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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황정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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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황정통기』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저술한 역사서로, 일본의 신화 시대부터 고무라카미 천황 즉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1338년부터 1341년 사이에 쓰여졌으며,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일본 군주의 행동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다. 주요 설로는 고무라카미 천황을 위한 제왕학 교재, 도고쿠 무사들을 남조로 끌어들이기 위한 권유 책자, 지카후사 자신의 철학적 사색을 담은 철학서 등이 있다. 이 책은 남북조 시대에 남조 지지 세력을 고무하고, 후대 일본의 황국사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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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황정통기
기본 정보
기타바타케 치카후사
기타바타케 치카후사의 초상
저자기타바타케 치카후사
언어일본어
주제일본사
장르역사서
출판일1343년 - 1349년
내용
목적남조의 정당성 주장 및 후손을 위한 지침
구성제1권: 진무 천황부터 닌카 천황까지
제2권: 고코 천황부터 고다이고 천황까지
제3권: 역사관 및 국가관 설명
특징신도적 관점에서의 역사 해석
대의명분 강조
남조 옹호
영향
후대에 미친 영향존왕양이 사상에 영향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반
황국사관 형성에 영향
관련 정보
관련 인물고다이고 천황
관련 사건겐무 신정
현대어 번역다나카 미나오, 고지마 노리유키

2. 역사서로서의 내용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일본서기를 연구하고 이세 신궁의 신관 와타라이 이에유키와 교류하며 이세 신토의 영향을 받았다.[5] 이러한 배경은 『신황정통기』에 반영되었다. 1338년부터 1341년까지 히타치국 오다 요새에서 저술되었고, 1343년 세키 요새에서 수정되었다.[5]

1339년 가을, 고다이고 천황 사후 고무라카미 천황 즉위 무렵 초고가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6] 현존하는 판본은 원본이 유실된 후 필사된 것으로, 원본과 다소 차이가 있다.[6] 특히 "이 책은 어떤 아이에게 바쳐진 것이다"라는 문장은 고무라카미 천황 또는 유키 지카토모에게 헌정된 것으로 해석된다.[6]

『신황정통기』는 신화 시대부터 고무라카미 천황 즉위까지를 다루며, 지카후사의 정치적, 윤리적 신념에 따른 개인적 관찰이 덧붙여졌다. 이는 일본 군주에게 적절한 행동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고,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남북조 시대에 남조 지지 세력을 고무했으며, 북조에 대한 군사적 열세 속에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일본과 천황들의 역사를 설득력 있게 분석하여 초기부터 남조와 북조 양측에 널리 읽혔다. 그러나 아시카가 다카우지 비판은 북조 측의 호응을 얻지 못해, 남조 영향권 밖 필사본에서는 생략되었다.

지카후사는 일본 삼종의 신기 소유를 일본 군주 인정의 절대적 조건으로 주장했다.[7] 또한 천황과 조정 귀족이 통치하고 사무라이 등이 그들의 지도를 받는 것이 이상적인 정부 형태라고 보았다.

남북조 재통합 후, 오즈키 하루토미가 아시카가 막부의 영향 아래 『신황정통기』의 속편을 저술하여 북조의 정통성을 정당화했다.

2. 1. 개요

2. 2.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점

2. 3. 조큐의 난(承久の乱)

조큐의 난(承久の乱)에 대해 《신황정통기》는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막부 타도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무가(武家)의 정치적 역할을 인정하는 복합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평가는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왕권과 무가 정권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일본 정치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신황정통기》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훈공은 컸지만 천하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군주로서 달갑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군다나 요리토모의 자손이 끊기고, 호조 마사코호조 요시토키가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고토바 상황이 막부를 타도하려 한 것은 일단 납득할 만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라카와 천황, 도바 천황의 치세부터 옛 정치의 모습이 쇠퇴했고, 고시라카와 천황 치세에 병란이 일어나 간신이 세상을 어지럽혔다고 지적한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난을 평정하여 수도의 전란을 진정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했으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사후에도 막부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막부를 무너뜨리려면 이를 능가하는 덕정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다면 상천(上天)도 돕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왕자의 군사는 죄 있는 자만을 토벌해야 하며, 요리토모가 고관에 오르고 슈고 직에 임명된 것은 고시라카와 법황의 칙재에 의한 것이므로 요리토모가 제멋대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시토키 역시 인망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막부를 추토하려 한 것은 군주의 과실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모반을 일으킨 아시카가 다카우지(조적)가 우연히 전쟁에 승리한 것과는 다르다고 덧붙인다.

