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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빌리크 메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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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빌리크 메르겐은 바르수볼라드 칸의 장남으로, 1532년 오르도스부 지농 직을 계승하여 몽골 우익을 이끌었다. 그는 동생 알탄 칸과 함께 명나라를 침략하고 칭하이를 복속시키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쳤으나, 만년에는 방종한 생활로 인해 권력을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1542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노얀다라가 지농직을 이었다.

2. 생애

1531년 아버지 발스 보라트 사인 아라크 진왕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듬해(1532년) 27세의 나이로 진왕(지논)의 자리를 계승하여 오르도스 투멘을 영유했다.[3] 동생 알탄과 함께 우익 투멘을 이끌고 매년 중국의 명나라, 오이라트, 모굴리스탄, 칭하이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2]

명나라에 교역을 요청했으나, 명 세종(가정제)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보디 알락 칸, 동생 알탄 칸과 함께 명나라의 변경을 침입, 여러 번 양선부(掠宣府, 현 허베이 성 쉬안화 현), 다퉁(大同), 량주(涼州, 현 간수 성 란저우 시) 등을 약탈하고 위협하였다.

1542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이듬해(1543년) 아들 노얀다라가 뒤를 이어 진왕이 되었다.[3]

2. 1. 생애 초기

군빌리크 메르겐은 바르수볼라드 칸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체그토부의 호소이 타브넌의 딸 보단 카툰(Бодин Хэтон)이다. 일설에는 바르수볼라드 칸이 소년 시절 몽골진부에 있을 때 얻은 여성이 그의 어머니라는 설이 있다.[2]

처음 이름은 구멜리(Гүмэли)였다가 군빌리크로 개명했다. 군빌리크는 '깊다'라는 의미의 '군'과 재능, 예능, 현명함을 뜻하는 '빌리크'의 조합어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깊은 현명함'이라는 뜻이 된다. 별칭은 메르겐 카르 지농(Мэргэн хар жонон)으로 '현명한 검은 진왕'이라는 뜻이다.[2]

1506년 아버지 발스 보라트 사인 아라크 진왕에게서 태어났다.[3] 1519년 오르도스(襖兒都司)의 만호가 되어 이커자오 맹(伊克昭盟, ᠶᠡᠬᠡ ᠵᠣᠣ ᠶ᠋ᠢᠨ ᠴᠢᠭᠤᠯᠭᠠᠨ, Их Зуугийн чуулган)에 파견, 유목생활을 하며 황하 하수화기(何濤和其) 이서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몽고 우익 3만호의 장으로, 좌익을 맡은 보디 알락 칸이 통제할 수 없었다. 1524년 북쪽에 있던 우량카이 원정, 1538년 4차 우량카이 원정을 끝으로 우량카이를 완전히 정복했다.[2]

그의 아버지 바르수볼라드 칸1519년 할아버지 다얀 카안이 죽자 사촌 보디 알라그가 나이어린 점을 들어 대신 카안이 되었으나, 보디 알라그는 이에 반발, 1522년 다른 삼촌 아르수볼라트와 친족들의 도움을 얻어 정변을 일으켜 대칸이 되었다. 보디 알락 칸은 축출된 삼촌 바르수볼라드 칸을 회유하고자, 바르수볼라드의 아들들에게 칸의 직함을 하사했다.[2]

1531년 아버지 발스 보라트 사인 아라크 진왕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듬해(1532년) 27세의 나이로 진왕(지논)의 자리를 계승하여 오르도스 투멘을 영유했다.[3]

2. 2. 오르도스의 만호, 우익 지농

1519년 오르도스(襖兒都司)의 만호가 되어 이커자오 맹(ᠶᠡᠬᠡ ᠵᠣᠣ ᠶ᠋ᠢᠨ ᠴᠢᠭᠤᠯᠭᠠᠨ|이흐 조긴 촐간mn)에 파견되어 유목생활을 하며 황하 하수화기(何濤和其) 이서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몽고 우익 3만호의 장으로, 좌익을 맡은 보디 알락 칸이 통제할 수 없었다. 1524년 북쪽에 있던 우량카이 원정, 1538년 4차 우량카이 원정을 끝으로 우량카이를 완전히 정복했다.

