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곤 천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곤 천황은 1313년 고후시미 천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계획 실패로 즉위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폐위된 후, 동생 고묘 천황을 즉위시키고 상황으로서 정무를 보았다. 이후 남조에 납치되어 출가한 후 교토로 돌아와 선불교에 귀의하여 수행하다가 1364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와카에 능하여 칙찬 와카집인 『풍아와카집』을 편찬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며,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13년 출생 - 조반니 보카치오
조반니 보카치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선구자 중 한 명인 작가이자 시인이며, 흑사병을 피해 피신한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대표작 《데카메론》은 당시 사회상과 인간 본성을 묘사하여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 1313년 출생 - 이달존
이달존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이제현의 아들이며,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학문적 재능과 뛰어난 문장으로 기대를 받았고, 아버지 이제현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 1364년 사망 - 가자 마다
가자 마다는 14세기 마자파힛 제국의 재상으로서, 자야네가라 왕 구출 및 반란 진압에 기여하고 팔라파 선서를 통해 제국 확장을 목표로 삼았으며, 부밧 전투 이후 강등되어 생을 마감했다. - 1364년 사망 - 장 2세 (프랑스)
장 2세는 백년 전쟁 중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혔으며, 브레티니 조약에 따른 몸값 지불을 거부하고 런던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국왕이다. - 14세기 일본의 군주 - 고코마쓰 천황
고코마쓰 천황은 남북조 시대 혼란을 종식시키고 북조 황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남북조 교대 약속을 어기고 아들에게 양위하여 비판받은 일본 제100대 천황이다. - 14세기 일본의 군주 - 고엔유 천황
고엔유 천황은 북조의 천황으로서 즉위 후 신하들과 갈등을 겪었고, 아들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한 후 사망했다.
고곤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추증 시호 | 고곤인 (光厳院), 고곤 천황 (光厳天皇) |
휘 | 카즈히토 (量仁) |
별칭 | 쇼코치 (勝光智) 코치 (光智, 법명) 쇼케이 황제 (正慶皇帝) 지묘인 상황 (持明院上皇) 지묘인덴 (持明院殿) 아마노 법황 (天野法皇) 아마노덴 (天野殿) 오구라 법황 (小倉法皇) 오구라덴 (小倉殿) 지묘인 법황 (持明院法皇) 후시미 대법황 (伏見大法皇) 무한화상 (無範和尚) |
![]() | |
통치 정보 | |
대수 | 북조 초대 |
재위 기간 | 1331년 10월 22일 ~ 1333년 7월 7일 |
연호 | 겐코(元弘), 쇼케이(正慶) |
시대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
즉위례 | 1332년 4월 17일 |
다이조사이 | 1332년 12월 1일 |
섭정 | 고후시미 천황(後伏見天皇) (1331년 ~ 1333년) |
간파쿠 | 다카쓰카사 후유노리(鷹司冬教) (1330년 ~ 1333년) |
생애 정보 | |
출생일 | 1313년 8월 1일 |
출생 장소 | 이치조 저택 (一条第) |
사망일 | 1364년 8월 5일 |
사망 장소 | 조쇼코지(常照皇寺) |
능묘 | 야마구니 능 (山国陵) |
원복 | 1330년 1월 17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고후시미 천황(後伏見天皇) |
어머니 | 사이온지 네이시(西園寺寧子) |
배우자 | 긴시 내친왕(懽子内親王) (전처) 쥬시 내친왕(寿子内親王) (후처) |
덴지 | 오기마치산조 히데코(正親町三条秀子) |
자녀 | 코시 내친왕 (光子内親王) 오키히토 친왕 (興仁親王, 스고 천황(崇光天皇)) 야스히토 왕 (弥仁王,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 요시히토 친왕 (義仁親王) 손초 입도 친왕 (尊朝入道親王) 그 외 (후비/황자녀 항목 참조) |
