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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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으로, 기원전 222년 집정관을 지냈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약했으며, 형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함께 카르타고에 맞서 싸웠다. 기원전 211년 일로르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은 기원전 19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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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11년 사망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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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세력을 확장한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말년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 스키피오 가 -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이자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로, 자녀 교육과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로마 여성의 전형으로 칭송받았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유구르타 전쟁과 동맹시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기원전 88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 지휘권을 두고 마리우스와 대립하며 로마를 장악, 숙청을 단행하고 독재관으로 공화정 개혁을 시도하여 로마 공화정 쇠퇴와 제정 이행에 큰 영향을 미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세력을 확장한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말년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 |
---|---|
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Geunaeuseu Koreunelliuseu Seukipio Kallbuseu |
출신 계급 | 파트리키 |
씨족 | 코르넬리우스 씨족 |
가문 | 스키피오 가문 |
사망 | 기원전 211년 |
사망 장소 | 이로르카 |
경력 | |
관직 | 집정관 (기원전 222년)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
군사 활동 | |
지휘 전쟁 | 키사 전투 (기원전 218년) |
2. 가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원전 259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고, 동생은 기원전 218년 집정관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그나이우스는 삼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구별하기 위해 칼부스(대머리)라는 별명을 얻었다.[1]
2. 1. 가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원전 259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으며, 루키우스는 기원전 280년 감찰관을 역임한 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의 아들이었다. 그의 동생은 기원전 218년 집정관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삼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구별하기 위해 칼부스(대머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의 삼촌은 아시나(당나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제1차 포에니 전쟁 중에 두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다.3. 초기 생애 및 집정관 시절 (기원전 222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는 기원전 222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두 집정관은 키살피나 갈리아의 인수브레스족과 맞섰다.[1]
3. 1. 키살피나 갈리아 원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는 기원전 222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두 집정관은 군대를 이끌고 키살피나 갈리아의 인수브레스족과 맞섰다.[1] 스키피오는 아케르라에를 포위했고, 마르켈루스는 클라스티디움에서 인수브레스족과 교전했다. 아케르라에가 함락된 후, 스키피오는 메디올라눔으로 진격하여 갈리아족을 유인해 격파하고 그 도시를 점령했다. 그 결과 갈리아족은 로마에 항복했다.[1]4.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11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니발 바르카와 직접 맞붙지는 않았지만, 한니발을 견제하고 격파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218년, 전쟁 발발 당시 집정관이었던 동생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군대에서 레가투스로 복무하며 히스파니아(스페인)에 파견되었다. 이후 기원전 211년 사망할 때까지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군과 맞서 싸웠다.[2]
기원전 212년, 스키피오 형제는 주요 광산 도시이자 한니발의 아내 이미르체의 고향인 카스툴로를 점령하고, 카스툴로와 일루지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후, 켈트-이베리아 용병을 고용했으나, 아스드루발 바르카에게 매수되어 이탈하면서 수적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2] 결국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군대와 합류한 카르타고군에 의해 일로르카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하위 섹션인 히스파니아 파견 (기원전 218년), 히스파니아에서의 활약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11년), 상부 바에티스 전투와 죽음 (기원전 211년)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4. 1. 히스파니아 파견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때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218년 전쟁 발발 당시 집정관이었던 그의 동생 푸블리우스의 군대에서 레가투스로 복무했다. 그는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11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인과 싸웠다.[2]기원전 218년, 그나이우스와 그의 형제는 푸블리우스의 집정관 군대와 함께 갈리아 남부의 동맹국인 마실리아로 항해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니발과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영토를 상대로 작전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푸블리우스는 한니발이 갈리아 북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론 강 동쪽 강둑을 따라 북쪽으로 기병대를 보냈는데, 이는 누미디아 경 기병대와 충돌했다. 격렬한 소규모 전투 끝에 그들은 누미디아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2] 푸블리우스는 그 후 갈리아에서 한니발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군대 전체를 북쪽으로 진군시켰다. 한편, 한니발은 동쪽으로 진군하여 알프스 산맥으로 향했다. 버려진 카르타고 야영지에 도착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사흘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형인 그나이우스의 지휘하에 군대를 이베리아 반도로 보내는 한편, 자신은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북이탈리아로 돌아갔다.
