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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카와 히데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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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아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하시바 히데토시,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가 되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로 개명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성 전투에 참전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받고 영지를 빼앗기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했으나, 전투 중 동군으로 배반하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공로로 오카야마 55만 석을 받았으나 21세에 사망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배신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내장 질환이 사망 원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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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견본 채색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 (고다이지 소장)
별명기노시타 다쓰노스케 (木下辰之助)
기노시타 히데토시 (木下毛利秀俊)
하시바 히데토시 (羽柴秀俊)
고바야카와 히데토시 (小早川秀俊)
히데아키 (秀秋)
가명 (통칭)긴고 주나곤
지쿠젠 주나곤
오카야마 주나곤
시호없음
계명즈이운인 슈간 닛센 (瑞雲院秀巌日詮)
묘소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의 즈이운지
교토부 교토시의 즈이운인
출생1582년
사망1602년 12월 1일 (21세)
가문기노시타 씨
하시바 씨 (도요토미 씨)
고바야카와 씨
관직
관위종3위
좌위문독
참의
권중납언
봉록비젠국 오카야마번 번주
가계
아버지기노시타 이에사다
어머니스기하라 이에쓰구의 딸
양아버지도요토미 히데요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배우자고마히메 (모리 데루모토의 양녀)
자녀하시바 히데요키
형제자매기노시타 가쓰토시
기노시타 도시후사
기노시타 노부토시
기노시타 도시사다
기노시타 히데노리
기노시타 도시타다
기노시타 히데노리
슈난 쇼슈쿠
군사 경력
소속모리 씨
도요토미 씨
서군
동군
복무 기간알 수 없음
계급다이묘
사에몬노카미 (左衛門督)
주나곤
영지지쿠고 영지
전투임진왜란 (1598년)
후시미성 전투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사와야마성 전투 (1600년)

2. 생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기노시타 이에사다[35]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다쓰노스케(辰之助)였다.[35] 겐푸쿠(성인식)를 치르면서 기노시타 히데토시(木下秀俊)라는 이름을 얻었다. 1585년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하시바 히데토시로 불렸고, 1589년 병사한 도요토미 히데카쓰의 영지였던 단바 가메야마 10만 석을 받았다. 1592년 곤주나곤에 임명되었다.

1594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가 되면서 고바야카와 가문에 들어가 히데아키로 개명했다. 그는 쥬나곤 관직과 함께 '집금오'(執金吾)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몰수당하기도 했지만, 같은 해 다카카게가 은거하면서 지쿠젠, 지쿠고, 히젠 일부를 합친 30만 7천 석을 상속받아 나지마 성주가 되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우키요에


임진왜란울산성 전투에서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포위된 울산왜성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 공을 세웠으나 히데요시로부터 경솔한 행동을 질책받고 영지를 몰수당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퍼뜨린 소문, 즉 이시다 미츠나리의 질투 때문이라는 소문을 믿고 미츠나리를 증오하게 되었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처음 서군으로 참전했다가 동군으로 돌아서서 결정적인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오카야마 으로 영지가 증가되었으나, 1602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2. 1. 도요토미 가문의 일원

기노시타 이에사다[35]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하라 이에쓰구의 딸이다. 어릴 적 이름은 '''다쓰노스케'''(辰之助)였다. 겐푸쿠(元服) 때 첫 이름을 '''기노시타 히데토시'''(木下秀俊)로 지었다. 1585년 하시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하시바 히데토시'''로 이름을 올렸다. 1589년 병사한 도요토미 히데카쓰의 옛 영지인 단바 가메야마 10만 석을 받았다. 1592년 주산미・곤주나곤에 서임되었다. 1594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가 되어 고바야카와가에 들어가 '''히데아키'''로 개명했다. 관직은 쥬나곤이었지만, 겐푸쿠 때 받은 관위인 「사에몬후」(左衛門督)의 중국 명칭 「집금오」(執金吾)와 합쳐 「'''긴고 주나곤'''」(金吾中納言)이라 불렸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에 연좌되어 단바 가메야마를 몰수당했다. 같은 해 양부 다카카게가 은거함에 따라 그 영지인 지쿠젠·지쿠고·히젠의 일부를 합친 30만7천 석을 계승해 지쿠젠 나지마 성주가 되었다.

덴쇼 10년(1582년), 기노시타 이에사다(고다이인의 형)의 다섯째 아들로 오미국나가하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하라 이에쓰구의 딸이다. 유명(幼名)은 다쓰노스케였다.