황사 | 기데라노미야 야스히토 친왕(木寺宮康仁親王) (황태자(皇太子)) |
거처 | |
궁궐 | 쓰치미카도히가시토인 저택 (土御門東洞院殿) 니조토미코지 저택 (二条富小路殿) |
2. 생애
지묘인 왕통 출신으로, 일본 남북조 시대 북조의 초대 천황이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결정에 따라 다이카쿠지 왕통과 지묘인 왕통 사이에서 교대로 천황을 내기로 한 원칙에 따라, 1326년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가 되었다.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 타도 계획 실패로 오키 제도에 유배되자, 가마쿠라 막부의 추대로 천황에 즉위했다(겐코의 난). 그러나 1333년 오키를 탈출한 고다이고 천황 측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로쿠하라 단다이를 함락시키고 교토를 점령하면서 즉위 2년 만에 폐위되었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손잡고 동생 도요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즉위시켜 북조를 열었다. 자신은 상황으로서 원정을 펼치며 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여 정무를 보았다. 이 시기 막부측 무사 도키 요리토가 고곤 상황의 행차에 난폭한 행동을 하여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북조 조정과 막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1351년 막부 내부의 간노의 소란 중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쇼헤이 일통)하면서 북조가 폐지되고 상황의 지위도 잃었다. 이듬해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이 교토를 공격했을 때, 고묘 상황, 스코 상황 등 세 명의 상황과 함께 남조의 거점인 야마토국 아노(賀名生)로 납치되어 유폐되었다.
유폐 중 선종에 귀의하여 출가하였고, 1357년 교토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탄바국 야마구니에 조쇼 황사를 건립하고 수행에 힘쓰다 1364년 붕어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남조가 정통으로 인정되면서 역대 천황에서 제외되었다. 그의 삶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즉위와 폐위, 납치를 겪는 등 파란만장했으며, 두 번이나 황위를 부정당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부 하나조노 상황의 가르침을 따라 정무에 진지하게 임했으며, 민중을 생각하며 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2. 1. 탄생과 어린 시절

고곤 천황으로 즉위하기 전의 휘(諱, 이미나)는 가즈히토 친왕(量仁親王)이었다.[2] 쇼와 2년(1313년) 7월 9일 진시에 지묘인통의 고후시미 천황과 고기몬인 네이시(広義門院寧子)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어머니 네이시는 당시 권세를 누리던 사이온지 씨 출신의 정비였다. 가즈히토는 지묘인통의 적자(嫡子)로서 숙부인 하나조노 천황에게 입양되었고[2], 같은 해 7월 17일 하나조노 천황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아 8월 17일 친왕 선하를 통해 "가즈히토"(量仁)로 명명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숙부인 하나조노 상황 등 친족으로부터 제왕 교육을 받았다.
가즈히토 친왕이 태어난 시대는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이 서로 황위를 다투던 양통질립의 시기였다. 할아버지 후시미 상황은 지묘인통의 분열을 막기 위해, 아버지 고후시미 천황에게 장차 적자(가즈히토)가 태어나면 숙부 하나조노 천황의 후계자로 삼아 황위를 잇도록 미리 정해두었다.
도쿠지 3년(1308년) 하나조노 천황이 즉위했을 때는 아직 가즈히토가 태어나지 않았고, 다이카쿠지통의 구니요시 친왕(고니조 천황의 아들)은 어리고 병약했으므로, 고다이고 천황(고니조의 동생)이 중계 성격으로 황태자가 되었다. 가즈히토가 태어난 후인 분포 2년(1318년), 하나조노 천황이 고다이고 천황에게 양위하면서 다이카쿠지통의 구니요시 친왕이 황태자가 되었다. 이때 가마쿠라 막부는 구니요시 다음 황태자로 가즈히토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나, 지묘인통은 다이카쿠지통에 유리한 이 제안을 거부하여(분포 화담) 가즈히토의 황태자 책봉은 미뤄졌다.