4. 2. 히스파니아에서의 활약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11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때,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218년 전쟁 발발 당시 집정관이었던 동생 푸블리우스의 군대에서 레가투스로 복무했다. 그는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11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군과 싸웠다.[2]기원전 218년, 그나이우스는 형제 푸블리우스와 함께 푸블리우스의 집정관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의 동맹국인 마실리아로 항해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니발과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영토를 상대로 작전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푸블리우스는 한니발이 갈리아 북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론 강 동쪽 강둑을 따라 북쪽으로 기병대를 보냈는데, 이는 누미디아 경 기병대와 충돌했다. 격렬한 소규모 전투 끝에 누미디아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2] 푸블리우스는 갈리아에서 한니발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군대 전체를 북쪽으로 진군시켰다. 한편, 한니발은 동쪽으로 진군하여 알프스 산맥으로 향했다. 버려진 카르타고 야영지에 도착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사흘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형인 그나이우스의 지휘하에 군대를 이베리아 반도로 보내는 한편, 자신은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북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나이우스는 보병 2만 명(로마군 군단 2개와 동맹군 알라 2개), 기병 2,200명, 60척의 퀸퀘레메를 이끌고 마실리아를 출발하여 스페인 동부의 엠포리온에 상륙했다. 엠포리온과 타라코의 그리스 도시들은 로마군을 환영했고, 그나이우스는 에브로 강 북쪽의 이베리아 부족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하노에게 보병 1만 명과 기병 1,000명을 주어 에브로 강 북쪽의 새로 정복한 영토를 수비하게 했다. 병력에서 심각하게 열세에 놓인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페인 남부의 카르타고 군대를 지휘하며 북쪽으로 진격하여 보병 8,000명과 기병 1,000명을 하노에게 증원했다.
하노는 더 이상 기다리면 이베리아인들과 에브로 강 북쪽의 카르타고 영토 전부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타라코 북쪽, 키사 또는 시사라고 불리는 곳 근처에서 로마군을 공격했다.[4] 그는 정규전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기발한 기동이나 매복은 없었다. 군대들은 그냥 대형을 갖추고 대치했다. 하노는 병력에서 2대 1로 열세였기에 비교적 쉽게 패배하여 전투에서 6,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게다가 로마군은 카르타고 야영지를 점령했는데, 2,000명의 병사와 하노 자신도 붙잡았다. 야영지에는 한니발이 남겨둔 모든 짐이 있었다.[5] 포로 중에는 영향력 있는 이베리아 추장인 인디빌리스도 있었다. 로마군은 또한 키사 마을을 공격했지만, 로마군이 실망스럽게도 값비싼 전리품은 없었다.[6]
기원전 217년 봄, 그나이우스는 55척의 군함 (아마도 5단노선 군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에브로 강 하구 근처에서 해전을 벌였다.[7] 그에게 맞선 40척의 카르타고 해군 함대는 로마 함대의 기습 공격으로 완전히 패배했다. 카르타고는 29척의 함선을 잃었고, 이베리아 반도 주변 해역의 제해권을 상실했다. 더욱이 이 승리로 인해 호전적인 이베리아인들 사이에서 로마의 위상이 높아졌다.
