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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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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은 1970년대 북아일랜드 분쟁 중 발생한 길퍼드 및 울위치 펍 폭탄 테러와 관련되어 각각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길퍼드 4인은 1975년 폭탄 테러 혐의로, 매과이어 7인은 폭발물 관련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이후 경찰의 증거 조작과 강압적인 심문이 드러나면서 1989년과 1991년에 유죄 판결이 파기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고, 이후 사법 개혁의 계기가 되었으며, 정부의 공식 사과와 보상금 지급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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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개요
주제억울하게 테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두 단체의 집단 명칭
관련 사건길퍼드 선술집 폭파 사건
맥과이어 가족
길퍼드 4인
구성원게리 콘론
폴 힐리어
패트릭 암스트롱
캐롤 리처드슨
유죄 판결1975년
석방1989년
혐의길퍼드 선술집 폭파 사건 연루
근거허위 자백 및 조작된 증거
맥과이어 7인
구성원앤 맥과이어
패트릭 맥과이어
빈센트 맥과이어
패트릭 오닐
프리다 린
패트릭 조셉 맥클로리
사라 베넷
유죄 판결1976년
석방1991년
혐의길퍼드 4인에게 폭탄 제조 물질 제공
근거조작된 과학적 증거
정의 구현 노력
주요 활동재심 청구
진실 규명 캠페인
책임자 처벌 요구
결과유죄 판결 취소 및 무죄 선고
사회적 영향
영화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 - 게리 콘론의 실화를 바탕으로 함
중요성사법 시스템의 오류 강조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 방식 비판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호의 중요성 강조

2. 배경

1970년대 영국 사회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영향으로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 의한 테러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길퍼드 및 울위치 펍 폭탄 테러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테러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확산되면서, 영국 경찰은 범인을 신속하게 검거해야 한다는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압박에 직면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진행된 수사 과정은 결국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등 무고한 이들이 테러범으로 잘못 지목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이 사건들은 당시 영국 사회의 불안감과 경찰의 성급한 수사, 사법 시스템의 오류 가능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다.

2. 1.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의 테러 활동

1975년 10월 22일 런던의 올드 베일리에서 길퍼드 4인은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저지른 폭탄 테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어서 매과이어 7인은 폭탄 테러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폭발물을 취급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두 그룹의 유죄 판결은 결국 "위험하고 만족스럽지 않다"[2]는 판결을 받았고, 15년에서 16년 동안 복역한 후 각각 1989년과 1991년에 파기되었다. 이는 IRA 테러 혐의 적용 과정과 영국 사법 시스템의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외에도 여러 명이 폭탄 테러와 관련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3] 그중 6명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이 혐의는 철회되었다.[4]

이러한 오판 논란 이후, 1989년 10월 영국 정부는 항소 법원 판사 존 메이 경을 임명하여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의 유죄 판결에 대한 사법 조사를 수행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는 재판장인 린밍턴 남작 존 도널드슨 경을 비판했으며, 과학적 증거 처리의 부적절성을 밝혀내고 유죄 판결이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며 항소 법원에 재회부를 권고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 규명이나 제도 개선을 위한 실질적인 후속 조치는 미흡했다는 비판이 있다.

길퍼드 및 울위치 폭탄 테러와 관련하여, 또는 자료 제공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은 기소되지 않았다. 세 명의 경찰관은 조사 결과에 따라 사법 방해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93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6]

사건 조사를 통해 비밀 증언을 포함하여 700개가 넘는 문서가 수집되었으며, 이 문서는 2020년 1월 1일에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19년 12월 31일, 영국 내무부는 모든 문서를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회수하여 정부 통제 하에 두었다.[7] 해당 파일은 현재까지 봉인되어 있어[8][9], 사건의 진상 규명과 투명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 2. 반테러 법과 경찰의 강압 수사

1975년 10월 22일, 런던의 올드 베일리 법원에서 길퍼드 4인은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저지른 폭탄 테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어서 매과이어 7인 역시 폭탄 테러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폭발물을 다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유죄 판결은 훗날 "위험하고 만족스럽지 않다"[2]는 평가를 받으며, 길퍼드 4인은 15년, 매과이어 7인은 16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각각 1989년과 1991년에 판결이 파기되었다.