결론적으로 《신황정통기》는 고토바 상황의 막부 타도 기도가 때가 이르지 않았고 하늘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신하가 군주를 업신여기는 것은 최악의 비도이므로, 결국에는 황실의 위덕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군주는 진정한 덕정을 행하고 조정의 권위를 확립하여 적을 무너뜨릴 정도의 정세를 만든 후에 거병해야 하며, 세상의 정세를 살펴 천명과 민의에 따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2. 4. 간무 천황과 삼한(三韓)

간무 천황이 '일본이 삼한과 동종(同種)'이라고 언급한 일본의 옛 문헌들을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는 기록이 《신황정통기》에 나타난다.[13] 이 기록은 "외국의 어떤 책 속에 '일본은 오나라 태백(太伯)의 후예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同種)의 나라라고 쓰여 있던 서적을 간무 천황 때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라는 구절로,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13]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일본서기사기》(日本書紀私記) 홍인사기(弘仁私記) 서문에는 《제왕계도》(帝王系圖)라는 서적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해당 주석에서는 "아메미야(天孫)의 후예를 모두 제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혹은 신라·고구려에 이르러 국왕이 되고, 혹은 민간에 있는 자가 제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엔랴쿠 연간에 전국에 부(符)를 내려서 이것을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민간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엔랴쿠 연간, 즉 간무 천황 재위 기간에 이러한 서적을 불태웠다는 기록은 다른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13]

에도 시대의 학자 마쓰시타 겐린은 자신의 저서 《이칭일본전》에서 조선의 《동문선》(東文選) 권101 '성주고씨가전'을 인용하며, '일본에서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여성들이 왔다'는 고을나 전설과 《일본서기》의 덴지 천황 8년에 탐라의 왕자 구마기가 왜국에 조공하여 오곡 씨앗을 주었다는 기록이 서로 통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마쓰시타 겐린은 '일본에서 여성을 탐라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이 일본 측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신황정통기》의 해당 기록과 유사한 사례일 수 있다는 추측을 제시했다.[14][15]

3. 사본(寫本)

저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초고본이나 수정본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히라타 도시하루에 따르면 초고본 계통의 사본으로써 미야지 하루쿠니 소장본(1책, 잔결)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며, 이를 토대로 류몬 문고 소장 아토본(1책, 잔결) 같은 형태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수정본 계통으로는 하쿠산히메 신사 소장본(4책, 에이쿄 10년 즉 서기 1438년 필사. 이른바 시라야마본)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시라야마본은 《신황정통기》의 원래 모습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것과 거의 같은 무렵에 옮겨쓴 전본이 일본 고쿠가쿠인 대학 소장본이다.

고쿠가쿠인 대학 소장본은 소장자이자 일본의 사학자였던 이노쿠마 노부오(1882~1963)의 이름을 따서 '이노쿠마 노부오 씨 구장본'이라고도 불리며, 총 3권 3책으로 표제에 상중하로 적혀 있다. 상권은 신대부터 인황 제29대까지, 중권은 제30대부터 제73대까지, 하권은 제74대부터 제96대까지이다. 1969년 이와나미 서점에서 일본고전문학대계87로 간행된 《신황정통기 마스카가미》는 이 고쿠가쿠인 대학 소장본을 저본으로 삼아 이와사 마사시가 교주한 것이다. 이와사 마사미는 이후 1975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단일본으로 재간행된 《신황정통기》의 교주도 맡았다. 이와사의 교주본은 한국의 남기학이 신황정통기를 번역하면서 저본으로 사용하였기도 하다.

3. 1. 초고본 계통

3. 2. 수정본 계통

3. 3. 「어느 어린아이」(或童蒙)

《신황정통기》 「시라야마본」 등 주요 저본에 있는 오서(간기)에는 「어느 어린아이」(或童蒙)를 위해 다 낡은 붓을 들어 쓰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어느 어린아이」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애초에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말한 점에서 의론이 분분하며,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상세한 것은 #《신황정통기》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항목의 각 설들을 참조한다.

