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E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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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IE 도서관은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가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설치, 운영한 도서관이다. 민간정보교육국(CIE)이 주도하여 민주주의 보급과 교육 개혁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일본 전역에 걸쳐 23개관이 운영되었다. 각 도서관은 약 4,000권의 장서와 다양한 정기간행물을 갖추고 무료로 개방되었으며, 참고 봉사, 상호대차, 영어회화교실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전후 일본 공공도서관의 모델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이후에는 미국문화센터(ACC)로 전환되어 운영되다가 예산 삭감 등으로 폐쇄되었고, 일부는 미국 대사관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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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E 도서관 | |
---|---|
CIE 도서관 | |
종류 | 도서관 |
설립 | 1945년 12월 |
폐쇄 | 1952년 3월 |
설립 목적 | 일본 국민의 민주화와 계몽 |
위치 | 도쿄도를 포함한 일본 각지 |
운영 주체 |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민간정보교육국(CIE) |
상세 정보 | |
주요 활동 | 도서, 잡지, 영화 등 각종 자료 제공 강연회, 토론회 개최 민주주의 사상 보급 |
특징 | 검열을 거치지 않은 자유로운 자료 열람 가능 일본 국민의 지적 호기심 충족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 |
소장 자료 | 약 15,000점의 도서 다양한 종류의 잡지, 신문 영화 필름 |
영향 | 전후 일본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 일본 국민의 의식 개혁에 영향 학술, 문화 발전에 공헌 |
관련 인물 | 시어도어 코헨 마쓰모토 시게하루 |
기타 | CIE 도서관의 자료는 현재 국립국회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음 CIE 도서관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 |
2. 명칭
1948년 8월 이후 정식 영어 명칭은 "CIE Information Center"였으나, 시민과 언론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CIE 도서관"이라 불렸다.[1] '인포메이션'의 번역어로 첩보를 연상시키는 '정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려 했다는 일화도 있다.[2] 나가사키 CIE 도서관의 경우 홍보용 리플릿에서 도서관 명칭을 "나가사키 CIE 도서관"(長崎CIE圖書館), "SCAP CIE INFORMATION CENTER NAGASAKI"로 표기하고 있다. 별칭으로는 "CIE 라이브러리", "SCAP(스캡) 도서관", "미국 도서관" 등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의 점령하에 놓였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7년간 GHQ/SCAP는 일본의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했다.[1]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 외에도 미국 태평양 육군 최고사령부(GHQ/USAFPAC)가 관할하는 각지의 지방군정부에도 민간정보과(CIE)가 있었으며, 이들 역시 지방의 공공도서관, 공민관, 학교 등에 "CIE 독서실"(CIE Reading Room)을 설치했기에 이들과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 다만 이러한 지방군정부의 CIE 독서실 중에는 후에 SCAP CIE로 이관되어 "CIE 도서관"의 분실이 된 곳도 있다. 그 외에는 폐지되거나 공공도서관, 공민관 등에 통합되었다.
3. 역사
GHQ/SCAP의 부서 중 하나인 민간정보교육국(CIE)은 민주주의 보급, 국가주의 배제, 교육개혁 등을 담당했으며, 도서관 정책 담당관도 배치되었다. CIE의 도서관 정책에는 국립도서관,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대학도서관 등 각종 도서관 개혁 외에도 직원 양성과 도서관 협력, 그리고 이 CIE 도서관의 설치, 운영이 포함되었다.[1]
최초의 CIE 도서관은 1945년 11월 15일 도쿄도 고지마치구(현 지요다구) 우치사이와이초의 NHK 도쿄 방송 회관 108호실에 설치되었다.[1] 초기에는 주로 CIE 관계자들이 이용하였으나,[1] 1946년 3월 니토 홍차 다실로 이전하면서 일반 일본인에게도 개방되었다.[1]
