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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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안국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국어학적 업적과 대일(對日) 인식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성리학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언해, 편찬, 간행하는 데 적극 참여하여 국어 연구에 기여했으며, 《여씨향약언해》 등을 통해 당시 국어의 여러 현상을 보여주는 자료를 제공했다. 또한, 일본에 대해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당시 주류였던 화이관과 달리 일본을 대등한 이웃으로 인식하고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으나, 이러한 그의 대일 인식은 실록에서 긍정적 평가와 함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는 《모재집》, 《모재가훈》, 《동몽선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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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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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안국 |
원래 이름 | 김안국(金安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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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성종 9년 1478년 9월 2일 |
사망일 | 중종 38년 1543년 2월 7일 |
별명 |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
학력 | 1503년 문과 급제 |
경력 | 문인 겸 학자 |
임기 | 1517년 8월 1일 ~ 1519년 2월 28일 |
군주 | 조선 중종 이역 |
서훈 | 종묘배향공신 |
직책 | 조선국 경상도 관찰사(朝鮮國 慶尙道 觀察使)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이씨 부인 |
형제 | 김정국(아우) |
친인척 | 김익령(조부) |
자녀 | 김유부(장남) |
본관 | 의성(義城) |
부모 | 아버지 김연(金璉), 어머니 양천 허씨 부인(陽川 許氏 夫人) |
2. 국어학적 업적
김안국은 백성이 성리학 이념을 쉽게 이해하도록 여러 서적을 언해(우리말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언해서들은 당시 국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김안국은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다.[5]
2. 1. 언해 사업 주도
김안국은 백성이 성리학적 이념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서적을 언해하고, 편찬하고, 간행하는 사업을 이끌었다. 그는 근본을 다지고 백성을 깨우치며, 인륜을 바로 세우고, 풍속을 교화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질병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실천적인 분야의 문헌들을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해하거나 편찬하고 간행하여 널리 퍼뜨리는 데 힘썼다.[5]김안국은 《여씨향약언해》, 《정속언해》, 《이륜행실도언해》, 《농서언해》, 《잠서언해》, 《벽온방언해》, 《창진방언해》, 《본문온역이해방》 등을 간행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국어학 발전에 기여했다. 이 책들은 당시 국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김안국은 이 책들을 언해하고 편찬하고 간행한 사람으로서 국어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5]
2. 2. 국어 연구 자료 제공
김안국은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근본 배양과 계몽, 인륜 정립, 향속 교화, 본업 장려, 질병 구료 등을 목적으로 실천적인 분야의 문헌들을 일반 백성들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언해)하거나 편찬, 간행하는 것을 주도하여 널리 퍼뜨리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실천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여씨향약언해》, 《정속언해》, 《이륜행실도언해》, 《농서언해》, 《잠서언해》, 《벽온방언해》, 《창진방언해》, 《본문온역이해방》 등의 간행 과정에서 언해, 편찬, 간행 등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국어학적 업적을 남겼다. 언해서들은 당시 국어의 여러 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국어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므로, 김안국은 이들 언해서들의 언해자, 편찬자, 간행자로서 국어학적 위치를 규정할 수 있다.[5]3. 대일(對日) 인식
김안국은 일본에 대해 객관적이고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6]
김안국은 중종 때 선위사(宣慰使)로 활동했다. 일본에 직접 간 적은 없지만, 내빙하는 사신들과 꾸준히 교류하여 당시 조선에서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 중심의 외교 정책을 따르면서 중국과는 사대 관계, 일본과는 교린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대등한 교린 관계였을 뿐, 대부분의 문신들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일본을 낮춰 보며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김안국은 일본을 교화해야 할 오랑캐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의 이웃 나라로 인식했다. 그는 일본을 폄하하는 당시 문신들을 경계하며,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양국 간 교역에서 불필요한 잡음은 백해무익하다는 투철한 관료 의식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당대와 달리 객관적이고 개방적인 시각으로 일본을 인정했던 김안국은 실록에서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일 인식에 관해서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6]
3. 1. 일본 전문가
김안국은 중종 때 일본에 직접 방문한 적은 없지만, 내빙하는 사신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당시 조선에서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일본 사승(使僧) 접대를 담당하였는데, 그의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대일 인식은 붕중(弸中), 안심동당(安心東堂)과의 교류에서 잘 나타난다.[6]1542년(중종 37년) 4월, 일본의 안심동당은 백은(白銀) 8만 냥을 가지고 내빙하였다. 당시 백은은 조선에서 무역을 금하고 있던 품목이었기에 양국 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조선은 백은을 제외한 필요 물품들만 교역하겠다고 주장하였음에 반해 일본은 백은을 받아주지 않을 경우 모든 교역품들을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펼쳤다. 이 문제를 놓고 극명한 찬반론을 제기하던 조선의 문신들 사이에서 김안국은 보내온 호의를 생각해서 가져온 은의 일부라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6]
