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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발갱이들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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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미발갱이들소리는 구미시 지산동 발갱이들에서 전해지는 논매기소리이다. 왕건과 신검의 전투 설화가 얽힌 발갱이들은 견훤과 왕건의 대립, 신검의 왕위 찬탈, 왕건의 승리 등의 역사를 담고 있다. 1982년 구미문화원에 의해 조명받았으며, 신세타령, 영남아리랑 등 13마당으로 구성된다. 백남진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나 사망하였고, 이수원은 건강 문제로 보유자 인정을 해제되었다. 구미시는 전수관을 개관하여 발갱이들소리 보존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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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발갱이들소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구미발갱이들소리
로마자 표기Gumibalgengaedeulsori
한자 표기龜尾발갱이들소리
발갱이들을 소개하는 비석
발갱이들을 소개하는 비석
종류경상북도의 무형문화재
지정 번호27
지정일1999년 4월 15일
주소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지산25길 20 (문성리)
전승 정보
전승자백남진

2. 역사적 배경 및 유래

발갱이들은 구미시 지산동에 위치한 넓은 들판으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신검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1] 전설에 따르면, 왕건이 이곳에서 신검을 사로잡았다고 하여 '발검평야'(拔劍平野)라 불렸고, 이 이름이 '발검들', '발갱이들'로 변했다고 한다.[1]

'구미발갱이들소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발갱이들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논매기소리이다. 1982년, 고 김택규 전 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지역 사학자들과 구미문화원의 노력으로 조사 및 채록되어 새롭게 조명받았다. 발갱이들소리는 신세타령(어사용)부터 가래질소리, 망깨소리와 목도소리,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 타작소리, 치나칭칭나네 등 농경 과정의 소리와 베틀소리, 구미 지방 토속 상여소리, 달개소리, 영남아리랑 등 총 13개 마당으로 구성된다. 특히 발굴된 영남아리랑은 민요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2]

2. 1. 왕건과 신검의 전투

견훤이 왕건에게 패배하자, 그의 아들 신검은 왕위를 빼앗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다. 이에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왕건에게 의탁했다. 왕건은 태자 무와 함께 군사 10만 및 삼군을 이끌고 발갱이들에서 신검과 전투를 벌였다. 결국 왕건은 신검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신검과 그의 군사들은 다시 진을 정비하여 싸웠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발갱이들 지역은 왕건이 신검을 사로잡은 곳이라 하여 발검평야(拔劍平野)라고 불렸고, 이것이 '발검들' 또는 '발갱이들'로 변했다고 한다.[1]

2. 2. 발검평야 전설

발갱이들은 구미시 지산동에 있는 넓은 들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신검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1] 후백제견훤고려 왕건에게 패배하자, 그의 아들 신검은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금산사에 가두었다.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왕건에게 귀순하였다.[1] 이에 왕건은 태자 무와 10만 군사, 그리고 삼군(三軍)을 이끌고 발갱이들에서 신검과 큰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승리하였고, 패배한 신검과 그의 군대는 다시 진을 정비하여 맞섰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결국 항복하였다고 한다.[1] 이때 왕건이 신검을 사로잡은 곳이라 하여 이 지역을 '발검평야'(拔劍平野)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발검들', '발갱이들'로 변했다고 전해진다.[1]

3. 발갱이들소리

발갱이들은 구미시 지산동에 있는 넓은 들 지역으로, 왕건과 신검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후백제견훤이 왕건에게 패배하자 그의 아들 신검이 왕위를 빼앗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다.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왕건에게 귀순했고, 왕건은 태자 무와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발갱이들에서 신검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은 신검을 사로잡았다고 하여 이곳을 발검평야(拔劍平野)라 불렀고, 이것이 '발검들', '발갱이들'로 변했다고 전해진다.[1]

발갱이들소리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지산동 및 발갱이들 지역에서 전승되는 논매기소리로, 1982년 고 김택규 전 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과 구미문화원의 조사를 통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2] 이 소리는 여러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발굴된 민요도 포함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2]

3. 1. 발갱이들소리의 구성

구미시 지산동 및 발갱이들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논매기소리이다.[2] 1982년, 고 김택규 전 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구미 지역의 전통문화 연구자들과 구미문화원이 함께 조사하고 기록하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2] 발갱이들소리는 모두 13개의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2]

마당 순서명칭
1신세타령(어사용)
2가래질소리
3망깨소리
4목도소리
5모찌기소리
6모심기소리
7논매기소리
8타작소리
9치나칭칭나네
10베틀소리
11구미지방토속 상여소리
12달개소리
13영남아리랑



