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카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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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막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무로마치 막부를 창설한 인물이다. 1305년에 태어나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에 기여했으나,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建武新政)에 반발하여 교토를 점령하고 고곤 천황을 옹립하며 무가 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의 권력 다툼, 남조와의 대립, 그리고 간노의 소란 등 격동의 시대를 겪었으며, 1358년에 사망했다. 다카우지는 뛰어난 무예와 정치적 수완, 그리고 예술적 재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생애는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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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다카우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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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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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시카가 다카우지 |
본명 |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 尊氏) |
통칭 | 마타타로 (又太郎) |
계명 | 등지원전인산묘의대거사장수사전(等持院殿仁山妙義大居士長寿寺殿) |
신호 | 해당사항 없음 |
묘소 | 교토부교토시기타구 만년산 도지인 가나가와현가마쿠라시 보구산 조주지 |
생애 | |
출생 | 1305년 8월 18일 |
출생지 | 아야베시, 교토부 우에스기 장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도치기현 아시카가시 |
사망 | 1358년 6월 7일 |
사망지 | 교토부교토시가미교구 마스야정 |
향년 | 54세 (만 52세) |
관직 | |
관위 | 종5위상 진수부장군 종4위하 좌병위독 종3위 무사시노카미 정3위 참의 정동장군 종2위 권대납언 정이대장군 정2위 증 종1위 증 좌대신 증 태정대신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겐무 신정 무로마치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재임: 1338년 - 1358년) |
가문 | |
씨족 | 가와치 겐지요리쿠니류 아시카가 씨 (아시카가 쇼군 가문) |
가문 문양 | 인양문(引両紋)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시카가 사다우지 |
어머니 | 우에스기 기요코 |
형제 | 다카요시 아시카가 다카우지 다다요시 미나모토노 린 (다마미도) |
배우자 | 정실: 아카하시 나리코 (호조 히사토키의 딸) 측실: 가코 로쿠로 모토우지의 딸 측실: 에치젠노츠보네? |
자녀 | 다케와카마루 다다후유 요시아키라 모토우지 에이추 호슌 쓰루오 기타 |
기타 정보 | |
알레기앙스 | 미나모토 씨 (세이와 겐지) |
분파 | 아시카가 씨 |
주군 | 모리쿠니 친왕 (호조 다카토키) 모리쿠니 친왕 (호조 모리토키) 고다이고 천황 고묘 천황 스고 천황 고무라카미 천황 고코곤 천황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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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는 가마쿠라 막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 초기에 활동한 무장으로, 무로마치 막부를 열어 초대 세이이타이쇼군이 된 인물이다. 어릴 적 이름은 마타고로(又太郎)였다.
처음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케닌으로서 1331년 겐코의 난 진압에 참여했으나, 점차 막부에 환멸을 느끼고 1333년 고다이고 천황 측으로 돌아서 막부 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 겐무 신정이 수립되었지만, 사무라이 계층의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다카우지는 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한 후 가마쿠라에 머물며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하기 시작했다.[5]
결국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 등을 격파하고 1336년 교토를 장악했으며, 지묘인통의 고묘 천황을 새로운 천황(북조)으로 옹립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피신하여 남조를 열면서, 이후 약 60년간 지속되는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었다.[6] 1338년 다카우지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 시대를 열었다.[9]
막부 초기에는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권력을 나누어 통치했으나, 점차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간노의 소란(1350-1352)이라는 내전을 겪었다.[9][10] 이후에도 남조와의 전쟁을 계속하던 중 1358년에 사망했다.[11] 그의 사후 쇼군직은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계승했으며, 손자 아시카가 요시미츠 대에 이르러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다카우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군기문학 《태평기》 등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현대에도 드라마 등의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사후 정1위에 추증되었고[11], 법명은 '''도지인덴 니야마 묘기 다이코지 조주지 도노'''(等持院殿仁山妙義大居士長寿寺殿)이다.[3][7]
2. 1. 탄생과 가마쿠라 막부 멸망
가겐 3년(1305년)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케닌인 아시카가 사다우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에 대해서는 아야베(綾部) 설, 가마쿠라 설, 아시카가 장원 설 등이 있다.[20] 아명(兒名)은 마타타로(又太郎)였다. 군기문학 《난태평기(難太平記)》에는 다카우지가 태어나 목욕할 때 산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와 그의 어깨와 국자에 앉았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아버지 사다우지의 정실인 호조 아키토키의 딸 소생의 장남이자 이복형인 아시카가 다카요시(足利高義)가 일찍 사망하면서, 측실 우에스기 세이코 소생의 차남이었던 다카우지가 아시카가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겐오 원년(1319년) 15세에 원복(元服, 성인식)을 치르고 종5위하 지부대보(治部大輔)에 임명되었다. 이때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이었던 호조 다카토키로부터 이름 한 글자(諱, 휘)를 받아 다카우지(高氏)라고 칭했다.[15] 이후 호조 씨 일족의 유력 가문인 아카하시류(赤橋流) 호조 모리토키의 여동생 아카하시 도코를 정실로 맞이했다. 겐코 원년/겐토쿠 3년(1331년), 아버지 사다우지가 사망하자 26세의 나이로 아시카가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같은 해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 타도를 목표로 가사기(笠置)에서 거병하자(겐코의 난), 막부는 다카우지에게 출병을 명령했다. 다카우지는 천황 측 거점인 가사기와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시모아카사카 성 공격에 참여했다. 당시 아버지 사다우지의 상중(喪中)임을 이유로 출병을 사양했지만 허락되지 않았고[16], 군기문학 《태평기》(太平記)는 이 일로 다카우지가 막부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고 전한다. 막부군의 공세로 겐코의 난은 실패로 끝났고, 고다이고 천황은 폐위되어 1332년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막부는 다카우지의 공을 인정하여 종5위상으로 승진시켰다.[19]
쇼쿄 2년/겐코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제도를 탈출하여 호키국 센조 산(船上山)에서 다시 거병했다. 다카우지는 병중이었음에도 다시 막부의 명을 받아 서국(西國)의 토막(討幕)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나고에 다카이에와 함께 사령관으로 교토로 향했다. 이때 막부는 인질로 다카우지의 아내 도코와 적남 센주오(千寿王, 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가마쿠라에 머물게 했다. 교토로 향하던 중, 다카우지는 미카와 국 야쓰하시(八橋)에서 기라 사다요시 등 측근들에게 막부 타도의 뜻을 밝혔고[20], 몰래 사자를 보내 센조 산의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막부 타도의 윤지(綸旨, 천황의 명령)를 받았다. 나고에 다카이에가 첫 전투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 엔신円心)에게 패배하여 전사하자, 다카우지는 4월 29일 단바의 시노무라 하치만 궁(篠村八幡宮, 현 가메오카시)에서 막부에 반기를 들고 거병했다.