이 사건들과 관련하여 여러 사람이 추가로 기소되었으며,[3] 그중 6명은 살인 혐의까지 받았으나 해당 혐의는 나중에 철회되었다.[4]

사건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1989년 10월 영국 정부는 항소 법원 판사였던 존 메이 경에게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의 의심스러운 유죄 판결에 대한 사법 조사를 맡겼다. 조사 결과,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린밍턴 남작 존 도널드슨 경의 재판 진행 방식이 비판받았다. 또한, 사건과 관련된 과학적 증거 처리 과정에서의 부적절함이 밝혀졌고, 결국 유죄 판결이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며 항소 법원에 재심을 권고했다.[5] 하지만 이러한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후속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길퍼드 및 울위치 폭탄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또는 수사 과정에서 정보를 제공한 것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이 추가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다만, 수사 과정에 참여했던 경찰관 세 명이 조사 결과에 따라 사법 방해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93년에 열린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6]

사법 조사 과정에서 비밀 증언을 포함한 700건 이상의 문서가 수집되었다. 이 문서들은 2020년 1월 1일에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개 하루 전인 2019년 12월 31일, 영국 내무부는 해당 문서들을 모두 회수하여 정부의 통제 하에 두었다.[7] 이 파일들은 현재까지도 봉인된 상태로 남아 있다.[8][9]

3. 길퍼드 4인

길퍼드 4인은 1974년 길퍼드 및 울위치에서 발생한 IRA의 폭탄 테러 사건 실행범으로 지목되어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네 명의 젊은이들을 가리킨다.[10][11] 이들은 아일랜드 출신 남성 세 명(폴 힐, 제리 콘론, 패트릭 암스트롱)과 잉글랜드 출신 여성 한 명(캐롤 리처드슨)으로 구성되었다.

체포 당시 17세에서 25세 사이였던 이들은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 과정에서 폭탄 테러를 자백했으나, 이는 이후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1][12] 그럼에도 이 자백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의 주요 근거로 사용되었고, 1975년 10월 네 명 모두 살인 및 관련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3]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이들이 사형이 가능한 대역죄로 기소되지 않은 것에 유감을 표하며 사실상 가석방 없는 장기 복역을 권고하는 등[14]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들의 평소 생활 방식이나 전과 등을 고려할 때 IRA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15][12] 등이 지적되면서, 길퍼드 4인 사건은 훗날 대표적인 오심 사건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된다.

3. 1. 체포와 심문

체포된 후, 길퍼드 4인 모두 경찰의 격렬한 심문 과정에서 폭탄 테러를 자백했다.[10] 이 자백은 나중에 철회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사건의 근거로 남아 있었다. 피고인들은 나중에 이 자백이 협박에서 고문까지 이르는 경찰의 강압 행위, 가족 구성원에 대한 위협, 그리고 약물 금단 증상의 영향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11] 제러드 "제리" 콘런은 자서전에서 1970년대 초에 통과된 대테러법이 경찰에게 혐의 없이 용의자를 최대 일주일 동안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이것이 강압적인 자백을 받아낸 주요 요인이었다고 썼다. 그는 만약 구금 기간 제한이 더 짧았다면 자신이 받은 대우를 견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12]

3. 2. 재판과 유죄 판결

나이유죄 판결폴 마이클 힐
Paul Michael Hill영어21제리 콘론
Gerard Patrick "Gerry" Conlonga21패트릭 조셉 "패디" 암스트롱
Patrick Joseph "Paddy" Armstrong영어25캐롤 리처드슨
Carole Richardson영어17



체포된 후, 네 명의 피고인 모두 경찰의 강도 높은 심문 과정에서 폭탄 테러를 자백했다.[10] 이 자백은 나중에 철회되었지만, 재판에서 유죄 판결의 핵심 근거로 사용되었다. 피고인들은 이후 경찰의 협박, 고문, 가족에 대한 위협, 그리고 약물 금단 증상 등 강압적인 수사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11] 제리 콘론은 그의 자서전에서, 1970년대 초 제정된 대테러법이 경찰에게 영장 없이 최대 7일간 용의자를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장기간의 심문을 견디기 어려웠고, 이것이 허위 자백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밝혔다.[12]

