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캠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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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캠피지는 1962년 10월 21일 호주에서 태어난 전 럭비 유니언 선수이다. 퀸비언 블루스에서 럭비 리그를 시작하여 1979년 럭비 유니언으로 전향, 1982년 호주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그는 1991년 럭비 월드컵 우승을 포함하여 100번의 국제 경기에 출전했으며, 럭비 세븐스 선수로서도 활약했다. 캠피지는 호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3년 IRB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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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캠피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본명 | David Ian Campese |
| 출생일 | 1962년 10월 21일 |
| 출생지 | 뉴사우스웨일스주퀸비언 |
| 신장 | 180 cm |
| 체중 | 89 kg |
| 친척 | 테리 캠피지 (조카) |
| 포지션 | 윙, 풀백 |
| 웹사이트 | 데이비드 캠피지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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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추어 경력 | |
| 연도 | 1981–1985 |
| 팀 |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
| 연도 | 1982–1986 |
| 팀 | 퀸비언 화이츠 |
| 연도 | 1987–1998 |
| 팀 | 랜드윅 |
| 클럽 경력 | |
| 연도 | 1984–1988 |
| 클럽 | 페트라르카 파도바 |
| 연도 | 1988–1993 |
| 클럽 | 아마토리 럭비 밀라노 |
| 주(Province) 경력 | |
| 연도 | 1987–1998 |
| 주 | 뉴사우스웨일스 |
| 출장 | 34 |
| 득점 | 84 |
| 슈퍼 럭비 경력 | |
| 연도 | 1996–1998 |
| 팀 | 뉴사우스웨일스 와라타스 |
| 출장 | 22 |
| 득점 | 30 |
| 국가대표 경력 | |
| 연도 | 1982–1996 |
| 국가대표팀 | 오스트레일리아 |
| 출장 | 101 |
| 득점 | 320 |
| 7인제 럭비 국가대표 경력 | |
| 연도 | 1983–1998 |
| 국가대표팀 | 오스트레일리아 |
| 코치 경력 | |
| 연도 | 1998 |
| 팀 | 싱가포르 |
| 연도 | 2005–2007 |
| 팀 | 샤크스 (보조 코치) |
| 연도 | 2010 |
| 팀 | 통가 7인제 |
| 수상 | |
| 메달 종류 | 남자 럭비 세븐즈 코먼웰스 게임 동메달 1998 쿠알라룸푸르 (팀) |
2. 초기 생애 및 럭비 경력
데이비드 캠피지는 1962년 10월 21일 뉴사우스웨일스주 퀸비언에서 아버지 지안안토니오와 어머니 조안 캠피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누나 리사와 코리나, 남동생 마리오가 있었다.[10] 1966년 가족과 함께 몬테키오 프레칼치노로 이주하여 18개월 동안 살다가 호주로 돌아와 퀸비언에 정착했다.