그러나 겐코 원년(1326년) 황태자 구니요시 친왕이 급서하자, 같은 해 가료쿠 원년(1326년) 7월에 가즈히토 친왕이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2. 2. 즉위
겐코 원년(1331년) 음력 8월 24일,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시도했던 고다이고 천황의 계획(겐코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했다. 막부는 고다이고 천황을 체포하여 오키 제도로 유배 보냈다.이에 지묘인 왕통의 고후시미 상황은 고토바 천황의 선례에 따라 조서를 내려, 1331년 음력 9월 20일(양력 10월 22일)[3] 당시 19세였던 황태자 가즈히토 친왕(훗날의 고곤 천황)을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정한 다이카쿠지 왕통과 지묘인 왕통이 번갈아 즉위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고곤 천황은 나중에 체포된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황실 전래의 삼종신기를 넘겨받아 즉위례와 대상제를 거행하며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다이카쿠지 왕통과의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찍 사망한 구니요시 친왕(고니조 천황의 아들이자 고다이고 천황 다음의 황태자 예정자)의 아들인 요시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로써 양쪽 왕통을 번갈아 즉위시키는 원칙을 표면적으로는 유지했다.
고곤 천황과 그의 측근들은 그가 1331년 10월 22일부터 1333년 7월 7일[4]까지 천황의 자리에 있었다고 여겼다.
2. 3. 폐위
쇼케이 2년(1333년) 봄 무렵부터 오키 제도를 탈출한 고다이고 천황에 의한 막부 타도 운동이 활발해졌다. 고다이고 천황의 윤지를 받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들고 고다이고 천황 측에 가담하여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했다.[5] 같은 해 5월, 다카우지는 로쿠하라 단다이를 함락시키고 교토를 장악했다.고곤 천황은 로쿠하라 단다이 함락 후 막부군과 함께 동쪽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오미국 반바 (현 시가현 마이바라시)에서 막부군은 전원 자결하고 고곤 천황 자신도 체포되었다. 1333년 7월 7일, 교토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은 고곤 천황을 폐위시켰다.[4] 이로써 고곤 천황은 즉위한 지 약 2년 만에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복위한 고다이고 천황은 고곤 천황의 재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고곤 천황 재위 기간 동안의 연호(쇼케이), 모든 보임(補任), 황태자 책봉 등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며 그의 치세를 부정했다.
2. 4. 회복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겐무 3년(1336년) 2월, 고곤 천황은 고다이고 천황 측을 이탈하여 패주하던 다카우지에게 고다이고 측 닛타 요시사다의 토벌을 명하는 원선을 내렸다.다카우지가 요시사다를 격파하고 고다이고의 겐무 정권을 붕괴시키자, 고곤 천황은 치천의 군으로서, 즉 사실상의 일본 군주로 복귀했다. 같은 해 8월, 고곤은 동생인 도요히토 친왕을 고묘 천황으로 즉위시키면서 북조가 시작되었다. 한편, 고다이고 천황은 야마토국의 요시노로 도망쳐 남조를 세우고 천황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로써 두 명의 천황이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북조가 우세한 상황이었다.