덴쇼 12년(1584년), 삼촌인 하시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되었다. 같은 해 13년(1585년), 히데요시의 양자(養子)가 되어, 어릴 적부터 고다이인에게 길러졌다. 겐푸쿠(元服)하여 기노시타 히데토시, 후에 하시바 히데토시(도요토미 히데토시)라 이름을 바꾸었다.

덴쇼 16년(1588년) 4월, 고요제이 천황의 주라쿠다이 행차에서는 나이다이진(内大臣)·오다 노부오 이하 6대명이 연서한 기청문(起請文)의 수신처가 금고전(히데토시)으로 되었다. 또한 이때 히데요시의 대리로 천황에게 맹세를 받았다.[4]

덴쇼 17년(1589년), 히데요시의 후계자 후보로서 7세에 겐푸쿠(元服)하고, 도요토미 히데카쓰의 영지였던 단바국가메야마성 10만 석을 받았다.

덴쇼 19년(1591년), 도요토미 성씨가 확인되었고,[5] 분로쿠 원년(1592년)에는 종3위(従三位) 곤추나곤(権中納言) 겸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 서임되어, "단바 쥬나곤"이라 불렸다.

여러 다이묘들로부터 간파쿠(関白)·도요토미 히데쓰구 다음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계승권 보유자로 여겨졌다.

2. 2. 고바야카와 가문 상속과 조선 출병

기노시타 이에사다[35]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하라 이에쓰구의 딸이다. 어릴 적 이름은 '''다쓰노스케'''(辰之助)였다. 겐푸쿠(元服) 때 첫 이름을 '''기노시타 히데토시'''(木下秀俊)로 지었다. 1585년 하시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하시바 히데토시'''로 이름을 올렸다. 1589년 병사한 도요토미 히데카쓰의 옛 영지인 단바 가메야마 10만 석을 받았다. 1592년 주산미・곤주나곤에 서임되었다. 1594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가 되어 고바야카와가에 들어가 '''히데아키'''로 개명했다. 관직은 쥬나곤이었지만, 겐푸쿠 때 받은 관위인 「사에몬후」(左衛門督)의 중국 명칭 「집금오」(執金吾)와 합쳐 「'''긴고 주나곤'''」(金吾中納言)이라 불렸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사건에 연좌되어 단바 가메야마를 몰수당했다. 같은 해 양부 다카카게가 은거함에 따라 그 영지인 지쿠젠·지쿠고·히젠의 일부를 합친 30만 7천 석을 계승해 지쿠젠 나지마 성주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원수를 역임했다. 울산성 전투에서는 명나라의 대군에게 포위된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섰다. 첫 출진에서 스스로 야리를 손에 들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활약했지만, 본래 원수인 히데아키는 부산성을 수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선 것은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비판받았다. 그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해 에치젠 기타노쇼 15만 석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비판받은 것은 구원에 나선 점이 아니라 히데아키 자신이 다수의 목을 취할 정도로 분투한 점이란 설[36]이 있고, 조선 병사가 아닌 일반인을 공격한 점이란 설도 있다).

임진왜란 중에 여성과 어린이를 공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많은 동료 사령관들의 비난을 받았다.

1593년, 히데요시에게 친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요시 휘하의 구로다 요시타카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히데토시를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로 삼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를 들은 다카카게는 동생 호이다 모토키요의 적장자인 모리 히데모토모리 가문의 후계자로 히데요시에게 소개하면서, 히데토시를 자신의 고바야카와 가문의 양자로 삼고 싶다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594년,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히데토시는 다카카게와 양자 관계를 맺었다. 또한, 양자 관계를 계기로 다카카게의 관직은 중납언(中納言)까지 승진하였고, 결과적으로 고바야카와 가문의 가격(家格)도 상승하게 된다.[4]

1595년, 히데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에 연좌되어 하시바 가문의 일족으로서 가지고 있던 단바 가메야마 영지 10만 석이 몰수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안에 다카카게는 주요 가신들을 거느리고 비고 미하라로 은거하였다. 히데토시는 고바야카와 영지 30만 7천 석을 상속받는 형태로 규슈로 내려가 지쿠젠 나가시마성의 국주가 되었다. 고바야카와 가문의 가독 상속에 있어서 부가로(付家老)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다카카게의 직신 우가이 모토타쓰 등으로부터 인수받아, 검지(検地)를 실시하여 영내의 석고가 확정되었다. 지쿠젠 동부의 5만 석은 다카카게의 은거령이었고 다카카게의 가신들이 남아 있었지만, 1597년 6월 다카카게 사후, 고바야카와 가문에서도 외양 뭇슈(外様衆) 무라카미 씨, 히노 씨, 구사카리 씨, 시미즈 씨가 히데토시에게 부임했다.[6]

