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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전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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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와전공 사건은 1948년 일본 쇼와전공 사장이 부흥 자금 융자를 위해 정부 고관과 금융 기관 간부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건이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직원들의 뇌물 수수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사가 검찰로 이관되었고, 여러 정치인과 관료들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아시다 내각이 붕괴되고 제2차 요시다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GHQ 내 권력 투쟁과 관련된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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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전공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쇼와 전공 사건
발생 시기1948년 - 1949년
발생 장소일본
관련 기업쇼와 전공 (현재 레조낙)
사건 유형뇌물, 정치 스캔들
주요 인물
용의자쇼다 가즈에 (당시 쇼와 전공 사장)
관련 정치인아시다 히토시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나바 히데오 (당시 사법 대신)
니시 오사무 (당시 경제안정본부 총무부장)
사건 전개
배경전후 일본의 경제 혼란과 쇼와 전공의 비료 증산 계획
사건 발각1948년 10월
수사검찰에 의한 강제 수사
재판아시다 히토시 전 총리 등 다수 기소
사건 결과
정치적 영향아시다 내각 총사퇴
쇼와 전공경영 위기
관련 정보
참고 문헌쇼와 전공 사건 (昭和電工事件) ISBN: 4-06-203994-X

2. 사건의 경위

검찰청에 연행되는 구루스 다케오(안경을 쓰고 수갑을 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한 남성)


부흥금융금고로부터 부흥 자금 목적의 융자를 얻기 위해 대기업 화학공업회사인 쇼와전공의 히노하라 세쓰조 사장이 정부 고관과 금융 기관 간부에게 뇌물을 뿌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초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다. 당시 경시청 수사2과장 하타노 아키라는 내사를 통해 정치권이 연루된 대규모 부정부패 사건임을 직감하고 정부가 붕괴될 위기까지 예상했지만 수사를 강행했다.

결국 아시다 내각총사퇴를 하게 되었고 이후 제2차 요시다 내각이 수립되었다.[11] 아시다 히토시도 전직 총리로 물러난 후에 체포되었지만, 구루스 다케오 외의 정치인들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2. 1. 수사 과정

경찰은 내사를 통해 쇼와전공 사건이 정계와 관련된 거대한 부정부패 사건임을 확신하고 수사를 진행했다.[12] 수사 과정에서 GHQ 직원들도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계, 재계, GHQ가 연루된 삼각 구도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파악되었다.[12]

GHQ는 일본 경찰의 수사에 압력을 가하며 사건에서 손을 떼게 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검찰이 수사를 주도하도록 공작했다.[12] 표면적인 이유는 경찰의 정보 누설이었지만, 실제로는 GHQ가 연루된 비리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12]

이에 당시 경시청 수사2과장 하타노 아키라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기자 고든 워커에게 비리 관련 GHQ 직원 명단을 넘겨주며 GHQ의 부당한 압력을 폭로했다.[12] 고든 워커는 GHQ를 방문하여 해당 명단을 제시하며 경찰 수사 방해 의혹을 제기했고, 이후 GHQ는 경찰 수사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12]

그러나 고든 워커는 갑작스럽게 한반도로 전근 명령을 받았고, 하타노 아키라와 후지타 형사부장도 전근되면서 결국 수사는 경찰에서 검찰로 이관되었다.[12] 검찰 수사에서는 GHQ에 대한 의혹이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12]

2. 2. 주요 사건 일지


  • 1948년
  • * 4월 27일: 중의원에서 쇼와전공의 부흥금융융자를 둘러싼 뇌물 수수가 의제로 다뤄졌다. 비료 공장 확충을 위해 23억 엔에 달하는 융자를 받기 위해 히토하라 사장이 정관재계에 막대한 자금을 뿌렸다.
  • * 6월 23일: 히토하라 사장 체포.[6]
  • * 9월 13일: 후쿠다 다케오 대장성 주계국장을 10만 엔 수뢰 의혹으로 체포.
  • * 9월 18일: 오노 반보쿠 자민당 고문을 20만 엔 수뢰 의혹으로 체포.
  • * 9월 30일: 구루스 다케오 경제안전본부 총무장관을 30만 엔 수뢰 의혹으로 체포.
  • * 10월 6일: 니시오 스에히로 전 부총리(사회당 서기장)를 100만 엔 수뢰 의혹으로 체포.
  • * 10월 7일: 아시다 내각 총사퇴.
  • * 12월 6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아시다 히토시, 기타우라 게이타로, 가와하시 도요지로에 대한 체포 동의안 통과.
  • 1962년
  • * 4월 13일: 최고재판소에서 히토하라 사장에게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5년을 확정, 동년 11월에 구루스에게 징역 8개월 및 집행유예 1년 및 추징금 150만을 확정.[13]

