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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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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량카이는 몽골어로 '전쟁 구호'와 '칸'을 의미하며, 몽골 제국 시대부터 다양한 시베리아 삼림 민족과 몽골 부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4세기에는 중국 북동부에 위치했으며, 명나라와의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이후 몽골 부족의 분열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다양한 지역과 민족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조선에서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지칭하는 '오랑캐'라는 단어로 변형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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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카이
개요
언어오이라트어, 몽골어
종교불교, 몽골 샤머니즘, 무종교
관련 민족몽골족, 특히 오이라트
인구 통계
몽골 (2010년 인구 조사)26,654명
명칭
몽골어Урианхай (Uriankhai, )
투바어Урааңкай (Urâñkay, )
알타이어Ураҥкай (Urañqay, )
사하어Урааҥхай (Urâñxay, )
중국어烏梁海 (Wūliánghǎi)
기타 표기}}


2. 명칭의 기원과 의미

"우량카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우리아"(motto, 전쟁 구호)와 칸(lord)을 의미한다. 몽골인들은 이 이름을 모든 삼림 민족에게 사용했고, 이후에는 투바인에게도 사용했다.[2] 몽골인들은 우량카이족을 다르긴 몽골로 분류했다.

명나라 때는 여진이 중국인들 보기에 만주의 숲속에 사는 "삼림민"들이었고, 그래서 이들도 우량카이와 같은 말인 "올량합"이라고 불렀다.[26] 한국어에서도 여진의 일파를 "올량합"이라고 일컫다가[29] 이 말이 변해 "오랑캐"가 되었는데, 주로 14세기 ~ 15세기에 중화문명에 포함된 세계를 공격하는 외부의 야만인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26]

조선에서 일컬은 우량카이 또는 올량합(兀良哈)은 두만강 유역에 살던 야인여진 부족인 왈카부(瓦爾喀部)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나중에는 건주여진의 후신인 청나라에서도 야인여진을 일컬어 우량카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30]

우량카이는 본래, 싱안링 주변 등 중국 동북부 북부에서 시베리아 남부 일대의 삼림 지대에 살았던 수렵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여겨진다. 퉁구스어로 "순록(oro)을 사육하는 민족"을 의미하는 oroči, oročin, orongqai 등의 호칭이 몽골어식으로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근연 호칭을 가진 민족으로는 오로첸족 등이 있다).

명칭이 지시하는 민족의 범위는 뚜렷한 경계 없이 모호하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몽골족의 시조 중 한 명인 알란 고아 시대부터 코리 토마토 등 몽골에 인접한 부족으로서 우량카이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투바인 Tuva〜Tuba>Tuma 및 투바 공화국을 탄누-우리앙하이 (한자 표기: 唐努烏梁海)라고 불렀다.

몽골 내의 투바인은 몽추고 우량카이라고 불린다(투바어로 ''Monchak''이라고 한다). 또한 몽골 내(바양울기 주 및 호브드 주)에 있는 다른 우량카이 집단은 알타이 이인 우량카이 (Altai Uriankhai|알타이 우량카이영어)라고 불린다. 이들은 분명히 오이라트를 가리킨다. 또한 야쿠트의 옛 칭호 중 하나는 ''우란카이''였다. 러시아의 파벨 네볼신은 1850년에 볼가강칼미크인의 ''우란쿠'' (Urankhu) 일족을 기록하고 있다.

3. 역사

"우량카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우리아"(전쟁 구호)와 칸을 의미한다. 몽골인들은 이 이름을 모든 삼림 민족에게 사용했고, 이후에는 투바인에게도 사용했다.

13세기 원나라 시대에 라시드 앗딘 하마다니는 삼림 우량카이를 자작나무 껍질 텐트에서 살며 스키를 타고 사냥하는 극도로 고립된 시베리아 삼림 민족으로 묘사했다. 이름이 유명한 몽골의 우량칸 씨족과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라시드는 그들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진술했다.[2]

14세기 중반, 우량카이족은 랴오양 중국 북동부에 살았다. 1375년, 랴오양의 몽골 지도자 나하추는 몽골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반도를 침략했다. 명나라는 군사 원정을 펼쳤고, 1388년 나하추는 항복했다.[3] 이후 북부 우량카이족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1538년 다얀 칸에게 정복당했고 대부분 북부 할하에게 병합되었다. 바트뭉크 다얀 칸은 우량카이 투멘을 해체했다.