1975년 10월 22일, 길퍼드 4인은 살인 및 기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영국 법에 따라 살인 유죄 판결을 받은 성인에게는 의무적으로 종신형이 선고되었다.[13] 폭탄 테러 당시 미성년자였던 캐롤 리처드슨은 살인 혐의에 대해 폐하의 뜻에 따라 구금되는 무기 징역형을, 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주재한 존 도널드슨 판사는 길퍼드 4인이 당시까지 사형이 가능했던 대역죄로 기소되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14] 영국에서는 1964년 이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지만, 대역죄에 대한 사형 조항은 1998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 도널드슨 판사는 통상적인 관세 설정 관례와 달리, 자신이 이들의 석방 심사 시점까지 살아있지 못할 것이라며 콘론에게 최소 30년, 암스트롱에게 최소 35년, 힐에게는 "노년이 될 때까지" 복역할 것을 권고했다.

한편, 길퍼드 4인의 생활 방식은 IRA 조직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잉글랜드 국적이었던 패디 암스트롱과 캐롤 리처드슨은 불법 점거 생활을 하며 마약 및 경범죄에 연루된 상태였다.[15] 제리 콘론 역시 자서전에서 절도 등 경범죄 전과 때문에 IRA가 자신을 조직원으로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며, IRA와 연관된 아일랜드 공화주의 청년 단체인 피아나 에이렌에서도 제명된 바 있다고 주장했다.[12] 이는 이들이 IRA와 무관하게 사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3. 3. 구성원

나이유죄 판결 내용폴 힐
Paul Michael Hilleng21제리 콘론
Gerard Patrick "Gerry" Conloneng21패트릭 "패디" 암스트롱
Patrick Joseph "Paddy" Armstrongeng25캐롤 리처드슨
Carole Richardsoneng17



체포된 후, 네 명의 피고인은 모두 경찰의 강도 높은 심문 과정에서 폭탄 테러를 자백했다.[10] 이 자백은 나중에 철회되었지만, 재판에서 유죄의 핵심 근거로 사용되었다. 피고인들은 자백이 협박, 고문, 가족에 대한 위협 등 경찰의 강압과 약물 금단 증상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11] 제리 콘론은 자서전에서 당시 시행된 반테러 법이 경찰에게 영장 없이 최대 7일간 용의자를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것이 강압적인 자백을 받아내는 주요 요인이었다고 밝혔다. 만약 구금 기간이 더 짧았다면 경찰의 압박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12]

1975년 10월 22일, 길퍼드 4인은 살인 및 기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영국 법에 따라 살인 유죄 판결을 받은 성인에게는 의무적으로 종신형이 선고되었다.[13] 폭탄 테러 당시 미성년자였던 캐롤 리처드슨은 살인 혐의에 대해 '여왕 폐하의 뜻에 따라' 구금되는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음모 혐의로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매과이어 7인 재판도 담당했던 존 도널드슨, 림밍턴의 도널드슨 남작 판사는 길퍼드 4인이 대역죄로 기소되지 않은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당시 대역죄는 여전히 사형 선고가 가능했기 때문이다.[14] 영국에서는 1964년 이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지만, 대역죄에 대한 사형 조항은 1998년 범죄 및 무질서법이 제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도널드슨 판사는 통상적인 최소 복역 기간 설정 대신, 콘론에게 최소 30년, 암스트롱에게 최소 35년, 힐에게는 "노년이 될 때까지" 복역할 것을 권고하며 사실상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가까운 의견을 제시했다.

