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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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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숙종(711년 ~ 762년)은 당나라의 황족으로, 당 현종의 셋째 아들이자 당나라의 제8대 황제이다. 그는 756년 안사의 난 발발 후 현종으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아 즉위했으며, 안사의 난을 진압하고 당나라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재위 기간 동안 위구르와의 동맹을 통해 장안을 수복하는 등 업적을 남겼으나, 환관의 발호와 황후 장씨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말년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숙종은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묘호는 숙종, 능호는 건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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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숙종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당 숙종
칭호황제
다른 칭호천가한(天可汗)
이름이형(李亨)
다른 이름이사승(李嗣升), 이준(李浚), 이여(李璵), 이소(李紹)
묘호숙종(肅宗)
시호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
재위 기간
즉위756년 8월 12일
퇴위762년 5월 16일
연호지덕(至德) 756년–758년
건원(乾元) 758년–760년
상원(上元) 760년–762년
보응(寶應) 762년
출생과 사망
출생711년
사망762년 5월 16일 (50세)
장지건릉(建陵)
가계
왕조당나라
이(李)
아버지현종
어머니원헌황후
배우자경조 위씨 (746년 이혼)
장황후 (762년 사망)
장경황후 (725년 결혼, 730년 사망)
자녀대종
이희
이담
이진
이선
이정
이광
이추이
숙공주
소공주
화정공주
탄공주
기공주
영화공주
고공주
영목공주
황태자
임명개원 26년 (738년) 6월 3일
해임지덕 원년 (756년) 7월 12일
이전폐태자 이영(李瑛)
이후대종 이예(李豫)

2. 생애

현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초기 이름은 이사성(李嗣昇)이었으나 여러 차례 개명을 거쳐 황태자 시절에는 이형(李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황태자 시절 이임보, 양국충 등 권신들과의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현종을 따라 장안을 탈출했으며, 피난 도중 마외역에서 양국충양귀비가 죽는 혼란을 겪었다. 이후 현종과 헤어져 북쪽으로 향하여 756년 영무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였다(당 숙종).

즉위 후 곽자의, 이광필 등 명장들을 기용하고 위구르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 토벌에 힘썼으며, 757년에는 수도 장안과 동도 낙양을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은 그의 생전에 완전히 진압되지 못했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를 옹립했던 환관 이보국 등의 세력이 강성해져 황권을 위협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는 폐단을 낳았다. 또한, 태상황으로 물러난 아버지 현종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아 말년에는 현종이 유폐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병세가 악화되었고, 762년 장황후와 이보국 사이의 권력 다툼이 극에 달한 혼란 속에서 안사의 난 종결을 보지 못한 채 5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의 치세는 안사의 난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동시에 환관 세력의 발호라는 새로운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 시기로 평가된다. 숙종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즉위 전

현종 이융기의 셋째 아들로 711년, 할아버지 예종의 치세 중에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이사성(李嗣昇)이었다. 어머니는 양귀빈(사후 원헌황후로 추존)으로, 수나라 황족의 후예였다. 증조부 양사달(楊士達)은 수나라의 고위 관료였고, 아버지 양지경(楊知慶)은 당나라 황궁 경비대 장군이었다.

이사성을 임신했을 당시, 아버지 이융기는 고모 태평공주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이융기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태자궁에 배치했으며, 이융기가 많은 아들을 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융기에게는 이미 이사성의 형인 이사지(후에 이총(李琮)으로 개명)와 이사견(후에 이영(李瑛)으로 개명) 두 아들이 있었다. 이융기는 양귀빈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태평공주 측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측근 장열에게 상담했다.

> "유력자가 내가 많은 아들을 갖는 것을 원치 않아. 이 여자가 표적이 될까 두렵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융기는 낙태를 유도하는 약초 달인 물을 준비했으나, 잠든 사이 신이 나타나 약 달인 정을 뒤엎는 꿈을 꾸었다. 이를 장열에게 말하자 장열은 "이는 하늘의 뜻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답했다.[8] 이 일로 이사성은 후에 장열에게 개인적인 빚을 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9]

712년 예종이 현종에게 양위했으나, 태상황으로서 실권을 유지했다. 현종 즉위 직후, 예종은 이사성을 산왕(汕王)에 봉했다. 713년 현종이 태평공주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후, 이영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사성은 생모가 있었지만 아들이 없던 현종의 부인 왕황후가 길렀다.[8]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에 힘써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현종은 하지장, 반숙(潘肅), 여향(呂向), 황보빈(皇甫彬), 형수(邢璹) 등 명망 있는 학자들을 보내 그와 함께 공부하게 했다.