기원전 215년 초, 그나이우스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형제의 연합 지휘 하에 로마군은 에브로 강을 건넜다. 하스드루발은 그의 야전군과 함께 북쪽으로 진군했고, 몇 차례의 기동 후에 두 군대는 에브로 강 남쪽 기슭, 데르토사 마을 건너편에서 대치했다. 군대의 규모는 비슷했으며, 스키피오 형제는 보병 3만 명과 기병 2,800명을, 하스드루발은 보병 2만 5천 명, 기병 4,000명, 코끼리 20마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그의 형제 한니발의 포위 전술(참조: 칸나에 전투)을 모방하려 했으나, 로마 기병이 버티고 덫을 닫지 못해 실패했다. 스키피오 형제는 이베리아 부족을 정복하고 카르타고의 영토를 약탈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야전군의 대부분을 잃은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한니발을 지원할 군대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스키피오 형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베리아에서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 외에도 이탈리아의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막았다.
4. 3. 상부 바에티스 전투와 죽음 (기원전 211년)
기원전 212년, 스키피오 형제는 주요 광산 도시이자 한니발의 아내 이미르체의 고향인 카스툴로를 점령했다. 그들은 이후 카스툴로와 일루지아에서 겨울을 보냈다.지난 몇 년 동안 스키피오 군대의 전력은 손실과 최근 정복한 영토를 주둔시켜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감소했다.[1] 따라서 형제는 야전군을 보강하기 위해 약 20,000명의 켈트-이베리아 용병을 고용하여 총 40,000명으로 증강했다.[1] 스키피오 형제는 대규모 군대를 뒤에 두고 카르타고 사령관들이 서로 분리되어 배치된 것을 관찰하고 군대를 나누기로 결정했다. 푸블리우스는 로마군과 동맹군을 이끌고 카스툴로 근처의 마고 바르카를 공격했고, 그나이우스는 로마 병력의 3분의 1과 모든 용병을 이끌고 아스드루발 바르카를 공격했다. 이 전략은 며칠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전투, 즉 '''카스툴로 전투'''와 '''일로르카 전투'''로 이어졌다.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먼저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아스드루발 바르카는 전투를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요새화된 자신의 야영지에 머물렀으며, 켈트-이베리아 용병들을 매수하여 그나이우스를 떠나게 했다.[2] 이로 인해 하스드루발 군대는 그나이우스 군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스드루발은 로마군과의 전투를 피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나이우스는 수적 우위를 잃은 후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자 북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로마군은 야영지에서 나와 불을 지핀 채 밤에 에브로 강으로 향했다. 다음 날 누미디아인들이 그들을 발견했고, 그들의 공격으로 로마군은 일로르카 근처 언덕 꼭대기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잡아야 했다. 카르타고 연합군이 밤중에 도착했다. 땅이 너무 돌이 많아 참호를 팔 수 없었기에 로마군은 짐과 안장으로 방어벽을 만들려 했다. 카르타고군은 이러한 임시 방어 시설을 쉽게 휩쓸어 그나이우스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그나이우스는 일로르카 전투에서 임시로 마련한 그의 야영지를 점령한 카르타고인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5. 유산
그나이우스는 일로르카 전투에서 임시로 마련한 그의 야영지를 점령한 카르타고인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죽음에도 스키피오 가문의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조카 푸블리우스는 한니발을 몰아내고 이베리아반도에 로마의 지배를 확립하는 데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아들은 기원전 191년에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뾰족한 코 때문에 나시카라는 별명이 붙었다)였다. 그는 최초의 스키피오 나시카였으며, 스키피오 가문의 나시카 분파를 창시했다. 스키피오 나시카의 아들인 또 다른 스키피오 나시카(코르쿨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정식 이름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녀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 마요르와 사촌 관계에서 결혼했다. 이로써 두 가문은 결합되었다. 그들의 남성 계열 후손은 적어도 기원전 46년까지 메텔루스 스키피오(카에킬리우스 메텔리 가문에 입양되었다)의 대에서 이어졌다.
참조
[1]
서적
Polybius, II.34.
[2]
서적
Hannibal's War
[3]
서적
Livy, XXI
[4]
서적
Polybius, III 76
[5]
서적
Hannibal's War
[6]
서적
Livy, XXI
[7]
서적
Livy, XII 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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