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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쿠라 시게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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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타쿠라 시게나가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무장으로, 다테 가문의 가신이었다. 1584년에 태어나 1659년에 사망했으며, '귀신 고주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오사카 전투에서 부친을 대신하여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고, 사나다 노부시게의 가신들을 보호했다. 또한, 다테 마사무네와 함께 교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기도 했다. 1615년 부친의 사망 이후 가문을 상속했으며, 1652년에는 센다이 번의 일가 지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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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쿠라 시게나가
기본 정보
가타쿠라 시게쓰나 ([[오치아이 요시쿠이]] 작)
가타쿠라 시게쓰나 (오치아이 요시쿠이 작)
씨족가타쿠라 씨
이름가타쿠라 시게나가 (片倉 重長)
이명통칭: 고주로 (小十郎)
별명: 오니노 고주로 (鬼の小十郎, 귀신 고주로)
계명진세이인 이치호 겐리 거사 (真性院一法元理居士)
묘소미야기현시라이시시 가타쿠라 가문 묘소
생몰년1585년 1월 25일 ~ 1659년 5월 16일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개명미자에몬 (弥左衛門), 사몬 (左門),사에몬 (左衛門), 시게쓰나(重綱) → 시게나가(重長)
관직
섬긴 주군다테 마사무네
다다무네
쓰나무네
소속무쓰국센다이 번
가족 관계
아버지가타쿠라 가쓰쓰나
어머니야나이 씨
배우자정실: 아야
계실: 아우메
자녀기사
양자가게나가

2. 생애

1584년 가타쿠라 가게쓰나의 아들로 태어나, 1591년 다테 나리자네를 에보시오야로 삼아 元服(겐푸쿠)를 행하고 '시게쓰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기도 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로이시 성 전투에서 첫 출전했으며,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고토 모토쓰구를 전사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에게는 장군으로서 칼을 겨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위라며 질책을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에 못지않은 지략과 용기를 겸비한 명장으로서 "귀신 고주로"라고 불렸다.

1615년 아버지 가게쓰나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다. 오사카 전투 이후 사나다 노부시게의 가신과 자식들을 보호하였고, 노부시게의 딸 오우메를 후실로 맞이하기도 했다. 1626년 정실이 사망하자, 노부시게의 셋째 딸 아메를 계실로 삼았다.

1636년 주군 다테 마사무네참근교대로 에도로 향하던 중 시로이시 성에 들러 시게나가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라는 유지를 남겼다. 1651년 센다이 번에서 "일가(一家)"의 지위를 받았으며, 1659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덴쇼 12년(1584년) 12월 25일, 데와 국 오치시 군 시모나가이 쇼 미야무라 가타쿠라 관에서 다테 가문의 가신 가타쿠라 가게쓰나의 아들로 태어났다.[4] 덴쇼 19년(1591년) 다테 나리자네를 烏帽子親(에보시오야)로 삼아 元服(겐푸쿠)하였고, 이때 이름은 시게쓰나였다.[4] 같은 해, 시게나가는 주군 마사무네와 아버지 가게쓰나와 함께 교토 후시미에 올라 게이쵸 4년(1599년)까지 머물렀으며, 그 사이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어의(御羽織)를 받았다.[4]

2. 2. 무장으로서의 활약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 병석에 누운 부친 가타쿠라 가게쓰나를 대신해 주군 다테 마사무네를 따라 종군했고, 적장 고토 모토쓰구를 전사시키는 등의 공적을 세워 크게 명성을 떨쳤다. 1615년 부친이 죽자 가문을 상속하였다. 아버지에 뒤지지 않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장으로, '귀신 고주로'라는 별명이 붙었다.

오사카 전투에서 주군을 잃은 사나다 노부시게의 가신들을 보호했다. 특히 여름 전투에서, 결전 전야인 5월 6일 밤에 노부시게의 차남 다이하치를 비롯한 노부시게의 자식들을 구출하여, 가타쿠라 가문의 본거지 시라이시 성으로 데리고 가 그들을 길렀다. 시게나가는 훗날 그중 한 명인 오우메를 후실로 맞아들였다. 또 다이하치(훗날의 사나다 모리노부)는 노부시게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사나다라는 성을 후세에 계승시킬 수 있었다.

일설에는 오사카 전투에서 시게나가가 분전하는 모습을 본 노부시게가 '이 사람이라면 자식들을 맡길 만 하다'라고 생각하여 가타쿠라 진영에 화살에 편지를 묶어 쏘아보내 혼인관계를 맺을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2. 3. 사나다 가문과의 인연

오사카 전투에서 시게나가는 주군을 잃은 사나다 노부시게의 가신들을 보호했다. 특히 1615년 5월 6일 밤, 여름 전투의 결전 전야에 노부시게의 차남 다이하치를 비롯한 노부시게의 자식들을 구출하여 가타쿠라 가문의 본거지 시라이시 성으로 데리고 가 그들을 길렀다. 훗날 시게나가는 그중 한 명인 오우메를 후실로 맞아들였다. 다이하치(훗날의 사나다 모리노부)는 노부시게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사나다라는 성을 후세에 계승시킬 수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오사카 전투에서 시게나가가 분전하는 모습을 본 노부시게가 '이 사람이라면 자식들을 맡길 만 하다'라고 생각하여 가타쿠라 진영에 화살에 편지를 묶어 쏘아보내 혼인관계를 제의했다고 한다.