2. 5. 치세
엔겐 원년(1336년) 6월경부터 고곤 상황은 실질적으로 치천의 군(治天の君)으로서 원정을 시작했다.[23][43] 고곤 원정을 중심으로 한 북조의 정무는 정치적 실권과 권위를 잃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43], 실제로는 일정한 범위 내에서 기능했으며[43]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되었다.[43] 고곤 상황이 발급한 원선(院宣)은 약 350통에 달하며, 이는 역대 천황·상황 중에서도 많은 편에 속한다.[43] 랴쿠오 잡소법 제정, 마지막 공가 신제(新制) 발포 등 법령 정비도 이루어졌다.[43] 또한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주도하는 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여 덕정(徳政)을 실시하기도 했다.[43]=== 정치 기구 ===
가마쿠라 시대의 조정을 계승하여 인평정(院評定)이 최고 의결 기관으로 설치되었다.[43] 인평정은 어전평정(御前評定, 최고 의결 기관)과 잡소평정(雑訴評定, 소송 사안 심의)으로 나뉘었다.[43][43] 잡소평정 아래에는 문전(文殿)이 설치되어 소송 사안의 조사 및 심리를 담당했다.[43] 원집사(院執事)인 도인 긴카타와 원집권(院執権)인 간주지 쓰네아키를 중심으로 상황 직속 정무 기관인 원청(院庁)이 운영되었고[43], 검비위사청(検非違使庁) 별당(別当)을 중심으로 교토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검비위사청도 설치되었다.[43][43] 조정과 막부 간의 교섭은 무가전주(武家伝奏)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막부 측에서는 고 모로나오(高師直), 아시카가 다다요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등이 북조 담당자로서 교섭에 참여했다.[43][43][43]
인명 | 관위 | 비고 |
---|---|---|
고노에 모토쓰구 | 종일위 전 관백 | |
이치조 쓰네미치 | 종일위 전 관백 | 출사의 흔적 없음 |
구가 나가미치 | 종일위 전 태정대신 | |
도인 긴카타 | 종일위 전 태정대신 | |
간주지 쓰네아키 | 정이위 전 권대납언 | 고곤 상황 정치를 실질적으로 지탱한 인물 중 한 명[43] |
히노 스케아키 | 정이위 전 권대납언 | 고곤 상황 정치를 실질적으로 지탱한 인물 중 한 명[43] |
하무로 나가미쓰 | 정이위 권중납언 | |
아부라노코지 다카카게(시조) | 정이위 전 권대납언 | |
다이라노 무네쓰구 | 종이위 권중납언 | |
다카시나노 마사아키 | 종이위 비참의 | |
나카노미카도 쓰네스에 | 정삼위 전 참의 | |
나카노미카도 노부아키 | 종이위 전 중납언 | 조와 5년(1349년) 5월 1일 임명 |
니조 요시모토 | 종일위 관백 | 조와 3년(1347년) 1월 14일의 어전평정에서부터 출사 |
도쿠다이지 긴키요 | 정이위 전 내대신 | 조와 5년(1349년) 5월 1일 임명 |
도인 사네나쓰 | 종이위 권대납언 | 조와 5년(1349년) 5월 1일 임명 |
=== 소송 제도 ===
랴쿠오 3년(1340년) 5월 14일, 총 19개 조로 구성된 '랴쿠오 잡소법'(暦応雑訴法)이 제정되어 공가(公家)의 소송 절차를 집대성했다.[43][43] 이 법은 소송의 조건, 심리 절차, 심리 기일 등을 규정했다.[43] 법에 따르면 어전평정은 월 1회, 잡소평정은 월 3회, 문전정중(文殿定衆, 문전에서 열리는 법정)[41]은 월 6회, 문전월소(文殿越訴, 판결 구제 절차 법정)는 월 2회, 검비위사청 평정은 월 6회 개최되도록 정해졌으며, 실제 기록을 통해 이러한 기일이 지켜졌음을 알 수 있다.[43][43] 특히 문전의 활동은 활발했으며, 고곤 원정기는 공가 소송 제도의 절정기이자 완성기로 평가받기도 한다.[43]
소송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원고가 유력자의 추천장(교조)과 함께 소장(모시조)을 평정중(주로 전주)에게 제출하면 제소가 성립되었다. 담당 봉행인(전주)은 피고에게 답변서(진조) 제출을 요구하는 원선(몬조)을 작성하고 문전을 지휘했다. 문답과 대결을 통해 해결되지 않으면 문전중이 합의 결과를 정리한 '문전 주진장(注進状)'을 작성하여 봉행인에게 제출했다. 봉행인은 이를 상황에게 올려 재가를 받았고, 재가 원선이 발부되어 소송이 종결되었다.[43]
고곤 상황의 원선은 조정 귀족이 작성한 시행장(구게시교조)과 함께 무로마치 막부에 보내져, 막부의 집행 기구를 통해 실제 효력을 발휘했다(준행 이관).[43][43]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북조는 왕조 정권의 형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43]
