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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좌상(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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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동불좌상(아미타불)은 금동 아미타불 좌상으로,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 수인을 하고 있는 불상이다. 조성기는 없지만, 얼굴, 신체, 의복 등 표현에서 고려 후기~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인다. 머리는 촘촘한 나발에 낮고 넓적한 육계를 갖췄으며, 얼굴은 역삼각형에 가깝고 미간에는 백호공이 있다.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하품중생인 수인은 고려 후기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 불상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4세기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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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좌상(아미타불)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금동불좌상 (아미타불)
금동불좌상(아미타불)
금동불좌상(아미타불)
일반 정보
국가대한민국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유형유형문화재
지정 번호168호
지정일2003년 9월 5일
수량1구
시대삼국시대

2. 제작 시기 및 양식

이 불상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는데, 조성기(造成記)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얼굴과 신체, 의복 등의 표현에서 고려 후기~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1]

머리는 전체적으로 촘촘한 나발(螺髮)로 이루어져 있고, 육계(肉髻)는 낮고 넓적하게 표현되었다. 머리와 육계 경계에는 중간계주(中間髻珠)를 장치했던 구멍이 크게 나 있다. 얼굴은 이마가 넓고 턱으로 내려오면서 좁아져 역삼각형에 가깝게 둥글며, 미간에는 큼직한 백호공(白毫孔)이 뚫려 있다. 눈을 내려 뜨고 있어 자비로운 시선을 느끼게 한다. 뺨은 통통하고 코는 오똑하며 귀는 두툼하고 길다. 중간계주, 대형 백호공, 낮고 넓은 육계 등은 고려시대 철불(鐵佛)과 금동불(金銅佛)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다.[1]

목에는 촘촘하게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신체는 어깨가 넓지 않으면서도 단정하다. 이 좌상은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양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무릎 아래로 촘촘한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오른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은 왼쪽 옷자락 안으로 끼워져 있으며, 대의(大衣) 안에는 가슴과 평행하게 군의(裙衣)를 입고 리본형 띠매듭을 묶었다. 'u'자형 띠매듭은 고려 후기~조선 초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상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1346년) 등 많은 예가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 불상에서 보이는 금구장식(金具裝飾)은 이 불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1]

수인(手印)은 아미타불의 수인 중 하나인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 부근으로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붙이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으로 내려 역시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고려 후기 아미타불상의 전형적인 수인이지만, 이 불상에서는 왼손을 조금 바깥쪽으로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1]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등에서 고려 후기 단아양식(端雅樣式)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소 두텁고 형식화된 옷주름 형태, 쳐진 젖가슴 표현, 작게 표현된 발 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작품으로 보이게 한다.[1]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이 불상은 고려 후반~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금동불로서, 14세기 무렵 불상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 상호(相好)도 원만하고 대의(大衣) 표현도 상당한 수준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1]

3. 세부 특징

이 불상은 아미타불의 수인 중 하나인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붙이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으로 내려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데, 무릎 쪽으로 내린 왼손을 조금 바깥쪽으로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1]

목에는 약 1cm 간격으로 촘촘하게 삼도가 표현되었고, 어깨는 넓지 않으면서도 단정한 편이다.[1] 옷은 통견 형식으로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양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무릎 아래로 촘촘한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은 왼쪽 옷자락 안으로 끼워져 있으며, 대의(大衣) 안에는 가슴과 평행하게 군의(裙衣)를 입고 그 위에 리본형의 띠매듭을 묶었다.[1] 군의를 묶은 'u'字형 띠매듭은 고려 후기~조선 초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상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1346년)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고려 후기 불상에서 보이는 금구장식(金具裝飾)은 이 불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1]

3. 1. 머리

머리는 전체가 촘촘한 나발로 이루어져 있고 육계는 낮고 넓적하게 표현되었다. 머리와 육계의 경계선 부분에는 중간계주를 장치하였던 구멍이 크게 나 있다. 얼굴은 이마 부분이 넓고 턱부분으로 내려오면서 좁아져 역삼각형에 가깝게 둥글고 미간에는 지름 2.0cm, 깊이 1.3cm 크기의 큼직한 백호(白毫)공(孔)이 뚫려 있다. 마치 중생들을 굽어보는 것과도 같이 눈을 내려 뜨고 앉아 있어 자비 가득한 시선을 느끼게 한다. 뺨은 통통하고 코는 오똑하며 귀는 두툼하고 길다. 이 불상에서 보이는 중간계주, 대형의 백호공, 낮으면서 넓은 육계 등은 고려시대 철불과 금동불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1]

3. 2. 얼굴

얼굴은 이마 부분이 넓고 턱 부분으로 내려오면서 좁아지는 역삼각형에 가깝다. 미간에는 지름 2cm, 깊이 1.3cm 크기의 큼직한 백호공(白毫孔)이 뚫려 있다. 눈을 내려 뜨고 있어 자비로운 시선을 느끼게 한다. 뺨은 통통하고 코는 오똑하며 귀는 두툼하고 길다. 이 불상에서 보이는 중간계주, 대형의 백호공, 낮으면서 넓은 육계 등은 고려시대 철불(鐵佛)과 금동불(金銅佛)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1]

3. 3. 신체 및 의복

목에는 약 1cm 간격으로 촘촘하게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어깨는 넓지 않으면서도 단정한 편이다.[1] 통견 형식으로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양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무릎 아래로 촘촘한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은 왼쪽 옷자락 안으로 끼워져 있으며, 대의(大衣) 안에는 가슴과 평행하게 군의(裙衣)를 입고 그 위에 리본형의 띠매듭을 묶었다.[1] 군의를 묶은 'u'字형 띠매듭은 고려 후기~조선 초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상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1346년)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고려 후기 불상에서 보이는 금구장식(金具裝飾)은 이 불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1]

3. 4. 수인(手印)

이 불상은 아미타불의 수인 중 하나인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붙이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으로 내려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무릎 쪽으로 내린 왼손을 조금 바깥쪽으로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1]

4. 가치 및 의의

이 불상은 고려 후반~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금동불로서 14세기 무렵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상호(相好)가 원만하고 대의(大衣) 표현 수준이 높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1]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등에서 고려 후기 단아양식(端雅樣式, 14세기 무신집권기가 끝나고 수도가 강화에서 개경으로 다시 옮겨진 후 나타나는 고려 후기 불상들의 특징을 집약한 용어로 너무 추상적이거나 육감적이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는 불상을 일컫는 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

참조

[1] 간행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및문화재자료지정 서울특별시장 2003-09-05
[2] 간행물 서울특별시 지정 문화재 지정명칭 변경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200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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