1597년 2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군령에 따라 히데토시의 조선 반도로의 건너감이 결정되었고, 부산포에서 전선으로부터의 보고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6월 12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죽었다. 이 날 이후, 조선에 주둔하는 동안 이름을 히데토시에서 '''히데아키'''로 개명하였다.[7]

같은 해 12월 23일부터 이듬해인 1598년 1월 4일까지 벌어진 울산성 전투에 참가했다는 사료도 있으나, 이는 1672년에 작성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구로다가 문서」[8]를 비롯한 이 전투에 관한 1차 사료들에는 히데아키의 참가를 입증하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히데아키는 1597년 12월 이전부터 여러 차례 히데요시로부터 귀국 요청을 받았고, 1598년 1월 29일에야 비로소 귀국길에 올랐다. 히데아키 귀국 후에도 고바야카와 군은 500명 정도의 잔류 부대가 데라자와 히로타카의 지휘 아래 부산 수비에 임했으나, 히로타카 등도 5월 중에는 귀국하였다. 4월 20일에는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약 700명 규모의 4개 부대를 히노 가게유키·시미즈 가게하루·인보 히로타다 혹은 인보 민부소부·무라카미 가게치카 등의 지휘 아래 순차적으로 교대하여 서생포에 주둔시키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모리 가쓰노부와 상의하여 처벌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9]

2. 3.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처음에는 서군으로 참전했다. 후시미성 공격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고,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동군의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서신을 주고받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동군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 다만, 후시미성 공략에 참여해 전공을 세웠음에도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배신을 결심했다는 이설도 있다.

이시다 미쓰나리오타니 요시쓰구 등은 히데아키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끼고, 서군이 승리하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직을 맡기고 기나이 지역 두 곳을 추가로 주겠다고 약속하며 서군에 남아있도록 설득했다.

결전 당일, 히데아키는 마쓰오산에 1만 5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을 쳤다. 이때 마쓰오산에는 이미 서군의 일부 병력이 있었지만, 히데아키는 이들을 내쫓고 진을 쳤다(이 시점에서 이미 동군에 가담했다고도 여겨진다).

히데아키는 동군에 가담할 마음이었지만,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를 격파하고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도 도도 다카토라 부대를 패주시킨 것처럼, 전황이 서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동군 참가를 주저했다는 설이 있다.

이에야스는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움직이지 않는 히데아키를 기다리다 지쳐 히데아키의 진에 위협 사격을 가했고, 이에 놀란 히데아키가 동군에 가담하여 오타니 부대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배신이었지만, 이를 예측하고 있던 오타니 부대는 반격하여 일시적으로 고바야카와 부대를 퇴각시켰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부대의 움직임에 동조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아카자 나오야스 등 서군의 여러 장수들이 잇따라 배신하면서 오타니 군은 괴멸되고 오타니 요시쓰구는 자결했다. 다만, 이에야스의 위협 사격은 위치 관계상 실제로 있었는지 의문이 있다.[16][15]

이 참전으로 대세가 결정되었고, 저녁 무렵 서군은 궤멸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사카를 향해 이부키야마산으로 도망쳤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전투깃발


마쓰오산에 있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진영 터(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정)


최근 연구에 따르면, 세키가하라 전투 시작 시각은 오전 10시경이며, 히데아키의 배신도 개전 직후였다는 견해도 있다.[17]

2. 4. 오카야마 번주와 죽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시다 마사쓰구(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버지)가 지키는 사와야마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전후 논공행상에서 우키타 히데이에의 영지였던 비젠미마사카로 이봉되었고, 오카야마 으로 영지가 증가되었다.[37]

히데아키는 오카야마성을 개축하여 이전보다 2배나 큰 바깥 해자(외호(外堀))를 20일 만에 완성했다. 또한 겐치를 실시하고, 절과 신사를 부흥시켰으며, 농지를 정비하는 등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1602년,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불과 2년 후에 21세(부정설 있음)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고바야카와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는 도쿠가와 정권 초기에 자손이 없어 가이에키를 당한 사례이다. 히데아키 사후, 고바야카와 가문의 옛 신하들은 세키가하라에서의 배신을 이유로 섬길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37]

히데아키에게 하시바 히데유키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히데아키 사후 측실에게서 태어난 히데유키는 히데아키의 형 기노시타 가쓰토시에게 양육되었다고 한다. 이후 자손들은 빗추 아시모리번 기노시타 가문의 가신이 되어 고바야카와 가문의 옛 성인 도히씨(土肥氏)를 칭했다고 한다.