724년, 현종의 총애를 받던 무혜비의 모함으로 왕황후가 폐위되고 곧 사망했다.[10] 무혜비는 재상 이임보와 결탁하여 자신의 아들 수왕 이청(李淸, 후에 이모(李瑁)로 개명)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726년 이사성은 중왕(忠王)으로 개봉되고 이름은 이준(李浚)으로 개명했다. 728년 어머니 양귀빈이 사망했다.[8] 729년 거란실위가 침입하자 명목상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실제 지휘는 현종의 사촌 신왕 이휘(李褘)가 맡았다. 이휘가 이들을 격퇴한 후 이준은 삼공의 하나인 사도(司徒)의 명예직을 받았다. 735년에는 이름을 이우(李璵)로 바꾸었다.

개원 25년(737년), 무혜비의 계략으로 형인 황태자 이영과 악왕 이요(李瑤), 광왕 이거(李琚)가 모반 혐의로 폐위되고 자결을 강요당했다. 무혜비와 이임보는 계속해서 이모를 태자로 밀었지만, 737년 말 무혜비가 사망하고 현종은 이우의 능력을 인정하여 주저했다. 환관 고력사는 장자를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738년 6월 24일 현종은 이우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름을 이소(李紹)로 개명했다.[11] 그러나 유송의 황제 시해범 유소와 이름이 같다는 지적이 나와 곧 이형(李亨)으로 다시 개명했고, 이후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천보 3년(744년)에 휘를 "형(亨)"으로 고쳤다. 그의 첩 중 위견(韋堅)의 누이인 위씨가 태자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황제 치세의 건원 숙종


이형이 태자가 된 것은 이임보의 뜻과 달랐다. 또한 황실 재정을 확충하는 능력으로 현종의 신임을 얻은 태자비의 오빠 위견(韋堅)이 조정에서 이임보의 경쟁자가 되자, 이임보는 이형과 위견을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746년, 이임보의 사주를 받은 양심긍(楊慎矜)은 이형이 위견과 함께 야경을 구경했고, 위견이 도교 사찰에서 장군 황보유명(皇甫惟明)을 만났다고 보고했다. 이임보는 이를 빌미로 위견과 황보유명이 비밀리에 이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현종을 몰아내려 했다고 모함했다. 위견과 황보유명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현종은 이임보의 주장을 믿으면서도 사건 확대를 원치 않아 이들을 외직으로 내쫓는 선에서 조사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말, 위견의 형제 위란(韋蘭)과 위지(韋芝)가 이형의 말을 인용하며 위견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현종은 격노했다. 두려움을 느낀 이형은 태자비 위씨와 이혼하고 위씨 형제들의 처벌을 청했다. 위씨 형제들과 전 재상 이적지, 위빈(韋斌), 위견의 조카 설왕 이권(李琄), 배관(裴寬), 이기물(李齊物) 등 관련자들이 모두 좌천되었다. 747년 이임보의 사주로 위씨 형제, 황보유명, 이적지는 자결을 강요당했다.

746년 말, 또 다른 사건으로 이형은 위기에 처했다. 그의 다른 후궁인 두비(杜妃)의 아버지 두유린(杜有鄰)이 매형 유적(柳勣)과의 불화로 인해, 이형을 위해 주술을 부렸다는 거짓 모함을 받았다. 이임보는 길온(吉溫)에게 유적을 심문하게 하여 두유린을 엮었다. 두유린, 유적, 유적의 친구 왕증(王曾)은 곤장으로 맞아 죽었고, 이형은 두비를 궁에서 내보내야 했다. 이임보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유적과 친분이 있던 이옹(李邕)과 배돈복(裴敦復)도 곤장으로 때려 죽였다.

747년, 현종이 총애하던 장군 안록산장안에 문안 인사를 왔을 때, 한족이 아니었던 그는 처음에 이형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며 황제에게만 충성할 뿐 황태자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변명했다. 현종이 황태자는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설명하자 마지못해 절을 했다. 이 일로 현종은 안록산을 더욱 총애했지만, 안록산은 이형이 앙심을 품을까 불안해했다.

