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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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해산은 일제강점기 의병으로, 1910년 순국했다. 전라북도 임실 출신으로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곽종석의 제자인 이한룡에게 한학을 배우고 기우만, 기삼연 등 호남 유림과 교류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의병 거병을 모의했으며, 1908년 이석용의 창의동맹단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대장으로 활동했으나, 순종의 의병 해산령과 연이은 패배로 지휘권을 박영근에게 넘기고 은신하다 체포되어 1910년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의병 활동을 기록한 《전해산진중일기》가 일부 남아 있다.

전해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전해산
원어 이름全海山
출생일1879년 음력 10월 18일
출생지전라북도임실군
사망일1910년 음력 7월 18일
국적
직업독립운동가, 의병장
웹사이트전해산(독립유공자 공훈록)
훈장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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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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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전해산은 전라북도 임실 출신으로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곽종석의 제자인 이한룡에게 한학을 배웠다. 기우만, 기삼연, 오성술, 고광순 등 호남 유림들과 교류했으며, 이들은 모두 훗날 의병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에 가담했다. 1906년 최익현이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를 찾아갔으나,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1907년 기삼연의 장성 의병대에 참여하려 했으나 역시 활동하지 않았다. 1908년 이석용이 이끄는 창의동맹단에 참모로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창의동맹단이 일본군에 패하자, 전해산은 기삼연의 장성 의병대에 합류하려 했으나, 기삼연과 김태원이 이미 전사한 후였다. 전해산은 오성술 등과 함께 1908년 음력 7월 25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고 대장이 되었다.

대동창의단은 1909년 5월까지 호남 서남부에서 유격전을 펼쳤고, 1908년 겨울에는 호남동의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순종의 해산 명령과 패전으로 영광에서 박영근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남원에 은신했다. 이후 밀고로 체포되어 1910년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이때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도 함께 처형되었다. 전해산의 장례식 때 그의 부인도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2.1. 출생과 가계

전라북도 임실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곽종석의 제자인 이한룡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기우만, 기삼연, 오성술, 고광순 등 호남 지방의 유림 세력과 교류했다. 이들은 모두 훗날 의병장이 되어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2.2. 의병 투신 전 활동

전라북도 임실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곽종석의 제자 이한룡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호남 지역의 유림 세력 기우만, 기삼연, 오성술, 고광순 등과 교류했다. 이들은 모두 후에 의병 운동에 참여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거병 모의에 가담했다. 위정척사의 거두 최익현이 이듬해 임실 인근 정읍시에서 호남 지역의 유림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을 때 최익현을 찾아갔지만, 거병에는 참여하지 않고 귀향했다. 1907년에도 기삼연이 장성군에서 일으킨 의병대의 직무를 맡았지만, 활동하지 않았다. 그가 의병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08년 이석용이 임실과 진안군을 중심으로 조직한 창의동맹단에 참모로 참가하면서부터이다.

2.3. 의병 투신과 창의동맹단 활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전해산은 의병 활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였다. 위정척사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최익현이 1906년 임실 인근 정읍에서 유학자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을 때, 전해산은 최익현을 찾아갔으나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07년에는 기삼연이 장성에서 조직한 의병대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 역시 실제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해산이 본격적으로 의병 운동에 뛰어든 것은 1908년 이석용이 임실과 진안을 중심으로 결성한 창의동맹단에 참모로 합류하면서부터이다.

창의동맹단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자, 전해산은 기삼연이 이끌던 장성 의병대에 합류하기 위해 이석용과 헤어졌다. 그러나 장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삼연이 전사하고, 그의 뒤를 이어 의병대를 지휘하던 김태원마저 전사한 뒤였다. 전해산은 남아있는 병사들을 모으고 있던 오성술과 힘을 합쳤고, 여기에 해산된 군인들을 이끌고 한성부에서 내려온 정원집이 합류하면서 1908년 음력 7월 25일 대동창의단을 창설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대동창의단은 1909년 5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호남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펼쳤다. 1908년 겨울에는 호남 지역의 여러 의병대를 통합하여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종의 의병 해산 명령과 계속되는 전투 패배로 인해, 전해산은 영광에서 박영근에게 부대 지휘권을 넘기고 은퇴하게 되었다.

2.4. 대동창의단 결성과 활동

전해산은 창의동맹단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연패하자 기삼연의 장성 의병대에 합류하기로 하고 이석용과 헤어졌다. 그러나 장성에서는 이미 전사한 기삼연을 이어받아 의병대를 이끌고 있던 김태원마저 전사한 뒤였다. 전해산은 남은 병사들을 규합 중이던 오성술과 합류하였고, 여기에 해산된 군인들을 이끌고 한성부에서 내려온 정원집이 가세함으로써 1908년 음력 7월 25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대동창의단은 1909년 5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호남 서남부 지역에서 소규모 유격전을 위주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 겨울에는 호남 지역 의병대의 연합 부대를 구성하여 호남동의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2.5. 체포와 순국

순종의 의병 해산령과 거듭되는 패배로 인해 전해산은 영광에서 부대 지휘권을 박영근에게 맡기고 뒷선으로 물러났다. 이후 남원에 숨어 지내다가 조두환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910년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때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도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처형당한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를 때 전해산의 부인도 자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3. 사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의병 활동 내역을 기록한 《전해산진중일기》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다.

3.1.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2. 전해산진중일기

의병 활동 내역을 기록한 《전해산진중일기》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