이 중 마지막 순서인 영남아리랑은 발굴된 민요로서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2]

3. 2. 영남아리랑 발굴

1982년, 고 김택규 전 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구미 지역의 전통 문화 연구자들과 구미문화원이 구미시 지산동 및 발갱이들 지역의 논매기소리인 발갱이들소리를 조사하고 채록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조명되었다. 발갱이들소리는 총 13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함께 발굴된 민요인 영남아리랑은 특히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2]

4. 발갱이들소리 보존 노력

구미발갱이들소리의 보존을 위해 기능보유자 지정 등 노력이 있었다. '''백남진'''(1924년~2015년)이 1999년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3] 2015년 사망으로 해제되었고,[5] '''이수원'''(1937년~) 역시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2018년 해제되었다.[6] 보존회 활동 과정에서 회원들의 고령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구미시는 2010년 3월 구미발갱이들소리 전수관을 개관하였다.[4]

4. 1. 발굴 및 채록

구미시 지산동 및 발갱이들 지역에서 전해지는 논매기소리인 발갱이들소리는 1982년, 고 김택규 전 영남대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구미 지역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학자들과 구미문화원이 조사하고 채록하면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2] 발갱이들소리는 신세타령(어사용)을 시작으로 가래질소리, 망깨소리와 목도소리,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 타작소리, 치나칭칭나네, 베틀소리, 구미지방 토속 상여소리, 달개소리, 영남아리랑 등 총 13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영남아리랑은 새롭게 발굴된 민요로서 학계의 큰 관심을 받았다.[2]

4. 2. 발갱이들소리 보존회

'''백남진'''(1924년~2015년)은 1999년에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3] 그는 1991년 6월부터 구미시 지산동, 괴평리, 문성리 등지에서 발갱이들 소리보존회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보존회는 발갱이들 유래비문을 세우고, 발갱이들소리 재현 공연을 여는 등 보존 활동에 힘썼다. 특히 2004년부터는 매년 모내기철마다 샛강 생태 자연습지 근처에서 발갱이들소리 재현공연을 열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발갱이들소리 보존회 회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구미시는 2010년 3월 구미발갱이들소리 전수관을 개관하여 보존 노력을 지원하고 있다.[4] 백남진은 2015년 5월 21일 사망하여 명예보유자에서 해제되었다.[5]

한편, '''이수원'''(1937년~)은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보존회 행사 및 전수교육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승보존활동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2018년 2월 2일자로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이 해제되었다.[6]

4. 3. 구미발갱이들소리 전수관

발갱이들소리 보존회 회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 보존에 어려움이 있었다.[4] 이에 따라 구미시는 구미발갱이들소리 전수관을 2010년 3월에 개관하여 발갱이들소리 보존에 힘쓰고 있다.[4]

5. 보유자

구미발갱이들소리의 주요 기능보유자로는 백남진과 이수원이 있었다. 백남진은 1999년에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나 2015년에 명예보유자에서 해제되었고[3][5], 이수원은 2018년에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이 해제되었다.[6]

5. 1. 백남진

'''백남진'''(1924년~2015년)은 1999년에 구미발갱이들소리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3] 그는 1991년 6월부터 구미시 지산동, 괴평리, 문성리 등지에서 발갱이들 소리보존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발갱이들 유래비문을 세우고 발갱이들소리 재현 공연을 여는 등 소리 보존에 힘썼다. 특히 2004년부터는 매년 모내기철마다 샛강 생태 자연습지 근처에서 발갱이들소리 재현 공연을 열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발갱이들소리 소리보존회 회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 소리 보존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미시는 2010년 3월 구미발갱이들소리 전수관을 개관하여 소리 보존을 지원하고 있다.[4] 백남진은 2015년 5월 21일 사망하였으며, 이에 따라 명예보유자에서 해제되었다.[5]

5. 2. 이수원

'''이수원'''(1937년~)은 병환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여, 보존회 행사나 전수교육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승 보존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도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2018년 2월 2일자로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이 해제되었다.[6]

참조

[1] 디지털구미문화대전 디지털구미문화대전 중 '발갱이들' 항목 http://gumi.grandcul[...]
[2] 웹인용 발갱이들소리 유래 https://web.archive.[...] 2012-01-20
[3] 웹사이트 발갱이들소리 보유자 http://www.gumi.go.k[...]
[4] 뉴스 발갱이들소리 전수관 개관 http://www.kyongbuk.[...] 경북일보 2010-03-26
[5] 간행물 경상북도 고시 제2015-186호 http://www.gb.go.kr/[...] 2015-06-01
[6] 간행물 경상북도 고시 제2015-53호 http://www.gb.go.kr/[...]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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