747년 후반, 이임보는 다시 이형을 제거하려 했다. 아버지 왕해빈(王海賓)의 전공으로 이형과 함께 궁에서 자란 장군 왕충사가 티베트 제국과의 전투에서 다른 장군 동연광(董延光)의 작전을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임보는 이를 확대하여 왕충사가 이형을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모함했다. 그러나 다른 장군 가서한의 변호로 왕충사는 사형을 면했고 이형은 연루되지 않았다. 이 시기 이임보는 여러 차례 이형을 모함했지만, 환관 고력사와 이형의 매형인 장기(張垍, 장열의 아들)의 보호로 위기를 넘겼다고 전해진다.

754년경에는 양국충(이임보는 752년 사망)이 재상이 되었다. 그는 현종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 양귀비의 사촌이었다. 양국충은 안록산과 권력 다툼을 벌이며 안록산이 반란을 꾀한다고 거듭 주장했지만 현종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형은 양국충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다. 천보 14년(755년) 11월, 양국충의 거듭된 도발 속에 안록산은 마침내 판양(현재의 베이징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안사의 난). 반란 초기 현종은 잠시 이형을 섭정으로 삼는 것을 고려했으나, 양귀비와 그녀의 자매들이 반대하여(이형이 섭정이 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두려워함) 실행하지 않았다.

이듬해 장안에 반란군이 닥쳐오자, 756년 여름, 안록산은 연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으며, 그의 군대는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왔다. 756년 7월 14일,[12] 현종은 양국충의 건의에 따라 청두 인근의 검남(劍南)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고, 고력사, 양국충, 위씨 일족, 이형, 양귀비와 그 가족들과 함께 장안을 떠났다. 다음 날인 7월 15일, 마외역(馬嵬驛, 현재 산시성 셴양시 싱핑시)에서 황제를 호위하던 군사들이 양국충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그를 살해하고, 현종에게 양귀비 또한 죽일 것을 강요했다. 현종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현종은 계속해서 으로 피신하려 했다. 마외 지역 백성들은 현종에게 떠나지 말고 장안을 수복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현종은 이형에게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형이 현종 곁을 떠나자, 환관 이보국과 이형의 아들 건녕왕 이담, 광평왕 이숙(훗날 대종)은 이형에게 현종을 따라가지 말고 북벌을 감행하여 안록산에 대항하라고 설득했다. 장안과 검남 사이의 지리적 장벽 때문에 남쪽으로 가면 장안 수복이 불가능해진다는 이유였다. 이형은 동의하고 아들 이숙을 보내 현종에게 이를 알렸다. 현종은 이형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자신은 검남으로 향했다. 이형 등은 토벌군을 이끌고 봉천(현재의 산시성 셴양시 건현)을 거쳐, 삭방절도사의 주둔지인 영무로 향했다. 영무에 도착하자 그곳의 군대는 이형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했다.

2. 2. 안사의 난 진압과 환관의 발호

756년 6월, 안사의 난으로 부황 현종 이융기양귀비 등과 함께 서쪽으로 피난하자, 당시 황태자였던 이형은 부황을 호위했다. 마외역에서 병사들이 양국충 일족을 처단하고 현종에게 양귀비의 처형을 강요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조정 대신들과 관중의 부로들은 현종에게 분조(分朝, 조정을 나눔)를 건의했다.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태자에게 분조를 명하고 자신은 서촉의 성도로 향했다. 태자 이형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영무(靈武)로 가는 길에 756년 7월, 호위하던 금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숙종이다. 이 소식을 들은 현종은 사후에 이를 승인하고 스스로 태상황으로 물러났다.[2] 숙종은 즉위 직후 연호를 지덕(至德)으로 바꾸었다.

"왕셴에서 황제를 맞이함" 望賢迎駕圖, 아마도 13세기 그림, 당 숙종의 세부 묘사.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장군 곽자의와 이광필에게 반란군 토벌을 명했다. 757년 정월, 반란 주모자 안록산이 아들 안경서(安慶緒)에게 살해당하면서 반란군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숙종은 위구르의 바이안추르 칸과 동맹을 맺고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위구르군은 안서서역에서 소환된 당나라 정예군과 합류했다. 숙종은 장안 탈환 시 위구르 군대의 약탈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절박한 상황에서 외세의 힘을 빌렸다. 재상 이미(李泌)는 먼저 반란군의 근거지인 판양(范陽)을 공격하여 후환을 없애자고 건의했으나, 숙종은 수도 장안 탈환을 우선시했다.

