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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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토쿠 사건은 1910년 일본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 탄압 사건이다. 나가노현에서 폭탄 제조 혐의로 체포된 미야시타 타키치의 공범 외에 고토쿠 슈스이와 칸노 스가코 등이 체포되었고, 검찰은 이 사건을 천황제에 대한 음모로 간주했다. 재판에서 26명이 기소되었고, 2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고토쿠 슈스이 등 11명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반체제 인사를 색출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제정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재심 청구가 기각되었고, 사건에 대한 평가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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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대역 사건 |
다른 이름 | 고토쿠 사건 |
발생 시기 | 1910년 |
주요 목표 | 메이지 천황 암살 계획 |
관련 인물 | |
주요 관련자 | 고토쿠 슈스이 외 다수 |
관련 이념 | 아나키즘 |
기타 관련자 |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도시키 |
사건 배경 | |
배경 사상 | 무정부주의 사상의 확산 |
시대 상황 | 메이지 시대의 사회적 불안정 |
사건 전개 | |
계획 발각 | 암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 |
대규모 검거 |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 진행 |
재판 및 처벌 |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및 사형 집행 |
사건 결과 | |
사형 집행 | 다수의 무정부주의자에게 사형 집행 |
무정부주의 운동 탄압 | 일본 내 무정부주의 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 |
사회적 영향 |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 분위기 조성 |
추가 정보 | |
참고 자료 | 야후 백과사전 대역사건 |
관련 사건 | 아마카스 사건 |
2. 사건 배경
고토쿠 사건의 배경이 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본 사회는 여러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10년 5월 20일, 나가노현의 한 제재소 직원 미야시타 타키치(宮下瀧治)의 방을 경찰이 수색하여 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들을 발견했다. 경찰은 추가 수사를 통해 닛타 토루(新田亨), 니이무라 다다오(新村忠雄), 후루카와 리키사쿠(古川力作),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및 그의 전 사실혼 배우자 칸노 스가코(菅野須磨)를 체포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일본 천황제에 대한 전국적인 음모로 간주했다.
3. 사건 발생 및 전개
전국적으로 많은 좌익 인사와 혐의자들이 조사받았고, 25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이 형법 제73조(천황 또는 황족에 대한 해악 또는 해악을 가할 의도)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불교 승려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2]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검사는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였다.
피고인에 대한 증거는 주로 정황 증거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26명 중 24명이 1911년 1월 18일 교수형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2명은 폭발물 규정 위반으로 각각 8년과 11년을 선고받았다. 사형 선고 중 12명은 다음 날 황실칙령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11년 1월 24일, 12명 중 11명이 처형되었는데, 여기에는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1] 의사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체포된 불교 승려 중 유일하게 처형된 우치야마 구도(内山孤島)가 포함되었다. 유일한 여성 피고인 칸노 스가코(菅野須磨子)는 다음 날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당국이 반체제 인사들을 색출하기 위한 구실로 크게 이용되었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실제로 천황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은 5~6명에 불과했다.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는 초기 단계 이후로는 음모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검찰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고토쿠 사건은 1908년 붉은 깃발 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대역죄 사건 수사 과정에서 이미 투옥된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이 연루 여부에 대해 조사받았다. 이미 감옥에 있던 것이 추가 기소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 붉은 깃발 사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던 칸노 스가코(菅野須磨子)는 대역죄 사건 재판에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3. 1. 미야시타 타키치와 아키나 사건
1910년(메이지 43년) 5월 25일, 나가노현의 기계공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미야시타 타키치(宮下太吉)가 폭발물 단속 처벌 조례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미야시타는 나가노현 히가시치쿠마군(東筑摩郡) 나카가와테무라(中川手村) 아키나(明科)(현: 나가노현 아즈미노시 아키나 나카가와테)에 있는 아키나 제재소에서 폭탄을 제조하고, 1909년(메이지 42년) 11월 3일에 폭파 실험을 했다.[5]
경찰은 1910년 5월 20일, 미야시타 타키치의 방을 수색하여 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들을 발견했다. 이후 추가 수사를 통해 닛타 토루(新田亨), 니이무라 다다오(新村忠雄), 후루카와 리키사쿠(古川力作)도 체포했다.
3. 2. 관련자 체포 및 수사
1910년 5월 20일, 나가노현의 제재소 직원 미야시타 타키치(宮下瀧治)의 방에서 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들이 발견되면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경찰은 닛타 토루(新田亨), 니이무라 다다오(新村忠雄), 후루카와 리키사쿠(古川力作),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및 그의 전 사실혼 배우자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인 칸노 스가코(菅野須磨)를 체포했다.[2] 검찰은 이 사건을 일본 천황제에 대한 전국적인 음모로 간주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많은 좌익 인사와 혐의자들이 조사를 받았다. 25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이 형법 제73조(천황 또는 황족에 대한 해악 또는 해악을 가할 의도)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체포된 사람 중 4명은 불교 승려였다.[2]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검사는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였다.
