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는 고려 말 승려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이다. 1386년 이색이 지은 행장을 토대로 혜잠이 비문을 새겨 광교산 창성사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진각국사의 생애와 업적이 담겨 있으며, 1962년 방화수류정 언덕 옆으로 이전되어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는 직사각형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고려 후기 비석의 소박한 특징을 보여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세기 조각 작품 - 국제 고딕
국제 고딕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사조로, 화려한 색채, 섬세한 묘사, 우아한 인물 표현이 특징이며 회화, 조각,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다. - 14세기 조각 작품 - 금동불좌상(아미타불)
하품중생인을 한 금동불좌상(아미타불)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단정하고 안정감 있는 형태를 보이는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불상으로, 고려 후기 불교 조각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수원시의 문화유산 - 만년제
만년제는 조선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후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1797년에 세운 제언으로, 둔전 설치와 농업 기반 강화, 상권 보호 등 정조의 권농정책을 보여주는 사적이다. - 수원시의 문화유산 - 축만제
축만제는 1799년 정조 23년에 수원 화성 서쪽에 축조된 저수지로, 만석의 생산을 축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2016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
영어 이름 | Stele for State Preceptor Jingak at Changseongsa Temple Site, Suwon |
지정 종류 | 보물 |
지정 번호 | 14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 |
시대 | 고려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수원시 |
2. 역사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는 창성사지는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번지 일대에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여기저기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에 창성사지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범우고(梵宇攷, 1799)》에는 ‘예전에 폐했는데 지금은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되었다가 18세기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00년대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考)》에는 ‘전부 화전(火田)이 되었다. 담장 석렬이 있고 석비 1기가 있을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19세기 말 이전에 폐사되었고, 진각국사탑비만 남아 있던 것을 알 수 있다.[2]
한신대학교박물관에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창성사지를 발굴·조사해서 진각국사비가 원래 있었던 자리를 밝혀냈다.[3]
2. 1. 창성사지
창성사지는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번지 일대에 있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여기저기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 절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에 나오고, 《범우고(梵宇攷, 1799)》에는 ‘예전에 폐했는데 지금은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되었다가 18세기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00년대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考)》에는 ‘전부 화전(火田)이 되었다. 담장 석렬이 있고 석비 1기가 있을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19세기 말 이전에 폐사되었고, 진각국사탑비만 남아 있던 것을 알 수 있다.[2]한신대학교박물관에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창성사지를 발굴·조사해서 진각국사비가 원래 있었던 자리를 밝혀냈다.[3]
2. 2. 이전 및 현황
3. 비문 내용
비문에는 진각국사(1307년~1382년)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1]
진각국사는 중국 항주에 가 휴휴암에서 몽산화상이 몸에서 빛을 발함을 꿈에서 보고, 임제종의 만봉시울(萬峯時蔚)의 법을 전해 받고 고려로 돌아왔다. 이후 치악산과 낙산사 등에서 지냈는데, 공민왕이 국사로 추대하였으며 나옹이 공부선을 주재할 때 증명이 되었고 부석사를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 태어날 때로 돌아가서 화엄종으로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여러 사찰을 돌며 수학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음기에는 교종과 선종을 망라한 문도들과 재가신도들을 열거하였다.[4]
이색이 비문을 짓고 승려인 혜잠(惠岑)이 글씨를 새겼다.[5]
4. 형태 및 특징
진각국사 천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1]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1]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등과 비교할 만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1]
직사각형 대석(臺石)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우진각 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었는데, 대석이나 개석에 장식이 없어 간략화된 고려 후기 비석의 소박함이 보이며 글씨 또한 기교를 배제하여 투박하지만 정제된 멋을 보여준다.[5]
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2]
웹인용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https://gjicp.ggcf.k[...]
2017-10-28
[3]
뉴스
수원 광교산 창성사지 발굴성과 학술대회
http://www.yonhapnew[...]
2016-12-21
[4]
웹인용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http://gsm.nricp.go.[...]
2017-10-30
[5]
문서
현지 안내문에서 인용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