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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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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바타케 가는 가마쿠라 시대에 나카노인 가에서 분가하여 시작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며 『신황정통기』를 저술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남조의 군사적 지도자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이세 지역을 지배하며 구게 다이묘로 성장했으나, 센고쿠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으로 쇠퇴했다. 에도 시대에 단절되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부활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2. 역사

무로마치 시대에 기타바타케 가문은 이세 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구게 다이묘(公家大名)로 불렸다. 이들은 막부의 이세 슈고들의 세력권이 북부 이세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남부 이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역대 당주는 다케 성(多芸城)을 거성(居城)으로 삼아 다케 고쇼(多芸御所)라 불렸다.

남북조 합일(南北朝合一) 후 기타바타케 미치마사(北畠満雅)는 무로마치 막부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쇼코 천황(称光天皇)이 붕어하고 북조 방계의 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이 후사로 선택되자 다시 반란을 일으켜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기타바타케 가는 이치시 군 ・ 이이타카 군을 잃었으나, 후에 막부로부터 반환되었다.

가키쓰(嘉吉) 원년(1441년)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모자 중 한 명이 연척 관계에 있던 기타바타케 노리토모(北畠教具)에게 의지해 왔지만 보호를 거부당하고 자결하였다.

오닌(応仁) 원년(1467년)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벌어지자 전란을 피해 이세로 내려온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를 보호하였다. 기타바타케 가는 동군(東軍) 편에 섰지만 교토 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 노리토모, 기타바타케 마사사토(北畠政郷), 기타바타케 기치카(北畠材親) 3대는 단속적으로 막부로부터 이세 슈고(伊勢守護)로 임명되어 이세 고쿠시와 슈고를 겸임하였다.

이세 기타바타케 씨로부터 여러 씨족들이 분가하여 나왔으며, 이들은 제각기 그곳에서 고쇼(御所)라 칭하였다.

2. 1.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대

나카노인 가(中院家)의 기타바타케 마사이에(雅家)가 교토 북부의 기타바타케(北畠)로 옮겨 살면서 '기타바타케'를 칭하였다. 기타바타케 가는 고사가 천황 이후 다이카쿠지 왕통(大覚寺統)과의 관계가 깊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말기,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는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을 지지하였고, 고다이고 천황 사후에는 남조(南朝)의 군사적 지도자가 되어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를 집필하여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였다. 지카후사의 장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는 고무라카미 천황을 받들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 싸웠다.

지카후사의 셋째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요시(北畠顕能)는 이세 고쿠시가 되어 이후 기타바타케 종가는 이세에 정착하였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이세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구게 다이묘(公家大名)라고 불렸다. 이들은 막부의 이세 슈고들의 세력권이 북부 이세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남부 이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역대 당주는 다케 성(多芸城)을 거성(居城)으로 삼아 다케 고쇼(多芸御所)라 불렸다.

남북조 합일(南北朝合一) 후 기타바타케 미치마사(北畠満雅)는 무로마치 막부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한 번은 화목하였으나, 쇼코 천황(称光天皇)이 붕어했을 때 북조 방계의 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이 후사로 선택되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기타바타케 가는 이치시 군 ・ 이이타카 군을 잃었으나, 후에 막부로부터 반환되었다.

가키쓰(嘉吉) 원년(1441년),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주모자의 한 명으로써 연척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 기타바타케 노리토모(北畠教具)를 의지해 왔지만 보호를 거부당하고 자결하게 되었다.

오닌(応仁) 원년(1467년)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벌어지자 전란을 피해 이세로 내려 온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를 보호하였다. 기타바타케 가는 동군(東軍) 편에 붙었지만 교토 안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 노리토모, 기타바타케 마사사토(北畠政郷), 기타바타케 기치카(北畠材親) 3대는 단속적으로 막부로부터 이세 슈고(伊勢守護)로 임명되어 이세 고쿠시와 슈고를 겸임하였다.

이세 기타바타케 씨로부터 여러 씨족들이 분가하여 나왔다. 이들은 제각기 그곳에서 고쇼(御所)라 칭하였다.

