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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대토벌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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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한 대토벌 작전은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 동안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격렬해진 항일 의병 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전라남도 지역에서 실시한 작전이다. 2,000여 명의 일본군이 투입되어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외곽 지대, 남서 해안 지역, 무인도 지역까지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양민 학살, 방화, 약탈 등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고, 103명의 의병장이 희생되었으며, 생포된 의병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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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대토벌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남한 대토벌 작전 정보
개요
분쟁남한 대토벌 작전
南韓大討伐作戰
날짜1907년 ~ 1909년
장소호남 지방
결과일본 제국의 의병 진압 성공
한반도 내에서의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 사라짐
독립군, 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 계승
교전 세력
지휘관 1이인영
군대 1정미의병
13도 창의군
군대 2일본 제국 육군 보병·헌병
일본 제국 해군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17,000명 이상 사망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14
사상자 2일본 주장 8명 사망
대한민국 주장 사망자 136명, 부상자 277명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14
대한제국 국권피탈 과정
지도
러일 전쟁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 내용일본군의 인천마산원산 상륙
서울덕수궁 점령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내용대한제국 내 일본군 주둔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 내용고문정치
대한제국군 감축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내용대한제국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화폐정리사업1905년 ~ 1909년
화폐정리사업 내용조선후기 상업자본 몰락
화폐경제 붕괴
일본 화폐에 예속
을사조약 (제2차 한일 협약)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내용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통감정치
고종 양위 사건1907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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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즉위
정미7조약 (제3차 한일 협약)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 내용차관정치
대한제국군 해산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내용시위대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정미의병 발발
기유각서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내용일본 제국에 사법권교도행정권 위탁
남한 대토벌 작전1909년 9월 1일
남한 대토벌 작전 내용전체 의병 소탕
항일의병 만주 대이동
한일약정각서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내용일본 제국에 경찰권 위탁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내용대한제국 멸망
일본 제국의 식민지 통치 전략
일제강점기 탄생

2. 배경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07년부터 1909년 전반기까지 약 2년간은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1907년에서 1909년까지 의병의 대(對) 일본군 전투 횟수는 약 2,700회였고, 참가한 의병 수는 약 40,000여 명에 이르렀다.[7] 항일 의병 투쟁은 한성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의병 활동이 강했던 호남 지역에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으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10월 30일까지 연장되었다.[7]

3. 일제의 의병 토벌 작전

1909년 일본 제국이 이른바 '남한 폭도(暴徒) 대토벌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지역의 항일 의병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은 그해 9월부터 약 2개월 동안이었다.[8] 이 작전은 1909년에 들어서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다른 지역은 자연스럽게 일제에 의해서 진압 당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3. 1. 일제의 만행과 민간인 학살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소위 '남한 폭도(暴徒) 대토벌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항일 의병이 가장 격렬했던 전라남도 지역에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일본 제국은 2,000여 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전라남도 지역의 항일 의병들을 진압했다. 제1단계 작전은 전북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 광주, 영광 등으로 이어지는 외곽 지대에서 이루어졌다. 제2단계는 고흥, 광주,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에서 진행되었다. 제3단계는 전라남도 서쪽 지방으로 탈출하는 항일 의병들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본 제국 군대는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잔학한 방법을 동원하여, 양민과 민가에 무참히 살육, 방화, 약탈 등을 자행하면서 수많은 민간인과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이 과정에서 항일 의병장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항일 의병장 전해산 등 23명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일본군에 잡힌 항일 의병들은 강제노동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거쳐 광양에서 하동까지의 도로 작업이었다. 훗날 일본군들은 이 도로를 '폭도 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8]

3. 2. 의병장들의 희생과 항일 투쟁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일본 제국은 소위 '남한 폭도(暴徒) 대토벌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항일 의병이 가장 격렬했던 전라남도 지역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항일 의병장 103명이 희생되었고, 그중 전해산 등 23명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했다.[8]

일본군에 체포된 항일 의병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해남에서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거쳐 광양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도로 작업에 강제 노역으로 동원된 것을 들 수 있다. 훗날 일본군은 이 도로를 '폭도 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8]

3. 3. 강제 노역 동원

일본 제국 군대에 체포된 항일 의병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해남에서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거쳐 광양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도로 작업에 강제 동원된 경우가 있다.[8] 일본군은 이 도로를 '폭도 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8]

참조

[1] 웹사이트 朝鮮侵略と支配の物理的基盤としての朝鮮軍 http://www.jkcf.or.j[...] 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 2005-11
[2] Kotobank 2020-07-09
[3] Kotobank 2020-07-09
[4] 웹사이트 旧韓末日本軍の「南韓暴徒大討伐作戦」についての一考察 https://cir.nii.ac.j[...] 国立情報学研究所
[5]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6]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7] 간행물 1908년 전라도의 전투 횟수는 전국 대비 25%였고, 전투의병수는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이런 상황이 더욱 심화되어 1909년 상반기 전투횟수가 47.3%, 전투의병수가 50.1%라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8] 웹인용 100년 前 비극 호남의병대학살사건 http://www.namdonews[...] 200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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