여러 지방에 거병을 촉구하는 군세초청장(軍勢催促状)을 보내 오미 국의 사사키 도요 등 반막부 세력을 규합하여 교토로 진군했고, 5월 7일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같은 시기 간토에서는 고즈케 국의 고케닌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하여, 가마쿠라에서 탈출한 다카우지의 아들 센주오를 명목상의 대장으로 내세워 가마쿠라를 공격했다. 결국 가마쿠라는 함락되었고, 싯켄 호조 다카토키를 비롯한 호조 씨 일족이 자결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했다.[5] 이 혼란 속에서 다카우지의 서장자(庶長子) 다케와카마루(竹若丸)는 숙부 가쿠헨(覚遍)과 함께 교토로 향하던 중 호조 측 잔당에게 살해되었다.
2. 2. 겐무 신정부터 남북조 동란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다카우지는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 및 종4위하 좌병위독(左兵衛督)에 임명되었고, 30개 곳의 소령(所領)을 하사받았다. 또한 고다이고 천황의 이름 다카하루(尊治)에서 한 글자를 받아 다카우지(尊氏)로 개명하였다.[57] 그러나 다카우지는 겐무 신정의 정치 중심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며, 자신의 집사(執事)인 고 모로나오와 고 모로야스 형제를 교토로 보내고,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가마쿠라로 보내 간토 지방 무사들을 규합하려 했다. 이는 고다이고 천황이 다카우지를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시각과, 다카우지 스스로 조정과 거리를 두려 했다는 시각이 공존한다. 일각에서는 다카우지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가마쿠라에 새로운 막부를 열고자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고다이고 천황이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를 진주다이쇼군(鎮守大将軍)[58]으로 임명하고 노리요시 친왕과 함께 오슈로 파견하자, 다카우지는 이에 맞서 동생 다다요시를 어린 나리요시 친왕과 함께 가마쿠라로 보냈다. 한편,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이자 세이이타이쇼군 자리를 노리던 모리요시 친왕은 다카우지와 대립했으며, 다카우지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겐무 원년(1334년), 다카우지는 아노 야스코와 손잡고 모리요시 친왕을 모함하여 실각시킨 뒤, 다다요시가 있는 가마쿠라로 유폐시켰다.
겐무 2년(1335년), 시나노 국에서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가 호조 가문 잔당을 이끌고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켜 가마쿠라를 점령했다. 이때 가마쿠라에 있던 다다요시는 독단적으로 유폐 중이던 모리요시 친왕을 살해했다.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세이이타이쇼군 직위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8월 2일 칙허(勅許) 없이 군대를 이끌고 가마쿠라로 진군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마지못해 다카우지를 정동장군(征東将軍)으로 임명했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 군과 합류하여 사가미 강 전투에서 호조 도키유키 군을 격파하고 8월 19일 가마쿠라를 탈환했다. 이 공으로 다카우지는 종2위로 승격되었다.
가마쿠라를 수복한 다카우지는 동생 다다요시의 권유도 있어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가마쿠라에 머물며 독자적으로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이는 고다이고 천황의 상경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사실상 독자적인 무가 정권 수립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11월,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간신으로 규정하고 토벌을 고다이고 천황에게 요청했으나, 오히려 천황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 토벌을 명했다.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과 함께 가마쿠라로 진군했고, 오슈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도 남하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다카우지는 사면을 청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거부당했다. 동생 다다요시와 고 모로나오 등이 각지에서 패배하자, 다카우지는 결국 겐무 정권에 반기를 들고 궐기했다. 12월, 다카우지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 군을 격파하고 교토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다카우지는 지묘인통(持明院統)의 고곤 상황과 연락하여 자신의 교토 입성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겐무 3년(1336년) 1월,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곧 오슈에서 올라온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의 반격으로 2월에 교토를 내주고 규슈로 피신했다.