4. 《신황정통기》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신황정통기》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정치론의 관점에서 지카후사와 중세 공가 귀족의 정치사상, 국가의식을 파악하려는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지카후사의 역사의식이나 역사서로서의 성격을 밝히려는 연구이다. 그러나 《신황정통기》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일본 학계에서도 확정된 설이 없다.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어렸던 고무라카미 천황을 위한 제왕학 교재였다는 설이다. 이 경우 《역경》, 《맹자》의 영향이 주로 거론된다. 이는 단순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덕이 없는 군주는 왕통이 단절되고 다른 계통으로 정통성이 옮겨간다'는 엄격한 유교적 이론, 즉 역성혁명론이 아닌 역계혁명론을 강조한 것이다. 지카후사는 고무라카미 천황에게 자신의 왕통을 정통으로 잇기 위해서는 자기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욕심을 버리고 백성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훈계한다.

두 번째 설은 유키 지카토모 등 도고쿠 무사들을 남조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전용 서적이었다는 설이다. 무사들이 일본 역사와 천황에 대해 쉽게 이해하도록 기존 사서보다 간략하게 서술하고, 유키 무네히로, 유키 지카미쓰 등 남조에 충성한 인물들을 포장하여 지카토모 등을 포섭하려 했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는 이 설이 통설에 가까웠으나, 이후 지지를 잃었다.

세 번째 설은 '선이란 무엇인가', '정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를 지카후사 자신이 묻고 답하는 철학서라는 설이다. 정적인 현재의 선은 유학의 유덕군주론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선의 지속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칙이나 삼종신기신토 논리로 보증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동적인 선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 《신황정통기》의 내용에 흔들림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며,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섭리를 행동으로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즉,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라는 한 인간의 생애 자체가 살아있는 철학서라는 것이다.

지카후사는 『일본서기』를 주의 깊게 연구했으며, 이는 『신황정통기』의 서사 구조에 반영되었다. 그는 이세 신궁의 신토 사제 와타라이 이에유키와도 친분이 있었으며, 이세 신토 이론의 명확화에 기여한 와타라이의 관점은 『신황정통기』의 어조에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1338년부터 1341년까지 일본 히타치국(현재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의 오다 요새에서 쓰여졌으며, 1343년 세키 요새에서 수정되었다.[5]

텍스트의 상당 부분은 1339년 가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하고 고무라카미 천황이 즉위할 무렵 초고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학자들은 원본 텍스트가 유실되었고, 현존하는 모든 텍스트는 원본과 약간 다른 필사본이라고 인정한다. 긴박감이 글에 스며들어 있는데, 이는 젊은 고무라카미 천황(1339-1368 재위)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 때문일 수 있다.[6] 작품 마지막 페이지의 "이 책은 어떤 아이에게 바쳐진 것이다"라는 문장은 고무라카미 천황 또는 유키 지카토모에게 헌정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4. 1. 주요설

지카후사는 일본서기를 주의 깊게 연구했으며, 이는 그의 『신황정통기』 서사 구조에 반영되었다. 그는 이세 신궁의 신토 사제 와타라이 이에유키와도 잘 알고 지냈다. 와타라이의 연구는 이세 신토 이론을 명확하게 했으며, 이러한 관점이 『신황정통기』의 어조에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1338년부터 1341년까지 일본 히타치국(현재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의 오다 요새에서 쓰여졌으며, 1343년 세키 요새에서 수정되었다.[5]

텍스트의 상당 부분은 1339년 가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 고무라카미 천황이 즉위할 무렵에 초고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학자들은 원본 텍스트가 유실되었고, 현존하는 모든 텍스트 버전은 원본과 약간 다른 필사본 버전이라고 인정한다. 긴박감이 글쓰기에 스며들어 있는데, 이는 서사가 젊은 고무라카미 천황(1339-1368 재위)을 교육시키기 위한 구체적이고 더 좁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6]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 책은 어떤 아이에게 바쳐진 것이다"라는 특이한 문장은 고무라카미 천황 또는 유키 지카토모에게 헌정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 고무라카미 천황을 위한 제왕학(帝王學) 교재 ===