길퍼드 4인은 평소 생활 방식으로 볼 때 IRA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았다. 패디 암스트롱과 캐롤 리처드슨은 불법 점거 생활을 하며 마약 및 경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다.[15] 제리 콘론 역시 자서전에서 자신이 절도 등 경범죄 전과 때문에 IRA에 가입할 수 없었을 것이며, IRA와 연계된 아일랜드 공화주의 청년 단체인 피아나 에이렌에서도 제명되었다고 주장했다.[12]

4. 매과이어 7인

매과이어 7인은 길퍼드 4인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폭발물(니트로글리세린)을 소지하고 IRA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7명의 사람들을 가리킨다.[16] 이들은 대부분 길퍼드 4인 중 한 명인 제리 콘런의 친척과 지인들이었으며, 앤 매과이어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가족의 지인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제리 콘런의 아버지인 패트릭 "주세페" 콘런은 아들의 재판을 돕기 위해 벨파스트에서 왔다가 함께 기소되기도 했다. 이들은 1976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4. 1. 체포와 심문

1974년 12월 3일, 경찰은 앤 매과이어의 웨스트 킬번 자택을 급습하여 7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IRA가 폭탄 제조에 사용하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을 소지하고 전달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16] 이들을 매과이어 7인이라고 부른다.

매과이어 7인은 1976년 3월 4일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각 피고인의 정보와 선고 형량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 성명관계재판 당시 연령선고 형량
앤 매과이어 (Anne Maguire)4014년형
패트릭 매과이어 시니어 (Patrick Maguire Snr.)앤의 남편4214년형
패트릭 매과이어 주니어 (Patrick Maguire Jr.)앤과 패트릭의 아들144년형
빈센트 매과이어 (Vincent Maguire)앤과 패트릭의 아들175년형
숀 스미스 (Sean Smyth)앤 매과이어의 남동생3712년형
패트릭 오닐 (Patrick O'Neill)가족들의 지인3512년형
패트릭 "주세페" 콘런 (Patrick "Giuseppe" Conlon)앤의 형부, 제리 콘런의 아버지5212년형 (1980년 옥중 사망)



패트릭 "주세페" 콘런은 길퍼드 4인 재판에 연루된 아들 제리 콘런을 돕기 위해 벨파스트에서 왔다가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폐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다른 6명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지만 그는 석방되지 못하고 1980년 1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4. 2. 재판과 유죄 판결

'''매과이어 7인'''은 1974년 12월 3일, 경찰이 앤 매과이어(제리 콘런의 이모)의 웨스트 킬번 자택을 급습한 후 체포되었다. 이들은 IRA가 폭탄 제조에 사용하려 했다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운반하고 소지한 혐의로 기소되었다.[16]

1976년 3월 4일 열린 재판에서 매과이어 7인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피고인 중에는 14세와 17세의 어린 아들들과 건강이 좋지 않았던 52세의 제리 콘런의 아버지까지 포함되어 있어 판결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었다. 선고된 형량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 성명관계재판 당시 연령선고
앤 매과이어4014년형
패트릭 매과이어앤의 남편4214년형
패트릭 매과이어앤과 패트릭의 아들144년형
빈센트 매과이어앤과 패트릭의 아들175년형
숀 스미스앤 매과이어의 남동생3712년형
패트릭 오닐가족들의 지인3512년형
패트릭 "주세페" 콘런앤의 형부, 제리 콘런의 아버지5212년형 (1980년 1월 옥중 사망)



패트릭 "주세페" 콘런은 길퍼드 4인 재판에 연루된 아들 제리 콘런을 돕기 위해 벨파스트에서 런던으로 왔다가 함께 기소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폐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결국 1980년 1월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다른 6명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4. 3. 구성원

'''매과이어 7인'''은 폭발물(니트로글리세린)을 IRA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이들이다. 1974년 12월 3일, 경찰이 앤 매과이어(제리 콘런의 이모)의 웨스트 킬번 자택을 급습한 후, 이들은 IRA가 폭탄 제조에 사용하려 했다고 주장된 니트로글리세린을 소지한 혐의로 기소되었다.[16]

1976년 3월 4일 재판에서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선고된 형량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관계재판 당시
나이
형량
앤 매과이어제리 콘런의 이모4014년
패트릭 매과이어 시니어앤의 남편4214년
패트릭 매과이어 주니어앤과 패트릭의 아들144년
빈센트 매과이어앤과 패트릭의 아들175년
숀 스미스앤 매과이어의 형제3712년
패트릭 오닐가족 친구3512년
패트릭 "지우세페" 콘론앤의 시동생, 제리 콘런의 아버지5212년; 1980년 감옥에서 사망



