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쿠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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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카쿠지통은 일본 역사에서 고후카쿠사 천황과 가메야마 천황의 대립으로 시작된 양통질립 원칙에 따라 황위를 계승한 천황 계통을 의미한다. 고사가 천황의 유언과 가마쿠라 막부의 개입으로 인해 두 계통의 자손들이 번갈아가며 황위를 이어받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과 겐무 신정,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다이카쿠지통은 지묘인통과 대립하였으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중재로 남북조가 통일된 후에도 저항을 이어갔다. 다이카쿠지통은 가메야마 천황의 후손이 현재의 황실에 혈맥을 전하고 있으며,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을 시작했으나 남조를 세우는 등 일본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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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카쿠지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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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통질립(両統迭立)의 성립
고사가 천황은 고후카쿠사 천황의 친동생인 가메야마 천황을 황태자로 삼고, 1259년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양위하게 하였다. 1268년에는 고후카쿠사 상황의 아들 후시미 천황 대신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 고우다 천황을 황태자로 지명하였다.
1272년 고사가 상황이 사망하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의향을 따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은 각자 자신이 치천의 군(治天의 君)이 되길 바라며 분쟁을 벌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고사가 상황의 정처이자 두 형제의 생모인 오미야인(大宮院)에게 뜻을 물었고, 오미야인이 가메야마 천황을 지지하여 그가 치천의 군으로 지명되었다. 1274년 가메야마 천황은 아들에게 양위하였다.
1275년, 막부는 고후카쿠사 상황의 불만을 수용하여 히로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지명하고, 장래 고후카쿠사 상황이 다음 치천의 군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고, 결국 두 황통이 번갈아 가면서 천황의 자리에 오르는 양통질립(両統迭立)의 원인이 되었다.
2. 1. 고사가 상황의 유언과 가마쿠라 막부의 개입
쇼카 2년(1258년) 고사가 천황은 당시 16세였던 고후카쿠사 천황의 친동생으로 당시 10세였던 히사히토 친왕(恒仁親王, 훗날의 가메야마 천황)을 태자로 삼았다. 이듬해인 쇼겐 원년(1259년)에 고후카쿠사 천황으로 하여금 히사히토 친왕에게 양위하게 하였다. 분에이 5년(1268년)에는 가메야마 천황의 제2황자로 당시 2세였던 요히토 친왕(世仁親王, 훗날의 고우다 천황)을 태자로 지명하였다.분에이 9년(1272년)에 고사가 상황이 사망하였는데, 유언장에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명확하게 적지 않고 다만 다음 치천의 군(治天の君)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가마쿠라 막부의 의향을 따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치천의 군은 인세이(院政)를 행하는 상황(上皇)을 가리키는 말이다. 때문에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은 저마다 자신이 다음 치천의 군이 되기를 바라고 분쟁을 벌였다. 조정(朝廷)을 맡아 개입한 가마쿠라 막부는 고사가 상황의 정처(正妻)인 오미야인(大宮院)에게 고사가 상황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물었다. 이때 오미야인은 가메야마 천황의 편을 들었으므로 가메야마 천황이 치천의 군으로 지명되었다. 그 결과 가메야마 천황은 재위 상태에서 치천의 군으로써 상황의 정무도 집행하게 되었고, 분에이 11년(1274년) 당시 8세였던 요히토 친왕에게 양위하였다.
그러나 막부는 고후카쿠사 상황의 불만도 수용해서 겐지 원년(1275년)에 당시 11세였던 히로히토 친왕(煕仁親王, 후시미 천황)을 태자로 지명하고 장래 고후카쿠사 상황이 다음 치천의 군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이렇게 발생한 고후카쿠사와 가메야마 두 군주의 대립은 막부에 의해 양측 자손 사이에 거의 10여 년 주기로 교대로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한다는, 이른바 양통질립(両統迭立)의 원칙으로써 인세이를 행하도록 하였다.
2. 2. 지묘인통과의 대립과 양통질립의 원칙
1258년(쇼카 2년) 고사가 천황은 고후카쿠사 천황의 친동생인 가메야마 천황을 황태자로 삼고, 이듬해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양위하게 하였다. 고후카쿠사 상황에게도 황자가 있었으나, 1268년 고후카쿠사 상황의 아들 후시미 천황을 제치고 가메야마 천황의 아들 고우다 천황을 황태자로 지명하였다.1272년 고사가 상황이 사망하면서, 유언장에 "가마쿠라 막부의 의향을 따르라"는 유지를 남겼다.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은 각자 자신이 치천의 군(治天の君)이 되길 바라며 분쟁을 벌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고사가 상황의 정처이자 두 형제의 생모인 오미야인(大宮院)에게 고사가 상황의 뜻을 물었고, 오미야인이 가메야마 천황을 지지하여 가메야마 천황이 치천의 군으로 지명되었다. 1274년 가메야마 천황은 아들 요히토 친왕에게 양위하였다.
그러나 막부는 고후카쿠사 상황의 불만을 수용, 1275년 히로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지명하고 장래 고후카쿠사 상황이 다음 치천의 군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이러한 고후카쿠사와 가메야마 두 군주의 대립은 막부의 중재로 양측 자손이 거의 10년 주기로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는, 이른바 양통질립(両統迭立)의 원칙으로 인세이(院政)를 행하도록 하였다.
