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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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실리 4세는 류리크 왕조의 슈이스키 가문 출신으로, 1606년 가짜 드미트리 1세를 폐위시키고 러시아 차르로 즉위했다. 그는 혼란 시대에 통치하며 스웨덴과의 동맹, 폴란드의 침공 등 어려움을 겪었고, 1610년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어 수도사가 되었다. 이후 폴란드의 포로로 잡혀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1635년 러시아로 반환되어 모스크바 대천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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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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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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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 전 러시아의 차르 |
재위 기간 | 1606년 5월 19일 ~ 1610년 7월 19일 |
이전 통치자 | 가짜 드미트리 1세 |
이후 통치자 | 블라디슬라프(법적 주장, 논쟁 중) / 표도르 므스티슬랍스키(7인 귀족 정부 수장) |
배우자 | 엘레나 미하일로브나 레프니나 예카테리나 (마리아) 부이노소바로스톱스카야 |
본명 | 바실리 이바노비치 슈이스키 |
왕가 | 슈이스키 |
아버지 | 이반 안드레예비치 슈이스키 |
어머니 | 마르파 표도로브나 |
출생일 | 1552년경 |
출생지 | 러시아 |
사망일 | 1612년 9월 12일 |
사망지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고스티닌 (감금)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2. 생애
바실리 4세는 류리크 왕조의 분파인 슈이스키 가문 출신으로, 이반 안드레예비치 슈이스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1606년 5월 19일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제거하고 러시아 차르국의 차르로 즉위했다.
1608년 5월 1일 볼호프강에서 가짜 드미트리 2세가 이끄는 군대를 격퇴했고, 1609년 2월 스웨덴과 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영토 가운데 일부를 스웨덴에 양도했다. 1609년 9월 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 바사 국왕이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이를 계기로 모스크바에서는 바실리 4세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고, 1610년 7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1611년 8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폴란드 군대의 포로로 잡혀 폴란드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바르샤바 인근의 고스티닌(Gostynin) 성에 수감되었다. 1612년 9월 12일 고스티닌 성에서 사망했으며, 1635년 미하일 1세의 요청에 따라 바실리 4세의 시신이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그의 시신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 대천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2. 1. 즉위 이전
류리크 왕조의 분파인 슈이스키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이반 4세의 친위대 오프리치니키에 속해 있었다. 1584년 이반 4세 사후, 표도르 1세의 섭정단 중 한 명이었던 이반 페트로비치 슈이스키(Шуйский, Иван Петровичru)가 보리스 고두노프와의 권력 투쟁에서 실각하자, 연좌되어 추방되었다.[1]이후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용서받고 그를 섬기게 되었다. 1591년 표도르 1세의 이복 동생 드미트리 이바노비치가 우글리치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보리스 고두노프에 의해 사인 조사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조사를 진행했다.[1] 슈이스키는 드미트리가 칼을 가지고 놀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판단했다.
1598년 표도르 1세가 사망하고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자, 보리스 고두노프의 차르 즉위를 인정하고 따랐다.
2. 2. 즉위
1605년 4월 보리스 고두노프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표도르 2세가 즉위하자, 슈이스키는 드미트리의 어머니 마리야 나가야와 함께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진짜 왕자로 인정하며 표도르 2세를 배신했다.[2] 그는 드미트리의 죽음에 대해 "보리스가 보낸 자객이 실수로 그의 친구를 죽였다"고 주장하며,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진짜 드미트리 황자라고 주장했다.모스크바로 옹립된 가짜 드미트리 1세가 귀족과 민중의 지지를 잃어가자, 슈이스키는 그를 가짜라고 규탄했다. 1606년 5월, 슈이스키는 다른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가짜 드미트리 1세를 폐위시키고 살해한 후, 지지자들에 의해 차르로 선출되었다.[2]
슈이스키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동생인 블라디미르 대공 Андрей Ярославич|label=안드레이 2세ru의 직계 후손이며, 류리크 왕조 단절 이후 류리크의 마지막 남자 후손이었기에 혈통상 가장 적합한 차르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즉위 후, 슈이스키는 진짜 드미트리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606년 6월 3일 드미트리의 유해를 우글리치에서 모스크바로 옮겼다. 발굴된 유해는 부패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이 기적으로 드미트리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3. 치세와 혼란
바실리 4세는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많은 귀족에게 양보해야 했으며(그가 류리크 왕조의 후손임은 분명하지만), 귀족 회의의 영향력이 커졌다.[1]동란 시대로 인해 국내가 분열된 상황에서 그의 권위는 매우 약했고, 표도르 1세의 아들을 자칭하는 가짜 표트르가 나타났다. 즉위한 해에는 대귀족과 코사크가 결탁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1]
1607년 이반 볼로트니코프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같은 해 말 '살아남은'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칭하는 가짜 드미트리 2세가 나타나 남부에서 큰 세력을 얻었다.[1]

