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가쓰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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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노시타 가쓰토시는 오와리국 출신의 가인으로, 1569년에 태어나 1649년에 사망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히데요시 사후 후시미성 수비를 맡았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퇴거한 일로 제봉 처분되었다. 이후 고다이인의 주선으로 영지를 받았지만, 유령 분쟁으로 다시 영지를 잃고 은거했다. 그는 와카에 능했고, 《거백집》, 《장소자집》 등 여러 가집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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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가쓰토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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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기노시타 씨(스기하라 씨), 하시바 씨(도요토미 씨), 기노시타 씨 |
이름 | 기노시타 가쓰토시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에이로쿠 12년 ( 1569년 ) |
사망 | 게이안 2년 6월 15일 ( 1649년7월 24일 ) |
개명 | 오쿠라 (유명), 가쓰토시, 기노시타 조쇼시 |
이명 | 류노 시주 시키부다이스케 와카사노쇼쇼 와카사자이쇼 (통칭) 조쇼 조쇼시 교하쿠 덴야 무오 니시야마쇼부 니시야마쇼오 (배호) |
계명 | 다이세이인덴젠시고혼우린덴야조쇼코지 |
영명 | 페테로 |
묘소 | 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의 고다이지 |
관위 | 종5위하시종 종4위하시키부다이부 좌근위권소장 |
막부 | 해당 사항 없음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번 | 빗추아시모리 번 번주 |
부모 | 기노시타 이에사다, 모 씨 |
형제 | 가쓰토시 도시후사 노부토시 도시사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도시타다 히데노리 슈난 쇼슈쿠 |
배우자 | 정실: 우메 (호센인) (모리 가나리의 딸) 측실: 다수 |
자녀 | 덴쇼인 (다케다 노부요시의 부인) 지코인 (야마자키 이에하루의 부인) 딸 (아노 사네후지의 생모) 슌코인 만게 쇼산 가쓰노부 (하시모토 가쓰노부) |
특기 사항 | 가쓰토시는 다케다 모토아키라와 교고쿠 다쓰코 사이에서 태어난 남자라는 이설도 있음 |
2. 생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던 기노시타 가쓰토시는 가신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사망한 후, 그의 영지였던 하리마국다쓰노성을 후쿠시마 마사노리 다음으로 물려받았다. 1588년에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10]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였고, 분로쿠의 역에서는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고야성에 머물렀다. 분로쿠 3년(혹은 2년)에는 와카사국고세야마성 8만 1500석을 받았다. 1590년대 초부터 와카에 재능을 보였으며, 히젠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쓰여진 글과 와카는 『규슈도노키』로 남아있다.
1600년, 아이즈 정벌에 나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후시미성에 머물며 마쓰노마루[10]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자, 동군의 토리이 모토타다는 가쓰토시가 서군에 있는 동생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내통할 것을 의심하여 퇴거를 요구했다. 이에 가쓰토시는 교토 신성으로 퇴거했다.[12][13]
가쓰토시가 후시미 성을 퇴거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해 관동(이에야스)에 가담해야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모반에 가담할 수도 없어, 성에 남아 있으면 방어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설,[14] 풍류를 좋아하는 가쓰토시가 성이 전란에 휩싸이는 것을 보는 것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15] 호소카와 유사이처럼(다나베성 전투) 천황을 비롯한 조정에 의한 구출 공작이 있었다는 설[16] 등이 있다. 기타노만도코로가 서군을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17] 통설에서는 기타노만도코로가 히데아키를 동군에 가세시키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18]
어쨌든 가쓰토시는 독단적으로 성을 나갔고, 오사카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아내 우메(호센인)는 가쓰토시의 적전 도주를 알고 격노하여 이혼했다. 전쟁 후, 가쓰토시는 후시미 성 퇴거를 이유로 제봉 처분을 받았다.[19]
1608년, 아버지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사망 후, 고다이인(기타노만도코로)의 주선으로 비추국아시모리 2만 5,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영지를 얻지 못한 동생 기노시타 도시후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에도 막부는 영지를 몰수했고, 가쓰토시는 다시 영지를 잃었다.
가쓰토시는 삭발하고 교토 히가시야마에 은거하여, '''장소자'''라 불렀다. 1640년경까지 와카를 계속 읊었고, 집외 36가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만년에는 쇼지 사 곁으로 이주하여, '''서산 초부'''(서산 초옹)라고 칭했다. 1649년에 사망하여 고다이 사에 묘가 있다.