=== 덕정(徳政)과 신제(新制) ===
고곤 원정기에는 조정을 주도하는 고곤과 무로마치 막부를 이끄는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협력하여 덕정(徳政)을 실시했다.[43] 이는 '조와의 덕정'이라고도 불린다. 조와 2년(1346년) 12월 15일, 고곤은 검약을 명하는 신제(新制)를 발포했는데, 이는 마지막 공가 신제가 되었다.[43] 이듬해 막부에서도 여러 추가법을 제정하며 조정의 정책에 호응했다.[43] 고에이 원년(1342년)에는 막부의 요청으로 물가 통제 법안이 조정에서 심의되기도 했다.[43] 이러한 공무 협력의 배경에는 잦은 재해와 천재지변에 대응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무민 정책으로서의 측면이 있었다.[43]
=== 문화 활동 ===
고곤은 덴류지와 안코쿠지 리쇼토의 건립에도 관여했다. 또한 와카에도 조예가 깊어, 칙찬 와카집인 『풍아 와카집(風雅和歌集)』 편찬을 주도했다. 이 와카집은 숙부인 하나조노 법황이 감수했지만, 실제 편찬은 고곤이 맡았다는 것이 정설이다.[56][56]
=== 평가 ===
랴쿠오 잡소법 제정 등으로 대표되는 고곤 원정은 '왕조 소송 제도의 정점'[43] 또는 '제도적으로 가장 완성된 것'[43]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잡소 평정이나 문전의 개최 빈도가 이전 시대보다 감소한 점 등을 들어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원정이나 겐무 신정 때보다 규모가 축소되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43] 고곤 자신도 '랴쿠오 잡소법' 제정 이후의 여러 정책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43]
=== 주요 저작 ===
- 『풍아화가집』: 하나조노 법황 감수, 고곤 상황 편찬의 17번째 칙찬 와카집.[56]
- 『고곤인 어집(光厳院御集)』: 고곤 상황이 직접 편찬한 가집.[56]
- 『고곤인 어백수(光厳院御百首)』: 조와 2년(1346년) 성립.[59]
- 『고곤인 친필 삼십육번 가합(光厳院宸翰三十六番歌合)』: 조와 5년(1349년) 가합 기록.[59]
- 『고곤 천황 신기(光厳天皇宸記)』: 고곤의 일기. 일부만 현존.[59][59]
- 『신요로쿠(深要路)』: 고묘 천황과의 공저.[60][61]
2. 6. 쇼헤이 일통과 삼상황 납치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내분인 간노의 소란이 일어나자, 간오 2년(1351년) 11월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항복하여 쇼헤이 일통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북조는 일시적으로 폐지되었고, 고곤 천황은 폐위되었으며 원정도 중지되었다.이듬해인 1352년 4월, 간노의 소란의 혼란을 틈타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은 교토를 점령했다. 이때 고무라카미 천황은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등 세 명의 상황과 황태자 타다히토를 납치하여 남조의 거점이었던 야마토국 아노(賀名生, 가나오)로 끌고 갔다.[5] 고곤 천황은 아노에서의 유폐 생활 중 선종에 귀의하여 출가했다.
2. 7. 출가와 귀경
간오의 소란 중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항복하면서 쇼헤이 잇토가 이루어져 북조는 일시적으로 폐지되었고, 고곤의 원정도 중지되었다(1351년 11월). 그러나 다음 해인 쇼헤이 7년(1352년) 윤2월, 남조는 화의를 깨고 교토를 다시 침공했다. 이때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고곤, 고묘, 스코 세 상황과 폐태자 나오히토 친왕을 버리고 패주했다. 남조는 '전란으로부터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이들을 이와시미즈하치만구로 옮기도록 요청했고, 고곤 등은 이를 따랐으나 이는 사실상의 납치였다. 고곤 자신도 이를 예감하고 지묘인통에 전해지던 기록물을 도인 기엔 등에게 맡겼다[38]. 이후 남조군이 철수하면서 세 상황과 나오히토 친왕은 가와치국 도조를 거쳐 남조의 본거지인 야마토국 가나오로 옮겨져 유폐되었다[39]. 막부가 사사키 도요 등을 보내 귀경을 교섭하고 획책했으나 실패했다.북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활했지만, 고곤은 유폐 중 자신의 아들 야히토 왕의 즉위 소식을 듣고 이에 실망하여 가나오에서 출가하고 선종에 귀의했다. 법명은 쇼코치(勝光智)였다.