1947년 8월 23일, CIE는 교토와 나고야에 CIE 도서관 설치 지령 SCAPIN4401-A를 발표했고,[2] 같은 해 12월 30일 발표된 SCAPIN5083-A에 의해 추가로 14개 도시에 설치하는 것이 통지되었다. 1948년까지 인구 20만 이상인 16개 지방 도시에도 CIE 도서관이 설치되어 총 17개관이 되었다.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신주쿠, 나가노, 마쓰야마, 오카야마, 아키타에 각 관이 개관했고, 마지막으로 고쿠라시의 후쿠오카 CIE 도서관 기타큐슈 분관이 시의 요청으로 승격되어 총 23개관이 되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군의 일본 점령이 끝나면서 CIE 도서관은 폐쇄되었고, 이 중 13개 도시는 미국 국무부로 이관된 후 5월 1일부터 미국문화센터(ACC)로 개칭되었다.[1] 기본적인 서비스 내용은 이전과 같았으나,[2] 미국 정부의 홍보 활동 최전선을 담당하는 시설이 되어 영화 상영회, 전시회, 영어 회화 교실, 강연회, 인사 교류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1]
3. 1. 설치 배경
1945년 8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이 종결되고, 일본은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였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어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기까지 7년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에 의해 민주화와 다양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GHQ/SCAP의 부서 중 하나인 '''민간정보교육국'''('''CIE''')은 민주주의 보급, 국가주의 배제, 교육개혁 등을 담당했으며, 도서관 정책 담당관도 배치되었다. CIE의 도서관 정책에는 국립도서관,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대학도서관 등 각종 도서관 개혁 외에도 직원 양성과 도서관 협력, 그리고 이 CIE 도서관의 설치, 운영이 포함되었다.[1]
다른 나라(특히 점령 지역)에 도서관을 설치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미국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전시정보국(OWI)이 각국에 도서관을 설치했고,[2] 미국 국무부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지역에 소규모 도서관 "인포메이션 라이브러리"를 설치했다. 다만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 조선에 대한 도서관 설치는 국무부가 아닌 전쟁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인포메이션 센터"라는 명칭이었다.
1946년에 CIE가 미국교육사절단의 안내서로 간행한 《일본의 교육》(Education in Japan)에서는 CIE 도서관의 목적에 대해 "일본의 문필가, 학자, 관료, 정치인, 제단체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제관계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참고자료와 서적을 제공하고, 미국의 관습, 법률, 사회, 정치기구에 근거한 활동과 정책의 실태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3. 2. 창설과 각지로의 확대
최초의 CIE 도서관은 1945년 11월 15일 도쿄도 고지마치구(현 지요다구) 우치사이와이초의 NHK 도쿄 방송 회관 108호실에 설치되었다.[1] 초기에는 주로 CIE 관계자들이 이용하였으나,[1] 1946년 3월 니토 홍차 다실로 이전하면서 일반 일본인에게도 개방되었다.[1]
1947년 8월 23일, CIE는 교토와 나고야에 CIE 도서관 설치 지령 SCAPIN4401-A를 발표했고,[2] 같은 해 12월 30일 발표된 SCAPIN5083-A에 의해 추가로 14개 도시에 설치하는 것이 통지되었다. 이에 따라 1948년까지 인구 20만 이상인 16개 지방 도시에도 CIE 도서관이 설치되어 총 17개관이 되었다.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신주쿠, 나가노, 마쓰야마, 오카야마, 아키타에 각 관이 개관했고, 마지막으로 고쿠라시의 후쿠오카 CIE 도서관 기타큐슈 분관이 시의 요청으로 승격되어 총 23개관이 되었다.
3. 3. 폐쇄와 그 이후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군의 일본 점령이 끝나면서 CIE 도서관은 폐쇄되었고, 이 중 13개 도시는 미국 국무부로 이관된 후 5월 1일부터 '''미국문화센터'''(ACC)로 개칭되었다.[1] 기본적인 서비스 내용은 이전과 같았으나,[2] 미국 정부의 홍보 활동 최전선을 담당하는 시설이 되어 영화 상영회, 전시회, 영어 회화 교실, 강연회, 인사 교류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1] 이듬해 1955년에는 국무부에서 미국 홍보, 문화교류청으로 관할이 이관되었다.
1967년 이후 예산 삭감으로 인해 7개의 센터가 폐쇄되어 1972년에는 삿포로, 도쿄, 나고야,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의 6개 도시만 남게 되었다. 1996년에 교토, 1997년에 삿포로의 센터도 폐쇄되었으나, USIA가 국무성에 통합된 1999년에는 삿포로의 센터가 재개되기도 했다. 2006년에는 도쿄 아메리칸 센터의 자료실도 폐쇄되어 미국 대사관으로 이전했다.