기노시타 조쇼시(가쓰토시)는 고보리 마사카즈, 다테 마사무네, 하야시 라잔, 가스가노 쓰보네, 후지와라 세이카, 레이제이 타메카게, 마쓰나가 사다토쿠, 나카인 미치카츠 등과 교류했다. 이시카와 조잔, 시모카베 초류, 야마가 소코에게도 사숙되었으며, 기비 대신 입당 그림 두루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2. 1. 출신과 가족
에이로쿠 12년(1569년),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에사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기타노만도코로, 오네)의 아버지인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쓰토시는 고다이인의 조카에 해당한다. 기노시타 성을 칭하지만, 히데요시와 혈연관계는 없다. 어머니는 모 씨이다.[7]이복 동생으로 도시후사, 노부토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이 있다.[8]
가쓰토시의 정실은 모리 요시나리의 딸 우메(호센인)이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각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섯째 아들 다케다 노부요시의 정실, 야마자키 이에하루의 계실, 곤다이나곤아노 기미사다의 처가 되었다.[2]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던 해(1600년)에 서자가 태어났지만, 후술할 실책의 연좌를 피하기 위해 죽은 것으로 되어 숨겨졌다. 이는 『조코인 과거장』이나 『거백집』의 "기나라시 옷"등을 통한 후년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 서자는 장성하여 호리오 요시하루를 섬겼고, 호리오 씨가 단절된 후에는 친족인 아사노 유키나가를 의지했으며, 호소카와 가문 가로 마쓰이 오키나가를 섬겨 하시모토 성을 칭한 가쓰노부라고 한다.[9] 가쓰노부의 계보는 현재도 야쓰시로시에서 이어지고 있으나, 가쓰토시는 후계자 없이 은거했기 때문에 가계는 단절되었다.
관계 | 이름 |
---|---|
아버지 | 기노시타 이에사다 (1543-1608) |
어머니 | 불명 |
정실 | 우메 (호센인) - 모리 요시나리의 딸, 후에 이혼 |
측실 | |
자녀 | 이름 |
장녀 | 덴쇼인 - 다케다 노부요시의 정실 |
차녀 | 치코인 - 야마자키 이에하루의 계실 |
3녀 | 불명[2] - 아노 기미사다의 처 |
4녀 | 슌코인 망카 쇼산[3] |
장남 | 기노시타 가쓰노부 (하시모토 가쓰노부) |
2. 2. 히데요시의 가신
어린 시절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일문 중 한 사람으로서 두터운 대우를 받았고, 가로(가신)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죽은 후, 그의 영지였던 하리마국타츠노성을 후쿠시마 마사노리 다음으로 물려받았다. 덴쇼 16년(1588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10]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했다. 분로쿠의 역에서는 1,500명을 이끌고 재진 중 한 사람으로서 나고야성에 머물렀다. 분로쿠 3년(혹은 2년)에 와카사국고세야마성 8만 1500석을 받았다. 20대 초반에 해당하는 1590년대 초 무렵부터 와카에 재능을 발휘하여, 분로쿠의 역 때 히젠국의 진중으로 가는 여정에서 쓰여진 글과 와카는 『규슈도노키』로서 남겨져 있다.
게이초 5년(1600년), 아이즈 정벌에 나서는 고다이로 수석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가쓰토시는 특히 후시미성에 머물게 되어 마쓰노마루[10]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자, 동군의 토리이 모토타다는 믿을 수 있는 미카와중[11]을 중심으로 성을 굳게 지키려 생각했고, 적군인 서군에 동생인 히데아키가 포함되어 있다고 가쓰토시를 의심하여, 퇴거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압박했다. 이 때문에 가쓰토시는 퇴거하여 기타노만도코로가 있는 교토로 향했다.[12][13]
가쓰토시가 후시미 성을 퇴거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사촌에 해당하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해서도 관동에 가담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시다 미츠나리의 모반에 가담할 수도 없어, 성에 남아 있으면 방어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4] 그 외의 이설로는, 풍류를 좋아하는 가쓰토시가 태합이 쌓은 금박의 기와가 호화로운 성이 병화에 휩싸이는 것을 보는 것이 참을 수 없어져, 모든 것이 싫어져 성을 나가버렸다는[15] 설이나, 그의 가도 스승이었던 호소카와 유사이처럼(다나베성 전투), 천황을 비롯한 조정에 의한 구출 공작이 있어 사토무라 쇼시츠가 가쓰토시를 맞이했다는 설이 있다.[16] 한편, 가쓰토시를 귀여워했던 기타노만도코로가 서군을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17]가, 통설에서는 기타노만도코로는 반 이시다·요도도노 측이었고, 우선 동군·가쓰토시와 서군·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형제라는 것을 이유로 중재하여 정전시키려 했고, 그것이 가쓰토시의 퇴거로 실패한 후에는 히데아키를 후시미 성에 입성시켜 동군에 가세시키려 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18] 어쨌든 이러한 이유라면, 결국 가쓰토시는 독단적으로 성을 나가게 된다.