규슈로 향하던 중, 다카우지는 나가토 국 아카마세키(현 시모노세키시)에서 쇼니 요리히사의 영접을 받았고, 지쿠젠 국 무나카타의 무나카타 신사 신관 무나카타 우지노리의 지원을 얻었다. 3월 초,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고다이고 천황 측의 기쿠치 다케토시 군을 격파한 다카우지는 규슈를 장악하고 세력을 재정비하여 다시 교토로 진격했다. 이때 고곤 상황으로부터의 원선(院宣)을 받아 정당성을 확보하자 서국의 무사들이 속속 다카우지 휘하로 모여들었다. 5월 25일, 미나토가와 강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군을 격파하고(이 전투에서 마사시게는 전사했다), 6월에 교토에 재입성했다.

교토로 돌아온 다카우지는 히에이 산으로 피신한 고다이고 천황에게 화의를 제안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받아들여 11월 2일, 고곤 상황의 아들인 고묘 천황에게 삼종의 신기를 넘겨주었다. 닷새 후인 11월 7일, 다카우지는 겐무식목 17개 조를 제정하여 새로운 정권의 기본 방침을 제시하며 새로운 무가 정권의 탄생을 선언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12월에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가서, 자신이 넘겨준 삼종의 신기는 가짜이며 진짜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천황으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워 새로운 왕조, 즉 남조를 열었다. 이로써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가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 8월 11일, 다카우지는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무가 정권, 즉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이듬해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에서 사망하자, 다카우지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교토에 덴류지를 건립했으며, 건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원에 무역선인 덴류지부네를 파견하기도 했다.
일본 연호 | 북조[24] | 남조[25] | 서력 | 월일 (음력) | 내용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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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겐 3년 | (고니조 천황) | 1305년 | 7월 27일 | 탄생. | ||
겐오 원년 | (고다이고 천황) | 1319년 | 10월 10일 | 종5위하지부대보에 서임. | 공경보임 | |
겐오 2년 | (고다이고 천황) | 1320년 | 9월 5일 | 지부대보 사임. | 공경보임 | |
겐토쿠 2년 | (고다이고 천황) | 1330년 | 6월 18일 | 적자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탄생. | ||
쇼케이 원년 | 고곤 천황 | 고다이고 천황 | 1332년 | 6월 8일 | 종5위상으로 승진. | 공경보임 |
겐코 3년/쇼케이 2년 | 고곤 천황 | 고다이고 천황 | 1333년 | 6월 5일 | 진주후쇼군. 내승전(昇殿)이 허락됨. | |
6월 12일 | 종4위하좌병위독으로 승진 전임. | 공경보임 | ||||
8월 5일 | 종3위로 승진, 무사시노카미 겸임. 이름을 다카우지(尊氏)로 개명. | 공경보임 | ||||
겐코의 난 종결. | ||||||
겐무 원년 | rowspan="2"| | 고다이고 천황 | 1334년 | 1월 5일 | 정3위로 승진. | |
9월 4일 | 참의에 임명. 좌병위독 여전(如元). | |||||
겐무 2년 | rowspan="4"| | 고다이고 천황 | 1335년 | 7-8월 | 나카센다이의 난 | |
8월 9일 | 정동장군(征東将軍) 선하. | |||||
8월 30일 | 종2위로 승진. | |||||
1336년 | 11월 26일 | 정동장군 사임. | ||||
겐무 3년/엔겐 원년 | 고묘 천황 | 고다이고 천황 | 1336년 | 2월경 | 다타라하마 전투 | 태평기 |
5월 25일 | 미나토가와 전투 | 태평기 | ||||
11월 7일 | 겐무식목 제정. | |||||
11월 26일 | 권대납언으로 전임. | |||||
랴쿠오 원년/엔겐 3년 | 고묘 천황 | 고다이고 천황 | 1338년 | 8월 11일 | 정2위로 승진. 세이이타이쇼군 선하. |
2. 3. 간노의 소란과 만년
새로운 정권 하에서 다카우지는 정무를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맡기고, 자신은 무사들의 구심점으로 군림하였다. 사토 신이치(佐藤進一)는 이를 주종제적 지배권을 장악한 다카우지와 통치권적 지배권을 소관한 다다요시와의 양두정치로 분석하며, 가마쿠라 막부 이후 쇼군이 가진 권력의 이원성이 구현된 것으로 평가했다.[59] 그러나 이원화된 권력은 점차 막부 내부의 대립으로 이어져, 고 모로나오를 중심으로 한 반(反) 다다요시파와 다다요시파 간의 갈등으로 나타났고, 이는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발전하였다. 다카우지는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 고 모로나오 파에 의해 옹립되면서 중립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에는 반대파의 습격을 받은 다다요시가 다카우지의 저택으로 피신했으나, 고 모로나오의 병력이 저택을 포위하고 다다요시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다다요시는 출가하여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다다요시의 배제가 다카우지와 고 모로나오 간의 합의에 따른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대신하여 자신의 적장자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가마쿠라에서 불러들여 다다요시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가마쿠라에는 차남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하여 간토 지역의 통치를 맡겼다. 다다요시가 은퇴한 후, 다카우지의 서자이자 다다요시의 양아들이었던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에서 다다요시파 재건을 도모하자, 쇼헤이 5년/간노 원년(1350년)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토벌을 위해 주고쿠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이 틈을 타 다다요시는 교토를 탈출하여 남조 측에 가담했고, 모모이 다다쓰네,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등 일부 아시카가 가문의 무장들도 그를 따랐다. 다다요시의 세력이 강해지자 요시아키라는 열세에 몰려 교토를 탈출했고, 다카우지 역시 셋쓰 국 우치데노하마(打出浜; 현 니시노미야시)에서 다다요시에게 패배하였다. 결국 다카우지는 고 모로나오와 고 모로야스 형제의 출가를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화친하였고, 쇼헤이 8년/간노 2년(1351년)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고 모로나오, 고 모로야스 형제는 호송 중 우에스기 요시노리(上杉能憲)에게 살해되었다.