신황정통기》의 집필 목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은 지카후사가 초고를 집필할 당시 12세였던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을 영명한 군주로 교육하기 위한 제왕학 서적이었다는 설이다.[19] 이 설은 에도 시대부터 존재했으나, 당시에는 지카후사의 오서(奥書)가 알려지지 않아 「어느 어린아이」와의 관련성은 언급되지 않았다.[6] 오서가 알려지면서 「어느 어린아이」가 고무라카미 천황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나왔다.[6]

아가쓰마 겐지는 《주역》 몽괘(蒙卦) 및 육오(六五)의 효사(爻辞)를 인용하여, 여기서 말하는 동몽(童蒙)이란 「군주」를 뜻하며, 바로 고무라카미 천황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7] 아가쓰마에 따르면 《신황정통기》는 덕(徳)에 의한 '''바른 다스림'''(正理)의 흐름을 설명하는 것이라 한다. 즉 왕통의 계승과 단절, 왕실뿐 아니라 한 집안의 가계 흥망은 「정도」(正道), 「유덕」(有徳), 「적선」(積善)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주로 『주역』과 『맹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 밖에도 『대학』, 『중용』, 대승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사상 등의 영향도 있다고 여겨진다.

지카후사는 군주의 조건으로 삼종신기 보유를 왕위의 필수불가결 조건으로 삼았다. 아가쓰마는 이를 단순한 물질적 숭상이 아니라, 각각의 신기를 삼달덕(三達徳)에 대응시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사상적인 상징으로써 군주의 근거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지카후사는 자신의 사상을 드러냄에 있어 매우 솔직했다. 예를 들어, 고다이고 천황에 대해서도 그 정책을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통렬하게 비판했다. 반대로 무가라 하여도 바른 정치를 행한 점은 평가했다. 조큐의 난을 일으킨 고토바 천황은 비난했지만, 호조 요시토키호조 야스토키가 그 뒤 선정을 펼쳐 사회가 안정되었음을 평가하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의사에 충실했던 것은 야스토키다」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오카노 도모히코는 아가쓰마의 주역설을 지지하며, 고무라카미 천황을 명군으로 키워내기 위한 제왕학 서적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카노에 따르면, 지카후사는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군주의 ‘덕’에 따라 일본 왕실 내부에서 '왕통'들간에 「정통」이 이동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신황정통기》는 「왕통 안에서의 혁명」 내지는 「역계혁명」(易系革命)이라는 사상을 드러낸 책이라고 하였다. 즉, 아직 어렸던 고무라카미 천황에게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백성을 위해 힘쓸 것과, 정당한 혈맥과 삼종신기를 갖춘 천황이라도 그 자리를 잃을 수 있으며, 북조 등 다른 왕통에 패하여 자신의 왕통이 단절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엄혹한 현실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한다.

=== 도고쿠(東国) 무사들에 대한 권유 책자 ===

유키 지카토모를 대표로 하는 도고쿠(東国) 무사들을 남조(南朝)로 끌어들이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는 설이다. 무사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일본의 역사를 기존 역사서보다 쉽게 쓰고, 유키 무네히로(지카토모의 아버지)나 유키 지카미쓰(지카토모의 동생)의 남조에 대한 충성심을 칭찬함으로써 지카토모 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한때는 통설에 가까웠지만, 이후 지지는 다소 줄어들었다.

1965년, 마쓰모토 신파치로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주군인 고무라카미 천황을 "어떤 동몽(童蒙)" = "어떤 어리석은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반론했다. 그리고 "동몽"은 유키 지카토모를 가리키는 것이며, 최후까지 남조를 위해 싸운 유키 무네히로(지카토모의 아버지)나 유키 지카미쓰(지카토모의 동생)의 충성심을 《신황정통기》에서 칭찬함으로써, 지카토모를 남조 측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 설은 당시 사토 신이치나 나가하라 케이지 등 일본사 연구의 대표적 연구자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아 거의 통설에 가까운 지위를 차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고무라카미 천황에 대한 제왕학의 서적 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가쓰마 겐지가 《주역》에 의해 동몽 = 군주 설을 주장한 이후, 전성기에 비해 지지 세력이 쇠퇴했다.

