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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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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흥국은 발해인의 후손으로 금나라 희종의 측근에서 근무하다가, 해릉양왕의 희종 암살 계획에 가담하여 희종을 살해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해릉양왕에게 높은 관직과 재물을 받았으나, 해릉양왕이 몰락한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희종 능묘 옆에서 처형되었다.

2. 생애

발해 유민의 후손인 대흥국은 희종 재위 시기 침전소저권근시국직장으로 근무하며 황제의 침전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황통 9년(1149년), 희종의 명으로 완안량에게 생일 선물을 전달했으나, 완안량이 이를 황후에게 바친 일로 인해 희종의 노여움을 사 억울하게 곤장 100대를 맞았다. 이 사건은 대흥국이 희종에게 앙심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황위 찬탈을 노리던 완안량은 희종 암살 계획에 대흥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라 여겨 그를 포섭했다. 대흥국은 개인적인 원한과 더불어 희종 치하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완안량의 계획에 가담했다. 같은 해 12월, 대흥국은 침전 문을 열어 완안량 일파를 들이고 희종이 방어할 수 없도록 조치하여 암살을 도왔다.

완안량이 해릉양왕으로 즉위한 후, 희종 시해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대흥국은 광녕윤에 임명되고 금자 광록대부의 지위를 받는 등 높은 관직과 막대한 재물을 하사받았다. 천덕 4년(1152년)에는 숭의군 절도사가 되고 '나라의 기틀'이라는 뜻의 '방기'라는 이름을 하사받는 등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해릉양왕이 폭정 끝에 1161년 피살되고 세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운명은 급변했다. 세종은 해릉양왕 시절의 인물들을 숙청하였고, 대흥국 역시 해릉양왕에게 받았던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결국 대정 23년(1183년), 34년 전 희종 시해에 가담했던 죄를 물어 희종의 능인 사릉 곁에서 처형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발해 유민의 후손으로, 처음에는 희종의 침전을 경호하는 침전소저권근시국직장(寝殿小底権近侍局直長)으로 일했다. 이 자리는 황제가 잠든 사이 방문객을 응대하고 출입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아, 직위는 낮았지만 상당한 중요성을 지녔다.

황통 9년(1149년), 적인내(迪古乃, 훗날의 해릉왕)의 생일에 희종은 대흥국을 사신으로 보내 사마광의 초상화와 진귀한 선물을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적인내가 이를 황후 배만씨에게 바치자 희종은 크게 분노했고, 대흥국은 아무 잘못 없이 곤장 100대의 벌을 받았다. 이 일로 희종에게 앙심을 품게 된 대흥국은, 마침 희종 암살을 계획하던 적인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중신이나 황후들이 사소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것도 암살에 가담한 이유 중 하나였다.

같은 해 12월 9일 밤, 대흥국은 침전 문을 열어 적인내 일행을 들였다. 또한 평소 희종이 침대 머리맡에 두던 칼을 미리 침대 아래로 숨겨두어, 잠에서 깬 희종이 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해릉양왕으로 즉위한 적인내는 희종 암살의 공을 인정하여 대흥국을 광녕윤(広寧尹)에 임명하고 노예 100명과 옥대 등을 하사했으며, 금자광록대부의 지위를 주었다. 이후에도 막대한 재물(전 1천만 냥, 황금 400냥, 은 1,000냥, 좋은 말 4필 등)을 상으로 받았다. 천덕 4년(1152년)에는 숭의군절도사가 되었고, '나라의 기틀'이라는 뜻의 '방기(邦基)'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대방기(大邦基)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무녕군절도사와 하간윤을 지냈다.

그러나 해릉양왕이 폭정 끝에 살해되고 세종이 즉위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해릉양왕에게 받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으며, 대정 23년(1183년) 정월 갑오일에는 34년 전 희종 암살에 가담했던 죄가 다시 거론되어, 희종의 능묘인 사릉(思陵) 곁에서 처형되었다.

2. 2. 희종 시해 가담

발해 유민의 후손인 대흥국은 희종의 침전을 경호하는 침전소저권근시국직장으로 일했다. 이 자리는 황제가 잠든 사이 방문객을 응대하고 출입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황통 9년(1149년), 적인내(훗날의 해릉양왕)의 생일에 희종은 대흥국을 사신으로 보내 사마광의 초상화와 진귀한 선물을 전달하게 했다. 적인내가 이 선물을 황후 배만씨에게 바치자 희종은 크게 분노했고, 아무 잘못 없는 대흥국이 대신 곤장 100대를 맞았다. 이 일로 희종에게 앙심을 품게 된 대흥국은, 당시 중신이나 황후들이 사소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희종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적인내는 계획 성공을 위해 대흥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여겼고, 대흥국은 적인내의 암살 계획에 가담하기로 했다.