21세에 요절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형제 두 명(기노시타 도시사다, 기노시타 아무개)도 함께 사망했다는 기록이 본슌닛키(梵舜日記)에 남아있다. 암살설도 존재한다. 한편 세간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자살로 몰아넣은 오타니 요시쓰구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고바야카와 가문은 단절되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재흥 칙명이 내려져 모리 본가에서 모리 사부로(毛利三郎)가 고바야카와 가문을 이어받아 재흥시켰다.

오타니 요시쓰구의 원혼을 두려워하는 히데아키. 쓰키오카 요시토시 그림, 게이오 4년(1868)


오카야마성에 들어간 히데아키는 가신들의 영지 배분, 사찰과 신사에 대한 기부 약속 등을 시행하는 한편, 이키 엔슈(遠江守)·하야시 나가요시 등 측근 세력의 확충을 도모하였다. 게이초 6년(1601), 가로를 오랫동안 맡은 중신 이나바 마사나리가 고바야카와 가문을 떠났는데, 이 배경에는 종래의 가신단 층과 새롭게 대두한 측근 층과의 대립이 있었다고 생각된다.[21]

게이초 7년 10월 18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호인 도조가 남긴 기록[22]에 따르면, 상방(上方)에서 귀국하는 길에 벌인 매사냥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3일 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데아키의 요절에 대해서는,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전사한 오타니 요시쓰구의 저주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지만,[23] 실제로 남아 있는 병력[24]으로는 알코올 중독(알코올 의존증)에 의한 내장 질환이 사인으로 가장 유력하다.[25][26] 마나세 겐사쿠가 기록한 『의학천정기』에는, 게이초 6년(1601) 7월에 주독(酒疸)에 의한 황달 증상이 심해져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황달』 항목에는, 과음에 의한 황달, 명치 부근의 혹,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목이 마르다는 등이 적혀 있다. 『황달』 외에도, 『내상부음식(飲食의 부조리에 의한 내장의 질환)』, 『소갈(糖尿病)』 항목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식욕 부진, 술을 마시면 토한다, 혀가 검고 소변이 붉다는 등이 적혀 있다.

히데아키의 사후, 고바야카와 가문은 후사가 없어 단절되어 개역되었다. 이것은 도쿠가와 정권 최초의 무자 개역이었다. 히데아키의 구신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배신을 책망받았기 때문에 관직을 얻지 못했다고 이야기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는 끝까지 히데아키를 섬긴 후 막부에 불려가 다이묘가 되어 입번(立藩)한 히라오카 요리카쓰가 있는 등, 마에다가나 기이 도쿠가와가의 가신이 된 자도 있었다.[27]

3. 인물 및 평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무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배신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결사항전한 것과 달리,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양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가문에 칼을 겨눈 꼴이 되었기 때문에 혹평이 많다. 오다 노부카쓰와 같은 암군으로 평가하는 문헌도 있다. 그러나 마쓰오 산을 점거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승리를 결정지은 점,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 측에 가담한 점은 선악을 떠나 공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점에서도 세키가하라 전투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결정지어졌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1]

히데아키는 정유재란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구출하는 등 무공을 세웠다. 이를 용맹함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첫 출전에서의 공명심으로 인한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점이나 비젠 오카야마 통치에서 보여준 정치 능력을 고려하면, 단순히 어리석은 인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배신은 위협 사격에 놀라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지리적 여건상 위협 사격이 어려웠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배신 직후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에게 일시적으로 패퇴한 점,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한 점은 부정적인 평판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배신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듯한 이미지가 굳어져 버린 것이다.[1]

지쿠젠 태수 시절, 히데아키는 품행이 불량하여 가신들의 간언을 듣고 발끈하여 그들을 베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히데아키의 어리석음에 실망하여 고바야카와 가문을 떠나는 중신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히데아키를 "수상쩍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인식했는데, 이것이 그의 실제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입양되어 "하시바 히데토시"(羽柴 秀俊)로 불렸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입양되어 "고바야카와 히데토시"(小早川 秀俊)가 되었고, 다카카게 사후 "히데아키"(秀秋)로 개명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에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詮)로 다시 개명했다.