가짜 드미트리 2세를 격퇴하기 위해 스웨덴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 대가로 리보니아 등 영토 일부를 포기해야 했고, 스웨덴과 동맹하여 폴란드와 싸울 것을 약속해야 했다.[1]
그러나 이는 스웨덴과 대립하던 폴란드의 무력 개입을 초래했다.[1]
2. 4. 퇴위
1610년 4월, 바실리 4세의 조카이자 유능한 장군이었던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가 급사하자, 바실리 4세가 그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1] 소문에 따르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가 많은 공을 세워 인기가 높아지자 바실리 4세가 자신의 차르 지위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암살했다는 것이다.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의 죽음으로 슈이스키 가문의 정권은 국내에서 거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같은 해 7월, 폴란드 군이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가운데, 바실리 4세는 로마노프 왕조, 볼로틴스키 가문, 므스티슬라프스키 가문 등 친(親)폴란드파 귀족들의 쿠데타로 퇴위당하고 수도사가 되었다.

2. 5. 폴란드 파견과 죽음
1611년 10월,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새로운 차르로 추대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파견된 사절단(단장은 필라레트)에 합류하여 29일 국왕 지그문트 3세를 알현했다.그러나 그 자리에서 바실리 4세는 필라레트와 함께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고, 이듬해 9월 바르샤바 교외 고스티닌에서 사망했다.
바실리 4세의 퇴위 이후, 러시아에서는 1610년부터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즉위할 때까지 3년 동안 차르가 부재한, 이른바 혼란 시대의 "'''공위 시대'''"가 이어졌다.

3. 인물됨
러시아 황제 연대기에 따르면, 바실리 4세는 키가 작고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미신을 믿고 음모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3]
그는 자신의 가문이 류리크 왕조의 혈통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차르 자리를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1591년 표도르 1세의 이복 동생 드미트리가 변사한 사건이 일어나자 사고사로 판단했다가, 1605년 보리스 고두노프가 죽은 후 이를 철회하고 표도르 2세를 배신했다. 그 후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인기를 잃자 그를 살해하는 등 권모술수를 부려 차르 자리에 올랐다.[1][2]
이반 티모페예프는 바실리 4세에 대해 "전국민의 동의도 없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차르로 선포되었다. 또한, 굳이 거절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
바실리 4세는 대귀족을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없고 의심을 받았으며, 국내외적으로 불안정한 동란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크게 양보해야 했다. 폴란드군 사령관 스타니스와프 죌키에프스키는 그를 "늑대처럼 탐욕스럽게 권력을 잡은 남자"라고 칭하며, 차르 자리를 얻은 것으로 인해 대립하는 귀족들의 질투를 샀다고 말했다.[3]
바실리 4세의 미신을 믿고 음모를 좋아하는 성격은 조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의 암살로 이어졌고(암살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로 인해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켜 파멸을 초래했다.[3]
4. 슈이스키 가문의 가계
Шуйский|슈이스키ru 가문의 계보를 보면 바실리 4세가 류리크의 혈통을 잇는 남계 자손임을 알 수 있다.
인물 | 비고 |
---|---|
류리크 | 노브고로드 공 |
이호르 류리코비치 | 키예프 대공 |
스뱌토슬라프 이고레비치 | 키예프 대공 |
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 | 키예프 대공 |
야로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 | 키예프 대공 |
세볼로드 야로슬라비치 | 키예프 대공 |
블라디미르 세볼로도비치 | 키예프 대공 |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 키예프 대공 |
세볼로드 유리예비치 | 키예프 대공 |
야로슬라프 세볼로도비치 | 블라디미르 대공 |
안드레이 야로슬라비치 | 블라디미르 대공 |
바실리 안드레예비치 | 수즈달 공 |
콘스탄틴 바실리예비치 | 수즈달 공 |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 | 블라디미르 대공 |
바실리 드미트리예비치 | 니즈니노브고로드 공 |
유리 바실리예비치 | 슈이스키 가문 |
바실리 유리예비치 | 슈이스키 공 |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 슈이스키 가문 |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 슈이스키 가문 |
이반 안드레예비치 | 슈이스키 가문 |
바실리 이바노비치 | 차르 |
참조
[1]
서적
The Russian dilemma : security, vigilance and relations with the West from Ivan III to Putin
https://www.worldcat[...]
2021
[2]
서적
The Russian dilemma : security, vigilance and relations with the West from Ivan III to Putin
https://www.worldcat[...]
2021
[3]
서적
The Critical Prose of Alexander Pushkin
University of Indiana Pres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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