의혹이 있다. - 1960년 시위 - 4·19 혁명
4·19 혁명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과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 1960년 시위 - 안보 투쟁
안보 투쟁은 1960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 운동으로, 조약 강행 처리와 시위 격화 속에 발효되었고, 이후 일본 정치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3·15 마산 의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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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마산 의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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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19 혁명 |
날짜 | 1960년 3월 15일 ~ 4월 11일 (마산 지역) 1960년 4월 11일 ~ 4월 26일 (전국적 확산) |
지역 |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
원인 | 3·15 부정선거 |
목적 |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
종류 | 항의, 시위 |
결과 | 4·19 혁명으로 확대 |
시위 참가자 | |
시위대 | 마산 지역 시민 |
상대 | 경찰 |
인원 | 만여 명 이상 |
주요 인물 | |
사상자 | |
사망자 | 13명 |
부상자 | 870명 |
2. 배경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40%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등을 확인하고 당사로 돌아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준비했다.[3]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선거 포기를 선언한 뒤 시위를 준비했다.[3] 저녁 7시 30분경,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인 1000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은 민주당 간부들과 함께 시위에 나섰고, 행진 과정에서 수천 명이 합류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자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정전 중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는 더욱 분노하여 맞섰다. 시위대는 자유당 관련 시설들을 파괴하며 저항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6]
저녁 7시 30분경,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간부들과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시위대는 민주당 간부, 시민, 학생으로 구성되었으며, 행진하면서 수천 명이 합류하였다.
경찰은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며 강력하게 대응했지만, 시위 군중은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을 정도로 더욱 늘어났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던 중 정전이 발생했고,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다.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시위대는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파출소장의 집 등을 파괴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혔고,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퍼진 인물이었다.[5]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6] 1960년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아침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낮 12시 45분부터 시민 1천여 명이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7]
3. 전개 과정
4월 11일 아침,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시민 1천여 명이 금남로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7]
3. 1. 1차 마산 시위 (3월 15일)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으며, 이내 시위를 준비했다.[3]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민주당 간부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행진함에 따라 수천 명이 합류하였다.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히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다. 이때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는데,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시켜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파출소장의 집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난 인물이다.[5]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6] 1960년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김주열은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되었고, 4월 11일 아침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는 시위를 더욱 격화시켰고,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 2.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4월 11일)
1960년 4월 11일 아침,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김주열 열사는 그해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이었다. 그는 3월 15일 마산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되었는데,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3]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3·15 마산 의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4·19 혁명을 촉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3] 당시 마산에서는 민주당 간부들이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로 들어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시위를 주도했다.[3] 민주당은 이 사건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폭력성을 규탄하며 정권 퇴진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3. 3. 2차 마산 시위 및 전국 확산
1960년 4월 11일 아침,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3] 김주열은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되었던 학생이었다. 이 사건은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5일 마산시에서는 민주당 간부들이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로 들어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준비했다.[3]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 중 정전이 되자 경찰의 총격을 받았고, 이에 분노하여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파출소장의 집 등을 파괴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혔고,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퍼진 인물이었다.[5]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6]
한편,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낮 12시 45분부터 시민 1천여 명이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7]
4. 주요 인물
3·15 마산 의거에는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크게 희생자, 시위 주도 인물, 이승만 및 자유당 관계자로 나눌 수 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민주당 간부들은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정남규를 중심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마산 시민, 학생 등 1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정남규 등을 연행하자 시위 군중은 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시민들이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했다.
자유당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 등 부정 선거를 자행했다.[3]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혔고,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5]
4. 1. 희생자
3·15 마산 의거 당시 경찰의 발포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했다.[6]이름 | 사망 당시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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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 3월 15일 시위 도중 실종. 27일 후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변사체로 발견됨.[6] |
김용실 | 3월 15일 마산파출소 앞 시위 중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 |
오성원 | 3월 15일 마산파출소 앞 시위 중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 |
김영준 | 시위 중 총을 맞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부르다 숨짐. |
김동섭 | 오후 9시 시위 중 총을 맞고 병원 치료를 받았으나 숨짐. 후두부에 총알 관통. |
조현대 | 시위 중 총에 맞아 투병 생활을 하다 이듬해 2월 28일 숨짐. |
김상웅 | 시위 중 좌측 복부에 총을 맞고 숨짐. 죽기 전 내 할 짓을 하고 죽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어머니를 위로함. |
전의규 | 시위 중 귀 윗부분에 총을 맞아 사망. |
김효덕 | 시위 중 좌측 두부에 총을 맞아 사망. |
김용기 | 시위 중 총을 맞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숨짐. |
김영호 | 시위 중 머리에 총알이 관통해 숨짐. |
김동섭은 1963년까지 생존하여 다른 희생자들보다 3년 더 생존했다.