1531년 혹은 1533년 투메드부의 칸 자리와 오르도스부의 칸, 우익 지농직을 계승하였다.[2] 오르도스는 그의 직할지였다. 그는 오르도스 북부 평원지대인 하투(河套)와 그 서쪽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동생 알탄 칸, 바야스갈 쿠툴룬 등과 함께 몽골 동부 우익과 주변 여러 부족을 통할했고 대칸 보디 알락 칸이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오르도스, 투메드, 우량카이, 우이고드, 옹기라트부 등 우익 내부의 다얀 카안 반대자들이 있었고, 군빌리크는 동생 알탄 칸의 도움을 얻어 이들 내부 반대파를 제압해나갔다.

1531년 명나라 다퉁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배하고 몽골로 도망쳤다. 그러나 군빌리크는 이후로도 계속 선부(宣府, 허베이성 선화(宣化)), 다퉁, 량주(凉州, 현, 간쑤성) 원정을 추진했다. 군빌리크는 명나라에 말, 소 무역 및 교역, 중국산 화살, 칼 등 교역을 다퉁총독을 통해 명나라 조정에 요구했으나, 가정제로부터 거절당했다.

1532년 27세의 나이로 진왕(지논)의 자리를 계승하여 오르도스 투멘을 영유했다.[3]

군빌리크 메르겐 진왕은 동생 알탄과 함께 우익 투멘을 이끌고 매년 중국의 명나라, 오이라트, 모굴리스탄, 칭하이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2]

2. 3. 명나라와의 관계

1533년 다퉁명나라 수군이 폭동을 일으키자, 군빌리크 메르겐은 몽골군 병력을 보내 폭도들을 지원하였다. 반란이 실패한 후 반란군은 모두 몽골로 망명하였고, 군빌리크 메르겐은 이들을 받아들였다.[2]

군빌리크 메르겐은 명나라에 교역을 요청했으나, 명 세종(가정제)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보다 알락 칸, 동생 알탄 칸과 함께 명나라의 변경을 침입, 여러 번 양선부(掠宣府, 현 허베이 성 쉬안화 현), 다퉁(大同), 량주(涼州, 현 간수 성 란저우 시) 등을 약탈하고 위협하였다. 그의 별칭 메르겐은 명나라에 맥력간으로 잘못 알려져 맥력간 길낭(麥力艮吉囊), 기령(己寧)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직책은 지농, 진왕(晉王)이었으나, 다시 중국에 한자로 번역되면서 오번역되어 길낭, 기령으로 소개되었다. 그의 아들 노욘다리 지농 역시 직책인 지농을 명나라 사서에서는 길능(吉能)으로 소개한다.[2]

2. 4. 생애 후반

그는 만년에 방종하게 생활하고 군사를 돌보지 않아, 몽골 우익의 군권과 권력은 서서히 동생 알탄 칸에게 넘어갔다. 그는 주색을 과도하게 즐겨 사망했다. 1542년 9월에 사망했으며, 일설에는 1550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2] 그의 사후 명나라 공략 과업은 동생 알탄 칸이 이어받았다. 그의 영지 오르도스부는 아들 노욘다리 지농이, 투메드부는 동생 알탄 칸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오르도스부는 그의 아들 9명이 나눠 가지면서 세력이 약화되고, 결국 그의 동생이자 9형제의 삼촌인 투메드부 알탄 칸의 영향력 하에 들게 되었다. 명목상의 오르도스의 칸 직과 우익 3만호 지농 직은 아들 노욘다리 지농과 부얀 바토르(Буянбаатар)에게 이어졌으나 1572년, 1573년 연이어 사망한다. 우익 3만호 역시 알탄 칸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3]

3. 가족 관계

부인출신 부족자녀
탄스크 다하톤[1]투메트 투멘의 한린부 아이란 세게르의 딸
에시게 숙모 하톤[2]할하 투멘의 자라이르부 에센 샤렌의 딸
알탄추 사인 하톤[3]투메트 투멘의 체고트부 호사이 타분웅의 딸
아물자 하톤[4]용시예부부 이바라이(이브라힘) 태사의 딸


4. 평가 및 영향

그의 작위인 조농(지농)이 명나라에 길낭(吉囊)으로 번역되었다.[1] 명나라조선에서는 길낭을 그의 이름으로 오해한 문서와 서적들도 존재한다.[1]

참조

[1] 서적 蒙古源流 1550
[2] 서적 2004
[3] 서적 2004
[4] 서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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