패트릭 "지우세페" 콘론은 길퍼드 4인 재판을 받는 아들 제리 콘런을 돕기 위해 벨파스트에서 왔다. 그는 수년간 폐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다른 6명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지만 지우세페 콘론은 1980년 1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5. 항소와 진실 규명 노력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은 유죄 판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이들의 가족과 지지자들, 그리고 여러 인권 단체들은 진실 규명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며 사건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17][18][19][20] 하지만 초기 상고 요청은 거부되었고, 발콤 스트리트 포위 사건 재판 중 IRA 대원들이 자신들이 진범이라고 밝혔음에도[17][18]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언론인들이 사건의 문제점을 꾸준히 제기하고 영국 내무부 내부에서조차 이들의 혐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17][18], 이러한 초기 노력들은 실질적인 재심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5. 1. 초기 항소 실패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은 유죄 판결에 대한 즉각적인 상고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다양한 단체들이 이 사건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1977년 2월, 발콤 스트리트 포위 사건 재판 과정에서 4명의 IRA 대원들은 변호사를 통해 "4명의 완전히 무고한 사람들이 막대한 형량을 복역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해달라"고 언급하며, 자신들이 길퍼드 폭탄 테러의 진범임을 시사했다. 그들은 경찰에게도 자신들이 책임이 있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해당 범죄로 기소되지 않았으며, 길퍼드 4인은 결과적으로 12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길퍼드 4인은 1968년 형사 상고법 제17조에 따라 내무 장관에게 사건을 상고 법원에 회부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87년, 내무부는 길퍼드 4인이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인정하는 각서를 발행했으나, 이는 상고를 위한 충분한 증거로 여겨지지 않았다.[17][18]

1977년 항소심에서 패소한 이후, 몇몇 언론인들이 유죄 판결의 정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더 레벨러에 기고한 데이비드 마틴, 뉴 스테이츠맨의 개빈 에슬러와 크리스 멀린, 그리고 벨파스트 텔레그래프의 데이비드 매키트릭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19] 1980년 2월 26일에는 BBC One Northern Ireland 채널에서 패트릭 매과이어와 BBC의 개빈 에슬러의 인터뷰를 담은 "스포트라이트: 주세페 콘론과 폭탄 공장"(Spotlight: Giuseppe Conlon and the Bomb Factory)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20]

5. 2. 새로운 증거 발견과 재조사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은 유죄 판결에 대해 즉각적인 상고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다양한 단체들이 이 사건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1977년 2월, 발콤 스트리트 ASU 재판에서 4명의 IRA 대원들은 변호사를 통해 "4명의 완전히 무고한 사람들이 막대한 형량을 복역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해달라"며 길퍼드 4인을 언급했다. 그들은 경찰에게 자신들이 폭탄 테러의 책임이 있다고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범죄로 기소되지 않았고 길퍼드 4인은 이후 12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길퍼드 4인은 1968년 형사 상고법 제17조에 따라 내무 장관에게 상고 법원 회부를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1987년, 영국 내무부는 길퍼드 4인이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인정하는 내부 각서를 발행했으나, 이것만으로는 상고를 위한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했다.[17][18]

1977년 항소심 패소 이후, 데이비드 마틴(더 레벨러), 개빈 에슬러와 크리스 멀린(뉴 스테이츠맨), 데이비드 매키트릭(벨파스트 텔레그래프) 등 소수의 언론인들이 유죄 판결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19] 1980년 2월 26일, BBC One Northern Ireland는 패트릭 매과이어와 BBC 개빈 에슬러의 인터뷰를 담은 "스포트라이트: 주세페 콘론과 폭탄 공장"을 방영했다.[20]