3. 수사 결과

1948년 4월 27일, 중의원에서 쇼와전공의 부흥 금융 자금을 둘러싼 뇌물 수수가 문제화되었다. 쇼와전공은 비료 공장 확충을 위해 23억 엔 이상의 부흥 금융 자금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히노하라 세쓰조 사장이 정계, 관료, 재계에 막대한 운동 자금을 살포한 사실이 드러났다.[6]

1948년 6월 23일, 히노하라 사장이 상공성 과장 등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체포되었다.[6] 이후 수사가 확대되면서, 9월 10일에는 전 농림 차관과 야스다 은행 상무가 체포되었고,[7] 9월 13일에는 후쿠다 다케오 대장성 주계국장이 10만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9월 18일에는 오노 반보쿠 민자당 고문이, 9월 30일에는 구리수 다케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이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10월 6일에는 니시오 스에히로 전 부총리(일본사회당 서기장)가 100만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되면서, 다음 날인 10월 7일 아시다 내각이 총사퇴하기에 이르렀다. 12월 6일에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아시다 히토시, 기타우라 케이타로, 가와하시 도요지로 3명에 대한 체포 청구가 20표 차이로 허가되었다.

1962년 4월 13일, 최고재판소는 히노하라 전 사장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의 확정 판결을 내렸다. 같은 해 11월에는 구리수 다케오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 추징금 150만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다른 주요 피고인들은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8]

3. 1. 히노하라 사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

히노하라 사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
이름직책뇌물 액수
시게마사 세이지일본비료 이사장, 전 농림차관170만, 주식 100만
구루스 다케오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45만
니노미야 요시모토부흥금융금고 이사, 일본흥업은행 부총재125만, 가택 수리 17.1만, 양복 2벌 3.2만
쓰다 노부히데상공기관4만, 양복 4벌 등 약 8.3만
마루야마 지로야스다은행 상무10만, 족자 4장 32.5만
후쿠다 다케오대장성 주계국장10만
노미야마 쓰토무상공성 화학국 화학비료본부 화학비료1과장6만
요코야마 아키라야스다은행 본점 융자1과장6만


3. 2. 후지이 다카시 상무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

후지이 다카시 상무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
이름소속뇌물 액수
요코야마 아키라야스다은행30000JPY
다케베 마사루야스다은행 융자부장30000JPY
히구치 슌지산와은행 긴자지점 차장20000JPY
하시모토 하루노스케산와은행 긴자지점장 대리15000JPY
요코타 노보루산와은행 긴자지점장40000JPY


4. GHQ의 역할과 음모론

쇼와전공 사건은 GHQ 내 민정국(GS)과 참모 제2부(G2) 간의 대립과 연관되어 있으며, 참모 제2부가 사건의 배후라는 음모론도 제기되었다. 이는 일본 점령 정책에서 민정국을 배제하고 보수파 내각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찰스 케디스 민정국장 실각의 계기가 되었다.[11]

사건 수사는 경찰이 먼저 시작했다. 경시총감이 되는 하타노 아키라 당시 수사 2과장은 정치권이 연루된 대규모 부정부패 사건임을 직감하고 내각 붕괴를 우려하면서도 수사를 진행했다. GHQ 직원들의 뇌물 수수 사실이 발각되면서 정계, 재계, GHQ가 얽힌 3각 구조의 부정부패임이 드러났다. GHQ는 경찰 수사를 방해하고 검찰을 통해 사건을 조작하려 했다. 하타노 아키라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기자 고든 워커에게 GHQ 직원 명단을 넘겨 GHQ의 간섭을 막았으나, 고든 워커는 한반도로 전근되고 하타노 아키라 등도 전근되어 결국 수사는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 수사에서는 GHQ 관련 의혹은 제기되지 않았다.[12]

4. 1. GHQ 내 권력 투쟁



쇼와전공 사건은 GHQ 내 민정국(GS)과 참모 제2부(G2) 간의 권력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민정국은 일본의 민주화를 추진한 반면, 참모 제2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자 했다.[11]