다다요시는 요시아키라의 보좌직으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는 사사키 도요와 아카마쓰 노리스케의 모반 진압을 명분으로 오미, 하리마로 진군했는데, 이는 실제로는 다다요시와 다다후유를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다다요시는 호쿠리쿠로 탈출하여 가마쿠라에 자리 잡았다. 이후 다카우지는 남조 측과의 화친 교섭을 진행하여 음력 10월에 화의를 맺었는데, 이를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이라고 한다. 그 후 다카우지는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진격하여, 스루가 삿타 산(薩捶山; 현 시즈오카시 시미즈구)과 사가미 하야카와지리(早川尻; 현 오다와라시)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다요시 군을 격파하고 다다요시를 체포하여 가마쿠라에 유폐시켰다. 쇼헤이 7년/간노 3년(1352년) 음력 2월,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가마쿠라에서 급사하였다. 《태평기》에는 다카우지가 다다요시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기록되어 있다.
다다요시 사망 직후, 무네요시 친왕, 닛타 요시오키, 닛타 요시무네, 호조 도키유키 등 남조 측 세력의 공격을 받아 다카우지는 무사시 국으로 일시 후퇴했으나, 곧 세력을 수습하여 간토의 남조 세력을 제압하고 교토로 돌아왔다. 쇼헤이 9년/분나 3년(1354년)에는 남조와 손잡은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에서 군대를 이끌고 교토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다음 해인 1355년 다카우지의 공세에 밀려 규슈로 다시 물러났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토벌을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고, 쇼헤이 13년/엔분 3년 음력 4월 30일(1358년) 교토의 저택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다다후유와의 전투 중 입은 화살 상처가 악화되어 생긴 등창이라고 한다. 향년 54세였다.[11]
3. 인물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인간적인 매력에 대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선승(禪僧) 무소 소세키(夢窓疎石)는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26]
- 첫째, 심지가 강하고 전투에서 목숨의 위험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며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 둘째, 천성적으로 자비로워 남을 원망할 줄을 모르고, 숱한 원수들조차 용서하며 나아가 그들을 제 자식처럼 대한다.
- 셋째, 마음이 넓고 아쉬워하는 것도 없어 금이나 은도 흙이나 돌처럼 여기며 무구나 말 등을 사람들에게 넘겨줄 때도 재산이나 이를 주는 사람을 특별히 확인하지도 않고 손 가는 대로 맡겨버린다.
첫 번째 특징인 전장에서의 용맹함에 관해서는, 어느 전쟁터에서 화살이 비처럼 다카우지의 머리 위에 쏟아지는 와중에 근신이 위험하다고 자중을 촉구했지만 다카우지는 웃으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60][27] 《원위집》(源威集)에 따르면, 분와(文和) 4년(1355년)의 도지 전투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 다카우지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전투에서 지면 그것으로 끝장이니 적이 다가오면 자해할 시기만 알려 주면 된다"라며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원위집》의 저자는 비록 귀신이 다가온다고 해도 전혀 동요할 기미가 없다며 다카우지의 담력을 극찬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인 관대함은, 하타케야마 구니키요(畠山国清)나 시바 다카쓰네(斯波高経) 등 한 번 적대했던 인물들이 다시 항복해오자 그들을 받아들이고 막부의 각료로 삼은 데서 드러난다.
세 번째 특징인 부하에 대한 후한 인심은 《매송론》(梅松論)에 나오는 팔삭(八朔, 음력 8월 1일) 일화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유행했던 팔삭 선물 증정 풍습에 따라 다카우지에게 산더미처럼 선물이 보내졌으나, 그는 옆에 있는 사람부터 차례로 선물을 나누어 주어 그날 저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세는 전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공적을 세운 부하에게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은상을 약속하는 감상(感状, 군진의 하문)을 직접 주었다. 이 즉시성은 막부의 구심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자신이 차고 있던 단도를 직접 가신 두 사람에게 주거나, 자신이 사용하던 군선[28]을 주기도 했다.[62][29] 이러한 행동은 무가의 수장다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사례로 전해진다. 시치조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나스 스케후지가 실려 왔을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충의에 감사했다고 한다.[30] 또한 다카우지는 전장에서 눈에 띄는 갑옷 때문에 후방으로 물러나라는 건의를 받거나, 적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퇴각하라는 말을 들어도 물러서지 않고 최전선에서 싸우며 무사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심 없고 부하를 아끼는 다카우지를 보며 가신들은 모두 "목숨을 잊고 죽음을 다투며, 용감하게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고 《매송론》은 기록하고 있다.[26] 이것이 다카우지의 가장 큰 인간적 매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을 배반하고 조정의 적(조적)이 된 것을 괴로워하며 출가를 생각하거나(《태평기》), 관응의 동란 중 동생 다다요시나 남조와의 화의를 시도하는 등 전쟁을 피하려는 정치적인 면모도 보였다. 해마다 신년 서예(갓쓰기)에서는 「천하의 정도(政道)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사의 근원은 어서 끊어버려야 한다.」라고 썼다고 전해진다.