아내인 우메(호센인)는 오사카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는데, 가쓰토시의 적전 도주를 알고 격노하여, 이것을 이유로 후에 이혼했다. 전쟁 후, 모토타다에게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가쓰토시가 부여받은 임무를 함부로 포기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 퇴거를 이유로 가쓰토시를 제봉 처분했다.[19]
게이초 13년(1608년), 아버지 이에사다의 사망 후, 고다이인(기타노만도코로)의 주선으로 유령(비추국아시모리 2만 5,000석)이 안도되어, 그 재량에 맡겨지게 되었다. 이때, 이에야스는 유령을 가쓰토시와 도시후사에 분여하려 했지만, 고다이인은 총애하는 가쓰토시에게 유령 전부를 넘겨주었다.[20] 그러자, 영지를 얻지 못하게 된 동생 도시후사는 항의하여 이에야스에게 하소연했고, 약 반 년 동안 쌍방의 사자가 교토와 스루가를 왕복하며 쟁의가 벌어졌다. 이듬해 9월, 에도 막부는 분지의 사태를 범하여 명령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이에사다의 유령 전부를 몰수했다. 이로 인해 다시 가쓰토시는 영지를 잃었지만, 도시후사도 마찬가지였고, 대신 먼 친척인 아사노 나가아키라가 아시모리 번을 일시적으로 받들어 관리했다. 또한, 도시후사는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군공을 세웠고, 그것으로 아버지의 유령인 아시모리 번의 계승을 인정받았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개역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던 기노시타 가쓰토시는 가신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사망한 후, 그의 영지였던 하리마국다쓰노성을 후쿠시마 마사노리 다음으로 물려받았다. 1588년에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10]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였고, 분로쿠의 역에서는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고야성에 머물렀다. 분로쿠 3년(혹은 2년)에는 와카사국고세야마성 8만 1500석을 받았다. 1590년대 초부터 와카에 재능을 보였으며, 히젠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쓰여진 글과 와카는 『규슈도노키』로 남아있다.
1600년, 아이즈 정벌에 나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후시미성에 머물며 마쓰노마루[10]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자, 동군의 토리이 모토타다는 가쓰토시가 서군에 있는 동생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내통할 것을 의심하여 퇴거를 요구했다. 이에 가쓰토시는 교토 신성으로 퇴거했다.[12][13]
가쓰토시가 후시미 성을 퇴거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해 관동(이에야스)에 가담해야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모반에 가담할 수도 없어, 성에 남아 있으면 방어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설,[14] 풍류를 좋아하는 가쓰토시가 성이 전란에 휩싸이는 것을 보는 것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15] 호소카와 유사이처럼(다나베성 전투) 천황을 비롯한 조정에 의한 구출 공작이 있었다는 설[16] 등이 있다. 기타노만도코로가 서군을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17] 통설에서는 기타노만도코로가 히데아키를 동군에 가세시키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18]
어쨌든 가쓰토시는 독단적으로 성을 나갔고, 오사카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아내 우메(호센인)는 가쓰토시의 적전 도주를 알고 격노하여 이혼했다. 전쟁 후, 가쓰토시는 후시미 성 퇴거를 이유로 제봉 처분을 받았다.[19]
2. 4. 은거 생활
가쓰토시는 삭발하고 교토 히가시야마에 은거하여, 고다이인이 연 고다이 사 남쪽에 거백당을 짓고, '''장소자'''라 불렀다. 이 은거지에는 "'''가선당'''"이라 부르는 작은 누각이 있었고,[21] 그 2층에는 36가선 그림을 걸어두었다.[22]그 후, 장소자(가쓰토시)는 거백당에서 1640년경까지 와카를 계속 읊었고, 고미즈노오 천황이 칙찬했다고 전해지는 집외 36가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만년에는 야마시로 오토쿠니 오하라노(서산)의 쇼지 사 곁으로 이주하여, '''서산 초부'''(서산 초옹)라고 칭했다. 은거 후에도 후처인지 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은 듯하다.
게이안 2년(1649년)에 사망했다. 묘는 고다이인 등이 잠든 고다이 사에 있다. 남겨진 와카 작품들은 제자인 야마모토 슌세이 등에 의해 편찬된 가문집 『거백집』에 수록되어 있다.