울산성 전투 당시 히데아키는 울산성을 포위한 조선-명 연합군으로부터 울산성을 구출하기 위해 증원군을 이끌었다. 그는 창을 들고 최전선에서 싸워 적장을 사로잡고 포위를 돌파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무모한 돌격을 질책하고 치쿠고 영지를 몰수했다. 히데아키는 이에 분노하여 이시다 미츠나리의 질투 때문이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소문을 믿고 미츠나리를 증오하게 되었다.

히데아키는 임진왜란 중 여성과 어린이를 공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히데아키는 오사카에 있었고 후시미 공방전에서 미쓰나리를 지원했다. 그는 이에야스와 비밀리에 연락하면서도 미쓰나리 편에 설 것처럼 행동했다. 미쓰나리와 오타니 요시쓰구는 히데아키에게 오사카 주변 영지 두 곳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장할 때까지 관백 지위를 약속하며 승리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전투 시작 후에도 히데아키는 의도를 숨겼다. 이에야스의 동군은 미쓰나리의 서군에 맞서 고전하고 있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오타니 요시쓰구는 도도 다카토라를 격파하고 있었다. 히데아키는 어느 편에도 참전하기를 주저했다. 일부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히데아키 군에 공포탄을 발사하여 행동을 촉구했다고 한다. 히데아키는 오타니 군을 공격했고, 이 공격은 일시적으로 격퇴되었지만, 다른 군대들도 배신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일부 역사가들은 히데아키의 배신이 전투 시작과 동시에 일어났으며, 이에야스의 '탐색 사격' 이야기는 허구라고 주장한다.[1]

역사가 미쓰나리 준지는 히데아키의 배신이 단독 결정이 아니라 고바야카와 가문 전체의 의도였으며, 가신들 또한 동군으로 편을 바꿀 것을 촉구했다고 보았다.[2]

히데아키는 이후 사와야마 성 공방전에서 미쓰나리의 아버지 이시다 마사쓰구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전투 후, 히데아키는 비젠과 미마사카를 하사받아 총 55만 석의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 이상에 빠진 후 2년 만에 술에 취해 죽었고, 후계자가 없어 고바야카와(小早川) 씨족은 해체되었고, 영지는 이케다(池田) 씨족에 흡수되었다.

히데아키는 1602년 10월 18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호인 도조의 기록[22]에 따르면, 상방에서 귀국하는 길에 매사냥 중 건강이 악화되어 3일 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히데아키의 요절은 오타니 요시쓰구의 저주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23], 알코올 중독(알코올 의존증)에 의한 내장 질환이 사인으로 유력하다.[25][26] 마나세 겐사쿠의 『의학천정기』에는 1601년 7월 주독(酒疸)에 의한 황달 증상이 심해져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히데아키 사후, 고바야카와 가문은 후계자가 없어 개역되었다. 히데아키의 옛 신하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배신을 책망받아 관직을 얻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히라오카 요리카쓰처럼 막부에 불려가 다이묘가 된 자도 있었고, 마에다가나 기이 도쿠가와가의 가신이 된 자도 있었다.[27]