같은 해 12월 9일 밤, 대흥국은 침전 문을 열어 적인내 일행을 들였다. 희종은 평소 침대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자는 습관이 있었는데, 대흥국이 미리 칼을 침대 밑으로 숨겨두었다. 잠에서 깬 희종은 칼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고, 결국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했다.

적인내가 해릉양왕으로 즉위하자 희종 시해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대흥국에게 큰 상을 내렸다. 광녕윤에 임명하고 노예 100명과 옥대 등을 하사했으며, 금자광록대부의 지위를 주었다. 이후에도 돈 천만 냥, 황금 400냥, 은 1,000냥, 좋은 말 네 필 등 막대한 재물을 받았다. 천덕 4년(1152년)에는 숭의군절도사가 되었고, '나라의 기틀'이라는 뜻의 '방기'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대방기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무녕군절도사와 하간윤을 지냈다.

그러나 해릉양왕이 폭정 끝에 살해되고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대흥국은 해릉양왕에게 받았던 막대한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다. 결국 대정 23년(1183년) 정월 갑오일, 34년 전 자신이 가담했던 희종 시해 사건의 책임을 물어 희종의 능묘인 사릉 곁에서 처형되었다.

2. 3. 완안량 집권기의 부상

발해인의 후손인 대흥국은 희종 치세 말기에 침전소저권근시국직장(寝殿小底権近侍局直長)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황제의 침실을 관리하며 방문객 응대 및 출입 허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황통 9년(1149년), 완안량(完顔亮, 당시 이름 적인내)의 생일에 희종은 대흥국을 사자로 보내 사마광의 초상화와 귀한 선물을 전달했다. 그러나 완안량이 이 선물을 자신의 부인인 황후 배만씨에게 주자, 희종은 크게 노하여 대흥국에게 곤장 100대를 치는 벌을 내렸다. 이는 대흥국이 완안량에게 협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희종의 변덕스러운 성정과 폭력성에 불만을 품고 있던 완안량은 황제 암살을 계획하며 대흥국의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대흥국 역시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곤장을 맞은 것에 앙심을 품었고, 희종 아래에서 중신이나 황후마저 사소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는 완안량의 거사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1149년 12월 9일 밤, 대흥국은 침전의 문을 열어 완안량과 그의 무리를 안으로 들였다. 평소 침대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자는 희종의 습관을 알고 있던 대흥국은 미리 칼을 침대 밑으로 숨겨두었다. 잠에서 깬 희종은 칼을 찾으려 했으나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저항하지 못한 채 완안량 일당에게 살해당했다.

희종을 제거하고 황위에 오른 완안량은 거사의 일등 공신인 대흥국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는 광녕윤(広寧尹)에 임명되었고, 금자광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또한 막대한 재물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완안량 즉위 후 대흥국이 받은 주요 관직 및 하사품
구분내용
관직광녕윤(広寧尹), 숭의군절도사(崇義軍節度使), 무령절도사(武寧節度使), 하간윤(河間尹)
품계금자광록대부
하사 이름방기(邦基) (천덕 4년, 1152년)
하사품노예 100명, 옥대(玉帯), 돈 1천만 냥, 황금 400냥, 은 1천 냥, 좋은 말 4필 등



천덕 4년(1152년)에는 숭의군절도사가 되었고, 완안량은 그에게 '나라의 기틀'이라는 의미의 '방기(邦基)'라는 이름을 직접 내려주었다. 이후 무령절도사와 하간윤 등의 요직을 거치며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러나 완안량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1161년 피살되고 세종이 즉위하면서 대흥국의 운명도 급변했다. 세종은 완안량에게 협력했던 인물들을 숙청했고, 대흥국 역시 해릉왕에게 받았던 막대한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다. 결국 대정 23년(1183년) 정월, 34년 전 자신이 가담했던 희종 시해 사건의 책임을 물어 희종의 능인 사릉(思陵) 곁에서 처형당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2. 4. 몰락과 처형

해릉왕이 살해되고 세종이 즉위하자, 이전에 해릉왕에게 하사받았던 재화는 모두 몰수되었다. 대정 23년(1183년) 정월 갑오일, 34년 전 희종 살해 사건이 다시 거론되면서 대흥국은 희종의 능묘인 사릉(思陵) 곁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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