2. 4. 가독 상속과 말년

1615년 부친 가타쿠라 가게쓰나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하였다. 아버지에 뒤지지 않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장으로, '귀신 고주로'라는 별명이 붙었다.[1]

오사카 전투에서 주군을 잃은 사나다 노부시게의 가신들을 보호했다. 특히 여름 전투에서, 결전 전야인 5월 6일 밤에 노부시게의 차남 다이하치를 비롯한 노부시게의 자식들을 구출하여, 가타쿠라 가문의 본거지 시라이시 성으로 데리고 가 그들을 길렀다. 훗날 시게나가는 그중 한 명인 오우메를 후실로 맞아들였다. 또 다이하치(훗날의 사나다 모리노부)는 노부시게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사나다라는 성을 후세에 계승시킬 수 있었다.[1]

일설에는 오사카 전투에서 시게나가가 분전하는 모습을 본 노부시게가 '이 사람이라면 자식들을 맡길 만 하다'라고 생각하여 가타쿠라 진영에 화살에 편지를 묶어 쏘아보내 혼인관계를 맺을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1]

겐와 원년 10월 14일, 아버지 가게쓰나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다.

시게나가의 정실은 에도에 인질로 머물렀는데, 간에이 3년 7월 에도 저택에서 사망하였다. 오사카 전투 당시 난방취되어 시녀가 되었던 아메는 사나다 노부시게의 셋째 딸임이 밝혀져 측실이 되었는데, 이를 계실로 삼았다.

게이안 4년 12월 28일, 주군 다테 다다무네로부터 센다이 번의 가격 중 "일가(一家)"의 지위를 받았다.

만지 2년 3월 25일 사망, 향년 76세. 법명은 일법원리진성원. 사후, 양자가 된 외손자 가게나가가 가독을 이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가타쿠라 가게츠나
어머니야노우치 시게사다의 딸
정실아야 - 하리우 우마시게나오(針生盛直)의 딸
계실아우메(阿梅) -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셋째 딸
부인
장녀기사 - 마쓰마에 야스히로(松前安広)의 아내
양자


4. 일화


  • 시게나가의 어머니가 시게나가를 임신했을 당시, 주군 다테 마사무네는 이제 막 가문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이라 아직 후계자가 될 자식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가게쓰나는 '다테 가문에 후계자가 탄생할 때까지는 가타쿠라 가문에 경사(慶事) 따위 있을 수 없다'며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살해할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무네는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으나 그런 생각은 그만두어주었으면 하네. 아이를 죽인다면 그대를 원망할 것이야. 부디 부디 아이를 살려 주게'라고 편지를 보내 시게나가를 구했다고 한다.[5]
  • 남자도 반하게 할 정도의 미소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그를 쫓아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군인 마사무네와 동성애 관계였다는 설도 있다.[5]
  • 사나다 노부시게의 딸을 계실로 맞이했다. 한 설에는 대판의 전장에서 분전하는 시게나가를 본 노부시게가 이 장수라면 하고, 가타쿠라 진영에 편지를 보내 혼인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이 인연으로 사나다 마사유키·노부시게 부자의 가신들을 보호하고 있다. 원래 아메는 누구의 딸인지 알 수 없었고 가타쿠라가의 시녀였지만, 사나다 씨의 옛 신하인 미이 호젠이 가타쿠라가를 방문하여 사나다 노부시게의 딸이었음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미이는 이후 가타쿠라가에 봉직했다. 또, 노부시게의 차남인 사나다 모리노부(당시는 다이하치), 육녀인 아쇼부는 아메의 인연으로 가타쿠라가를 의지했다. 모리노부는 시로이시에서 "가타쿠라" 성을 사용하고, 자식 대에 사나다 성으로 복귀했다. 아쇼부는 가타쿠라 사다히로(다무라 씨 출신으로 마사무네의 정실 아이히메의 조카)의 아내가 되었다.

5. 등장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片倉小十郎重長の列伝 http://www.geocities[...] 2007-03-23
[2] 웹사이트 片倉小十郎重長(重綱) https://archive.toda[...]
[3] 문서 본 페이지에서는 중장으로 통일한다.
[4] 간행물 일본사 傑物전 제일삼이화 대곡길계 아사히게이노 2011-10-06
[5] 서적 片倉代々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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