결정적인 전환점은 1989년에 찾아왔다. 사건 처리를 재조사하던 에이번 앤드 서머셋 경찰청 형사들은 서리 경찰이 길퍼드 4인의 진술을 다루는 과정에서 중대한 문제점들을 발견했다. 패트릭 암스트롱의 경찰 심문 타이핑 메모는 광범위하게 편집되었으며, 삭제와 추가, 내용 재배열이 이루어진 정황이 드러났다. 이 조작된 메모는 재판에서 제시된 필기 및 타이핑 메모와 일치했는데, 이는 필기 메모가 실제 심문 이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재판 당시 이 메모들은 심문과 동시에 작성된 기록으로 제시되었다. 또한, 폴 힐의 심문 필사본 메모는 그의 다섯 번째 진술이 판사 규칙을 위반하여 얻어졌으며,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보는 DPP이나 검찰에 전달되지 않았으며, 관련 경찰관들은 해당 심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법정에서 선서 하에 부인했다. 서리 경찰의 구금 기록 역시 주장된 심문의 시간 및 기간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증거들을 바탕으로 항소가 다시 진행되었다. 기포드 경이 폴 힐을 변호했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인권 변호사 가레스 피어스가 변호했다. 항소 심리는 당초 1990년 1월로 예정되었으나, 에이번 앤드 서머셋 경찰청의 보고서 결과가 나옴에 따라 앞당겨 재개되었다. 결국 검찰은 길퍼드 4인의 유죄 판결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법원장 레인 경은 경찰의 기만 행위가 너무 심각하여 모든 경찰 증거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만들며, 따라서 검찰 측의 주장은 안전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레인 경은 에이번 앤드 서머셋 경찰청이 발견한 자료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피고인 측이 제시하려던 알리바이 또는 추가 증거의 영향을 따질 필요조차 없다고 판단했다.

레인 경은 판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울위치 폭탄 테러와 관련된 증거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길퍼드와 울위치 사건과 관련하여 이들 네 명의 항소인에 대한 유죄 판결을 안전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21]

1989년 10월 19일, 길퍼드 4인은 유죄 판결이 파기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폴 힐은 서리 경찰 구금 중 받아낸 자백을 근거로 영국 군인 브라이언 쇼 살해 혐의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었는데, 이는 레인 경의 항소심 범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유죄 판결에 대한 항소를 기다리는 동안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1994년 벨파스트의 항소 법원에서 쇼 살인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 역시 최종적으로 파기되었다.

6. 유죄 판결 파기와 명예 회복

1989년, 사건 처리를 조사하던 에이번 앤드 서머셋 경찰청 형사들은 길퍼드 4인과 그들의 진술에 대한 서리 경찰의 처리와 관련된 중요한 증거들을 발견했다. 패트릭 암스트롱의 경찰 심문에서 타이핑된 메모는 광범위하게 편집되었으며, 삭제와 추가, 재배열이 이루어졌다. 이 메모는 재판에서 제시된 필기 및 타이핑 메모와 일치했는데, 이는 필기 메모가 심문 후에 작성되었음을 시사했다. 제시된 메모는 법정에서 동시대 기록으로 묘사되었다. 폴 힐과의 심문에 관한 필사본 메모는 힐의 다섯 번째 진술이 판사 규칙을 위반하여 작성되었으며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었다. 이 정보는 DPP 또는 검찰에 제공되지 않았고, 관련된 경찰관들은 그런 심문이 있었다는 것을 선서 하에 부인했다. 서리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구금 기록은 주장된 심문의 시간 및 기간과 일치하지 않았다.

다른 증거를 토대로 이미 항소가 진행 중이었으며, 기포드 경은 폴 힐을 변호했고, 다른 사람들은 인권 변호사 가레스 피어스가 변호했다. 항소 심리는 길퍼드 4인의 요청에 따라 1990년 1월로 연기되었지만, 서머셋과 에이번 보고서의 결과가 나오자 심리가 재개되었고, 검찰은 유죄 판결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장 레인 경은 에이번 앤드 서머셋이 발견한 자료의 내용이나 항소인이 제시하려는 알리바이 또는 추가 증거의 영향에 관계없이, 경찰의 기만 행위 정도가 모든 경찰 증거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검찰 측의 사건이 안전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레인 경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울위치 폭탄 테러와 관련된 증거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길퍼드와 울위치 사건과 관련하여 이들 네 명의 항소인에 대한 유죄 판결을 안전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21]

길퍼드 4인은 유죄 판결이 파기된 후 1989년 10월 19일에 석방되었다. 힐은 또한 서리 경찰의 구금 중 자백에 근거하여 영국 군인 브라이언 쇼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 유죄 판결에 대한 항소를 기다리는 동안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94년, 벨파스트에 있는 국왕 폐하 항소 법원은 쇼 살인 혐의에 대한 힐의 유죄 판결을 파기했다.