사카모토 타로 역시, 지카토모는 "동몽"이라고 불릴 나이가 아니며, 확실히 《신황정통기》는 한자와 가나를 섞어 썼고, 분량, 표기, 기술 모두에서, 《일본서기》 등 그 전까지 있었던 역사서보다 훨씬 읽기 쉽지만, 과연 무사들을 꾀어들이는 수단으로 유효할지는 의문이라고 권유서 설(勧誘書説)을 부정했다.

구보타 다카아키도, 이 시기에 지카후사가 지카토모에게 보낸 서간으로서 《간조 서(関城書)》가 있는데, 《간조 서》와 《신황정통기》에서는 치카후사의 자세가 전혀 달라, 동일 저자가 동일 대상자에게 동시기에 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자신과의 대화 ===

《신황정통기》는 '선(善)이란 무엇인가', '정통(正統)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자신의 사색을 담은 철학서라는 설이 있다.

정치학 연구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신황정통기》를 「행동을 위한 책」(行動の書)으로 규정하고, 실천적 의욕으로부터 동태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정치론이라고 평가했다. 마루야마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정치적 실천이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고 그 내면성에 따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한 사상가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카후사가 「정도」(正直, 심정 윤리)와 「안민」(安民, 책임 윤리)을 혼동하고 있어, 《신황정통기》는 객관적인 사상서로는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인 사상서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사토 마사히데는 「영원」(永遠)과 「무궁」(無窮)을 구분하여, 「정통」의 시간 의식은 「영원」이 아니라 「무궁」, 즉 지속됨이 정통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신황정통기》가 유학의 유덕군주론에 가까운 것은 이 때문이며, 그 본질에는 「현재 주체의 행위가 '정통'의 지속됨을 생성케 한다」는 사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구보타 고메이는 《신황정통기》가 쓰레즈레구사와 유사하게 지카후사 자신이 묻고 답하는 성격의 철학서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황정통기》에 대상이 오락가락하는 듯한 서술이 보이는 것은 특정 독자를 상정하고 쓴 것이 아니라 지카후사 자신의 자문자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구보타에 따르면, 지카후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이어지는 선의 존재를 이론화하고자 했으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천양무궁」(天壌無窮)이나 삼종신기로 대표되는 신토 사상을 통해 태초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선이 이어져 왔음을 보증하려 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선의 지속성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에, 사색하는 철학자인 동시에 행동하는 정치가였던 지카후사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표현하려 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신황정통기》를 한국어로 번역한 남기학은 종래의 연구들이 ‘동몽’이란 자구의 해석에 치우친 것에 의문을 표시하는 구보타의 견해에는 동의하면서도 《신황정통기》를 사변적인 '자기와의 대화'로 보는 것은 그것이 쓰여진 급박한 정치현실을 간과한 해석이라고 지적하였다.

4. 1. 1. 고무라카미 천황을 위한 제왕학(帝王學) 교재

신황정통기》의 집필 목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은 지카후사가 초고를 집필할 당시 12세였던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을 영명한 군주로 교육하기 위한 제왕학 서적이었다는 설이다.[19] 이 설은 에도 시대부터 존재했으나, 당시에는 지카후사의 오서(奥書)가 알려지지 않아 「어느 어린아이」와의 관련성은 언급되지 않았다.[6] 오서가 알려지면서 「어느 어린아이」가 고무라카미 천황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나왔다.[6]

아가쓰마 겐지는 《주역》 몽괘(蒙卦) 및 육오(六五)의 효사(爻辞)를 인용하여, 여기서 말하는 동몽(童蒙)이란 「군주」를 뜻하며, 바로 고무라카미 천황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7] 아가쓰마에 따르면 《신황정통기》는 덕(徳)에 의한 「'''바른 다스림'''」(正理)의 흐름을 설명하는 것이라 한다. 즉 왕통의 계승과 단절, 왕실뿐 아니라 한 집안의 가계 흥망은 「정도」(正道), 「유덕」(有徳), 「적선」(積善)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주로 『주역』과 『맹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 밖에도 『대학』, 『중용』, 대승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사상 등의 영향도 있다고 여겨진다.