4. 설비와 서비스
각 CIE 도서관은 개관 당시 약 4,000권의 장서와 400종의 정기간행물을 소장했으며, 냉난방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고베 CIE 도서관은 302평으로 가장 컸으며, 수용 인원은 오사카와 센다이가 각각 246명으로 최대였고, 하코다테가 72명으로 최소였다. 구마모토 CIE 도서관장을 지낸 그레이스 이이지마에 따르면, CIE 도서관의 과학, 기술 분야 장서는 미국의 일반적인 공공도서관보다 더 풍부했다고 한다.
각 도서관에는 미국인 전문 사서가 관장으로 1명씩 배치되었고, 일본인 직원이 보좌하는 형태였다. 일본에 온 관장 사서 중 확인된 인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CIE 도서관에서는 전쟁 전 일본 도서관에는 없었던 무료 공개의 개가제를 채택하고, 참고 봉사, 도서관 간 상호대차, 아동 서비스 등을 실시하여 전후 일본 근대 공공도서관의 모델이 되었다. 그 밖에도 영어회화교실, 영화 상영회, 레코드 콘서트, 강연회, 독서회, 토론회, 스퀘어 댄스, 펜팔 등 다양한 서비스가 CIE 도서관에서 제공되었다.
이용자는 미곡통장이나 학생증을 제시하면 대출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도서, 잡지 외에도 레코드와 악보, 팸플릿류도 무료로 대출할 수 있었다. 도서 대출 기간은 2주, 잡지는 1주(최신호는 1일)였다.
오사카 CIE 도서관 개설 시 CIE가 발표한 담화에서는 기존 일본 공공도서관에는 없는 CIE 도서관의 특징으로 입관 절차 불필요, 무료 입관, 자유로운 책 열람이 가능한 개가제, 자료 검색 및 지도 가능 직원 배치, 찾기 쉬운 충실한 카드식 도서목록 등이 언급되었다.
5. 이용 현황
개관 당시 도쿄 CIE 도서관은 하루 1,200명 이상, 지방에서는 400~500명 정도가 이용했다.[1] 이용자 대부분은 학생이었다.[2] 이공계 잡지의 이용률이 가장 높았으며,[2] 의학, 토목, 전기, 자동차, 무선, 텔레비전 관련 잡지는 입수되는 즉시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전쟁 전 일본 대학도서관에는 최신 자료가 부족했고, 해외 자료를 구하는 데도 수개월이 걸렸기 때문에 젊은 연구자들은 CIE 도서관에서 학술잡지를 탐독했다. 이용자는 학생, 연구자뿐만 아니라 미국의 패션 잡지를 찾는 주부와 여고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CIE 도서관을 이용했던 저명인사로는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마쓰야마 CIE 도서관), 공업디자이너 에쿠안 겐지(히로시마 CIE 도서관), 정신과 의사 나카이 히사오(오사카 CIE 도서관), 영문학자 유라 기미요시(도쿄 CIE 도서관) 등이 있다.
1947년 10월 1일자 일본독서신문 보도에 따르면, 도쿄 CIE 도서관의 하루 평균 열람자는 600명이었다. 성별로는 남성이 85%, 여성이 15%였다. 연령별로는 10대 이하 21%, 20대 65%, 30대 이상 21%였다. 직업별로는 학생이 55%로 가장 많았고, 엔지니어 14%, 과학자·전문기술자 4%, 의사 3%, 작가·편집자·신문기자 2%, 예술가·디자이너 2%, 관리 2%, 무직 4%였다.
도쿄 CIE 도서관 열람자 수의 분야별 내역은 다음과 같다.
철학·심리·종교 | 교육 | 사회문제 | 정치·역사 | 경제·상업·노동 | 공예 | 미술·오락 | 문학 | 기타 | |
---|---|---|---|---|---|---|---|---|---|
도서 | 2% | 4% | 2% | 18% | 20% | 20% | 12% | 16% | 2% |
잡지 | 2% | 4% | 10% | 8% | 4% | 48% | 16% | 0% | 8% |
참조
[1]
웹인용
格子なき図書館とは
https://kotobank.jp/[...]
2021-09-01
[2]
웹인용
昭和22年頃の移動映画に関することで、「ナトコ」という言葉がある。どういう意味か知りたい。
https://crd.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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