[64][27] 《등지원전어유서(等持院殿御遺書)》에는 "노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모든 일의 득실을 판단하라"며, 부세를 무겁게 하거나 공납을 많이 거두는 것은 결국 큰 손실로 이어진다는 경계의 말이 담겨 있어, 욕심에서 한 걸음 물러선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다카우지는 무장,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렌카(連歌)에서는 《쓰쿠바슈》(菟玖波集)에 68수가 실려 있는데, 이는 무가 인물 중에서는 사사키 도요(佐々木道誉)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와카(和歌)에도 능하여 《속후습유와카집》(続後拾遺和歌集)부터 《신속고금와카집》(新続古今和歌集)까지 6개의 칙찬집(勅撰集)에 총 86수가 입선했다. 그는 와카집 《신센자이슈》(新千載集)를 직접 기획하여, 무가 인물이 칙찬집을 주도한 첫 사례를 만들었다. 조상인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 부자 때부터 명인으로 알려진 생황(笙)을 도요하라 류슈(豊原龍秋)에게 배워 고다이고 천황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65][32] 훗날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도 다카우지를 따라 류슈에게 생황을 배웠다.[66][33] 지장보살이나 달마대사를 그린 수묵화도 남아 있어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이 외에도 부채 띄우기(扇流し)의 시조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앙 면에서는 진언종의 다이고지 제65대 좌주 산보인 겐슌(憲俊)을 존경하여 호지승(護持僧, 기도의 힘으로 장군을 보호하는 승려)으로 삼았다. 겐슌은 공경 히노 도시미쓰의 아들이었으며, 이는 훗날 아시카가 쇼군 가문과 히노 씨가 연척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다카우지는 겐슌이 사망하자 49재에 직접 『이취경』을 필사했는데, 이 사본(다이고지 소장)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34] 천태종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이었던 엔칸(円観)에게 귀의하여, 호조 다카토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가마쿠라에 호카이지(宝戒寺)를 건립하고 엔칸을 명목상의 개산(開山)으로 삼았다. 임제종에서는 무소 소세키에게 깊이 귀의하여,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덴류지(天龍寺)를 건립하게 했다. 진언율종에서는 조도지(浄土寺)를 비호했으며, 아시카가시(足利市)의 오이와 비샤몬텐(大岩毘沙門天)을 신앙했다고도 한다.
4. 평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에도 시대 미토번에서 시작된 미토학은 주자학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고다이고 천황에 대항한 다카우지를 역적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시각은 메이지 시대 이후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역사관이 강조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남북조 정윤 논쟁 등을 거치며 다카우지는 오랫동안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태평양 전쟁 이전의 교육에서는 그를 '천황에게 활을 겨눈 역신'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4. 1. 2차 세계 대전까지의 평가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역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에도 시대 미토번을 중심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창시한 미토학에서 비롯되었다. 미토학은 주자학의 명분론에 강한 영향을 받아 황통의 정통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정통' 천황으로 여겨진 고다이고 천황을 몰아낸 다카우지를 역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러한 미토학의 사관은 존왕 사상이 점차 강해지던 에도 시대 말기(막말)에 이르러, 존왕양이론자들이 교토 토지인(等持院)에 안치되어 있던 아시카가 쇼군 3대(다카우지, 요시아키라, 요시미쓰)의 목상의 목을 베어 효수한 사건(아시카가 3대 목상 효수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메이지 시대가 되어 일본 제국 정부가 천황 중심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국가주의적 역사관을 구축하면서 다카우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더욱 강화되었다. 메이지 시대 중기까지는 근대 역사학 연구를 통해 고다이고 천황이 이끈 남조의 정통성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으나, 메이지 40년(1907년)경 발생한 '남북조 정윤 논쟁'을 거치면서 남조의 정통성이 부각되었고, 다카우지를 역적으로 보는 시각이 사회적으로 확고해졌다. 태평양 전쟁 이전 일본의 국정 교과서에는 다카우지를 '천황에게 활을 겨눈 역신'으로 기술하였다.
1934년(쇼와 9년)에는 사이토 마코토 내각의 상공대신이었던 나카지마 구마키치 남작이 과거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져 문제가 되었다. 제국의회에서 구리하라 히코사부로[39], 기쿠치 다케오[40] 등 야당 의원들은 이를 "난신이자 역적인 다카우지를 옹호하는 것이냐"며 정권 비판의 소재로 삼았고[41], 결국 나카지마는 대신직에서 사임해야만 했다.[42] 또한 1939년(쇼와 14년)에 공포된 영화법에서는 검열 기준 중 하나로 "국사상의 사실에 대한 연소자의 판단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는 것. 예를 들면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선인으로 그리는 것과 같은 국사상의 시비 관념을 그르치지 않는 것을 주안으로 한다"고 명시하여[43], 다카우지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려 했다.
한편, 작가 하기와라 사쿠타로처럼 다카우지를 동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소수 존재했다. 하기와라는 다카우지를 "인생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비극으로 보고, 피할 수 없는 악의 숙명으로 관념"했으며, "적도 아군도 비극이며, 전쟁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숙명"으로 여겼다고 묘사했다. 그는 다카우지가 "자기의 원치 않는 싸움을 싸우면서, 숙명의 비극을 슬퍼하며 살아갔다"고 평가했다.[44]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당시 일본 사회를 지배하던 국가주의적 역사관과는 거리가 먼 예외적인 것이었다.
