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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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절도사는 당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군사 지휘관 직책으로, 군사, 민사, 재정을 통괄하는 권한을 가졌다.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당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대십국 시대에는 절도사가 각국의 기반이 되었으나, 송나라 건국 후 조광윤은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하고 명예직으로 전환했다. 한국에서는 신라 말기에 절도사를 자칭하는 호족이 있었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의 형태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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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위는 동아시아의 삼공 중 하나로, 주로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최고위 관직이었으며 시대와 국가에 따라 역할과 권한에 차이가 있었다. 
| 절도사 | |
|---|---|
| 개요 | |
| 명칭 | 절도사 (節度使) | 
| 로마자 표기 | Jedosa | 
| 설명 | 당나라부터 원나라까지 중국의 지방 군사 책임자를 가리키는 명칭 | 
| 참고 | 당나라의 군사적 지역주의 참고 | 
2. 역사
당나라 예종 경운 2년 (711년)에 "절도사"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 절도사는 조정에서 내린 "정절"(旌節, 사자가 지참하는 깃발로, 소꼬리를 깃발에 붙인 것)을 받아 관할 지역의 군정을 절제할 수 있었다. 부병제 붕괴와 용병 증가로 현종 개원 연간 (713년 - 741년)에 삭방(현재 내몽골 자치구 오르도스), 농우(현재 간쑤성 남부, 농산 서쪽), 하동·하서의 변방 10개 진에 설치되었다.[2]
안사의 난 이후 내지에도 설치되어 40~50명의 절도사가 안찰사, 안무사, 도지사 등을 겸임하며 군사, 민사, 재정을 총괄했다. 하북도 절도사처럼 독립적인 경우도 있었으나, 헌종 때 약화되었지만 당나라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1]
오대십국 시대 여러 나라는 절도사가 수립했으며, 국내에 절도사를 분립하여 전횡을 심화시켰다. 조광윤은 송나라 건국 후 절도사 권한을 회수했고, 번진을 각 주로 되돌렸으며, 이후 장수, 대신, 황족, 공신을 위한 명예직으로 바뀌어 실체를 잃었다.[2] 요나라, 금에도 설치되었으나, 원에서 폐지되었다.[1]
2. 1. 성립과 안사의 난 이전
당은 태종 때 크게 영토를 확장했고, 도호부, 기미정책, 부병제, 진병 등의 제도로 영토를 유지했다. 진병은 이민족 출신 번장, 번병을 많이 기용했는데, 번진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주로 서북 변방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으나 현종 때 부병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서 변방 이외 지역에도 설치되었다. 절도사는 주둔군 장군과 지방 재정관을 겸하며 임지 세수를 군비와 병사 고용에 쓰는 제도였다.[2]부병제는 북위 군사제도에 기반을 두었는데, 북위에서는 병사의 주체가 유목민족 고유 부족 제도 아래 집단생활을 하던 유목민족이었던 반면, 당의 부병제는 정주 생활 기반 농경 종사 농민들이 병사까지 겸하는 것이었다. 연간 3개월 군사훈련은 농업에 부담이 되었고, 영토 확장과 함께 변경으로 부임하는 병사들은 출신 향리나 가족으로부터 멀어져 사기가 저하되고 전투력도 약해졌다. 변경 복무는 백거이의 『신풍절비옹』으로 대표되는 병역거부 현상까지 발생시켰고, 부담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도망쳐 본적지를 떠나는 도호와 그대로 다른 땅에 가서 현지 귀족의 노비로 들어가는 양민도 생겨났다. 그에 따라 호적을 바탕으로 병역 의무를 부과했던 부병제는 징병 대상이 차츰 감소했고, 병력 충당 인원이 줄면서 교대 기간도 늘어나 복무 기간이 2년, 3년에 걸치기도 했다.
당은 각 도마다 주둔하던 무장을 도독이라 불렀고, 도독은 사지절 칭호를 가지고 절도사가 되었다. 현종 경운 2년(711년)에 하발연사를 양주도독으로서 하서절도사로 채운 것을 시작으로, 10곳 도에 절도사가 설치되었다. 주둔 병사는 징병제 형태였던 부병제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모병제 형태 장정건아제에 의해 이루어졌고, 변경에서 둔전을 경작하며 국가로부터 견과 동전을 월급으로 지급받았다.
| 절도사명 | 치소 | 설치목적 | 설치연도 | 병력 | 
|---|---|---|---|---|