2. 2. 센고쿠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센고쿠 시대에 기타바타케 가문은 기타바타케 하루토모라는 뛰어난 영주가 나타나면서 크게 성장했다. 하루토모는 남부 이세, 시마국, 이가국 남부, 야마토국 남부, 기이국 동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다스렸다.[1] 한편, 북부 이세의 나가노 구도 씨(長野工藤氏)와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하루토모의 아들 기타바타케 도모노리 대에 이르러 기타바타케 가문은 나가노 구도 씨를 복속시키고 북부 이세로 진출했으며, 시마 지역에 대한 지배력도 강화하는 등 센고쿠 다이묘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도모노리의 아들 기타바타케 도모후사 대에 이르러, 이세 국은 오다 노부나가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기타바타케 가문을 따르던 간도 씨(神戸氏)와 나가노 구도 씨도 차례로 오다 가문에 항복하고, 노부나가의 동생과 아들을 맞아들이며 오다 가문의 편으로 돌아섰다.

1569년 8월,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으로 오카와치 성(大河内城)이 포위 공격을 받았다. 10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재로 화의가 이루어졌는데(오카와치 성 전투), 이는 오다 가문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를 도모후사의 양자로 들이고, 도모노리의 딸 유키히메(雪姫)와 결혼시키는 조건이었다. 1575년, 노부카쓰는 기타바타케 가문의 가독을 이어받았다.

1576년 11월, 미노세 고쇼(三瀬御所)에 은거하던 도모노리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노부카쓰의 자객들에게 습격당해 암살되었다. 도모노리의 넷째 아들 도쿠마쓰마루(徳松丸)와 다섯째 아들 가메마쓰마루(亀松丸)도 함께 살해되었다. 도모노리의 차남 나가노 도모후지, 셋째 아들 기타바타케 지카나리 등 기타바타케 가문의 주요 인물들도 살해되었다(미노세의 변).

기타바타케 가문이 몰살당한 이유는 도모노리가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원이었던 다케다 신겐에게 배를 제공하기로 밀약했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

도모후사는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넘겨져 3년간 유폐되었다가 1580년 사망했다. 이로써 가마쿠라 시대 이래의 명문 가문이었던 기타바타케 가문은 사실상 오다 가문에게 넘어갔다.

1582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자, 도모노리의 친동생 기타바타케 도모치카가 재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가모 씨(蒲生氏)의 객신(客臣)이 되었다. 혼노지의 변 이후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 노부카쓰는 오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오다 성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세 고쿠시 가문으로서의 기타바타케 가문은 멸망했다.

2. 3. 재흥

나카노인 미치카쓰의 아들 기타바타케 지카아키가 기타바타케 가의 이름을 이었지만, 1630년(간에이 7년) 지카아키가 사망한 뒤 후사가 없어 기타바타케 가는 다시금 단절되었다.

기타바타케 씨가 다시 일어선 것은 메이지 시대였다. 1868년(메이지 원년) 9월 고가 가의 당주 고가 다케미치의 넷째 아들 기타바타케 미치시로는 에치고국 가시와자키 현지사, 1869년(메이지 2년) 4월에 효고현지사로 취임하는 등 젊은 나이에 요직을 역임하였기에 고가 가의 적자가 아님에도 승전이 허가되었다. 1870년 3월에 고가 다케미치는 미치시로를 당주로 삼아 기타바타케 가를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취지를 메이지 신정부에 출원하였는데, 권판관(権判官) 다이고 다다유키는 미치시로에게 승전을 허락한 것은 미치노리 그 한 사람의 대에 한정해서 허락한 것으로 아무리 도조케라 하여도 차남이 기타바타케로 성을 바꾸는 것은 인용될 수 없다 하여 청원은 각하되었다고 한다.[1]

미치시로는 그 한 대에 한정해 당상관이었고, 화족 제도가 성립된 당초에는 그 한 대에 한정하여 종신 화족이 되어 있었는데, 1870년 11월에 미치시로에게 영세록 245ton 1두가 지급되고 이로 하여 미치시로는 한 집안을 새로 일으키는 것이 허락되어 종신화족에서 영세화족이 된 것으로 여겨지며, 1871년 7월 19일자로 미치노리에게 기타바타케로 성을 바꾸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로써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후예로써 기타바타케 집안 재흥이 이루어졌다. 1884년 화족이 오작제가 되었을때 기타바타케 미치시로에게 남작 작위가 주어졌으며, 미치시로는 후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아키이에 부자 등을 제향하는 료 산 신사의 궁사를 맡았다.

패전 전인 쇼와(昭和) 전기에 기타바타케 남작가의 저택은 도쿄 시 스기나미 구 신메이 정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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