전 소하가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소유의 猩猩緋羅紗地違い鎌模様陣羽織(중요문화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 히데아키는 근위 신인(近衛信尹)의 추도문[28]에 따르면, 소년 시절 축국(蹴鞠)과 무용(舞) 등 예술에 재능을 보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를 베푸는 등 뛰어난 소년이었으나, 술을 알게 된 후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날들을 보내 고다이인(高台院)을 괴롭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간경변을 앓았다는 설도 있다.[29] 조락회 자리에서 난폭한 행동을 하는 등[30] 행실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 히데아키는 고다이인에게 500냥의 빚을 지고 있었고, 손님들에게도 빚을 신청하는 등[31]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정실인 장수원(長寿院)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양녀로, 1594년 히데아키가 소하가와 가에 양자로 들어오면서 결혼했지만, 모리 가에게는 고민이 많은 결혼이었다. 히데요시 사후 정세 변화에 따라 1598년 9월경 히데아키와 다른 여성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고, 이에야스가 개입하여 에도(江戸)로 내려가도록 권유한 것을 계기로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히데아키 생전인 1602년 8월, 흥정사(興正寺) 18세 준손(准尊)에게 재가했다.[32]
  • 1879년 (메이지(明治) 12년), 모리 종가의 공작(公爵) 모리 모토노리(毛利元徳)의 삼남 사부로를 당주로 한 소하가와 가가 재흥되었다. 사부로는 요절하여 동생 시로가 양자로 들어가 화족(華族) 남작(男爵) 작위(爵位)를 받았다. 이후 시로의 양자로 모리 모토아키(毛利元昭)의 차남 모토하루가 계승했다. 전 마쓰다(マツダ)사 모터스포츠(モータースポーツ) 부문 기술자, 마쓰다 RX-7(マツダ・RX-7) 개발 주사, 모터 저널리스트(ジャーナリスト)인 소하가와 타카하루(小早川隆治)는 그의 아들이다.[33]
  •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에는 히데아키 소유라고 전해지는 「猩猩緋羅紗地違い鎌模様陣羽織」이 소장되어 있다. 선명한 猩猩緋(쇼죠히)색 라샤의 진바오리(陣羽織)로, 등 전체에 「다이가마(違い鎌)」 문양을 치부자수로 붙여져 있다.
  • 세키가하라 전투 후 미쓰나리가 햇볕에 말려지고 있을 때 히데아키가 오자 "죽은 태합을 배신하고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꾸짖었고, 히데아키는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다.[34]

4. 가신


  • 이나바 마사나리: 정실은 가스가노 쓰보네이다. 이후 다이묘가 된다.[1]
  • 야마구치 마사히로[1]
  • 히라오카 요리카쓰[1]
  • 스기하라 시게하루[1]
  • 마쓰노 시게모토[1]
  • 이나바 미치마사[1]
  • 山口宗永: 다나바(丹波) 이래의 수장 가로(家老)였다. 에치젠(越前) 영지 감봉 시 가가 다이쇼지(加賀大聖寺)의 독립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사했다.[1]
  • 마쓰노 시게모토: 다나바 이래의 가신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소하야카와(小早川) 세력에서 이탈했다.[1]
  • 이나바 마사나리(통정(通政)): 옛 이름은 "하야시 마사나리"(林正成)였다. 오카야마(岡山)로 영지 이전 후 도주했다. 계모는 가스가노 쓰보네이며, 후에 다이묘가 되었다.[1]
  • 히라오카 요리카쓰: 히데아키(秀秋) 사후 로닌(浪人)이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불려져 다이묘가 된다.[1]
  • 스기하라 시게마사: 오카야마로 영지 이전 후 상의(上意)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1]
  •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아들 다키가와 다쓰마사: 오카야마로 영지 이전 후 가로직을 사임하고, 히메지 번 이케다가(池田家)에 봉직했다.[1]
  • 나가사키 모토이에[1]
  • 세이부 카즈이노카미[1]
  • 이토 시게이에: 가가쿠두(雅楽頭)였다. 세키가하라에서는 치쿠젠(筑前)에 주재했다.[1]
  • 고쿠후 다다시게: 야우에몬(弥右衛門)이었다. 세키가하라에서는 치쿠젠에 주재했다. 오카야마로 영지 이전 후 고쿠후 나이조(国府内蔵丞)라 칭하고, 히데아키 사후 이케다 데루마사를 섬겼다.[1]
  • 호리다 마사요시[1]
  • 시가 지카쓰구: 세키가하라 전투 후, 후쿠시마가(福島家)를 거쳐 후고(肥後) 호소카와가(細川家)에 봉직했다.[1]
  • 미조에 나가우지: 아사쿠라가(朝倉家) 가신이었다. 주가 멸망 후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 들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에치젠에 영지를 소유한다. 히데아키의 에치젠 이봉 후 히데아키의 부하가 되었다. 아들로 미조에 나가하루가 있다.[1]
  • 하부 마타에몬: 다나바의 토호(土豪)에서 가신이 되어, 치쿠젠 입부에 따른다.[1]
  • 기노시타 노부사다: 히데아키의 친형으로 손님이었다. 1602년 10월, 같은 달에 아우 히데아키와 마찬가지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게이쵸 7년 10월에 병사한 친형 기노시타 도시사다로 여겨짐).[1]