3. 양통질립 이후의 전개
고니조 천황 사후, 고우다 상황은 구니요시 친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고다이고 천황에게 황위를 잇게 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계통으로 왕위를 계승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고우다 법황과 구니요시 친왕에 맞서 인세이를 정지하고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계획하는 등 다이카쿠지통은 분열 위기를 맞았다. 지묘인통과 가마쿠라 막부는 구니요시 친왕을 지원, 그의 사후에는 아들 야스히토 친왕을 고곤 천황의 태자로 삼아 고다이고 천황 계통의 왕위 계승을 거부했다. 겐코 3년(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겐무 신정으로 다이카쿠지통으로 통일되는 듯했으나 2년 반 만에 붕괴,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간노의 소란으로 남조가 일시 연호를 통일했으나(쇼헤이 잇토) 곧 붕괴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중재로 고카메야마 천황이 삼종신기를 고코마쓰 천황에게 넘겨 남북조 시대는 끝났지만(메이토쿠 화약), 정식 양위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왕위가 지묘인통으로 굳어지자 다이카쿠지통은 불만을 품고 후남조라 불리는 저항을 15세기 중반까지 지속했다.
3. 1.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과 다이카쿠지통의 분열 위기
고니조 천황이 사망하자 그의 아버지인 고우다 상황은 "(고니조 천황의 아들인) 구니요시 친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고니조 천황의 동생인 다카하루 친왕에게 황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기존의 양통질립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하였다.이에 고우다 법황이나 황태자 구니요시 친왕이 반발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인세이를 정지시켜 대항하였으며, 또한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다이카쿠지통 자체가 분열될 위기에 놓이기에 이르렀다. 지묘인통이나 가마쿠라 막부는 구니요시 친왕을 지원했고, 구니요시 친왕이 급서하자 친왕의 아들인 야스히토 친왕을 지묘인통의 고곤 천황의 태자로 삼게 하여 고다이고 천황 계통으로의 왕위 계승을 거절할 자세를 비쳤으나, 겐코 3년(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복위하면서 고니조 천황 계열의 기데라노미야 가의 황위 계승은 부인되게 되었다.
3. 2. 겐무 신정과 남북조 시대
1333년, 겐코 3년에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복위하면서 고니조 천황 계열의 기데라노미야 가(木寺宮家)의 황위 계승은 부인되게 되었다.겐무 신정으로 일시 왕통은 다이카쿠지 왕통(고다이고계)로 통일될 듯 보였으나, 2년 반 만에 겐무 신정은 붕괴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吉野)로 달아나 남조(南朝)를 선포하였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옹립된 지묘인 왕통의 천황은 북조(北朝)로써 대립하게 되어, 일본은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간노의 소란 때에 남조가 교토를 탈환하고 일시적으로 연호를 통일하였으나(쇼헤이 잇토) 이마저도 반년 만에 붕괴하였다.
3. 3. 쇼헤이 일통과 메이토쿠 화약
간노의 소란 때 남조가 교토를 탈환하고 일시적으로 연호를 통일했으나(쇼헤이 일통), 이마저도 반년 만에 붕괴했다. 훗날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알선으로 정식 양위 의식을 행하는 동시에 이후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양통질립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다이카쿠지 왕통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삼종신기를 지묘인 왕통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넘겨주고 남북조 시대의 분열은 막을 내렸다. (메이토쿠 화약)그러나 남조 측의 교토 입성 때 신기 귀환 의식은 이루어졌으나 정식 양위 의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카메야마 천황에 대한 처우는 "천황으로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상황으로 예우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왕위 계승이 지묘인 왕통으로 굳어지면서 다이카쿠지 계통은 불만을 품고 옛 남조의 유신(遺臣)들이 궁중의 신기를 탈취하는 등의 저항을 15세기 중반까지 지속하였다(후남조).
4. 후남조(後南朝)와 다이카쿠지통의 저항
메이토쿠의 화약(1392년)으로 고카메야마 천황이 지묘인통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넘겨주면서 남북조 분열은 끝났다. 하지만 다이카쿠지통의 후손들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남조 측이 교토로 들어올 때 신기 반환 의식은 있었지만, 정식 양위 의식은 없었고, 고카메야마 천황은 "천황으로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상황 대우"를 받았다. 이후 황위가 지묘인통에서만 계승되자, 다이카쿠지통의 자손들과 남조 유신들은 궁중의 신기를 탈취하는 등 15세기 중반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이들을 후남조라고 부른다.
5. 다이카쿠지통의 천황
6. 다이카쿠지통의 혈통
가메야마 천황의 황녀는 고노에 이에모토에게 시집가 고노에 쓰네히라를 낳았으며, 그 자손들은 사키히사, 사키코(고요제이 천황 여어)를 거쳐 고미즈노오 천황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황실에 혈맥을 전하고 있다.
6. 1. 고노에 가문과의 연결
가메야마 천황의 황녀는 고노에 이에모토에게 시집가 고노에 쓰네히라를 낳았고, 그 자손은 현재의 황실에 혈맥을 전하고 있다.
6. 2. 다이카쿠지통 계도
(북조)(남조)
(초대 후시미노미야)
(오구라노미야가)
(고스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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