엔분 2년(1357년) 2월, 오랜 유폐 생활을 마치고 교토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지묘인통의 상속 문제를 정리하였으며, 이후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성립과 존속에 깊이 관여했다.
2. 8. 만년과 붕어
엔분 2년(1357년) 2월 18일, 5년간의 남조 유폐 생활을 마치고 스코 상황, 나오히토 친왕과 함께 교토로 돌아왔다. 고곤은 고묘 법황이 있는 후카쿠사 곤고주인에 들어갔다. 귀경 직후에는 고산 문학 승려로 유명한 주간 엔게츠를 초청하여 고묘 법황과 함께 『다이에 후가쿠 선사어록』 강의를 듣는 등 불교 수행에 힘썼으며, 한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으나 3월에는 요로쿠몬인의 아버지 오기마치 산조 긴히데와 면회하며 슬픔과 기쁨을 나누었다.고안 2년(1362년) 9월에는 10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호류지에 참배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이헤이키』나 『다이죠인 일기 목록』 등에는 법황이 야마토와 기이 지방을 순행하며 요시노에서 고무라카미 천황과 재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40].
만년에는 탄바국 야마구니 (현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에 조쇼 황사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선종 수행에 매진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조지 3년(1364년) 7월 7일, 고곤 법황은 조쇼 황사에서 붕어했다. 향년 52세(만 51세)였다.
이튿날인 7월 8일[63], 춘옥묘파의 주관 아래 선종의 방식에 따라 장례가 치러졌다. 교토에서 일부 공경과 고묘 법황도 참석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유해는 화장된 후 조쇼 황사 뒷산에 매장되었다. 7월 10일, 조정에서는 법황이 만년에 머물렀던 사찰 이름을 따 "고곤인"(光厳院)이라는 원호를 결정했다. 7월 11일에는 북조에서 유조(遺詔) 주(奏)・고관 경호・폐조 등의 절차가 진행되었다.
고곤 천황이 묻힌 야마쿠니릉(山国陵)은 그의 유계(遺誡)에 따라 매우 검소한 흙무덤으로 조성되었으며, "소나무와 잣나무는 스스로 묘 위에 자라고, 풍운은 때때로 오고 가는 것은,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손님이다. 매우 사랑하는 바이다"라는 유언처럼 무덤 위에는 단풍나무와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훗날 분메이 3년(1471년)에는 고곤 천황의 현손인 고하나조노 천황이 자신의 유언에 따라 이곳 야마쿠니릉에 합장되었다.
분골소는 유폐지였던 오사카부 가와치나가노시 아마노마치의 곤고지에 있으며, 발탑(髪塔, 머리카락을 봉안한 탑)은 아들 스코 천황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교토시 우쿄구의 곤고인(金剛院)에 있다.