757년 가을, 숙종의 장남인 광평왕 이숙(李俶, 훗날 대종 이유(李豫))이 총지휘한 당-위구르 연합군은 마침내 장안을 탈환했다. 위구르군은 장안 대신 낙양을 약탈하는 것으로 이숙과 합의했다. 9월에 숙종은 장안으로 환도했고, 12월에는 태상황 현종도 돌아왔다. 장안 탈환 한 달 뒤, 연합군은 동도(東都) 낙양마저 탈환했으나, 약속대로 위구르군은 낙양에서 심한 약탈을 자행했다.[14] 안경서는 야성(鄴城)으로 달아났다. 이 시기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만수르가 숙종을 돕기 위해 3,000명의 용병을 파견했다는 기록도 있다.[16] 그러나 난의 혼란 속에서 760년에는 전 연나라 장군이었던 전승공이 양주에서 아랍 및 페르시아 상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양주 학살 (760))이 벌어지기도 했다.[17]

수도 탈환 이후, 숙종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환관 이보국(李輔國)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이보국은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귀비(張貴妃, 후에 황후로 책봉됨)와 결탁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태자 이숙(이유), 건녕왕 이담(李倓), 재상 이미 등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757년, 이보국과 장황후는 건녕왕 이담이 태자 자리를 노리고 형인 이숙을 암살하려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격분한 숙종은 아들 이담에게 자결을 명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태자 이숙과 이미 등은 큰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보국은 황실 금군인 신책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며 숙종조차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한편, 장황후는 자신의 아들 이소(李佋)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숙종은 장남 이숙의 공로와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태자로 책봉하고 이름도 이유(李豫)로 바꾸었다.

안사의 난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758년, 당에 항복했던 연나라의 주요 장수 사사명(史思明)이 당나라 장군 이광필과의 불화 및 자신의 부하 오승은(烏承恩) 암살 시도 등을 이유로 다시 반기를 들었다. 759년 봄, 사사명은 야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군을 격파하고, 안경서를 유인하여 살해한 뒤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를 칭하고 낙양을 재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이광필 등의 분전으로 장안으로의 추가 진격은 저지되었고, 전선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761년, 사사명 역시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암살당했지만, 연나라 잔존 세력은 여전히 강성하여 난은 숙종 생전에 종결되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환관 이보국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다. 760년, 이보국은 태상황 현종과 그의 측근들이 복위를 꾀하고 있다고 숙종에게 참소했다. 숙종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이보국은 현종의 거처를 감시가 용이한 서내(西內, 태극궁)로 강제로 옮기게 하고, 현종이 신임하던 환관 고력사(高力士), 진현례(陳玄禮), 왕승은(王承恩), 위열(魏悅) 등을 제거하거나 유배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현종의 누이 이지영(李持盈) 위진공주와 시녀 여선원(如仙媛) 등도 쫓겨났다. 이 일로 깊은 상심에 빠진 현종은 외부와의 교류가 끊긴 채 병석에 누웠다. 숙종 역시 이보국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한 이보국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이보국은 국방부 장관 격인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랐고, 숙종은 국정 운영에 있어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762년 5월 3일(음력 4월 경진일), 태상황 현종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숙종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숙종은 태자 이유에게 섭정을 맡겼다. 이 무렵, 권력을 나누던 장황후와 이보국 사이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장황후는 이보국을 제거하기 위해 태자 이유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유의 동생인 월왕(越王) 이계(李係)와 손잡고 이보국과 그의 심복 환관 정원진(程元振)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762년 5월 14일(음력 4월 경자일), 이들의 계획을 먼저 간파한 이보국과 정원진이 선수를 쳐 황실 금군을 동원하여 장황후와 월왕 이계, 그리고 그 추종자들을 체포했다. 이 극심한 혼란 속에서 병석에 누워 있던 숙종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762년 5월 18일(음력 4월 임진일, 현종 사망 13일 후[6]), 장생전(長生殿)에서 5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숙종 사후, 이보국은 장황후, 월왕 이계, 연왕(兗王) 이현(李僩) 등을 처형하고 태자 이유를 황제로 즉위시켰으니, 이가 바로 대종이다.

숙종 자신도 환관 이보국의 도움으로 황위에 올랐고,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환관을 감군(監軍)으로 파견하여 군대를 감시하게 하는 등 환관 세력을 중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당나라 후기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환관의 발호를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숙종 이후 당나라 황제 대부분의 즉위 과정에 환관이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 악습이 시작된 것이다.

