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드미트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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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짜 드미트리 2세는 17세기 초 러시아의 혼란기인 대혼란기에 등장한 인물로, 자신이 쫓겨난 차르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죽은 후 나타났으며, 리투아니아 국경 지대의 죄수 출신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투시노에 정부를 세웠으나, 폴란드의 개입과 바실리 4세의 폐위 이후 세력을 잃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죽음 이후에도 러시아는 혼란을 겪었다.
가짜 드미트리 1세가 1606년 5월에 살해된 후, 러시아와 폴란드 국경 지역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을 틈타 가짜 드미트리 2세( Лжедмитрий II|가짜 드미트리 2세ru)가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이며, 심지어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첫 번째 가짜와 달리, 그는 자신이 가짜임을 알고 있었다.[1]
1608년,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그리고리 샤호프스코이와 이반 볼로트니코프의 반란군 잔당을 끌어들이고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아 루스 차르국의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바실리 4세는 동생 드미트리 슈이스키를 진압군 대장으로 출동시켰지만 패배했다. 모스크바 함락 직전, 바실리 4세의 조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의 활약으로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모스크바 근교 투시노로 물러났고, '투시노의 악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1]
2. 등장 배경
그의 출신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리투아니아 국경 지대 감옥의 죄수 출신으로, 바실리 4세에 대한 전국적인 불만을 이용하여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2]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에 대한 국가적 충성심이 커서, 첫 번째 가짜와 외모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드미트리 역시 드미트리로 인정받았다.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르타 수녀와 첫 번째 가짜의 왕비였던 마리나 므니제치도 그를 인정하고 결혼했다.[2]
2. 1. 혼란기의 상황
가짜 드미트리 1세가 1606년 5월에 살해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소문이 러시아와 폴란드 국경 지역에 퍼졌다. 이 소문을 틈타 가짜 드미트리 2세가 나타나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모스크바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1608년 여름부터 1610년 봄까지 모스크바 근교 투시노에 본영을 두고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를 지원하던 폴란드 국왕에게 버림받아 투시노에서 도망쳤고, 도망치는 도중에 동료에게 살해당했다.[1]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진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의 생모인 마리야 나가야에게 '진짜'로 인정받았다. 또한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정실 부인이었던 마리나 므니셰크와 결혼하여 아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를 낳았다.[1] 이반은 '작은 악당'으로 불렸으며, 코사크에 의해 옹립되었지만 1614년에 미하일 로마노프에게 처형되었다.[1]
2. 2. 가짜 드미트리 2세의 등장
그는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는 물론이고, 첫 번째 드미트리와도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최근에 차르에서 쫓겨났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가짜가 자신이 진짜라는 확신에 차 있었던 반면, 두 번째 가짜는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1]
또한 그의 출신은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었으며, 리투아니아와의 국경지대의 감옥의 죄수 출신으로, 바실리 4세에 대한 전국적인 불만을 이용하여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2]
그러나 첫 번째 가짜와 완전히 다른 외모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에 대한 국가적 충성심이 컸던 탓에 두 번째 드미트리 역시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로 인정받았으며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르타 수녀 역시 그야말로 진짜 드미트리라고 인정하였으며, 첫 번째 가짜의 왕비인 마리나 므니제치 역시 그와 결혼하였다. 두 번째 가짜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등장과 동시에 러시아 백성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된다.[2]
3. 정치 활동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성 삼위일체-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공격하여 포위된 상황을 극복하려 했으나, 1년 넘게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아 모스크바와 투시노 양쪽 모두 교착 상태에 빠졌다.[1]
1609년 2월, 바실리 4세는 칼 9세 치하의 스웨덴에 도움을 요청하여 스웨덴이 참전했으나, 바실리 4세의 조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의 활약으로 모스크바는 북러시아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후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모스크바 남동쪽 칼루가로 피신했다.[1]
3. 1. 모스크바 진격과 투시노 정부
1608년 봄,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그리고리 샤호프스코이와 이반 볼로트니코프의 반란군 잔당을 끌어들이고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아 루스 차르국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바실리 4세의 동생인 드미트리 슈이스키가 진압군 대장이 되어 출동했지만 패배했다. 모스크바 함락 직전 바실리 4세의 조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의 활약으로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모스크바 근교의 투시노로 물러났다. 이후 '투시노의 악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투시노에 자리를 잡은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그곳에 자신만의 정부를 세웠다. 그는 행정부와 귀족회의를 세웠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로부터 세금을 걷기도 했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투시노에서 농업 투자를 하는 등 국왕으로 즉위만 하지 않았을 뿐, 모든 면에서 한 나라의 국왕과 완전히 똑같았다. 많은 지역들이 가짜 드미트리 2세에게 복속하거나, 혹은 투시노와 모스크바 양쪽과 관계를 맺었다.[1]