3. 가계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고후시미 천황 | 제93대 천황 |
어머니 | 사이온지 네이시 | 사이온지 킨히라의 딸, 고기몬인(広義門院) |
양부 | 하나조노 천황 | 고후시미 천황의 동생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지위 | 배우자 이름 | 자녀 |
황후 | 센세이몬인 요시코 내친왕 (1315-1362) | 고다이고 천황의 황녀, 센세이몬인(宣政門院) |
비 (妃) | 키안몬인 쥬시 내친왕 (1318-1358) | 하나조노 천황의 황녀, 키안몬인(徽安門院) |
텐시 (典侍) | 산조 히데코(三条 秀子) (1311-1352) | 오기마치산조 킨히데(正親町三条 公秀)의 딸, 요로쿠몬인(陽禄門院) |
후궁 | 사이온지(西園寺)씨 | 사이온지 사네히라의 딸, 킨온카타(今御方) |
후궁 | 사이온지(西園寺)씨 | 사이온지 사네아키라의 딸, 타이온카타(對御方) |
후궁 | 오기마치(正親町)씨 | 오기마치 킨카게의 딸, 이치죠노츠보네(一条局) |
후궁 | 오이노미카도(大炊御門)씨 | 오이노미카도 후유우지의 딸 |
생모 불명 | ||
유자 | ||
유자 | 고묘 천황 | 고곤 천황의 친동생. 의모는 센세이몬인 요시코 내친왕. |
유자 | 나오히토 친왕 | 하나조노 천황의 황자로 알려졌으나 고곤 천황의 친자설 유력. 명목상 고곤 천황의 유자. 모친은 오기마치 사네코(正親町 実子).[62] |
4. 연호
고곤 천황의 치세는 하나 이상의 연호( 年号|넨고일본어 )로 더 구체적으로 식별된다.[6]
1332년(겐코 2년)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로 유배된 사이, 고곤 천황은 4월 28일에 연호를 '쇼케이(正慶)'로 바꾸었다. 하지만 쇼케이 2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를 탈출하고,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로쿠하라를 공격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복위하여 고곤 천황을 폐위시켰다. 동시에 '쇼케이' 연호를 무효로 하고, 연호를 다시 '겐코(元弘)' 3년으로 되돌릴 것을 선언했다. 고곤 천황이 즉위하기 전 고다이고 천황이 겐코로 개원했을 때, 가마쿠라 막부에 개원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기존의 연호인 '겐토쿠'를 계속 사용했으며 겐코 연호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고곤 천황이 사용한 연호는 다음과 같다.
:'''''남북조 시대 이전'''''
- ''겐코'' (1331년–1334년) - 1331년 10월 22일(겐코 원년 9월 20일) 선조(先朝)로부터 이어받음.
- ''쇼케이'' (1332년–1333년) - 1332년 5월 23일(겐코 2년 4월 28일) 즉위하며 개원. 1333년 7월 7일(쇼케이 2년 5월 25일) 폐위되면서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연호가 '겐코' 3년으로 환원됨.
:'''''남북조 시대 북조'''
5. 평가
고곤 천황의 생애는 남북조 시대라는 혼란기에 휘둘렸으며,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폐위되고 이후 남조에 의해 다시 황위가 부정되는 등 천황으로서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그는 두 번이나 황위에서 물러나야 했던 비운의 천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숙부인 하나조노 상황의 가르침을 지키며 치천의 군으로서 정무에 진지하게 임했다는 평가가 있다. 민중을 생각하며 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으며, 때로는 "강단 있는" 위정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와카에 능하여 칙찬 와카집인 『풍아와카집』을 직접 편찬하는 업적을 남겼다.
남북조 합일 이후 고곤 천황의 자손들이 황위를 이어갔지만, 메이지 44년(1911년) 그의 후손인 메이지 천황이 당시 여론의 영향을 받아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46]. 이 결정으로 고곤 천황을 비롯한 북조의 천황들은 정식 역대 천황 명단인 『황통보』에서 제외되었고, 고곤 천황은 역대 천황이 아닌 북조 초대 천황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コトバンク 「光嚴天皇」
https://kotobank.jp/[...]
2017-07-23
[2]
문서
Titsingh, p. 286.
[3]
문서
The twentieth day of the ninth month of the third year of [[Gentoku]],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lunisolar calendar]]
[4]
문서
The twenty-fifth day of the fifth month of the second year of [[Shōkei (Japanese era)|Shōkei]],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lunisolar calendar]]
[5]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6]
문서
Titsingh, p. 286.