1990년 7월 12일, 내무부 장관 데이비드 웨딩턴은 "길퍼드 사건에 대한 임시 보고서: 1974년 길퍼드와 울위치 폭탄 테러 사건에서 비롯된 유죄 판결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조사"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재판장 도널드슨을 비판하고, 과학 증거 처리의 부적절성을 밝혀냈으며, 유죄 판결이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고, 항소 법원에 재심을 권고했다.[22] 또한 보고서는 "길퍼드 4인의 재판에서 검찰이 콘런 씨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하는 진술을 변호 측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23] 매과이어 7인의 유죄 판결은 1991년에 파기되었다.

7. 사건의 여파와 교훈

1977년 항소심 패소 이후, 더 레벨러, 뉴 스테이츠맨, 벨파스트 텔레그래프 등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유죄 판결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었다.[19] 1980년에는 BBC One Northern Ireland에서 패트릭 매과이어의 인터뷰 등을 담은 다큐멘터리 "스포트라이트: 주세페 콘론과 폭탄 공장"을 방영하며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다.[20]

이 사건은 영국 사법 시스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심화시켰으며, 특히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 관행과 증거 조작 의혹에 대한 강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길퍼드 폭탄 테러는 책임을 주장했던 IRA의 발콤 스트리트 ASU(eng) 조직원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들은 이미 다른 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상태였고 이후 성금요일 협정에 따라 석방되었다. 반면,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의 수사 과정에서 사법 방해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던 영국 경찰관 3명(토마스 스타일, 존 도날드슨, 버논 앳웰)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24] 이는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사건 당시 부당한 기소와 재판 과정에 관여했던 법조계 및 사법 시스템의 주요 인물 다수가 사건 이후에도 공식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일부는 오히려 승진하여 각 분야의 최고위직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제리 콘론은 2014년 사망 직전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에서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며, 석방 후 자신과 다른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어려움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비판했다. 한편, 관련 재판 중 하나였던 ''R v Maguire 1981'' 항소 사건은 판결 자체와는 별개로, 피고 측에 대한 정보 공개(eng)와 관련하여 영국 법체계에 중요한 판례를 남기게 되었다.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 또한 계속되었다. 제리 콘론과 패트릭 매과이어는 각자의 끔찍했던 경험을 담은 자서전을 출간했으며,[2][36] 특히 제리 콘론의 자서전 ''무죄 입증됨''(eng)은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로 각색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사건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2] 2018년에는 BBC에서 매과이어 가족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A Great British Injustice: The Maguire Story''를 방송하기도 했다.[38]

결론적으로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사건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오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며, 영국 사법 시스템의 심각한 오류를 드러내고 이후 사법 개혁 논의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7. 1. 피해자 보상과 사과

2005년 2월 9일,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사건으로 부당하게 투옥되었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영국 정부를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블레어 총리는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불의에 대해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그들은 공개적으로 완전히 무죄임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밝혔다.[25] 영국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2]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앤 매과이어에게 '놀라운 용서의 능력'과 지역 사회에 대한 헌신을 기리며 베네메렌티 메달을 수여했다.[26]

7. 2.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사건은 영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이 사건은 국가 권력이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인권이 어떻게 침해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잘못된 사법 판결을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2005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길퍼드와 울위치 폭탄 테러로 부당하게 투옥되었던 11명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그들이 그러한 고난과 불의에 시달린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그들은 완전히 공개적으로 면죄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국가의 과오를 인정했다.[25] 이는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미흡했다.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영국 경찰관 세 명(토마스 스타일, 존 도날드슨, 버논 앳웰)은 사법 방해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24] 더욱이 제리 콘론은 2014년 사망 직전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부당한 유죄 판결에 관련된 주요 영국 인물들이 사건 이후 오히려 승진하여 각 분야에서 최고 지위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이는 사법 시스템의 한계와 권력에 대한 견제 및 감시의 필요성을 절실히 보여준다.