2. 3. 최후

건원 원년(758년), 숙종은 제오기를 염철사로 임명하여 소금 전매제를 도입하는 등 재정 건전화와 국가 체제 강화를 시도했으나, 조정의 실권은 황후 장씨와 환관 이보국 등에게 넘어가 있었다. 숙종은 자신의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이후 이보국은 장황후와 권력 다툼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숙종의 셋째 아들 건녕왕 이담이 모반 혐의로 자결하게 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무렵부터 숙종은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아졌다.

761년, 사사명이 암살되고 그의 아들 사조의가 뒤를 이었으나, 다른 연나라 장수들이 사조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안사의 난 진압의 기회가 생겼다. 당군은 연군을 격퇴했지만 낙양을 탈환하지는 못했고, 안사의 난은 숙종 생전에 종결되지 못했다.

762년 5월 3일, 아버지인 태상황 현종 이융기가 사망하자[6] 숙종은 큰 슬픔에 빠졌고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황태자 이유(당 대종)에게 섭정을 맡겼다. 당시 황후 장씨와 이보국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장황후는 이유에게 접근하여 이보국과 그의 측근 정원진을 제거하자고 제안했으나 이유는 병든 숙종에게 충격을 줄 것을 염려하여 거절했다.

이후 장황후는 이유의 동생인 월왕 이계(월왕 이계)와 손을 잡고,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환관 200여 명과 함께 이보국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762년 5월 16일,[18] 장황후는 숙종의 이름으로 이유를 궁궐로 불러들이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환관 정원진이 이 계획을 알아채고 이보국과 이유에게 알렸고, 정원진은 이유를 황실 경비대 본부로 피신시켰다.

이보국과 정원진이 이끄는 황실 경비대는 궁궐로 들어가 장황후, 월왕 이계 및 그 일파를 체포했다. 이때 숙종은 장생전(長生殿)에서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병사들이 그의 앞에서 장황후 등을 끌고 나갔다고 전해진다. 시종도 없이 홀로 남겨진 숙종은 762년 5월 18일, 향년 52세로 붕어했다.[6] 이보국은 장황후, 월왕 이계, 연왕 이현(연왕 이현) 등을 처형한 뒤 이유를 황제로 즉위시켰으니, 그가 바로 당 대종이다.

숙종이 환관 이보국에 의해 옹립되고, 또 환관을 감군으로 중용한 사실은 이후 당나라 황제 즉위에 환관이 깊이 관여하는 악습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숙종의 현손인 헌종 이후 당 멸망 시까지 경종을 제외한 모든 황제가 환관에 의해 추대되었다.

3. 연호

숙종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
서력
(西曆)
756년757년758년759년760년761년762년
간지
(干支)
병신(丙申)정유(丁酉)무술(戊戌)기해(己亥)경자(庚子)신축(辛丑)임인(壬寅)
연호
(年號)
지덕(至德)
원년
2년3년
건원(乾元)
원년
2년3년
상원(上元)
원년
2년(3년)
보응(寶應)
원년



761년 10월 23일, 당 숙종은 '건자'월(11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선포했다.[19] 762년 5월 13일, 그는 이 변경을 되돌려 '건인'월을 다시 새해의 시작으로 했다.[20]

4. 연표

숙종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
서력
(西曆)
756년757년758년759년760년761년762년
간지
(干支)
병신(丙申)정유(丁酉)무술(戊戌)기해(己亥)경자(庚子)신축(辛丑)임인(壬寅)
연호
(年號)
지덕(至德)
원년
2년3년
건원(乾元)
원년
2년3년
상원(上元)
원년
2년(3년)
보응(寶應)
원년


5. 존호, 시호, 묘호, 능호

초기 존호는 광천문무대성효감황제(光天文武大聖孝感皇帝)이며, 이후 추가와 개칭을 거친 최종 존호는 건원대성광천문무효감황제(乾元大聖光天文武孝感皇帝)이다.

시호는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이다.

묘호는 '''숙종'''(肅宗)이며, 능호는 건릉(建陵)이다.

6. 가족 관계

당 숙종은 아버지 당 현종과 사후 원헌황후로 추존된 어머니 양씨(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러 명의 배우자를 두었는데, 태자 시절 맞이했던 황태자비 위씨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이혼했으며, 즉위 후에는 장씨(張氏)를 황후로 책봉했다. 장황후는 숙종 말년에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숙종 사후 제거되었다. 숙종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당 대종을 낳은 후궁 오씨(吳氏)는 사후 장경황후로 추존되었다. 이 외에도 여러 후궁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기록상으로는 14명의 황자와 다수의 황녀가 있었다. 숙종의 가족 관계는 그의 치세 동안 발생한 여러 정치적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자세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정보는 아래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6. 1. 부모



711년, 할아버지인 예종의 치세 2년차에 아버지 이융기(당시 황태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이사성(李嗣昇)이었다. 어머니 양귀빈(楊貴嬪)은 사후 원헌황후로 추존되었으며, 수나라 황족의 후예였다. 양귀빈의 증조부 양사달(楊士達)은 수나라의 고위 관료로 정왕(鄭王) 작위를 받았고, 아버지 양지경(楊知慶)은 당나라 황궁 경비대 장군을 지냈다.