[7]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8]
뉴스
聖武天皇の命日、1日間違えた 宮内庁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3-08-02
[9]
웹사이트
光厳天皇
2023-03-04
[10]
웹사이트
光厳天皇
2023-03-04
[11]
서적
鎌倉時代の朝幕関係
[12]
서적
鎌倉時代の朝幕関係
[13]
서적
新釈日本文学叢書 第8巻 (今鏡・増鏡)
https://dl.ndl.go.jp[...]
日本文学叢書刊行会
[14]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元弘元年9月20日(1331009020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5]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元弘元年10月6日(1331010006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6]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元弘元年10月13日(1331010013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7]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正慶元年3月22日(1332003022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8]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正慶2年3月12日(1333003012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19]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建武2年6月24日(1335006024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0]
웹사이트
御幸始
https://kotobank.jp/[...]
[21]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建武元年1月29日(13340010290) 2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2]
웹사이트
高松市公式ホームページ
http://www.city.taka[...]
2023-01-04
[23]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延元元年5月27日(1336005027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4]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延元元年11月7日(1336011007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5]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暦応1年11月19日(1338011019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6]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暦応3年5月14日(1340005014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7]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和2年12月28日(1346012028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8]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和3年2月19日(1347002019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29]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暦応2年10月5日(1339010005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0]
서적
日本仏教史(4)
[31]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和元年2月6日(1345002006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2]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和4年10月27日(1348010027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3]
웹사이트
流行性感冒の歴史―前近代の流行り風邪―(4)
https://archives.pre[...]
神奈川県立公文書館
2023-01-04
[34]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和4年5月6日(1348005006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5]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観応元年7月12日(1350007012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6]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観応元年10月2日(1350010002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7]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康永元年9月6日(1342009006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38]
서적
中世歌壇史の研究―南北朝期
1965
[39]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文和元年6月2日(1352006002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40]
서적
太平記の論
1997
[41]
논문
院評定制について
[42]
문서
[43]
문서
[44]
서적
女院領の中世的展開
同成社
2018
[45]
서적
室町時代和歌史論
[46]
서적
尋常小學日本歴史―教師用
https://nieropac.nie[...]
1911
[47]
문서
[48]
웹사이트
コトバンク、百首歌
https://kotobank.jp/[...]
2023-03-02
[49]
뉴스
皇太子が胸に刻む訓戒の書『誡太子書』の苛烈な内容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19-03-21
[50]
웹사이트
風雅和歌集
https://japanknowled[...]
2023-01-04
[51]
뉴스
関西の納豆文化広がり期待 発祥伝説の京都で新工場、1日2万食生産 牛若納豆の森口加工食品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23-01-04
[52]
뉴스
(関西食百景)古都に伸びる伝承の糸
https://www.asahi.co[...]
朝日新聞社
2023-01-04
[53]
웹사이트
納豆発祥の地 納豆もち 大豆や米作り 京都京北 山国さきがけセンター
https://keihoku-saki[...]
2023-01-04
[54]
웹사이트
納豆発祥の地・京北 | 納豆発祥の地 京都・京北よりお届けする牛若納豆
https://www.ushiwaka[...]
2023-01-04
[55]
문서
[56]
논문
光厳院御集と花園院御集
1960
[57]
웹사이트
書陵部所蔵目録・画像公開システム『花園院御集』
https://shoryobu.kun[...]
宮内庁書陵部
2023-01-04
[58]
뉴스
国文学者で渋沢栄一のひ孫、岩佐美代子さん死去
https://www.sanspo.c[...]
サンスポ
[59]
데이터베이스
国書データベース
https://kokusho.nijl[...]
2023-05-31
[60]
데이터베이스
国書データベース
https://kokusho.nijl[...]
2023-05-31
[61]
웹사이트
書陵部所蔵資料目録・画像公開システム ギャラリー バックナンバー
https://shoryobu.kun[...]
宮内庁書陵部
2023-05-31
[62]
서적
新編纂図本朝尊卑分脈系譜雑類要集(6)
https://dl.ndl.go.jp[...]
吉川弘文館
1904
[63]
데이터베이스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治3年7月8日(13640070080) 1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