조선은 명나라의 중국 중심 외교 정책을 수용하면서 중국과는 사대 관계를, 일본과는 교린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만 대등 교린이었으며, 당시 대부분의 문사들은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일본을 바라보았고, 따라서 이들은 일본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김안국은 일본을 교화시켜야 할 오랑캐의 나라라고 인식하기보단 그들을 대등한 관계에 있는 이웃 나라로 인식하였다. 그는 선입견에 따라 일본을 폄하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문사들을 경계하면서, 일본과 상호 간 우호적인 입장에서 교린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또한 일본에 대하여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더불어 양국 간의 상호 교역에 있어서 불필요한 잡음은 백해무익임을 강조하는 김안국의 투철한 관료 의식 또한 여기서 발견된다.[6]
3. 2.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
김안국은 중종 때 선위사(宣慰使)로 활동하였다. 일본에 직접 간 적은 없지만, 일본 사신들과 꾸준히 교류하여 당시 조선에서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일본 사승(使僧) 접대를 담당했는데, 붕중(弸中), 안심동당(安心東堂)과의 교류에서 그의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대일 인식이 잘 나타난다.[6]1542년(중종 37년) 4월, 일본의 안심동당은 백은(白銀) 8만 냥을 가지고 왔다. 당시 백은은 조선에서 무역을 금지하던 품목이었기에 양국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조선은 백은을 제외한 필요 물품만 교역하겠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백은을 받지 않으면 모든 교역품을 가지고 돌아가겠다고 맞섰다. 이 문제를 두고 조선 문신들 사이에서 찬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김안국은 보내온 호의를 생각해서 가져온 은의 일부라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6]
조선은 명나라의 중국 중심 외교 정책을 받아들여 중국과는 사대 관계를, 일본과는 교린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만 대등한 교린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문신들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일본을 낮춰 보며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김안국은 일본을 교화해야 할 오랑캐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의 이웃 나라로 인식했다. 그는 선입견에 따라 일본을 폄하하는 당시 문신들을 경계하면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양국 간의 교역에서 불필요한 잡음은 백해무익하다는 투철한 관료 의식도 보여주었다.[6]
3. 3. 실리 외교 추구
1542년(조선 중종 37년) 4월, 일본의 안심동당은 백은(白銀) 80000냥을 가지고 조선에 방문했다. 당시 백은은 조선에서 무역을 금하고 있던 품목이었기에 양국 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6] 조선은 백은을 제외한 필요 물품들만 교역하겠다고 주장한 반면, 일본은 백은을 받아주지 않을 경우 모든 교역품들을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펼쳤다. 이 문제를 놓고 조선의 문신들 사이에서 찬반론이 팽팽하게 맞섰는데, 김안국은 보내온 호의를 생각해서 가져온 은의 일부라도 받아야 한다는 실리적인 입장을 취했다.[6]3. 4. 대등한 관계 인식
김안국은 일본을 교화해야 할 오랑캐로 인식하기보다 대등한 관계에 있는 이웃 나라로 인식하였다.[6] 그는 선입견에 따라 일본을 폄하하는 시각을 가진 당시의 문신들을 경계하면서, 일본과 상호 우호적인 입장에서 교린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또한 일본에 대하여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함을 역설하였다.[6] 더불어 양국 간의 상호 교역에서 불필요한 잡음은 백해무익임을 강조하였다.[6]3. 5. 비판적 평가
김안국은 일본을 오랑캐로 폄하하기보다는 대등한 이웃 나라로 인식하고, 상호 우호적인 교린 관계와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양국 간 교역에서 불필요한 잡음은 백해무익함을 강조하는 투철한 관료 의식을 보여주었다.[6]1542년(조선 중종 37년) 4월, 일본 사신 안심동당이 백은(白銀) 8만 냥을 가지고 왔을 때, 조선은 백은 무역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양국 간 신경전이 벌어졌다. 김안국은 일본의 호의를 생각해 일부라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조선 문신들은 명나라 중심의 외교 정책과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일본을 상대적 우월감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당대인과 달리 객관적이고 개방적인 시각에서 일본을 인정했던 김안국은 실록으로부터 전반적인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일 인식에 관해서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4. 저서
- 《모재집》
- 《모재가훈》
- 《동몽선습》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할아버지 | 김익령(金益齡) |
아버지 | 김연(金璉) (참봉) |
어머니 | 양천 허씨(陽川許氏) |
동생 | 김정국(金正國) |
부인 | 송림군(松林君) 이효창(李孝昌)의 딸 |
장남 | 김유부(金有孚) |
자부 | 한숙창(韓叔昌)의 딸 |
손자 | 김요명(金堯命) |
손자 | 김요선(金堯選) |
자부 | 이건(李楗)의 딸 |
차남 | 김여부(金汝孚) |
자부 | 구원(具元)의 딸 |
손자 | 김요서(金堯敍) |
손녀 | 이담년(李聃年)에게 출가 |
삼남 | 김재부(金在孚) |
자부 | 성계례(成繼禮)의 딸 |
손자 | 김요석(金堯錫) |
장녀 | 강복(姜復)에게 출가 |
서자 | 김연부(金衍孚) |
참조
[1]
서적
국역 국조인물고
https://terms.naver.[...]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6-01-03
[2]
웹인용
김안국
http://encykorea.aks[...]
2016-01-03
[3]
서적
조선 전기 경세론과 불교비판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4]
웹사이트
김안국(金安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5]
저널
김안국의 국어학적 위치
2008
[6]
저널
慕齋 金安國의 對日認識
2009
[7]
저널
김안국의 국어학적 위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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