지카후사는 군주의 조건으로 삼종신기 보유를 왕위의 필수불가결 조건으로 삼았다. 아가쓰마는 이를 단순한 물질적 숭상이 아니라, 각각의 신기를 삼달덕(三達徳)에 대응시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사상적인 상징으로써 군주의 근거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지카후사는 자신의 사상을 드러냄에 있어 매우 솔직했다. 예를 들어, 고다이고 천황에 대해서도 그 정책을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통렬하게 비판했다. 반대로 무가라 하여도 바른 정치를 행한 점은 평가했다. 조큐의 난을 일으킨 고토바 천황은 비난했지만, 호조 요시토키호조 야스토키가 그 뒤 선정을 펼쳐 사회가 안정되었음을 평가하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의사에 충실했던 것은 야스토키다」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오카노 도모히코는 아가쓰마의 주역설을 지지하며, 고무라카미 천황을 명군으로 키워내기 위한 제왕학 서적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카노에 따르면, 지카후사는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군주의 ‘덕’에 따라 일본 왕실 내부에서 '왕통'들간에 「정통」이 이동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신황정통기》는 「왕통 안에서의 혁명」 내지는 「역계혁명」(易系革命)이라는 사상을 드러낸 책이라고 하였다. 즉, 아직 어렸던 고무라카미 천황에게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백성을 위해 힘쓸 것과, 정당한 혈맥과 삼종신기를 갖춘 천황이라도 그 자리를 잃을 수 있으며, 북조 등 다른 왕통에 패하여 자신의 왕통이 단절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엄혹한 현실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한다.

4. 1. 2. 도고쿠(東国) 무사들에 대한 권유 책자

유키 지카토모를 대표로 하는 도고쿠(東国) 무사들을 남조(南朝)로 끌어들이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는 설이다. 무사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일본의 역사를 기존 역사서보다 쉽게 쓰고, 유키 무네히로(지카토모의 아버지)나 유키 지카미쓰(지카토모의 동생)의 남조에 대한 충성심을 칭찬함으로써 지카토모 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한때는 통설에 가까웠지만, 이후 지지는 다소 줄어들었다.

1965년, 마쓰모토 신파치로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주군인 고무라카미 천황을 "어떤 동몽(童蒙)" = "어떤 어리석은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반론했다. 그리고 "동몽"은 유키 지카토모를 가리키는 것이며, 최후까지 남조를 위해 싸운 유키 무네히로(지카토모의 아버지)나 유키 지카미쓰(지카토모의 동생)의 충성심을 《신황정통기》에서 칭찬함으로써, 지카토모를 남조 측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 설은 당시 사토 신이치나 나가하라 케이지 등 일본사 연구의 대표적 연구자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아 거의 통설에 가까운 지위를 차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고무라카미 천황에 대한 제왕학의 서적 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가쓰마 겐지가 《주역》에 의해 동몽 = 군주 설을 주장한 이후, 전성기에 비해 지지 세력이 쇠퇴했다.

사카모토 타로 역시, 지카토모는 "동몽"이라고 불릴 나이가 아니며, 확실히 《신황정통기》는 한자와 가나를 섞어 썼고, 분량, 표기, 기술 모두에서, 《일본서기》 등 그 전까지 있었던 역사서보다 훨씬 읽기 쉽지만, 과연 무사들을 꾀어들이는 수단으로 유효할지는 의문이라고 권유서 설(勧誘書説)을 부정했다.

구보타 다카아키도, 이 시기에 지카후사가 지카토모에게 보낸 서간으로서 《간조 서(関城書)》가 있는데, 《간조 서》와 《신황정통기》에서는 치카후사의 자세가 전혀 달라, 동일 저자가 동일 대상자에게 동시기에 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4. 1. 3.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자신과의 대화

《신황정통기》는 '선(善)이란 무엇인가', '정통(正統)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자신의 사색을 담은 철학서라는 설이 있다.

