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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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13세는 965년부터 972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로마 귀족 출신으로 교황 요한 12세와 레오 8세 밑에서 일했으며, 965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로마 귀족들의 반란으로 체포되어 캄파니아로 유배되었다. 이후 오토 1세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로마의 안정을 찾고,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겪었다. 그는 유럽 전역의 교계 조직 발전에 기여했으며, 폴란드, 보헤미아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고, 잉글랜드, 독일 등과 관계를 맺었다. 972년 사망했으며, 선한 목자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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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로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마로치아는 투스쿨룸 백작의 딸로서 교황과의 관계 및 혼인, 아들의 교황 옹립 등을 통해 로마 정계를 장악했으며, 그녀의 통치는 교황직 암흑기로도 여겨지지만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로마를 통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황 요한 1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직함 | 교황 |
이름 | 요한 13세 |
본명 | 조반니 데이 크레셴치 |
출생지 | 교황령, 로마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
재임 정보 | |
즉위 시작 | 965년 10월 1일 |
즉위 종료 | 972년 9월 6일 |
선임자 | 레오 8세 |
후임자 | 베네딕토 6세 |
서임 | 962년 |
추기경 임명 | 964년 |
추기경 임명자 | 베네딕토 5세 |
이전 직책 |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의 추기경 사제 (944년–965년) |
개인 정보 | |
출생 | 910년경 |
사망 | 972년 9월 6일 (42세) |
소속 교단 | 가톨릭교회 |
로마자 표기 | |
라틴어 | Ioannes XIII |
2. 가문과 생애 초기
요한 13세는 930년경 로마에서 주교 조반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는 로마 귀족으로서,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 가문과 혼인한 크레센티 가문의 일원이라고 전해진다.[42]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 13세의 아버지는 주교로 서임되기 전에 공작이었으며, 어쩌면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을 수도 있다.[42] 요한 13세는 대크레센티우스와 형제지간이었으며, 사비나의 베네딕투스 백작과 혼인한 팔레스티나의 스테파니아 및 투스쿨룸 백작 그레고리오 1세와 혼인한 마로치아와 남매지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3]
레오 8세가 선종하자 로마 귀족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교황 베네딕토 5세의 복위를 요청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5세의 복위가 불가능해지자, 오토 1세의 특사인 슈파이어의 오트거 주교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 주교는 요한 크레센티우스 주교를 후임 교황으로 추천하였다.[46] 결국 요한은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레오 8세가 사망한 지 5개월 만인 965년 10월 1일 주일에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요한 13세는 오토 1세와 협력하여 교회 재건에 힘썼다. 967년 초 로마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그라도를 베네토 전 지역을 관할하는 총대주교좌 및 관구로 지정했다. 같은 해 라벤나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는 오토 1세가 라벤나를 포함한 이전 교황들에게서 몰수했던 영토를 요한 13세에게 반환했다.[55] 또한 마그데부르크에 대교구를 신설하는 것을 승인했다.[56]
요한 13세는 유럽 전역의 교회 조직 발전에 기여하였다. 968년, 그는 요르단을 폴란드의 첫 주교로 임명하였다.[64][28] 973년에는 보헤미아 공작 볼라슬라우스 2세의 누이인 믈라다를 베네딕도회 수녀원장으로 임명하고, 교황 칙서를 내려 프라하 교구 설정을 승인하였다. 요한 13세는 이 칙서에서 성 비투스 성당을 프라하 교구의 대성당으로 정하고,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 수녀원을 세워 믈라다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비잔티움 전례가 아닌 라틴 전례를 따르고, 라틴어를 잘 아는 사람을 초대 주교로 서임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64][29]