두 번째 그룹의 우량카이(헨티 산맥의 우량카이)는 몽골 중부에 살았으며, 16세기 초에 알타이 산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4] 일부 그룹은 북원 시대(1368–1635) 동안 헨티 산맥에서 홉스골 주로 이주했다.[5]

17세기 초, 우량카이라는 용어는 기원에 관계없이 북서부에 흩어져 있는 모든 부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몽골어 용어가 되었다.[2] 1757년 청나라는 극북 변경을 일련의 우량카이 기로 조직했다. 여기에는 홉스골 누르 우량카이, 탄누 우량카이, 켐치크, 살착, 토주 (모두 투바인) 그리고 알타이인 등이 있었다.[2]

이 이름의 변형인 '''우라ŋ카이 사하'''는 야쿠트족의 옛 이름이었다.[6] 우량카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도 사용되었는데, 특히 14세기와 15세기에 시니트화된 세계에 대한 그들의 공격과 관련하여 '''오랑캐''' (오랑캐한국어, "야만인")라는 차용된 이름으로 불렸다.[5]

3. 1. 몽골 제국 시대

몽골 비사에 따르면, 몽골족의 시조 중 한 명인 알란 고아 시대부터 우량카이의 이름이 등장한다. 라시드 앗딘 하마다니는 집사에서 우량카이를 "수렵민 우량카이족"과 "유목민 우량카이족"으로 구분하여 설명했다.[2] "수렵민 우량카이족"은 자작나무 껍질 텐트에서 살며 스키를 타고 사냥하는 극도로 고립된 시베리아 삼림 민족이었다. "유목민 우량카이족"은 몽골화되어 초원 지역으로 진출한 집단으로, 젤메, 수부타이 등 몽골 제국의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다.

집사의 우량카이 부족지에서는 "수렵민 우량카이족"은 야크의 종류도 모르고, 방목지도 모르고 가죽으로 만든 덮개로 생활했지만, 우연히 자신들의 거주지에 길을 잃은 양을 발견하고, 그 양이나 소가 자라는 곳을 찾는 과정에서 삼림 지대에서 초원으로 진출했다는 "유목민 우량카이족"의 기원 설화를 전하고 있다. "숲의 우량카트"는 코리・토마토나 키르기스 등과도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3. 2. 북원 시대

1368년 원나라대도에서 쫓겨난 이후, "우량카이"라고 불리는 여러 집단이 나타났다.

  • '''우량카이 투멘''' : 헨티 산맥에 있는 칭기즈 칸의 묘역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다얀 칸이 이끄는 6개 투멘 중 하나로, 좌익의 3만 호를 이루었다.
  • '''울량합 삼위(兀良哈三衛)''' : 1389년 명나라에 항복한 집단으로, 타얀위(朶顔衛), 태녕위(泰寧衛), 복여위(福余衛)로 나뉘었다. 이 중 타얀위만이 우량카이인으로 구성되었다.
  • '''오랑카이(兀良哈)''' : 조선에서 두만강 근처의 야인여진 부족인 왈카부(瓦爾喀部)를 부르던 이름이다. 임진왜란가토 기요마사가 이들과 싸우기도 했다.


에센 타이시가 몽골을 통일했을 때, 우량카이부의 수장은 차부단(사부단)이었고, 그의 딸 알타갈진은 타이순 칸(토크토아 부하)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타이순 칸은 알타갈진을 친정으로 돌려보냈고, 이후 에센과의 싸움에서 져 차부단의 처소로 도망쳤다. 차부단은 딸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타이순 칸을 죽였다.[16] 알타갈진이 낳은 타이순 칸의 아들은 모란 칸이 되었다.

우량카이의 호토크트는 딸 시키르를 바얀 몽케 볼후 진왕에게 시집보냈고, 게렌센제 등을 낳은 다얀 칸의 부인 중 한 명도 우량카이부 출신이었다.[17] 이처럼 우량카이부는 칸의 부인을 배출하는 유력한 부족 중 하나였다.

다얀 칸은 분열된 몽골을 재통일하고, 여러 집단을 여섯 투멘(6만 호)으로 재편했다. 우량카이 투멘은 차하르, 할하와 함께 좌익의 3만 호를 이루어 우익의 오르도스부와 대치했다. 다얀 칸은 어머니와 부인이 우량카이부 출신이었고, 우량카이와 칸 사이에는 강한 연결이 있었다.

그러나 다얀 칸의 뒤를 이은 보디 알라크 칸은 우량카이와 연결이 약했고, 우량카이부의 입지는 변화했다. 결국 우량카이는 반란을 일으켰지만,[18] 보디 알라크 칸과 알탄 칸 등에 의해 진압되었다.