4. 2. 패전 이후의 평가
에도 시대 미토번을 중심으로 한 미토학은 주자학의 명분론에 영향을 받아 황통의 정통성을 중시했고, '정통' 천황인 고다이고 천황을 몰아낸 다카우지를 역적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사관은 에도 시대 말기 존왕양이론자들에 의해 아시카가 쇼군 3대의 목상이 효수되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정부는 천황 중심의 국민 국가 건설을 위해 국가주의적 역사관을 내세웠다. 이는 대정봉환, 왕정복고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다이카 개신, 겐무 중흥, 메이지 유신을 중요한 개혁으로 강조했다. 초기에는 근대 역사학의 실증적 연구로 남조 정통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메이지 40년경 '남북조 정윤 논쟁'을 거치며 남조의 정통성이 강조되었고 다카우지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더욱 확고해졌다. 태평양 전쟁 이전의 국정 교과서에는 다카우지를 '천황에게 활을 겨눈 역신'으로 기술했으며, 1934년에는 사이토 마코토 내각의 상공대신 나카지마 구마키치가 과거 다카우지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글을 쓴 사실이 드러나 야당의 비판을 받고 사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 국가주의적 역사관이 약화되고 실증주의적 역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다카우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사토 신이치는 다카우지를 주종제적 지배자로 평가하며 무가 정권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현대 일본 역사 연구에서는 다카우지를 단순한 역적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메이지 시대에 그가 역적으로 규정된 과정 자체가 연구 주제가 되기도 했다.
모리 시게아키는 1차 사료 분석을 통해 다카우지가 남긴 수많은 문서를 근거로, 그가 가마쿠라 쇼군과 달리 최고 지도자로서 친재권을 행사하며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67] 또한 남북조 시대가 현대 일본 문화의 원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골격을 만든 다카우지를 「일본문화의 실질적인 창시자의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68]
가메다 도시카즈는 『원위집』(源威集)에서 간노의 소란 이후 다카우지가 「세이이타이쇼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대장」으로 묘사된 점, 다케다 노부타케의 8년 전 병장을 기억하고 평가한 일화 등을 들어 그의 카리스마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 분배에만 있지 않고 부하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적절한 평가 능력에도 기인했다고 분석했다.[69] 그는 무로마치 막부가 200년 이상 지속된 장기 정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 다카우지가 「여러 정책들의 은상화」를 통해 「노력이 보상받는 정치」를 실현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보았다.[70] 또한 간노의 소란 이전 정치적으로 무기력했던 다카우지가 40대 중반 이후 적극적으로 정무에 참여하게 되는 극적인 변화를 지적하며, 나이에 상관없이 노력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다.[71]
문화적으로도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사본 태평기』는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와 다른 새로운 다카우지 상을 제시하여 폭넓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다카우지에 대한 평가는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
한편,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소설가 가이온지 주고로는 『무장열전』에서, 이자와 모토히코는 『역설의 일본사』에서 고다이고 천황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 점과 내부 분쟁 처리에 미숙했던 점을 들어 「인물로써의 카리스마는 높지만, 조직 운영능력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반면 소설가 곤 도고는 『독설 일본사』에서 다카우지를 자손이 곤란할 정도로 사람이 좋은 인물로 묘사하며, 전국 시대에 태어났다면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보다 기량이 뛰어나 오다 노부나가와도 맞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천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고다이고 천황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1960년대 역사학자 사토 신이치는 다카우지의 모순되어 보이는 행동들(예: 나카센다이의 난 진압 과정에서의 태도 변화, 겐무의 난 발발 시의 은둔 시도 등)을 근거로 그가 양극성 장애(당시 명칭 조울증)를 앓았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사토는 다카우지 가문의 유전적 요인까지 언급하며 이러한 주장을 펼쳤으나, 2010년대 역사학자 구레자 유이치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구레자는 정신의학 전문가가 아닌 역사학자가 불충분한 근거로 정신 질환을 단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사료에 나타난 다카우지의 행동은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동생 다다요시에 대한 형제애로 일관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토의 해석이 다카우지가 처음부터 반란을 계획했다는 선입관에 기반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하며, 다카우지의 행동은 천황을 위한 선의의 독단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천황의 의도와 어긋났을 뿐이라고 보았다.
5. 용모
교토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기마무사상'(騎馬武者像, 중요문화재)[45]은 교토 모리야 가문(守屋家)의 옛 소장품이었기에 오늘날에도 다른 다카우지 초상화와 구별하기 위해 '모리야 가문본'(守屋家本)이라고도 불린다. 이 그림은 에도 시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편찬한 『집고십종』(集古十種)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초상으로 소개된 이후 널리 알려져, 2000년대까지 일본의 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다카우지의 초상화로 실렸다.
그러나 그림 윗부분에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화압(花押, 수결)이 있고, 기마무사가 탄 말갖춤에 그려진 문장이 아시카가 가문의 것이 아닌 고(高) 가문의 것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초상화의 주인이 다카우지가 아니라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였던 고 모로나오(高師直)[72][73] 혹은 그의 아들 고 모로아키라(高師詮)[74], 또는 고 모로후유(高師冬)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2000년대 무렵부터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이 그림을 다카우지의 초상화로 단정하지 않고 단순히 '기마무사상'으로만 소개하고 있다.[75]
반면, 『매송론』(梅松論)에 묘사된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 당시 다카우지의 출정 모습이 이 초상화와 흡사하고, 교토로 개선한 다카우지가 이때의 모습을 화공에게 그리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76] 여전히 '기마무사상'이 다카우지의 초상화라는 의견도 존재한다.[77] 또한 『태평기』(太平記)에는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기 직전 절에 머물며 상투를 잘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기마무사상'에 묘사된 인물의 짧은 머리 모양이 바로 이때의 다카우지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태평기』는 거병 당시 다카우지를 따랐던 무사들이 모두 다카우지를 본떠 상투를 잘랐다는 일화도 전한다.
