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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대견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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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달성 대견사지 삼층석탑은 비슬산에 위치한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9세기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된 대견사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을 1988년 달성군에서 복원했다. 탑은 절벽 바위를 바닥돌로 삼고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세워졌으며, 소박한 형태와 가늘고 높은 외형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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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대견사지 삼층석탑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견사지삼층석탑
대견사지삼층석탑
이름대견사지삼층석탑
지정 종류유형문화재
지정 번호42
지정일1995년 5월 12일
소재지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산1번지
시대통일신라
면적16,530m2
google_map대견사지
추가 정보
유형 문화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4호 (1994년 4월 16일 지정, 1995년 5월 12일 해제)

2. 역사

비슬산 중턱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이 탑은 1988년에 복원되었다. 절벽의 높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그 위로 기단과 탑신을 올린 모습이 특징이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둔 것 외에는 거의 꾸밈을 하지 않아 소박하다.

탑은 대견사의 창건 시기와 같은 통일신라 시대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1]

2. 1. 건립 배경

대견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라 헌강왕 때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절 이름의 유래는 당나라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시대 왕실 자료와 지리지 등에서 대견사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15세기 왕실 자료인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는 대견사의 석조관음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후 간행된 문헌에는 사찰의 위치와 창건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며, 18세기 후반의 지리지부터는 사찰이 "영무"(令無) 또는 "영폐"(令廢)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특히 《영남읍지》와 《현풍군읍지》에 따르면, 대견사에는 구층석탑이 있었고 1592년에 사찰 건물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대견사는 9세기에 창건되어 석조관음상과 구층탑을 봉안하였으며, 16세기 전반까지는 사세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2. 2. 고려 및 조선 시대

대견사의 창건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신라 헌강왕 대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명(寺名) 유래는 당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문헌 기록은 조선시대의 왕실 자료와 지리지 등에서 확인된다. 15세기 왕실자료인 태종실록세종실록에는 대견사의 석조관음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후에 간행된 문헌에는 사찰의 위치와 창건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며, 18세기 후반의 지리지부터는 사찰에 대해 "영무"(令無), "영폐"(令廢)로 기록되어 있다.[1] 특히 영남읍지와 현풍군읍지에 의하면 사찰에 구층석탑이 있고, 1592년에 사찰 건물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에 의하면 대견사는 9세기에 창건되어 석조관음상과 구층탑을 봉안하였으며, 16세기 전반까지는 사세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00년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재인이 중창하였으나 1909년에 다시 폐사되었다고 한다.[1]

2. 3. 임진왜란과 폐사

대견사는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명(寺名) 유래는 당나라 문종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왕실 자료와 지리지 등에서 대견사에 대한 문헌 기록이 확인된다. 15세기 왕실 자료인 태종실록세종실록에는 대견사의 석조관음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후 간행된 문헌에는 사찰의 위치와 창건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며, 18세기 후반의 지리지부터는 사찰에 대해 "영무"(令無), "영폐"(令廢)로 기록되어 있다.[1]

특히 영남읍지와 현풍군읍지에 따르면, 대견사에 구층석탑이 있었고 1592년(임진왜란)에 사찰 건물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대견사는 9세기에 창건되어 석조관음상과 구층탑을 봉안하였으며, 16세기 전반까지는 사세(寺勢)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00년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재인이 중창하였으나 1909년에 다시 폐사되었다.[1]

2. 4. 근현대

1900년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재인이 대견사를 중창하였으나 1909년에 다시 폐사되었다.[1]

일제강점기 조사자료에는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과 오층석탑, 마애불이 있다고 하였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석탑 1기와 석불 1구만 보고되어 있다. 이후 1997년 자료에는 석축, 석렬, 우물지와 도괴되었다가 복원된 석탑, 추정 배례석, 연화대석, 마애범라분 등이 보고되어 있다. 절터는 달성군의 정비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에 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조선시대 건물지 6동과 연화대좌, 납환 2점, 명문 막새편 등이 확인되었으며, 2014년에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1]

2. 5. 최근 복원 사업

1988년에 달성군에서 쓰러져 있던 석탑을 복원했다. 높이는 3.67m이다.[2] 2014년에는 달성군에서 대견사지 정비 및 복원 사업을 진행했다.[1]

3. 구조

이 탑은 비슬산 주봉인 천왕봉에서 남쪽으로 약 2km, 해발 약 950m에 위치한다. 중국 당나라 황제가 절을 짓기 위해 명당을 찾아 헤매다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이곳에 터를 잡아 절과 삼층석탑을 건립하고, 대국에서 본 절이라 하여 대견사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절을 처음 세웠을 때는 9층탑(또는 6층탑)이라 전해지기도 한다.[2]

탑 모양이 가늘고 높게 올라가 상승감이 있으며, 통일신라 후기(또는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2]

임진왜란 때 절이 허물어져 빈터에 주춧돌과 석축만이 남아 있었고, 삼층석탑도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88년 달성군에서 높이 3.67m의 3층탑으로 복원하였다.[2]

3. 1. 기단부

이 탑은 일반적인 탑과 달리 절벽의 바위를 바닥돌로 하고 그 위에 2층 기단을 쌓아 3층탑을 세웠다. 하층 기단에는 양쪽 모서리 부분과 가운데에 기둥무늬를 돋을새김했고, 윗층 기둥돌과 몸돌에도 양쪽 모서리에만 기둥무늬를 새겼을 뿐 별다른 꾸밈이 없어 소박하다.[2]

3. 2. 탑신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절 내의 여러 석재들과 함께 쓰러져 있던 것을 1988년에 복원하였다. 일반적인 탑과 달리 절벽의 높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그 위로 기단과 탑신을 올려놓았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둔 것 외에는 거의 꾸밈을 하지 않아 소박하다.[2]

윗층 기둥돌과 몸돌에도 양쪽 모서리에만 기둥무늬를 새겼을 뿐 별다른 꾸밈이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 모양이 가늘고 높게 올라가 상승감이 있다.[2]

4. 현지 안내문

비슬산 중턱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이다.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절 안의 여러 석재들과 함께 쓰러져 있던 것을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일반적인 탑과 달리 절벽의 높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그 위로 기단과 탑신을 올려놓았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둔 것 외에는 거의 꾸밈을 하지 않아 소박하다.[2]

만들어진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로 추측된다. 오랜 세월 무너져 있었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산세를 다스리고 있는 듯한 위엄이 우러난다.[2]

참조

[1] 서적 2015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上,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https://web.archive.[...]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7-03-19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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