| 안서 | 구자 | 천산남로 방어, 서돌궐 대비 | 710년 | 24000 | 
| 북정 | 정주 | 천산북로 | 712년 | 20000 | 
| 하서 | 양주 | 토번과 돌궐 연합 저지 | 710년 | 73000 | 
| 삭방 | 영주 | 돌궐 대비 | 721년 | 64700 | 
| 하동 | 태원 | 돌궐 대비 | 711년 | 55000 | 
| 범양 | 유주 | 해・거란 대비 | 713년 | 91400 | 
| 평로 | 영주 | 실위・말갈 대비 | 719년 | 37500 | 
| 농우 | 선주 | 토번 대비 | 713년 | 75000 | 
| 검남 | 성도 | 토번・토욕혼 대비 | 714년 | 30900 | 
| 영남오부경략사 | 광주 | 이요[3] 대비 | 711년 | 15400 | 
절도사는 안서・북정・평로의 장성 바깥을 맡은 절도사와, 그 이외 장성 안쪽을 맡은 절도사로 나뉘었다. 장성외절도사는 무인이나 번장이 임명되었고, 장성내절도사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문관이 부임하게 되어있는 것이 당초 방침이었다. 절도사는 또한 문관이 재상으로 등용되기 위한 일종의 출세 코스로 여겨졌는데, 현종에게 중용되었던 재상 이임보는 정적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법제상 재상이 될 수 없게 되어 있던 번장을 적극적으로 절도사로 등용했다. 안록산도 현종 총애를 받아 742년에 평로절도사가 되었고 이어 범양・하동 절도사도 겸하게 되었다.
"절도사"라는 명칭은 당나라 예종의 경운 2년 (711년)에 처음 등장하며, 이 직책을 받을 때 조정에서 "정절"(旌節, 사자의 표식으로 사자가 지참하는 깃발로, 소꼬리를 깃발에 붙인 것)을 하사받아, 관할하는 지역의 군정을 절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 2. 안사의 난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내지에 절도사를 설치하여 40~50명의 절도사가 배치되었다. 이들은 안찰사, 안무사, 도지사 등을 겸임하며 군사, 민사, 재정을 총괄했다. 특히 하북 지역 절도사들은 중앙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경향을 보였다.[1] 헌종의 탄압으로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절도사 세력은 당나라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1]2. 3. 당 대종, 덕종 시기
대종, 덕종 시기에 당나라는 번진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압박을 가했다. 781년 성덕군의 이보신이 사망하자 아들 이유악(李惟嶽)의 세습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성덕, 천웅, 평로, 산남동도(지금의 산시성 동부)의 양숭의(梁祟義)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덕종은 금군(禁軍)과 노룡 등지의 다른 번진 군사들을 동원하여 토벌하고 양숭의를 죽이고 이유악을 잡아들이는 성과를 거두었다.[1]그러나 덕종의 강경 자세에 두려움을 느낀 번진들이 반발하였다. 관군을 자처하던 노룡군에서조차 당나라에 등을 돌리고 783년 난을 일으켜, 원유주절도사(元幽州節度使) 주차(朱沘)를 황제로 옹립하고 장안을 점령하였다. 이에 덕종은 장안 서쪽의 봉천으로 피신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1] 사태 수습을 위해 덕종은 번진의 지위를 보전하고 죄를 묻지 않겠다는 칙서를 내렸고, 번진들은 대부분 이를 받아들였다. 남은 노룡군이나 회서, 장안을 점거한 주차도 786년에 진압되었다.[1] 799년 회서의 이희열(李希烈)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한 진선기(陳仙奇)를 다시 죽이고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가 된 오소성(呉少誠)이 난을 일으켰지만, 1년여에 걸친 전투 뒤에 당나라 조정에서 죄를 사면하는 형식으로 난을 수습했다.[1]
2. 4. 당 헌종 시기
헌종은 806년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유벽(劉闢)이 동천(東川)을 공격하자 이를 토벌하여 처형했다. 이를 시작으로 하수은절도유후(夏綏銀節度留後) 양혜림(楊惠琳)과 절강서도(浙江西道)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 이기(李錡) 토벌에 나섰다.하북 삼진에 대한 토벌은 실패했지만, 회서의 오원제를 멸망시켜 번진들은 각자 당조에 땅을 바치며 공순할 뜻을 보였다. 성덕의 왕승종(王承宗)은 영지 일부를 반환했고, 횡해군(横海軍) 정권(程權)은 2주 전체를 당조에 반환하며 번진으로서의 역사를 스스로 끝냈다. 그러나 평로의 이사도(李師道)는 처음에는 영지를 반환할 뜻을 보였으나 후에 철회하며 당조에 맞섰다. 결국 헌종은 절도사들을 모아 평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하삭형 번진으로서 가장 오래 버텼던 평로가 멸망하면서 위박의 전홍정(田弘正)은 번진 수장 지위를 반환하고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헌종도 820년 환관(宦官)에게 살해되고, 성덕・노룡도 조정에 번진 수장 직책을 반환하면서 하삭삼진으로서의 독자적인 번진 계승은 끝이 났다.