이사성을 임신했을 당시, 아버지 이융기는 고모 태평공주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이융기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동궁(태자궁)에 심어두었으며, 이융기가 아들을 많이 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융기에게는 이미 이사성의 형인 이사지(훗날 이총으로 개명)와 이사견(훗날 이영으로 개명) 두 아들이 있었다.

이융기는 태평공주가 양귀빈의 임신 사실을 알면 해를 가할까 염려하여 측근 장열에게 "권세가가 내가 아들을 많이 갖는 것을 원치 않으니, 이 여인이 표적이 될까 두렵소.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상의했다. 이융기는 한의학에서 낙태를 유도한다고 알려진 약초 달인 물을 준비했으나, 약을 달이다 잠이 들었고 꿈에서 신이 나타나 약 달이는 '''정'''을 뒤엎는 것을 보았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장열은 "이는 하늘의 뜻이니 염려 마십시오"라고 답했다.[8] 이 일로 훗날 숙종은 장열에게 개인적으로 큰 신세를 졌다고 여겼다.[9]

712년, 예종이 현종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으나, 태상황으로서 실권은 유지했다. 현종 즉위 직후, 예종은 상왕의 자격으로 이사성을 산왕(陜王)에 봉했다. 713년 현종이 태평공주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후, 어머니 조씨(趙氏)가 현종의 총애를 받던 이사견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사성은 생모 양씨가 있었음에도 자식이 없던 현종의 정실 왕 황후에게 입양되어 길러졌다.[8]

어린 시절 이사성은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에 힘써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현종은 하지장(賀知章), 반숙(潘肅), 여향(呂向), 황보빈(皇甫彬), 형수(邢璹) 등 학식이 높은 신하들을 보내 그와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724년, 현종의 총애를 받던 무혜비의 모함으로 왕 황후가 폐위되고 곧 사망했다.[10] 이후 무혜비는 재상 이린보와 결탁하여 자신의 아들 수왕(壽王) 이청(李淸)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726년 이사성은 중왕(忠王)으로 봉해지고 이름도 이준(李浚)으로 개명했다. 728년에는 생모 양귀빈이 세상을 떠났다.[8]

729년 거란족과 실위가 침입하자, 이준은 토벌군의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실제 지휘는 현종의 사촌 신왕(信王) 이휘(李褘)가 맡았다. 이휘가 거란과 실위를 격퇴한 후, 이준은 삼공의 하나인 사도(司徒)라는 명예직을 받았다. 735년에는 이름을 이우(李璵)로 다시 바꾸었다.

737년, 무혜비의 계략으로 황태자 이영과 그의 형제 악왕(鄂王) 이요(李瑤), 광왕(光王) 이거(李琚)가 모반 혐의를 쓰고 폐위되어 자결을 강요당했다. 무혜비와 이인보는 계속해서 자신의 아들 이모(李瑁, 이청에서 개명)를 태자로 밀었지만, 그해 말 무혜비가 사망하고 현종은 이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태자 책봉을 망설였다.

환관 고력사는 장자를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현종은 738년 6월 24일 이우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름을 이소(李紹)로 바꾸었다.[11] 그러나 유송의 황태자였던 유소(아버지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함)와 이름이 같다는 지적이 나오자, 곧 이름을 이형(李亨)으로 다시 바꾸었고 이후 이 이름이 그의 최종 이름이 되었다. 그의 첩 중 위견(韋堅)의 누이인 위씨(韋氏)가 태자비로 책봉되었다.

6. 2. 황후

숙종에게는 정식으로 책봉된 황후와 사후에 추존된 황후가 있었다. 또한 태자 시절 맞이했던 태자비도 있었다.