4. 2. 시위 주도 인물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에서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준비했다.[3]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저녁 7시 30분경 마산 시민 1000여 명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민주당 간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는 행진하며 규모가 커졌고,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자 시위 군중은 밤 8~9시경 만여 명으로 늘어났다.4. 3. 이승만 및 자유당 관계자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에서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 등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3]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민주당 간부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행진하면서 수천 명이 합류하였다.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며 강력히 대응하자 시위 군중은 밤 8~9시경 만여 명이 넘을 정도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고, 이에 시위대는 더욱 분노하여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파출소장의 집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혔고,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난 인물이다.[5]5. 수습 및 결과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선거 포기를 선언하며 시위를 준비했다.[3] 정남규 의원을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과 마산 시민,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더욱 늘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으며,[6] 시위대는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파출소 등을 공격했다. 특히,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허윤수 의원은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혀 비판을 받았다.[4][5]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 1천여 명이 금남로에서 데모를 벌였다.[7]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5. 1. 국회 조사단의 진상 조사
국회조사단은 이날의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의 해산을 위한 것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마산 시위가 공산당의 사주로 벌어진 일인 양 주장하였다.[8]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마산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을 묻는 질문에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8]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중국어
5. 2. 이승만 정부의 대응과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 국회조사단은 마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 해산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마산 시위가 공산당의 사주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3]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3월 18일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마산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을 따져 묻는 질문에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8]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1960년 3월 18일 3·15 마산 발포 사건에 대한 회견 중 이기붕한국어[9]
4월 11일 아침,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6. 역사적 의의와 평가
3·15 마산 의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서, 독재 정권에 맞선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을 상징한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에서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선거 포기를 선언한 뒤 시위를 준비했다.[3]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난 인물이다.[5]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여 명이 부상당했다.[6]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민주당은 3·15 의거를 당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3·15 의거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보여준 사건이며, 독재에 항거한 시민 정신을 기리는 것은 민주당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6. 1.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영향
3·15 마산 의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0년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김주열은 3·15 의거에 참여했다가 실종되었는데, 4월 11일 아침 마산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6] 이는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6. 2. 사회적 인식과 평가
3·15 마산 의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서, 독재 정권에 맞선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을 상징한다.1960년 3월 15일 마산시에서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선거 포기를 선언한 뒤 시위를 준비했다.[3]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난 인물이다.[5]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6] 또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민주당은 3·15 의거를 당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3·15 의거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보여준 사건이며, 독재에 항거한 시민 정신을 기리는 것은 민주당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7. 기념 사업
3·15 의거를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2003년 12월 26일 경상남도는 도 조례 3017호를 통해 매년 3월 15일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2009년 국회에서 국가기념일 제정 관련 법안이 통과되어 2010년 정식 공포되었다.
7. 1. 국립 3.15 민주묘지
3·15 의거가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1969년, 마산시 구암동 애기봉 일대에 1,200평 규모로 희생자 묘역을 조성하여 이듬해 1월에 묘 13기를 이장하였다. 이후 1994년 묘역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1996년에 계획이 확정되면서 1998년 3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2002년 7월 22일 마산시는 묘지 일대 관리권을 국가보훈처로 이관하였고, 8월 1일에 국립 묘지로 승격되었다.[10] 승격 이후 9월 11일에 국립 묘지 관리소가 설치되었고[11], 5년간의 공사 끝에 시위 43주년이 되는 날인 2003년 3월 15일에 준공식을 했다. 2010년 7월 1일 마산시와 창원시가 통합하여 행정구역상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속하게 되었다.
7. 2. 기념일 제정
2003년 12월 26일 경상남도는 도 조례 3017호를 통해 매년 3월 15일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2009년 국회에서 국가기념일 제정 관련 법안이 통과되어 2010년 정식 공포되었다.참조
[1]
웹사이트
3ㆍ15 의거 기념일
https://theme.archiv[...]
[2]
뉴스
'마산 3.15의거' 국가기념일 지정…국무회의 통과
http://www.cbs.co.kr[...]
경남CBS
2010-03-09
[3]
서적
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
지와사랑
[4]
서적
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
지와사랑
[5]
논문
이승만 정권의 붕괴(3.15~4.26):이승만 정부의 대응 및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6]
서적
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
동아일보사
[7]
뉴스
"3·15의거 광주서 시작"…민주주의 장송 데모 재현
https://news.naver.c[...]
[8]
간행물
이승만의 몰락,피플파워 현장:이만섭 전국회의장 회고 3·15마산의거
신동아
1995-04
[9]
뉴스
시류가 남긴 정치어록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6-08-14
[10]
법령
대통령령 제17668호
[11]
법령
대통령령 17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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