2. 5. 당나라 멸망과 오대십국시대
황소의 난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당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조정의 권위가 쇠퇴한 상태에서 중국은 다시 주전충, 이극용 등의 번진 세력이 다투게 되었다.[2] 907년 주전충이 선양의 형식을 빌려 당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뒤, 후량, 후당을 제외한 오대 십국 시대의 황제들은 모두 과거 당나라의 절도사직에 있던 자들이었다.[2]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 또한 후주로부터 송주절도사(宋州節度使)로 임명된 자였다.[2]후주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절도사 출신의 무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면서 은퇴할 것을 권했다.[2] 오대 십국 시대의 전란을 지켜본 그들은 "휘하 군대가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려 든다면 꼼짝없이 모반자가 될 것"이라는 조광윤의 권유에 응해 자신들이 가진 병권을 반납했다.[2] 이후 조광윤은 통판(通判)직을 두어 절도사의 행정권을 이관시켰고, 최종적으로 절도사는 명예직이 되었다.[2]
2. 6. 송나라 이후
송 태조 조광윤 이후, 절도사는 송나라 무장의 최고위 관직과 종실(宗室), 문신 훈구(勳舊)와 재집(宰執)에게 임명되었으며, 규절(旌節)을 가지고 절도사인(節度使印), 관내관찰사인(管內觀察使印), 절도주인(節度州印)의 세 인장을 소지하였다. 경덕(景德) 이후 절도사가 되는 자는 규절문기(旌節門旗) 둘, 용호기(龍虎旗) 하나, 규절(旌節) 하나, 휘창(麾槍) 둘, 표미(豹尾) 둘을 수여받았다. 철종 이전에는 절도사직이 쉽게 제수되는 일이 없었던 것에 비해, 휘종 때에는 환관 여섯 명이 모두 절도사로 임명되었다.요와 금에서도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절도사를 두었지만 유명무실한 것이었으며, 그 지위도 송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원나라에서는 이를 폐지하였다.[1]
3. 한국의 절도사
고려 초에 한국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절도사를 처음 두었다.[1] 《삼국사기》 경명왕 8년(921년)조에는 1월에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를 자칭한 왕봉규(王逢規)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명종으로부터 회화대장군의 관직을 수여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 말기의 군벌 호족들 가운데 일부가 중국과의 독자적인 외교를 추진하면서 중국의 관직인 절도사를 자처한 흔적으로 보인다.[1]
조선에 설치된 절도사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1]
4. 주요 절도사 목록
| 절도사명 | 위치 | 기타 | 
|---|---|---|
| 청원군 절도사 | 취안저우 | 949년 설치, 푸젠성의 장저우, 샤먼 등 관할. 류총효가 절도사 역임. | 
| 무안군 절도사 | 후난성 | 951년 변호가 초를 격파 후 승진. | 
| 안화 절도사(安化) | ||
| 변송 절도사(汴宋) | ||
| 빈녕 절도사(邠寧) | ||
| 채주 절도사 | ||
| 성덕군 절도사(成德軍) | ||
| 징쉬 절도사(陳許) | ||
| 어악 절도사(鄂岳) | ||
| 범양 절도사(范陽) | ||
| 봉화 절도사(奉化) | ||
| 봉상 절도사(鳳翔) | ||
| 부방 절도사(鄜坊) | ||
| 귀의군 절도사 | ||
| 하동 절도사 | ||
| 하남 절도사 | ||
| 횡해군 절도사(橫海軍) | ||
| 하서 절도사(河西) | ||
| 하양삼성 절도사(河陽三城) | ||
| 하중 절도사(河中) | ||
| 회남 절도사(淮南) | ||
| 회서 절도사(淮西) | ||
| 강서 절도사(江西) | ||
| 검남 절도사(劍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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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절도사:
참조
[1] 
웹사이트
 
Middle Ranking Official of the Tang dynasty (唐代中層文官)
 
http://www.hist.nthu[...] 
2010-11-26
 
[2] 
문서
 
병역을 피하려고 자신의 팔을 부러뜨린 노인의 이야기
 
[3] 
문서
 
중국 서남쪽 지역에 살던 이민족에 대한 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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