피고인들에 대한 증거는 주로 정황 증거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26명의 피고인 중 24명은 1911년 1월 18일 교수형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2명은 폭발물 규정 위반으로 각각 8년과 11년을 선고받았다.[2]
4. 재판 및 처벌
1910년 5월, 경찰은 나가노현의 한 제재소 직원 미야시타 타키치(宮下瀧治)의 방을 수색하여 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들을 발견했다. 이후 닛타 토루(新田亨), 니이무라 다다오(新村忠雄), 후루카와 리키사쿠(古川力作),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칸노 스가코(菅野須磨) 등이 체포되었고, 검찰은 이를 일본 천황제에 대한 전국적인 음모로 간주했다.[2]
이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좌익 인사들이 조사를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26명이 기소되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4명의 불교 승려도 포함되어 있었다.[2]
이 사건은 당국이 반체제 인사들을 색출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천황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은 5~6명에 불과했으며, 고토쿠 슈스이는 초기 단계 이후로는 음모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검찰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4. 1. 재판 과정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검사는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가 맡았다.[2]증거는 주로 정황 증거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1년 1월 18일, 26명의 피고인 중 24명이 교수형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2명은 폭발물 규정 위반으로 각각 8년과 1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2]
사형 선고를 받은 24명 중 12명은 다음 날 황실 칙령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나머지 12명 중 11명은 1911년 1월 24일에 처형되었다. 여기에는 저명한 일본 아나키스트인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1] 의사인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그리고 체포된 불교 승려 중 유일하게 처형된 우치야마 구도(内山孤島)가 포함되었다. 유일한 여성 피고인이었던 칸노 스가코(菅野須磨子)는 다음 날 처형되었다.[2]
후세 가나지(布施柑治)에 따르면, 고토쿠 슈스이는 심리 종반에 "단 한 명의 증인 심문조차 하지 않고 판결을 내리려는 암흑적인 공판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진술했다.[7]
4. 2. 사형 선고 및 집행
1911년 1월 18일, 피고인 26명 중 24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2명은 폭발물 규정 위반으로 각각 징역 8년과 11년형을 선고받았다.[2] 다음 날, 사형수 중 12명은 황실 칙령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6]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1]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우치야마 구도(内山孤島) 등 11명은 1911년 1월 24일에 처형되었다.[1] 유일한 여성 피고인이었던 칸노 스가코(菅野須磨子)는 다음 날인 1월 25일에 처형되었다.[6]
사형 집행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6]
이름 | 처형 날짜 |
---|---|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 1911년 1월 24일 |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 1911년 1월 24일 |
우치야마 구도(内山孤島) | 1911년 1월 24일 |
미야시타 타키치(宮下瀧治) | 1911년 1월 24일 |
니이무라 다다오(新村忠雄) | 1911년 1월 24일 |
후루카와 리키사쿠(古川力作) | 1911년 1월 24일 |
모리치카 운페이(森近運平) | 1911년 1월 24일 |
오쿠미야 켄지(奥宮健之) | 1911년 1월 24일 |
나리아이시 헤이시로(成石平四郎) | 1911년 1월 24일 |
마츠오 우이타(松尾卯一太) | 1911년 1월 24일 |
신미 우이치로(新美卯一郎) | 1911년 1월 24일 |
칸노 스가코(菅野須磨子) | 1911년 1월 25일 |
고토쿠 슈스이는 심리 막바지에 "증인 심문조차 없이 판결을 내리는 암흑 공판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진술했다.[7]
4. 3. 붉은 깃발 사건과의 연관성
1908년 붉은 깃발 사건은 고토쿠 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고토쿠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붉은 깃발 사건으로 이미 투옥된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도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등 아나키스트들이 연루 여부에 대해 조사받았다. 이들은 이미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추가 기소를 피할 수 있었다.[3] 붉은 깃발 사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던 칸노 스가코는 고토쿠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5. 사건의 여파 및 영향
고토쿠 사건은 메이지 시대 후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쳐,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등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상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치안유지법 제정의 한 요인이 되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심 청구가 제기되었으나, 1967년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4]
5. 1. 일본 사회의 변화와 사상 탄압 강화
대역 사건은 메이지 시대 후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어,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이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상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치안유지법 제정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4]1910년 11월 22일, 미국의 무정부주의자 에마 골드만 등은 이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를 뉴욕에서 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이 항의 운동을 벌였다.[8][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판 기록 등 자세한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당시 일본 정부가 비판적인 인물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0]
이후, 천황 암살 계획에 실제로 가담한 사람은 미야시타 다키치, 간노 스가, 니이무라 다다오,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1960년대부터 “대역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을 중심으로 재심 청구 운동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일본 최고재판소는 1967년에 “전전의 특수한 사례이며, 현재의 법제도에 비추어 볼 수 없다. 대역죄가 이미 폐지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려 재심 청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5. 2. 치안유지법 제정
대역사건은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상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메이지 시대 후기의 지적 환경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치안유지법 제정의 요인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4]5. 3. 재심 청구와 기각
제2차 세계 대전 후 재심 청구가 제출되었지만, 1967년 대법원에서 기각되었다.[4] 1960년대부터 “대역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을 중심으로 재심 청구 운동이 추진되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967년(쇼와 42년)에 “전전의 특수한 사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며, 현재의 법제도에 비추어 볼 수 없다. 대역죄가 이미 폐지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려 재심 청구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였다.[10]6. 사건에 대한 평가 및 논란
고토쿠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판 기록 등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일본 제국 정부가 비판적인 인물들을 허위 혐의로 탄압한 사건이라는 시각이 제기되기 시작했다.[10] 1960년대부터 “대역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을 중심으로 재심 청구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1967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전전의 특수한 사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며, 현재의 법제도에 비추어 볼 수 없다. 대역죄가 이미 폐지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려 재심 청구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였다.