멸망한 우량카이의 백성은 남은 다섯 투멘으로 분할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투메트의 모민간부, 오르도스의 우라트부와 케우케트부는 우량카이 정복으로 늘어난 부족이라고 한다.[19] 우량카이의 옛 땅에는 게렌센제의 자손인 외할하 제후가 진출했고, 청나라가 성립될 무렵 북몽골의 대부분은 할하부의 영지가 되었다.[20]

1389년 아자슈리에 이끌려 명나라에 항복한 집단은 타얀위(朶顔衛), 태녕위(泰寧衛), 복여위(福余衛)의 세 위소(衛所)로 편성되었고, 명나라는 이들을 '''울량합 삼위(兀良哈三衛)'''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우량카이인으로 구성된 것은 타얀위뿐이었다. 타얀위 수장의 가계는 칭기즈 칸을 섬긴 사준사구(四駿四狗) 중 한 명인 울량카이부의 젤메를 시조로 하며, 몽골 제국 시대에 갈라진 우량카이부의 한 분파의 후예로 여겨진다. 타얀위는 세 위 중에서 유일하게 멸망하지 않고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내몽골 육맹 중 하나인 조소토맹에 속하는 하라친 기(哈拉チン旗)・투무드 좌기(トゥムド左旗)는 타얀위의 후신이다.

3. 3. 청나라 시대

1757년 청나라는 극북 변경을 일련의 우량카이 기로 조직했다. 여기에는 홉스골 누르 우량카이, 탄누 우량카이, 켐치크, 살착, 토주 (모두 투바인) 그리고 알타이인 등이 있었다.[2]

3. 4. 현대

야쿠트인의 옛 이름 중에도 "우랑하이(Uraŋxai)"가 있었다.[31] 러시아의 파벨 네볼신은 1850년대 볼가 칼미크인 중 "우란쿠(Urankhu)" 씨족이 있다고 기록했다.[32] 현재 몽골, 투바 공화국, 중국 등지에 다양한 우량카이 집단이 존재한다.

17세기 초, 우량카이라는 용어는 기원에 관계없이 북서부에 흩어져 있는 모든 부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몽골어 용어가 되었다.[2] 1757년 청나라는 극북 변경을 일련의 우량카이 기로 조직했다. 몽골의 투바인들은 몽골인들에 의해 몽초고 우량카이(투바어 ''몽착'' < 카자흐족 ''몬샤크'' "목걸이" 참조)라고 불린다. 바양울기 주 및 코브드 주의 또 다른 우량카이 그룹은 알타이 우량카이라고 불리며, 오이라트에 소속되었다. 동부 몽골 다얀 칸의 6개 투멘 중 하나도 우량카이 그룹이었다. 알타이나 홉스골 우량카이에는 튀르크 또는 사모예드 씨족이 없다.

야쿠트족의 옛 이름은 '''우라ŋ카이 사하'''였다.[6]

4. 조선과 우량카이 (오랑캐)

조선에서 우량카이 또는 올량합(兀良哈)은 두만강 유역에 살던 야인여진 부족인 왈카부(瓦爾喀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30] 이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와 교전하기도 했다.[30] "올량합"이라는 말은 한국어에서 "오랑캐"로 변화하여, 주로 14세기 ~ 15세기에 중화 문명에 포함된 세계를 공격하는 외부의 야만인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26]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Census 2010 http://www.toollogo2[...]
[2]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4] 간행물 Custom of the Oirat wedding
[5] 논문 An Introduction to the Qing Foundation Myth 1985-12
[6] 논문 Review of Menges "The Turkic Languages and Peoples"
[7] 서적 Journey to Tuva Ethnographic Press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8] 서적 Chʻing-shih Wen-tʻi https://books.google[...] Chʻing-shih wen-tʻi
[9] 서적 Ch'ing-shih Wen-t'i https://books.google[...] Ch'ing-shih wen-t'i
[10] 서적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02-15
[11] 서적 China's minority nationalities https://books.google[...] Foreign Languages Press
[12] 서적 Rosyjsko-chińskie stosunki polityczne: XVII-XIX w https://books.google[...] Wydawn. Univ.
[13] 서적 草原の掟―西部モンゴル遊牧社会における生存戦略のエスノグラフィ ナカニシヤ出版 2022-01
[14] 문서 岡田2010,321頁
[15] 문서 森川1972A,36頁
[16] 문서 岡田2004,199-200頁
[17] 문서 この二人の妃の出自については各種モンゴル年代記間で相違が大きく、ウルートのオロチュの娘とする記述も存在する(森川1972B,174頁)
[18] 문서 岡田2010,315-316頁
[19] 문서 森川1972B,176-177頁
[20] 문서 岡田2010,74頁
[21] 문서 増井1999
[22] 웹사이트 原文「조선민족의 천년숙적인 섬오랑캐들」 http://www.uriminzok[...]
[23] 문서 岡田2010,320頁
[2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25] 간행물 Custom of the Oirat wedding
[26] 논문 An Introduction to the Qing Foundation Myth 1985-12
[27] 웹사이트 National Census 2010 http://www.toollogo2[...]
[28]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29] 뉴스 올량합과 알타리가 조회와서 다투다가 화해하다. 태조가 집에서 이들을 대접하다.
[30] 뉴스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31] 논문 Review of Menges "The Turkic Languages and Peoples"
[32] 서적 Journey to Tuva Ethnographic Press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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