참조

[1] 웹사이트 The battle of Sekigahara – what went right? https://www.ospreypu[...] 2019-08-28
[2] 웹사이트 小早川秀秋、脇坂安治、小川祐忠~関ヶ原「裏切り者」たちの思惑(1) https://rekishikaido[...] PHPオンライン 2020-01-01
[3] 문서 「金吾」は官職の左衛門督の唐名「執金吾」が由来。
[4] 논문 小早川家の「清華成」と豊臣政権 2008-01-01
[5]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2000-01-01
[6] 논문 小早川秀俊の家臣団について 2008-01-01
[7] 논문 小早川秀秋発給文書に関する一考 1997-01-01
[8] 문서 「黒田家文書」所収の慶長三年正月朔日付早川長政竹中隆重連署陣触写は蔚山城の戦いの陣立書であるが、そこに秀秋の名前はない。
[9] 문서 「宮窪町村上家文書」(『今治郷土史 資料編 古代・中世』今治市1989年639頁92-11号文書)西生浦在番人数帳。
[10] 논문 豊臣政権下の博多と町衆 戎光祥出版
[11] 논문 知行充行状にみる「五大老」の性格 2010-01-01
[12] 서적 日本戦史 旧参謀本部
[13] 서적 関原軍記大成、改正三河後風土記
[14] 서적 黒田家譜
[15] 논문 関ヶ原合戦で家康は小早川軍に鉄砲を撃ち込ませてはいない 1984-02-01
[16] 서적 敗者から見た関ヶ原合戦 洋泉社 2007-05-01
[17] 서적 関ヶ原合戦の真実 宮帯出版社
[18] 논문 関ヶ原合戦における小早川秀秋の動向
[19] 문서 「中臣祐範記」9月15日条
[20] 논문 在京公家・僧侶などの日記における関ヶ原の戦い関係等の記載について(その1)時系列データベース化の試み(慶長5年3月~同年12月) 2016-02-01
[21] 서적 戦国期 領域権力と地域社会 岩田書院
[22] 문서 木下家古写『系図』
[23] 서적 関原軍記大成
[24] 문서 曲直瀬玄朔著『醫學天正記』(医学天正記)には18-19歳(数え歳)の秀秋(原文は「備前中納言秀秋公、年十八 九歳」)診察時の情報が載っており、乾上に「内傷附飲食 十三」には「酒渇嘔吐、胸中煩悶全不食、尿赤舌黒乾、脉細數(以下、薬の処方の説明なので略)」、乾下に「黄疸 三十六」には「酒疸一身黄、心下堅滿、而痛不飲食渇甚(薬説明、中略)○黄色少減、心中悸動心遠、脉遅用(薬説明、略)」とある。
(近藤瓶城 編『史籍集覧 第二十六冊』近藤出版部、1902年、p.442・461。)
このように食事がとれないような体調不良が何度かあり、酒を飲むと吐く・尿が赤くて舌が黒い・脈が細かい(内傷)、全身黄色い・心臓の下が硬く腫れ痛い(黄疸)などと身体の異常が記載されており、その原因は曲直瀬も"酒疸"(=アルコール性肝硬変)と指摘し、当時の名医にも酒が原因と認識されていた。

[25] 방송 にっぽん!歴史鑑定 BS-TBS 2015-07-13
[26] 문서 三日前の慶長7年(1602年)10月18日、実兄で秀秋領に寄寓していた木下俊定も死去している。
[27] 웹사이트 近世武家の世界・コラム http://www.hakubutu.[...]
[28] 문서 木下家古写『系図』
[29] 뉴스 小早川秀秋、関ヶ原の寝返り決断遅れは肝疾患のせい? https://yomidr.yomiu[...] 2016-06-27
[30] 문서 大日本古文書家わけ第11(小早川家文書之1)514号文書
[31] 문서 慶長7年4月20日付小早川秀秋印判状
[32] 서적 西国の権力と戦乱 清文堂出版
[33] 뉴스 断絶した小早川を毛利が再興、末裔はル・マンで優勝 http://dot.asahi.com[...] 2014-10-31
[34] 웹사이트 【戦国こぼれ話】関ヶ原合戦後、無念の最期を迎えた石田三成の気骨あふれる魂の言葉とは(渡邊大門)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21-10-18
[35] 문서 豊臣秀吉の正室ねねの兄
[36] 문서 만에 하나 상대에게 역습당해 대장인 히데아키가 목을 떨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니까
[37] 문서 실제로는 가가의 마에다가를 경유해 기이 도쿠가와가에 사관한 인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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