사건 수사 과정에서 민정국장 찰스 케디스 대령이 뇌물 수수 혐의로 실각하면서, 참모 제2부의 영향력이 커졌다.[11] 이는 일본 점령 정책에서 민정국을 배제하고 보수파 내각의 성립을 도모하기 위한 참모 제2부의 의도였다는 설이 유력하다.[4]

4. 2. 음모론

GHQ 참모 제2부(G2)가 민정국(GS)을 견제하고 일본 내 보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쇼와전공 사건을 조작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11] 실제로 이 사건으로 민정국장 찰스 케디스 대령이 실각했고,[11]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보수 성향의 제2차 요시다 내각이 수립되었다.[11]

5. 사건의 영향

쇼와전공 사건은 일본 부흥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뇌물 수수 사건으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장 관료 출신으로 훗날 총리가 되는 후쿠다 다케오, 민주자유당의 오노 반보쿠 (후의 자유민주당 부총재) 등 유력 정치인들이 체포되었고,[4] 구루스 다케오 경제안정본부 총무 장관, 니시오 스에히로부총리 등이 검거되면서 아시다 내각이 붕괴되었다.[4]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GHQ 관계자들의 연루 의혹이 제기되면서, GHQ 내부의 권력 다툼과 반공 공작 의혹까지 불거졌다. 특히 민정국(GS)의 찰스 케디스 대령은 이 사건으로 실각했다.[5]

사건의 주요 일지는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 내용
1948년 4월 27일중의원에서 쇼와전공의 부흥 금융 자금을 둘러싼 뇌물 수수가 문제화됨.
1948년 6월 23일히노하라 세쓰조 쇼와전공 사장, 상공성 과장 등에 대한 수뢰 혐의로 체포.[6]
1948년 9월 10일전 농림 차관, 야스다 은행 상무 체포.[7]
1948년 9월 13일후쿠다 다케오 대장성 주계국장, 10만 엔 수뢰 혐의로 체포.
1948년 9월 18일오노 반보쿠 민자당 고문, 20만 엔 수뢰 혐의로 체포.
1948년 9월 30일구루스 다케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30만 엔 및 기타 수뢰 혐의로 체포.
1948년 10월 6일니시오 스에히로 전 부총리 (사회당 서기장), 100만 엔 수뢰 혐의로 체포.
1948년 12월 6일중의원 본회의에서 아시다 히토시 등 3명에 대한 체포 청구 허가.
1962년 4월 13일최고 재판소에서 히노하라 전 사장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 확정 판결, 같은 해 11월에 구루스 다케오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 추징금 15만 확정. 다른 중요 피고는 거의 무죄.[8]


5. 1. 정치적 영향

1948년 10월 7일 아시다 내각은 총사퇴했고,[4] 민주자유당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 성향의 요시다 내각이 수립되었다.[4] 구루스 다케오 경제안정본부 총무 장관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8]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무죄를 선고받아 정계 개편의 폭은 제한적이었다.[4]

5. 2. 사회적 영향

쇼와전공 사건은 일본 사회에 정·관·재계 유착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남겼다.[4] 특히, 부흥 금융 금고로부터 융자를 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뇌물 수수 사건은 부흥 과정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이 사건은 아시다 내각총사퇴를 초래하고, 요시다 내각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등 정치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4]

GHQ의 역할에 대한 논란도 제기되었다. 민정국(GS)의 찰스 케디스 대령 등 GHQ 고관들이 뇌물 수수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은 일본의 민주화를 추진하던 GHQ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또한, 참모 제2부(G2)의 찰스 윌로비 소장이 이 사건을 이용하여 GS를 견제하고 반공 공작을 펼쳤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昭電事件 https://www.bengo4.c[...]
[2]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 https://kotobank.jp/[...] 2018-08-09
[3] 웹사이트 大辞林 第三版 https://kotobank.jp/[...]
[4] 서적 日本全史(ジャパン・クロニック) 講談社
[5] 서적 日本の官僚 文春文庫
[6]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7]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8] 웹사이트 昭電疑獄事件 https://kotobank.jp/[...]
[9]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 https://kotobank.jp/[...]
[10] 웹사이트 大辞林 第三版 https://kotobank.jp/[...]
[11] 서적 일본전사(재팬·크로닉) 고단샤
[12] 서적 일본의 관료 분슌문고
[13] 웹사이트 쇼덴 의옥 사건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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