정치학 연구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신황정통기》를 「행동을 위한 책」(行動の書)으로 규정하고, 실천적 의욕으로부터 동태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정치론이라고 평가했다. 마루야마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정치적 실천이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고 그 내면성에 따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한 사상가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카후사가 「정도」(正直, 심정 윤리)와 「안민」(安民, 책임 윤리)을 혼동하고 있어, 《신황정통기》는 객관적인 사상서로는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인 사상서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사토 마사히데는 「영원」(永遠)과 「무궁」(無窮)을 구분하여, 「정통」의 시간 의식은 「영원」이 아니라 「무궁」, 즉 지속됨이 정통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신황정통기》가 유학의 유덕군주론에 가까운 것은 이 때문이며, 그 본질에는 「현재 주체의 행위가 '정통'의 지속됨을 생성케 한다」는 사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구보타 고메이는 《신황정통기》가 쓰레즈레구사와 유사하게 지카후사 자신이 묻고 답하는 성격의 철학서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황정통기》에 대상이 오락가락하는 듯한 서술이 보이는 것은 특정 독자를 상정하고 쓴 것이 아니라 지카후사 자신의 자문자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구보타에 따르면, 지카후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이어지는 선의 존재를 이론화하고자 했으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천양무궁」(天壌無窮)이나 삼종신기로 대표되는 신토 사상을 통해 태초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선이 이어져 왔음을 보증하려 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선의 지속성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에, 사색하는 철학자인 동시에 행동하는 정치가였던 지카후사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표현하려 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신황정통기》를 한국어로 번역한 남기학은 종래의 연구들이 ‘동몽’이란 자구의 해석에 치우친 것에 의문을 표시하는 구보타의 견해에는 동의하면서도 《신황정통기》를 사변적인 '자기와의 대화'로 보는 것은 그것이 쓰여진 급박한 정치현실을 간과한 해석이라고 지적하였다.

4. 2. 기타

4. 2. 1. 일본 역사에 대한 개설서

에도 시대게이안 2년(1649년) 2월, 《신황정통기》는 후게쓰 소치에 의해 간본이 출간되었다. 하야시 라잔 등에 의해 에도 막부의 공식 사서인 《본조통감》(간분 10년, 1670년)에는 "정통을 기술함에 간략하고 보기 쉬우니, 오늘날에도 보존되어 세상에 돌아다닌다"라고 하여 일본사를 개관하는 편리한 책이라고 평가받았다. 20세기의 일본사 연구자 히라타 토시하루 또한 알기 쉬운 일본어 개설서로써의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구보타 고메이는 역사서로서 읽고 이해하기 쉬운 책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기술은 객관적이지 않은 가운데 《아즈마카가미》나 《마스카가미》 같은 다른 중세의 역사책들과도 비교해도 이질적이다. 또한 에도 시대 사람들도 대부분은 이 책을 단순한 역사 개설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4. 2. 2. 신국(神国) 사상을 설명한 책

구보타 오사무(久保田収)는 《기타바타케 부자와 아시카가 형제》(北畠父子と足利兄弟)에서 지카후사의 확신에 넘치는 신토관 ・ 국가관 ・ 정치관에는 후세의 독자마저 기어이 분기시켜 버릴 정도의 기백이 엿보인다고 하였다.

일본의 《국사대사전》 「신황정통기」 항목(오스미 카즈오 집필) 또한 「명확한 역사 태도와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명석한 문장으로 인해 (후략)」라고 이 책의 집필 목적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왕통의 이동을 유학적인 역사론과 이세 신토로 정당화하려 하였다, 중세 일본의 신토적인 역사론 ・ 신국사상을 대표하는 고전이라고 하였다.

기타바타 지카후사는 일본서기를 주의 깊게 연구했으며, 이세 신궁의 신토 사제인 와타라이 이에유키와도 잘 알고 지냈다. 와타라이의 연구는 이세 신토의 이론을 명확하게 했으며, 이러한 관점이 『신황정통기』의 어조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일본이 신국(神国)이라는 사상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4. 2. 3. 국위(国威)를 널리 드날리기 위한 책

이스라엘의 역사 연구자 벤 아미 실로니는 일본 왕실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 유지된 왕조라는 이른바 「만세일계」의 주장에 대해 일본의 자국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가로써는 일본보다 오래되었으나 역대 왕조가 일본보다 단명했던 중국에 감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있었다고 하였다. 중국인은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 마음에 들어해 눈여겨 두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고 한다.[20]