이 사건에 대해 에마 골드만 등 미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뉴욕에서 항의 집회를 여는 등 국제적인 항의 운동이 전개되었다.[8][9]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이 현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항의 운동을 벌였다.[8][9]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천황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미야시타 다키치, 간노 스가코, 니이무라 다다오,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뿐이었다.
6. 1.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
고토쿠 사건 판결 2개월 전인 1910년 11월 22일, 미국의 무정부주의자 에마 골드만 등이 이 사건에 대해 뉴욕에서 집회를 여는 등 항의 운동을 전개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이 현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항의 운동을 벌였다.[8][9]재판 기록 등 상세한 관련 자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공개되었고, 당시 일본 제국 정부가 허위 혐의로 비판적인 인물들을 탄압한 冤罪 사건이라는 시각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인 우쓰노미야 겐지 명의의 담화가 발표되었다.[10]
이후 천황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미야시타, 가나오, 신무라, 후카와 4명뿐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1960년대부터 “대역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을 중심으로 재심 청구 등의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는 1967년에 “전전의 특수한 사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며, 현재의 법제도에 비추어 볼 수 없다. 대역죄가 이미 폐지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려 재심 청구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였다. 다만, 형사보상법에서는 면소라도 무죄로 추정될 때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6. 2. 역사적 평가 및 논란
고토쿠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판 기록 등 상세한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당시 일본 제국 정부가 허위 혐의로 비판적인 인물들을 탄압한 사건이라는 시각이 제기되기 시작했다.[10] 1960년대부터 “대역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을 중심으로 재심 청구 등의 운동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일본 최고재판소는 1967년에 “전전의 특수한 사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며, 현재의 법제도에 비추어 볼 수 없다. 대역죄가 이미 폐지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려 재심 청구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였다. 다만, 형사보상법에서는 면소라도 무죄로 추정될 때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이 사건에 대해 미국 무정부주의자 에마 골드만 등이 뉴욕에서 항의 집회를 여는 등 국제적인 항의 운동이 전개되었다.[8][9]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이 현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항의 운동을 벌였다.[8][9]
이후, 천황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미야시타 다키치, 간노 스가코, 니이무라 다다오,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뿐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7. 관련 인물
(내용 없음)
7. 0. 1. 기타 관련 인물
(내용 없음)8. 관련 연표
연도 | 사건 |
---|---|
1908년 | |
1909년 | |
1910년 | |
1911년 | |
1913년 | |
1914년 | |
1915년 | |
1916년 | |
191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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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 |
1931년 | |
1932년 | |
1934년 | |
1937년 | |
1945년 | |
1948년 | |
1953년 | |
1955년 | |
1960년 | |
1961년 | |
1967년 | |
1975년 | |
1996년 | |
2001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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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itain & Japan: Biographical Portraits
Japan Society Publications
[2]
서적
Zen at War
Weatherhill, Inc.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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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acherous Women of Imperial Japan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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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members2.jcom[...]
2011-08-23
[5]
웹사이트
Yahoo!百科事典 大逆事件
https://archive.is/f[...]
2017-02-02
[6]
간행물
官報
https://dl.ndl.go.jp[...]
1911-01-26
[7]
서적 # Harvnb 템플릿은 일반적으로 서적을 가리킵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합니다.
[8]
서적 # Harvnb 템플릿은 일반적으로 서적을 가리킵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합니다.
[9]
서적 # Harvnb 템플릿은 일반적으로 서적을 가리킵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합니다.
[10]
웹사이트
大逆事件死刑執行100年の慰霊祭に当たっての会長談話
https://www.nichiben[...]
日本弁護士連合会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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