최근에는 '기마무사상' 수리 보고 과정에서 그림 속 가문 문양이 후대에 덧그려진 것임이 밝혀지면서, 초상화의 주인을 고 씨 일족으로 보는 근거가 약화되었다. 이와 함께 1749년 간행된 『회본 무자 비고』(絵本武者備考)에 유사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상이 실려 있다는 점이 주목받으면서, '기마무사상'의 주인이 다시 아시카가 다카우지라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한편, 가마쿠라 시대 초기 후지와라 타카노부(藤原隆信)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국보 진고지 삼상(神護寺三像) 중 '전 다이라노 시게모리상'(伝平重盛像)을 다카우지를 그린 그림으로 보는 설이 1995년 일본의 미술사학자 요네쿠라 미치오(米倉迪夫)와 역사학자 구로다 히데오(黒田日出男)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교토 도지인(等持院)에 소장된 다카우지 목상과의 비교, 그림 속 인물이 쓴 관모의 형태가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유행했던 양식과 일치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그림의 화풍이나 양식이 남북조 시대까지 내려오지 않는다는 반론을 제기하며 논쟁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대체로 이 새로운 학설이 인정받는 경향이다.
그 외에도 다카우지를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초상화는 다음과 같다.
-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의 조도지(浄土寺) 소장 속대(束帯, 일본 전통 관복) 차림 초상화.
- 교토시 덴류지(天龍寺) 소장 속대 차림 견본 채색 초상화 (무로마치 시대 후기 작으로 추정).
- 가나가와현립 역사 박물관 소장 기마 자세 초상화 ('정2품 쇼군 미나모토 아손 타카우지 경'(征夷大将軍源朝臣尊氏卿)이라는 명문이 적힌 에도 시대 후기 작품).
- 2017년 발견된 개인 소장 초상화 (토치기현립 박물관 공개): 견본 채색, 속대 차림.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원본을 보고 그린 복제품으로 추정된다. 린자이슈 다이카쿠지파 승려 하쿠에이 토쿠슌(白英徳슌)의 찬(賛)이 붙어 있으며, 찬에는 다카우지를 가리키는 '조주지 전'(長寿寺殿)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46][47]
- 에도 시대에 그려진 니시키에(錦絵) 중 다카우지를 묘사한 작품들: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国芳)의 '태평기 효고 전투'(太平記兵庫合戦)[48],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의 '태평기 합전도'(太平記合戦図), 하시모토 지카노부(橋本周延)의 '아시카가 타카우지 효고 합전도'(足利尊氏兵庫合戦図) 등.
다카우지의 목상(木像)으로는 다음이 알려져 있다.
- 오이타현 구니사키시의 안코쿠지(安国寺) 소장 목상(중요 문화재): 현존하는 다카우지 목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얼굴 표현이 사실적이고 이상화되지 않았으며, 다카우지 생전이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교토시 기타구의 도지인 소장 목상: 아시카가 가문의 보리사(菩提寺)인 도지인에 모셔져 있어 잘 알려져 있다. 몸체 표현은 다소 후대의 조형 양식을 보이지만, 머리 부분은 안코쿠지 목상이나 조도지 초상화와 공통된 도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중세 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 기타 소장처: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세이겐지(清見寺, 분메이 17년(1485년) 이전 작), 교토시 우쿄구 덴류지(16세기 작), 토치기현 사쿠라시 류코지(龍光寺, 간분 6년(1666년) 재흥상),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조쥬지(長寿寺, 겐로쿠 2년(1689년) 재흥상), 토치기현 아시카가시 반나지(鑁阿寺, 에도 시대・19세기 작) 및 젠토쿠지(善徳寺), 토치기현 모카시 노인지(能仁寺).
현대에 들어 제작된 동상이 토치기현 아시카가시의 반나지 참도와 교토부 아야베시 안코쿠지 정(安国寺町)에 세워져 있다.
6. 관련 작품
겐코의 난부터 남북조 시대 성립에 이르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고다이고 천황,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이야기는 40권으로 이루어진 무로마치 시대의 군기 문학 작품인 ''태평기''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 소설 ===
- 요시카와 에이지 『사본 태평기』(私本太平記) (전 13권), 마이니치 신문사, 1959년~1962년. (고단샤 요시카와 에이지 역사시대문고 전 7권, 1990년)
- 야마오카 소하치 『신 태평기』(新太平記) (전 5권), 고단샤, 1971년~1972년. (야마오카 소하치 역사문고 전 5권, 1986년)
- 오모리 류지(大森隆治) 『아시카가 다카우지: 무로마치 막부를 연 남자』(足利尊氏 : 室町幕府を開いた男) (상/하), 시모츠케 신문사(下野新聞社), 1989년 6월.
- 마쓰자키 요지(松崎洋二)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신인물왕래사(新人物往来社), 1990년 3월.
- 무라카미 겐조(村上元三)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상/하) (도쿠마 문고), 도쿠마 서점, 1991년 4월.
-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후지미 쇼보(富士見書房), 1994년 12월.
- 스기모토 소엔코(杉本苑子) 『바람의 군상』(風の群像) (상/하), 일본경제신문사, 1997년 6월.