요한 13세는 선종한 후 한 연대기 작가에게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받았으며,[72] 당대에 성경과 교회법에 대한 높은 학식에 버금갈 정도로 깊은 덕망과 신앙심을 가진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73] 어린 시절부터 흰닭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순백으로 빛나는 그의 머리카락 색깔 때문이다.[5]
[1]
간행물
Pope John XIII
라테라노 궁전에서 자란 그는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수문품, 독서직, 구마품, 시종직 등을 거쳐 차부제품과 부제품을 받았다.[44] 성가대를 떠난 뒤에는 교회 행정에 참여하면서 교황 요한 12세와 교황 레오 8세 밑에서 교황 공문서를 보관하는 업무를 맡았다. 961년에는 교황 도서관장으로 봉직했다.[45]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나르니의 주교로 서임된 그는 963년 로마 시노드 뿐만 아니라 그가 복위한 964년 로마 시노드에도 참석했다.[45]
3. 교황 선출과 로마 귀족들의 반란
요한 13세는 즉위 직후 로마 귀족들의 권력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크레센티 가문 사람들을 요직에 앉혀 자신을 보필하게 하였고, 오토 1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47] 그러나 오토 1세가 독일로 돌아간 후, 왕이 없는 틈을 타 여러 세력들이 요한 13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로마 귀족들은 황제가 교황 선출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이를 저지하려는 교황의 행동에 불만을 품어 965년 12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교황을 체포하여 캄파니아로 끌고 갔다. 로마 귀족들은 외세의 비호 아래 즉위한 요한 13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전(前) 왕이었던 아달베르토가 롬바르디아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로마 시장 페트루스의 주도 하에 캄파냐 백작 로프레드와 로마 시 재무담당관 스테파누스는 “색슨족 왕들이 로마인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가려고 한다”고 다른 귀족들을 선동하였다.[48]
965년 12월 16일, 로마 민병대 지휘관들은 요한 13세를 체포하여 산탄젤로 성에 가두었다. 그러나 요한 13세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교황은 다시 캄파니아에 있는 로프레드의 성으로 옮겨졌다.[49]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오토 1세는 966년 늦여름에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그동안 요한 13세는 캄파니아에서 탈출하여 카푸아로 가서 판둘프 아로헤트 공작에게 의탁했다.[50] 요한 13세는 자신을 도와준 판둘프에게 감사하며 카푸아 교구를 관구로 승격시키고, 판둘프의 동생을 카푸아 관구의 첫 관구장 주교로 서임하였다. 한편, 로마에서는 요한 13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봉기하여 로프레드와 스테파누스는 요한 13세의 조카인 요한 크레센티우스에게 살해되었다. 요한 13세는 카푸아를 떠나 사비나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자신의 처남인 베네딕투스를 만나 지지를 받았다. 로마가 다시 안정을 되찾자 요한 13세는 966년 11월 14일 로마로 귀환하여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51]
요한 13세는 처음에는 반역자들에게 관대했지만, 오토 1세가 로마에 도착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오토 1세는 요한 13세의 요청에 따라 집정관 두 명을 독일로 유배 보내고, 12명의 민병대 지휘관을 교수형에 처했다. 다른 반역 가담자들도 처형되거나 안구를 적출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로마 시장 페트루스는 요한 13세에게 끌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에 머리카락이 묶인 채 매달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후 머리카락이 끊어져 떨어진 그는 발가벗겨진 채 당나귀 위에 거꾸로 태워졌다. 그의 머리와 허벅지 양쪽에는 깃털 한 가닥이 붙여졌고, 목에는 종이 달린 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페트루스는 이후 지하 감옥에 갇혔다가 오토 1세에 의해 독일로 유배되었다.[52][53] 요한 13세는 황제의 개입에 감사하며 그를 교회의 해방자이자 재건자요 귀한 내빈으로 칭송하며 세 번씩이나 강복해 주었다.[54]
4. 동로마 제국과의 대립
967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는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57] 오토 1세가 동로마 제국과의 혼인 동맹을 추진하자, 요한 13세는 이를 지지하며 동로마 황제 니케포루스 2세에게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를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그리스인들의 황제"라고 칭하여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59] 오토 1세는 니케포루스 2세에게 롱고바르디아와 칼라브리아를 지참금으로 요구했고, 니케포루스 2세는 라벤나 총독부 복원을 요구하며 맞섰다.[60] 협상이 결렬되자 니케포루스 2세는 요한 13세에게 협박성 편지를 보냈다.[61]