기노시타 조쇼시(가쓰토시)는 고보리 마사카즈나 다테 마사무네와 같은 다이묘를 비롯하여, 하야시 라잔이나 가스가노 쓰보네와 같은 막부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의 아들 레이제이 타메카게 (숙부·레이제이 타메마사의 양자), 마쓰나가 사다토쿠, 나카인 미치카츠 등 문화인들과도 교류했다. 제자로는 앞서 언급한 야마모토 슌세이와 오카모토 무네요시, 다타 코키 등이 있다. 또한, 이시카와 조잔, 시모카베 초류와 야마가 소코에게도 사숙되었으며, 야마가 소코는 그의 거주지를 방문했다. 또한, 가쓰토시는 기비 대신 입당 그림 두루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 문화적 교류 및 평가
기노시타 가쓰토시(조쇼시)는 고보리 마사카즈나 다테 마사무네와 같은 다이묘를 비롯하여, 하야시 라잔이나 가스가노 쓰보네와 같은 막부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의 아들 레이제이 타메카게 (숙부·레이제이 타메마사의 양자), 마쓰나가 사다토쿠, 나카인 미치카츠 등 문화인들과도 교류했다. 제자로는 야마모토 슌세이, 오카모토 무네요시, 다타 코키 등이 있다. 또한, 이시카와 조잔, 시모카베 초류에게 사숙받았으며, 야마가 소코는 그의 거주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가쓰토시는 기비 대신 입당 그림 두루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21]
4. 작품
기노시타 가쓰토시는 교토 히가시야마에 은거하여 지은 거백당에서 1640년경까지 와카를 읊었으며, 고미즈노오 천황이 칙찬했다고 전해지는 집외 36가선에도 이름을 올렸다.[21][22] 만년에는 야마시로 오토쿠니 오하라노(서산)의 쇼지 사 곁으로 이주하여 서산 초부(서산 초옹)라 칭했다.
가쓰토시는 고보리 마사카즈, 다테 마사무네와 같은 다이묘, 하야시 라잔, 가스가노 쓰보네와 같은 막부 요직 인사, 후지와라 세이카 등 여러 문화인들과 교류했다. 제자로는 야마모토 슌세이, 오카모토 무네요시, 다타 코키 등이 있으며, 이시카와 조잔, 시모카베 초류, 야마가 소코도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제자인 야마모토 슌세이 등이 편찬한 가문집 『거백집』에 수록되어 있다.[28] 가쓰토시는 기비 대신 입당 그림 두루마리를 소유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4. 1. 와카
- 다른 세상에서 몸은 다 낡아 없어지고, 넓은 하늘도 소매에서 구름이 엉기는 첫 가을 비인가.
- 좋고 나쁨을 사람의 마음에 맡겨두고, 하늘을 우러러 소리내며 지나가는 세상.[23]
- 자줏빛도, 붉은 빛도, 초록빛도 봄의 색깔은 있지만, 없는 것 같은 산벚꽃이여.
- 나팔꽃이 피어있는 처마 밑에서 시원하게, 남자는 멋쩍어하고 여자는 두 사람의 것.
- 모든 것은 그저 이것 모두 가을의 일이라, 달도 저녁도 벌레도 괴롭지 않네.
- 검은 머리카락도 길게 자라라고 어루만졌는데, 어찌 옥구슬의 끈은 짧았던가.[24]
- 분수를 잊고 마주하는 산벚꽃, 꽃이야말로 사람을 세상에 있게 했네.
- 가지도 잎도 셀 정도가 되니, 달이 맑아 그림자가 확실한 뜰의 때묻은 나무.
- 꽃이 한창 피었는데도 지나가지 못하고 그대만을 기다리니, 마음이 간절하네.
- 내 신세를 어찌 빠뜨리고 오늘은 또 불타는 집을 벗어났는가, 부처가 되었는가 보다.[25]
- 이슬 같은 몸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곳, 풀잎 외에 또 다른 곳이 있었네.[26]
4. 2. 저작
기노시타 가쓰토시의 와카 작품들은 제자인 야마모토 슌세이 등이 편찬한 가문집 『거백집』에 수록되어 있다.[28]; 가집
- 『벌레 노래 합 그림 두루마리』 1640년 (간에이 17년) [27]
- 『물고기 노래 합』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간에이 연간
- 『짐승의 노래 합』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간에이 연간
- 『벌레의 노래 합』 『벌레 노래 합』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벌레 15번 노래 합』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장소 문초』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가문집 『거백집』 1649년 [28]
- 가집 『와카사쇼쇼 가쓰토시 아손집』 (『장소자집』)
5. 관련 작품
참조
[1]
문서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서적
詳説日本史研究
山川出版社
[6]
서적
群書系図部集 第3
続群書類従完成会
[7]
문서
[8]
문서
[9]
간행물
[10]
문서
[11]
문서
[12]
서적
關原軍記大成
http://dl.ndl.go.jp/[...]
国史研究会
[13]
서적
家康時代 上巻 関原役
http://dl.ndl.go.jp/[...]
民友社
[14]
간행물
[15]
간행물
[16]
문서
[17]
문서
[18]
서적
浅野荘と浅野氏
http://dl.ndl.go.jp/[...]
浅野史蹟顕彰会
[19]
문서
[20]
간행물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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