3. 2. 세력 확장과 갈등
투시노에 자리를 잡은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그곳에 자신만의 정부를 세웠다. 그는 행정부와 귀족회의를 세웠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로부터 세금을 걷기도 했다. 2차 가짜 드미트리는 개인 병력을 모아 훈련시키고 투시노에 농업 투자를 하는 등 국왕으로 즉위만 하지 않았을 뿐 모든 면에서 국왕과 똑같았다. 많은 지역들이 2차 가짜 드미트리에게 복속하거나, 투시노와 모스크바 양쪽과 관계를 맺었다.[1]
그러나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정부는 바실리 4세의 지역들 한가운데에 포위된 상태였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모스크바 북동부의 성 삼위일체-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년이 넘는 공격에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모스크바와 투시노 양쪽 모두 교착 상태에 빠졌다.[1]
바실리 4세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스웨덴의 칼 9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609년 2월에 스웨덴이 참전하였으나, 바실리 4세의 조카인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의 대활약으로 모스크바는 북러시아의 지배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에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추종자를 이끌고 모스크바 남동쪽의 칼루가로 피신한다.[1]
4. 몰락과 죽음
가짜 드미트리 1세가 1606년 5월에 살해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러시아와 폴란드의 국경에 나타나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모스크바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1608년 여름부터 1610년 봄까지 모스크바 근교의 투시노에 본영을 두고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를 지원하던 폴란드 국왕에게 버림받아 투시노에서 도망쳤고, 이후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진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의 생모인 마리야 나가야에게 '진짜'로 인정받았고,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정실 부인이었던 마리나 므니셰크와 결혼하여 아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를 낳았다. 이반은 '작은 악당'으로 불리며 코사크에게 옹립되었지만, 1614년에 미하일 로마노프에게 처형되었다.
4. 1. 폴란드의 개입과 바실리 4세 폐위
가짜 드미트리 2세가 칼루가로 피신한 이후, 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는 자신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를 내세워 러시아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1] 투시노의 반모스크바적 인사들이 지그문트 3세와 접촉하였으며, 1605년부터 계속된 폴란드와 루스 차르국 사이의 전쟁이 재개되었다.[1]1610년 7월, 바실리 4세는 성직자, 귀족, 일부 평민들이 참여한 회의를 통해 강제로 폐위되었고, 이후 7명의 귀족회의를 통해 새로운 차르를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1] 여러 인물들이 차르의 자리에 도전하였는데, 가장 강력한 후보는 브와디스와프였으며, 이반 4세 처가의 후손인 미하일 1세 역시 입후보했다.[1] 가짜 드미트리 2세 역시 차르의 자리에 도전했다.[1] 회의 결과 브와디스와프가 새로운 차르로 선출되었으며,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다시 칼루가로 피신했다.[1]
4. 2. 최후
1610년 7월, 바실리 4세는 성직자, 귀족, 일부 평민들이 참여한 회의를 통해 강제로 폐위되었고, 이후 7명의 귀족회의를 통해 새로운 차르를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여러 인물들이 차르 자리에 도전하였는데,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와 미하일 1세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가짜 드미트리 2세 역시 차르 자리에 도전했으나, 회의 결과 브와디스와프가 새로운 차르로 선출되었고,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다시 칼루가로 피신했다.그러나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러시아 정교회로의 개종 등의 이유를 들어 차르 자리에 오르지 않았고, 루스 차르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틈타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러시아 동부 외곽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규합하려 했다. 하지만 1610년 12월 11일, 그는 자신의 타타르인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스타니슬라브 졸키에프스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5. 사후
가짜 드미트리 2세 사후, 마리나 므니셰크는 아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5. 1. 아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사후, 카자흐인과 타타르인들은 마리나 므니셰크와 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일명 "작은 악인")를 옹립하여 모스크바 정부에 대한 반란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곧 진압되어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의 아들과 반란군 지도자는 사형을 당하고, 마리나 므니셰크는 모스크바의 옥중에서 삶을 마감한다.[1] 이반 드미트리예비치는 '작은 악당'으로 불렸으며, 1614년에 미하일 로마노프에 의해 처형되었다.[3]참조
[1]
문서
His birthdate is claimed so he may not have been 28 when he died.
[2]
문서
Also known as Dmitry of Uglich
[3]
문서
False Dmitry IV was active around the same time as False Dmitry III and may just be False Dmitry III because of bad record keeping
[4]
문서
Other romanization of Russian|romanizations of his name include '''Dmitri''', '''Dmitrii''', and '''Dmitriy'''.
[5]
서적
Demetrius, Pseudo- s.v. 2
[6]
서적
A Short History of Russia's First Civil War: The Time of Troubles and the Founding of the Romanov Dynasty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04
[7]
문서
Żółkiewski had never met Dmitry, but relied on the information from his many sources. In his memoirs he also wrote that if False Dmitry II had anything in common with False Dmitry I, it was that ''they were both human be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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