니케포루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재치권을 이탈리아 남부까지 확장하려 했다. 오틀란토 주교좌를 관구좌로 승격시키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 전례만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욱투스는 오틀란토 주교에게 여러 주교 서임 권한을 부여했다.[62] 이에 요한 13세는 969년 시노드를 소집, 베네벤툼 교구를 관구로 승격시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62]
969년 니케포루스 2세가 사망하고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요한네스 1세는 오토 1세와 대화를 재개했고, 결국 오토 2세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 테오파누의 혼인이 972년 4월 14일 로마에서 요한 13세의 주례로 거행되었다.[63]
5. 기타 국가와의 관계
971년, 요한 13세는 아내와 첩을 포기하지 않은 윈체스터 대성당의 의전사제들과 대립한 잉글랜드 왕 평화로운 에드거와 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턴의 행동을 지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65][30] 같은 해, 그는 에드거 왕이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 부여한 특권을 인가하고, 수도원을 교황의 보호 아래 둔다고 선언했다.[66][31] 나아가 요한 13세는 앨더먼 앨프릭에게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서 금전을 받지 말라고 지시하는 서신을 보냈다.[67][32]
독일의 경우, 요한 13세는 트리어 대주교를 교황 대리로 임명하여 독일 및 서 프랑크 왕국 지역 시노드에서 결의된 교령을 실행하도록 했다.[33] 그는 또한 유럽 전역에 많은 특혜를 베풀었는데, 970년 9월 29일 메츠의 성 빈첸시오 수도원에 준 특혜가 대표적이다. 요한 13세는 수도원장에게 특별히 달마티카와 주교용 전례복 및 신발을 착용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요한 13세는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노발리사의 성 베드로 수도원 수사들이 지역 백작인 아르도인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허락한 것이 한 예이다.[68][34] 또 다른 예로, 971년 11월 랭스 대주교 아달베론이 요한 13세에게 무종 수도원 수사들에게 재산 일부를 물려주려는 결정을 인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 덕분에 아달베론은 프랑스 왕 루이 4세로부터 수사들에게 재산을 안전하게 기증할 수 있었다.[69][35]
970년, 요한 13세는 자신의 누이 세나트릭스 스테파니아에게 팔레스트리나를 연간 금화 10 솔리두스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해 그녀의 손주들까지 세습할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나중에 교회로 반납되었다. 이는 로마인의 영토 중 봉건제가 도입된 첫 번째 사례이다.[70][36]
6. 죽음과 평가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선종한 착한 목자인 교황 요한의 유해가 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성 바오로의 공덕으로 죽음의 속박에서 풀려난 그는 하늘나라로 올라가 그곳에 있는 성인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이 비문을 경건하게 읽는 그대는 당신의 성혈로 이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종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도록 기도할 지어다.”[74]
요한 13세는 972년 9월 6일에 사망했으며, 성 바오로 대성전에 묻혔다.[37] 그의 뒤를 이어 베네딕토 6세가 즉위했다. 교회의 종을 축복하는 고대 관습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이 그의 재위 기간에 나타났다.[38]
요한 13세의 재위 기간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메츠의 디트리히 1세에 따르면, 황제 오토 1세의 궁정에 소속된 귀족 중 한 명이 악령에 사로잡혀 자신의 얼굴을 찢고 손과 팔을 물어뜯었다. 황제는 그 귀족을 교황 요한 13세에게 데려가 성 베드로의 족쇄를 그에게 씌워 그를 치유하도록 지시했다. 전설에 따르면, 요한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여러 개의 복사된 족쇄를 씌웠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요한이 성 베드로의 진짜 족쇄를 그에게 씌우자, 짙은 연기가 그 귀족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비명이 허공에서 들렸으며, 악령이 그 귀족을 떠났다.[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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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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