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남원 만인의총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원 만인의총은 1597년(선조 30년) 임진왜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1만여 명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무덤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남원성을 공격하여 점령했을 때, 명나라 부총병 양원과 조선 관군, 의병, 주민들이 함께 항전했으나, 결국 대부분 전사했다. 이후 광해군 4년(1612)에 사당이 건립되었고, 효종 4년(1653)에 충렬사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64년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으며, 사적 제27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원시의 무덤 -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은 가야와 백제의 고분 축조 방식과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5~6세기 전라북도 동부 지역의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며, 사적 제542호로 지정되어 관리된다.
  • 1612년 설립 - 바티칸 비밀문서고
    바티칸 사도 문서고는 바티칸 시국에 위치한 로마 교황청 소유의 기록 보관소로, 기독교 1세기부터 수집된 기록을 소장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바티칸 비밀 문서고"로 불렸으나 "교황의 개인적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 남원시의 문화유산 - 광한루
    광한루는 조선 시대 남원에 세워진 누각으로, 광통루에서 유래하여 광한청허부의 의미를 담아 개칭되었고, 정유재란 후 재건되었으며, 춘향전의 배경으로 광한루원으로 확장되어 관리되고 있다.
  • 남원시의 문화유산 - 실상사
    실상사는 신라 시대 문화유산을 다수 보유한 사찰로,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급 문화재 10점 이상, 한국 최대 철불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등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남원 만인의총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남원 만인의총
남원 만인의총
유형사적
지정 번호272
지정일1981년 4월 1일
주소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향교동 636
면적100,866m²
시대조선
추가 정보
문화재청 ID13,02720000,35

2. 전투 배경

2. 1. 명나라의 지원

2. 2. 조선군의 상황

3. 전투 과정

3. 1. 남원성 방어전

3. 2. 명나라 장수 양원의 도주

3. 3. 조선군 지휘관들의 최후

4. 전투 결과 및 영향

5. 만인의총

1597년(선조 30년) 8월에 고니시 유키나카 휘하 왜군 10만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군, 명나라 장군 천총 장표 등이 거느린 3,000군사와 교룡산성 별장 신호가 이끄는 소수의 군사는 용성관을 중심으로 주둔하면서 다시 성곽 회복을 준비하고, 양원은 순천으로 올라오는 왜군을 막으러 내려가던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등에게 지원을 요청, 이들은 다시 순천, 광양, 옥과를 거쳐 남원성 근처로 당도하였다. 이때는 이미 남원성은 고니시의 적군에 함락된 상태였다.

관군은 남원부사 임현, 접반사 정기원을 비롯하여 병마절도사 이복남·방어사 오응정·조방장 김경노, 남원부 판관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산성별감 신호 등은 남원성으로 들어가, 군민과 함께 이를 막아 싸우게 되었다. 또한 태귀생, 태천생 등의 일가와 가복, 문기방 등이 이끄는 의병이 가세하였다. 성안의 주민들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왜군과 싸웠는데, 남문이 무너지면서 성안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자 명나라 장수 양원은 이복남 등에게 상황이 불리함을 들어 나갈 것을 권고했으나 이복남은 거절했다. 그 뒤 양원은 재빨리 변장하고 심복부하 50여 명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8월 15일 조선 관군과 의병, 주민 다수는 전사했고, 이복남은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볏단을 쌓은 뒤 분신 자결하였다. 이 싸움으로 관군 4천과 성민 1만이 장렬히 전사하여 후일 한 곳에 묻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만인의총 유래가 되고 있다.

5. 1. 만인의총의 역사

광해군 4년(1612) 만인의사의 영혼을 안치하는 사당이 건립되었고, 효종 4년(1653)에는 충렬사라는 시호가 내려졌다.[3] 숙종 원년(1675)에는 용성관 동면에 있던 사당을 북문 밖의 정결한 곳으로 이전하였다.[3] 1962년에는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자 현재 위치로 의총과 사당을 이전하였고, 1975년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3]

대한민국 수립 후 사적 102호로 지정되었으나 임의 이장을 이유로 지정 해제되었다.[3] 196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1964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3] 이후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가 1981년 4월 1일 다시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되었다.[3]

5. 2. 사적 지정 및 해제, 재지정

광해군 4년(1612) 만인의사의 영혼을 안치하는 사당이 지어졌고, 효종 4년(1653)에는 충렬사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원년(1675)에 용성관 동면에 있던 사당이 북문 밖의 정결한 곳으로 옮겨 지어졌다.[3] 1962년에는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자 현재 위치로 의총과 사당을 옮겼으며, 1975년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었다.[3]

대한민국 수립 후 사적 제102호로 지정되었으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1964년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다.[3] 임의 이전을 이유로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다가,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3] 이후 1981년 4월 1일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되었다.[3]

6. 갤러리


참조

[1] 간행물 사적지정 문화공보부장관 1981-04-04
[2]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2011-07-28
[3] 웹인용 문화재 해제 http://theme.archive[...] 대한민국 관보 제3836호 2016-04-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