피해자들은 오랜 수감 생활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 고통받았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제리 콘론의 자서전 ''무죄 입증됨''은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로 각색되어 사건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영화는 일부 허구적 요소를 포함하지만, 국가 권력에 의해 파괴된 개인과 가족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2] 제리 콘론은 정부와 약 50만파운드의 보상금으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2] 패트릭 매과이어 역시 자서전 ''아버지의 시계: 70년대 영국에서 아동 죄수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사건이 삶에 미친 영향을 기록했다.[36] 또한, 제리 콘론의 어머니 사라 콘론을 비롯한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2]

제리 콘론은 석방 이후에도 '크레이가본 2인'과 같이 부당하게 수감된 이들의 석방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개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어떻게 사회 전체의 불의에 맞서는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014년 그가 사망했을 때, 가족들은 성명을 통해 "그가 우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싸움으로써 얻은 것이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닫힌 눈이 불의에 대해 열리도록 강요했고, 상상할 수 없는 사악함을 인정하도록 강요했으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고 믿습니다"라고 밝혔다.[37]

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 사건은 국가 권력의 오용과 사법 시스템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동시에, 진실 규명과 정의 실현을 위한 시민 사회의 역할과 피해자 인권 회복을 위한 국가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과거사 문제, 국가 폭력 등 유사한 경험을 가진 한국 사회에도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8. 대중문화에서의 재현

1977년 항소심에서 패소한 이후, 여러 언론인들이 유죄 판결의 정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더 레벨러(The Leveller)의 데이비드 마틴, 뉴 스테이츠맨(New Statesman)의 개빈 에슬러와 크리스 멀린, 그리고 벨파스트 텔레그래프(Belfast Telegraph)의 데이비드 매키트릭 등이 대표적이다.[19] 1980년 2월 26일에는 BBC One 북아일랜드 채널에서 패트릭 매과이어와 개빈 에슬러의 인터뷰를 포함한 "스포트라이트: 주세페 콘론과 폭탄 공장"(Spotlight: Giuseppe Conlon and the Bomb Factory)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며 사건의 문제점을 조명했다.[20]

1994년 폴 힐이 ''Opinions''에 출연한 모습


길퍼드 4인의 일원이었던 폴 힐은 석방 이후 여러 매체에 출연하여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길퍼드 4인의 이야기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다루어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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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An injustice that still reverberates https://www.theguard[...] 1999-10-19
[3] 웹사이트 Paul Foot - Out For a Drink https://literaryrevi[...] 2023-08-15
[4] 뉴스 British Accuse 11 More In Pub Bombing Fatal to 5 https://www.nytimes.[...] 1974-12-08
[5] 웹사이트 Return to an address of the Honourable, the House of Commons dated 30 June 1994 for a report of the inquiry into the circumstances surrounding the convictions arising out of the bomb attacks in Guildford and Woolwich in 1974 HC 449 https://assets.publi[...] 1994-06-30
[6] 뉴스 From the archive, 20 May 1993: Guildford Four case detectives cleared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3-05-20
[7] 뉴스 Closed files on Guildford pub bombings to remain sealed https://www.bbc.com/[...] BBC News 2019-12-31
[8] 뉴스 Guildford pub bomb police took action to keep files closed https://www.bbc.com/[...] BBC News 2020-12-02
[9] 뉴스 Guildford pub bombs: Calls for release of IRA file as legacy bill looms https://www.bbc.com/[...] BBC News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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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뉴스 Gerry Conlon https://www.th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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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간행물 Judgement of the 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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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뉴스 Detectives 'lied about Guildford Four notes': Terry Kirby reports on accusations that police tampered with confessions to gain bomb convictions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199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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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뉴스 Courtney and Paul Hill go their own way http://www.independe[...] Irish Independent 2006-02-15
[28] 뉴스 Daughter of Guildford Four's Paul Hill found dead at Kennedy compound https://www.thejourn[...] 20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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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뉴스 Hill attending Colombia 'IRA trial' http://news.bbc.co.u[...] 2002-11-28
[31] 뉴스 Gerry Conlon dies https://www.bbc.co.u[...] 2014-06-21
[32] 뉴스 Guildford bomb campaigner dies http://news.bbc.co.u[...] 200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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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RTÉ Radio 1 http://www.rte.ie/ra[...] 20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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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뉴스 Gerry Conlon dies: Guildford Four member who never gave up his fight for justice https://www.indep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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