- 사쿠라다 신야(桜田晋也)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쇼덴샤(祥伝社), 1999년 9월. (1988년 가도카와 서점 발간본 개정판)
- 모리무라 세이이치 『태평기』(太平記) (1) ~ (6) (가도카와 문고), 가도카와 서점, 2004년 12월~2005년 2월.
- 가키네 료스케(垣根涼介) 『극락 정이 대장군』(極楽征夷大将軍), 분게이슌주, 2023년 5월 10일. (제169회 나오키 산주고상 수상작)
=== 드라마 ===
=== 만화 ===
- 유구치 세이코(湯口聖子) 『유메가타리 시리즈 바람의 묘표』(夢語りシリーズ 風の墓標) (1989년 - 1991년, 아키타 쇼텐)
- 사와다 히로후미(沢田ひろふみ) 『산적왕』(山賊王) (2000년 - 2009년, 코단샤)
- 카와베 마사미치(河部真道) 『밴디트 - 위전 태평기 -』(バンデット -偽伝太平記-) (2016년 - 2017년, 코단샤)
- 마츠이 유세이 『도망쳐라! 와카군』(逃げ上手の若君) (2021년 - , 슈에이샤)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주요 적대자로 등장한다.
참조
[1]
문서
His name had originally been written with the characters 高氏,but he later received from Emperor Go-Daigo the right to use those 尊氏, under which he would become famous. According to Sansom (1977:87), in contemporary chronicles he is rarely called with his name, but referred to as Ō-gosho or Dainagon (Great Council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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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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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ikaga Takau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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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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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建武3年(1336年)まで南北朝分裂はしていない。
[25]
문서
建武3年(1336年)以前の所在地は京都、それ以降は南北朝統一まで奈良。
[26]
서적
梅松論
[27]
문서
臥雲日件録抜尤〉享徳4年正月19日条
[28]
웹사이트
日月図軍扇
http://www.kyuhaku.c[...]
[29]
서적
足利尊氏再発見 一族をめぐる肖像・仏像・古文書
吉川弘文館
[30]
서적
源威集
[31]
서적
日本中世の史的展開
文献出版
[32]
서적
続史愚抄
建武2年5月25日
[33]
학술지
後光厳天皇と音楽
吉川弘文館
[34]
백과사전
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35]
서적
日本刀大百科事典
雄山閣
[36]
서적
日本刀大百科事典
雄山閣
[37]
서적
日本刀大百科事典
雄山閣
[38]
서적
日本甲冑100選
秋田書店
[39]
웹사이트
國務大臣が亂臣賊子 足利尊氏に傾倒すはモツテの外と栗原彦三郎氏 ~~中島商相を痛罵
https://hojishinbun.[...]
Nichibei Shinbun
1934-02-04
[40]
웹사이트
足利尊氏敬論で 商相槍玉に擧る 數年前の論文で責められ輕卒だつたと神妙に陳謝杉山氏農村問題で肉薄
https://hojishinbun.[...]
Singapōru Nippō
1934-02-05
[41]
웹사이트
(尊氏問題記事多数)
https://hojishinbun.[...]
Nippu Jiji
1934-02-07
[42]
웹사이트
商相の辭職
https://hojishinbun.[...]
Singapōru Nippō
1934-02-10
[43]
간행물
同盟旬報第3巻第27号(通号082号)
同盟通信社
1939-10-10
[44]
서적
萩原朔太郎全集 第九卷
筑摩書房
1976-05-25
[45]
웹사이트
e国宝に画像と解説有り
https://archive.fo/G[...]
[46]
뉴스
足利尊氏の顔、これで決まり? 中世肖像画の写し発見
https://www.asahi.co[...]
朝日新聞DIGITAL
2017-10-27
[47]
간행물
企画展 名馬と武将
馬の博物館
[48]
디지털자료
国立国会図書館
[49]
문서
師守記
1344-05-08
[50]
문서
尊卑分脈
[51]
문서
師守記・門葉記
[52]
서적
下野宇都宮氏
戎光祥出版
[53]
문서
瑞石歴代雑記
[54]
웹사이트
足利市イメージキャラクター「たかうじ君」を紹介します!
https://www.city.ash[...]
足利市役所
2023-02-01
[55]
문서
해동제국기
[56]
문서
규슈, 주고쿠, 시코쿠
[57]
문서
고다이고 천황의 휘
[58]
문서
진주다이쇼군
[59]
서적
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 7
이와나미 쇼텐
[60]
문서
臥雲日件録抜尤
1455-01-19
[61]
문서
일월도군선
1351-01-07
[62]
서적
コラム 戦場の足利尊氏
吉川弘文館
[63]
문서
조울증 추측
[64]
문서
다카우지 성격 분석
[65]
문서
속사우초
1337-05-25
[66]
서적
後光厳天皇と音楽
吉川弘文館
[67]
서적
はじめに
[68]
서적
おわりに
[69]
서적
[70]
서적
[71]
서적
亀田 2017, あとがき
[72]
서적
鎧をまとう人びと
吉川弘文館
[73]
간행물
守屋家本騎馬武者像の像主について
[74]
서적
肖像画を読む
角川書店
[75]
뉴스
見慣れた肖像画は別人?「足利尊氏像」→「騎馬武者像」 源頼朝像の真偽も…
https://www.sankei.c[...]
産経新聞WEST
2013-03-27
[76]
문서
武田左京亮文秀像に寄せた蘭坡景茝の賛文
[77]
서적
肖像画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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