봉호시호(봉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능묘비고
폐황후(廢皇后)장씨(張氏)[21]758년 ~ 762년? ~ 762년장거일(張去逸)
의장현주(義章縣主)
두씨(竇氏)
[22]
궁인(宮人)장경황후
(章敬皇后)
오씨(吳氏)(추존)713년 ~ 730년진국공(秦國公)
오영규(吳令珪)
진국부인(秦國夫人)
이씨(李氏)
건릉(建陵)[23]



숙종이 태자였던 시절, 그의 첫 번째 정비는 황태자비 위씨였다. 그러나 746년, 권력자 이임보는 태자 이형(숙종)과 그의 장인 위견(韋堅)을 제거하기 위해 모함을 꾸몄다. 이임보는 위견과 황보유명(皇甫惟明) 장군이 현종을 몰아내고 이형을 옹립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위견과 그의 형제들은 좌천되었고, 두려움을 느낀 이형은 태자비 위씨와 이혼하고 위씨 형제들의 처벌을 요구해야 했다. 위씨는 757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연왕 이선(李僴)과 영화공주, 영목공주를 낳았다.

숙종 즉위 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장씨(張氏)였다. 본래 숙종의 총애받는 후궁(귀비)이었으나 758년 황후로 책봉되었다. 장황후는 환관 이보국(李輔國)과 손잡고 정적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녀는 숙종의 셋째 아들이자 명망 높던 건녕왕 이담(李倓)이 자신들의 비리를 비판하자, 그가 황태자 광평왕 이초(李俶, 훗날 대종 이유)를 해치려 한다고 무고하여 757년 죽게 만들었다. 이는 당시 황태자였던 이초와 조언자 이미(李泌)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장황후는 자신의 아들 李佋|이소중국어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숙종은 장남이자 공이 많았던 이초를 태자로 책봉하고 이름을 이유(李豫)로 바꾸었다. 숙종 말년에 병세가 깊어지자 장황후는 다시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녀는 이보국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월왕 李係|이계중국어와 손잡고 이보국과 그의 심복 정원진(程元振)을 제거하려 했다. 762년 5월, 장황후는 숙종의 이름으로 이유를 불러들여 이보국 제거를 논의하려 했으나, 정원진이 이를 먼저 알아채고 이보국과 이유에게 알렸다. 이보국과 정원진은 황실 금군을 동원하여 장황후와 이계 등을 체포했고, 숙종이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 장황후와 그 일파는 숙종 앞에서 끌려 나갔다. 숙종이 사망한 직후 이보국은 장황후, 이계 등을 처형하고 이유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장경황후 오씨(吳氏)는 숙종의 후궁이었으나 일찍 사망했다. 그녀는 숙종의 첫째 아들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당 대종을 낳았기 때문에 사후에 황후로 추존되었다.

6. 3. 후궁

봉호(시호)별칭성씨(이름)생몰년도비고
황후 장씨장귀비장씨(張氏)? ~ 762년공의황태자 이소, 정왕 이동의 생모.
황후 오씨(추존)오씨(吳氏)713년 ~ 730년대종 이예, 화정공주의 생모.
폐태자비(廢太子妃)충왕비(忠王妃)위씨(韋氏, 경조)? ~ 757년태자 시절 이혼함. 연왕 이선, 영화공주, 영목공주의 생모.
비(妃)최씨(崔氏)?
소의(昭儀)배씨(裴氏)?상왕 이광의 생모.
첩여(婕妤)진씨(陳氏)?팽왕 이근의 생모.
첩여(婕妤)단씨(段氏)?기왕 이추의 생모.
첩여(婕妤)미인(美人)동씨(董氏)?
미인(美人)장씨(張氏)?경왕 이정의 생모.
양제(良娣)두씨(杜氏)?태자 시절 폐서인됨.
궁인(宮人)손씨(孫氏)?월왕 이계의 생모.
궁인(宮人)장씨(張氏)?승천황제 이담의 생모.
궁인(宮人)왕씨(王氏)?위왕 이필의 생모.


6. 4. 황자

wikitext

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별칭비고
장남황태자
(皇太子)
이숙(李俶)
이예(李豫)
726년 ~ 779년장경황후 오씨20남 20녀[24]제8대 황제 대종(代宗).
차남월왕(越王)이담(李儋)
이계(李係)
? ~ 762년궁인 손씨3남[25]
3남건녕군왕
(建寧郡王)
승천황제
(承天皇帝)
이담(李倓)? ~ 757년궁인 장씨[26][27]
4남서평군왕
(西平郡王)
이필(李佖)궁인 왕씨[28][29]
5남팽왕(彭王)이근(李僅)? ~ 783년첩여 진씨1남[30]
6남연왕(兗王)이한(李僴)? ~ 762년폐태자비 위씨[31]
7남경왕(涇王)이정(李侹)? ~ 784년미인 장씨[32]
8남영창군왕
(靈昌郡王)
이영(李榮)[33][34]
9남양왕(襄王)이광(李僙)? ~ 791년소의 배씨2남
10남기왕(杞王)이수(李倕)? ~ 798년첩여 단씨
11남소왕(召王)이괴(李傀)? ~ 783년황비 최씨
12남흥왕(興王)공의황태자
(恭懿皇太子)
이소(李佋)753년 ~ 760년폐황후 장씨[35]
13남정왕(定王)이동(李侗)? ~ 762년폐황후 장씨요절함.
14남회양군왕
(淮陽郡王)
이희(李僖)[36][37]