일본인들도 왕조의 수명의 길고 짧음에 관한 중국과의 비교론에 열중했다고 하였다. 《신황정통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20]

중국은 특히 난역으로 인해 질서가 없는 나라이다. … 복희(伏羲) 이후 중국에서는 천자의 씨성이 36번 바뀌었으니 황위 계승의 어지러움이 극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직 우리나라(일본)만이 천지개벽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뜻에 따라) 황위를 계승하는 데 어지러움이 없다. 한 종성 중에서 때때로 방류에 황위가 전해지는 일은 있어도 또한 저절로 본류에 돌아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신명의 서약이 명확하기 때문이며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다른 까닭이기도 하다.

5. 《신황정통기》 그 후의 이야기

남북조 합일(1392년) 이후, 북조에 정통성이 있다는 북조정통론(北朝正統論)을 제창한 무로마치 막부의 영향으로 내용이 개수되거나, 오즈키 하루토미가 저술한 《속신황정통기》처럼 그 ‘속편’을 자처하며 저자 지카후사의 논 자체를 부정하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21]

에도 시대미토번도쿠가와 미쓰쿠니는 번 단위의 대규모 편찬 사업이었던 《대일본사》에서 지카후사의 사상을 높게 평가하였다.[21][8] 에도 막부 안에서도 가마쿠라 싯켄 야스토키의 선례 등을 인용하여 「무가에 의한 도쿠가와 정치」의 정당성을 말하는 의견이 나타났다.[21]

미토학과 결부된 《신황정통기》는 훗날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황국사관에도 영향을 주었다.[21][8]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는 거꾸로 국수주의적인 입장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유교불교, 심지어 일본 고유의 신토 가운데서도 이단시되던 이세 신토의 영향을 진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이유로, 《신황정통기》는 중정(重訂)이라는 이름 아래 개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지카후사의 사상은 다시금 부정당해야 했다. 다만 중정 작업을 거친 《신황정통기》가 세간에 정착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21]

《신황정통기》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다시금 흥륭한 것은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패전 뒤 오래 지나서의 일이었다.[21] 오늘날, ''신황정통기''는 문학적, 역사적 가치 자체로 평가받고 있다.[8]

6. 평가

구보타 고메이(窪田 弘)는 《신황정통기》가 역사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저자 지카후사가 단순히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사상을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명쾌하게 서술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불가사의한 서적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을 읽은 논자들은 지카후사가 특정한 사상을 명쾌하게 서술했다고 단정하고, 그 사상에 찬동하거나 강렬한 혐오감을 느껴 거부하기도 한다. 구보타는 지카후사가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지적하며, 《신황정통기》 본문 및 그 평석을 읽을 때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쿠보타 타카아키 또한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다.

참조

[1] 논문 “A Living Past as the Nation’s Personality”: Jinnō shōtōki, Early Shōwa Nationalism, and Das Dritte Reich http://shinku.nichib[...] 2012-11-04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Political thought in Japanese historical writing: from Kojiki (712) to Tokushi Yoron (1712)
[4] 문서
[5] 서적 Jinnō Shōtōki
[6] 서적 Japanese historians and the national myths, 1600–1945: the age of the gods and Emperor Jimmu
[7] 문서
[8] 문서
[9] 서적 神皇正統記に現れたる政治観 みすず書房
[10]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11] 서적 日本思想全史
[12] 서적 神皇正統記に現れたる政治観 みすず書房
[13] 서적 신황정통기 소명출판
[14] 서적 이칭일본전
[15] 서적 전쟁의 문헌학 열린책들 2017
[16] 간행물 『神皇正統記』の歴史観
[17] 웹사이트 神皇正統記 増鏡 - 岩波書店 https://www.iwanami.[...]
[18] 웹사이트 神皇正統記 - 岩波書店 https://www.iwanami.[...]
[19] 간행물 神皇正統記と愚管抄
[20]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1] 서적 日本思想全史
[22] 서적 신황정통기 소명출판
[23] 뉴스 조선일보 1938년 2월 26일자 조선일보 193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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