6. 5. 황녀

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비고
장녀숙국공주두로 담(豆盧 湛)[38]
차녀소국공주
(蕭國公主)
rowspan="3"|rowspan="3"|rowspan="3"|정손(鄭巽)[39]
설강형(薛康衡)
영무 가한(英武 可汗)
약라갈 마연철(藥羅葛 磨延啜)
3녀화정공주728년 ~ 764년장경황후 오씨류담(柳潭)[40]
4녀담국공주729년 ~ 786년장청(張淸)[41]
5녀기국공주이숙(李淑)733년 ~ 807년정패(鄭沛)[42]
6녀영화공주? ~ 768년폐태자비 위씨왕전(王詮)[43]
7녀고국공주rowspan="2"|? ~ 790년rowspan="2"|배휘(裴徽)[44]
소승(蕭升)
8녀영목공주폐태자비 위씨위회(韋會)
9녀공주755년 ~ ?폐황후 장씨[45]


7. 관련 작품

; 영화


  • 양귀비: 레이디 오브 더 다이너스티 (2015년, 중국) - 배우: 우차오

; 텔레비전 드라마

  • 양귀비 (2005년, 중국) - 배우: 장징둥
  • 려왕별희 ~꽃이 흩날리는 영원한 사랑~ (2017년, 중국) - 배우: 왕진송

참조

[1] 문서
[2] Old Book of Tang
[3]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zh:s:舊唐書/卷10
[4] Old Book of Tang
[5]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zh:s:舊唐書/卷10
[6] Old Book of Tang
[7]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22
[8]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zh:s:舊唐書/卷52
[9]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20
[10] Old Book of Tang Old Book of Tang :zh:s:舊唐書/卷51
[11] Jiu Tang Shu
[12] Old Book of Tang
[13]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757
[14] 서적 Outlines of the History of the Chinese
[15] 서적 The New Silk Road leads through the Arab Peninsula: Mastering Global Business and Innovation Emerald Group Publishing
[16] 서적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ume 5,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4, Spagyrical Discovery and Invention: Apparatus, Theories and Gift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17] 서적 The earliest Muslim communities in China https://www.kfcris.c[...] King Faisal Center For Research and Islamic Studies
[18] Old Book of Tang
[19] Zizhi Tongjian
[20] Zizhi Tongjian
[21] 문서 양제(良娣)/숙비(淑妃)
[22] 문서 폐서인이 된 후에 사사됨.
[23] 문서 대종 즉위 후에 황후로 추존됨.
[24] 문서 광평군왕(廣平郡王)/초왕(楚王)/성왕(成王)
[25] 문서 남양군왕(南陽郡王)/조왕(趙王)
[26] 문서 제왕(齊王)
[27] 문서 사후 제왕으로 봉하였으나, 대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됨.
[28] 문서 위왕(衛王)
[29] 문서 요절함. 대종에 의해 위왕으로 봉해짐.
[30] 문서 신성군왕(新城郡王)
[31] 문서 영천군왕(潁川郡王)
[32] 문서 동양군왕(東陽郡王)
[33] 문서 운왕(鄆王)
[34] 문서 요절함. 대종에 의해 운왕으로 봉해짐.
[35] 문서 요절함. 사후에 황태자로 추존됨.
[36] 문서 송왕(宋王)
[37] 문서 요절함. 대종에 의해 송왕으로 봉해짐.
[38] 문서 장락공주(長樂公主)
[39] 문서 영국공주(寧國公主)
[40] 문서 화정군주(和政郡主)
[41] 문서 대령군주(大寧郡主)
[42] 문서 의령공주(宜寧公主)
[43] 문서 보장공주(寶章公主)/보정공주(寶貞公主)
[44] 문서 연광공주(延光公主)
[45] 문서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하지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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