지역 공립학교와 퀸비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0] 8세부터 16세까지 퀸비언 블루스에서 럭비 리그 선수로 활동했다. 16세에 골프를 하기 위해 럭비를 그만두었고, 1978년 ACT-Monaro 스쿨보이즈 골프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1년 호주 21세 이하 대표팀에 발탁되어 뉴질랜드를 순회했다. 1981–82 호주 럭비 유니언 영국 및 아일랜드 투어에 앞서 '평가전'에 선발되기도 했으나, 국가대표로 선발되지는 못했다.[10]
2. 1. 유년 시절
뉴사우스웨일스주 퀸비언(Queanbeyan, New South Wales)에서 1962년 10월 21일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지안안토니오, 어머니의 이름은 조안 캠피지이다. 누나로는 리사(Lisa)와 코리나(Corrina)가 있으며, 남동생의 이름은 마리오(Mario)이다.[10] 1966년, 그의 가족은 몬테키오 프레칼치노(Montecchio Precalcino)로 이주하여 18개월 동안 지내다가 다시 호주로 돌아와 퀸비언에 정착했다.지역 공립학교와 퀸비언 고등학교(Queanbeyan High School)를 졸업했다.[10] 8세부터 16세까지 퀸비언 블루스(Queanbeyan Blues)에서 럭비 리그 선수로 활동했다. 16세에 골프를 하기 위해 모든 럭비 관련 활동을 중단했고, 1978년 ACT-Monaro 스쿨보이즈 골프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9년, 퀸비언 화이트스(Queanbeyan Whites) 소속으로 4부 리그에서 럭비 유니언 경기를 처음으로 치렀다. 이듬해 1부 리그로 승격되었다. 1981년에는 호주 21세 이하 대표팀에 발탁되어 뉴질랜드를 순회했다. 1981–82 호주 럭비 유니언 영국 및 아일랜드 투어에 앞서 '평가전'에 선발되기도 했으나, 국가대표로 선발되지는 못했다.[10]
2. 2. 퀸비언 화이트 입단
캠피지는 1979년 4부 리그에서 퀸비언 화이트스(Queanbeyan Whites) 소속으로 럭비 유니언 첫 경기를 치렀다. 이듬해 그는 1부 리그로 승격되었다.[10]3. 국제 테스트 경력
데이비드 캠피지는 1982년 뉴질랜드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월라비 데뷔를 했으며, 첫 두 번의 테스트에서 각각 한 번의 트라이를 기록했다. 1983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호주를 위해 4번의 트라이를 기록하여 당시 호주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그는 1984년 영국 및 아일랜드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럭비 유니언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호주 팀의 일원이었다.
1986년 뉴질랜드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캠피지는 월라비의 일원으로 올 블랙스를 2–1로 꺾는 데 기여했다. 이는 뉴질랜드에서 테스트 시리즈에서 승리한 두 번째 호주 팀이었다. 그는 첫 1987년 럭비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서 당시 국제 럭비 선수 최다 트라이 기록을 경신했다. 1991년 럭비 월드컵에서 캠피지는 월라비의 우승 멤버였으며, 이 대회에서 6개의 트라이로 공동 최다 트라이 기록을 세웠고, "대회 선수"로 칭송받았다.
캠피지는 1992년 월라비가 올 블랙스를 2–1로 꺾으면서 두 번째 Bledisloe Cup을 획득했다. 1992년 남아프리카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남아프리카를 상대로 통산 50번째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했다. 1994년에는 세 번째 Bledisloe Cup을 획득했다.
1996년 유럽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캠피지는 100번의 테스트 출전이라는 이정표를 달성한 최초의 호주 럭비 유니언 선수이자 두 번째 국제 선수가 되었다. 그는 투어 종료와 함께 국제 럭비를 은퇴했으며, 101번의 테스트에 출전하여 당시 세계 기록인 64개의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이후 오하타 다이스케와 브라이언 하바나에 의해 경신되었다.
캠피지는 또한 유명한 럭비 세븐스 선수였다. 그는 홍콩 세븐스에 12번 출전했으며 (1983–1990, 1993–94, 1997–98),[3] 3번의 호주 우승 (1983, 1985, 1988)에 기여했고, 1988년에는 대회 선수로 레슬리 윌리엄스 상을 수상했다.[4][5] 1998년 1998년 코먼웰스 게임에서 호주 럭비 세븐스 팀의 주장을 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 2015년 홍콩 럭비 풋볼 유니온 (HKRFU)은 캠피지를 지난 40년간 홍콩 세븐스에서 활약한 7명의 가장 중요한 선수들을 기리는 HKRFU의 기념 캠페인인 'The Hong Kong Magnificent Sevens'의 7명의 멤버 중 한 명으로 발표했다.[4][9]
그는 상대를 넘어뜨리려 애쓰게 만드는 히치킥 동작인 "구스 스텝"으로 유명하다.
3. 1. 1982년
1982년, 호주와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 밤에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 및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 불참을 선언했는데, 여기에는 월러비스의 최고 윙어였던 브렌던 문도 포함되었다.[3][4] 이 발표 이후 캠피지는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파머스턴 노스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고,[5][6] 이 경기에서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7] 그는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7]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8][9]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8][9]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7]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으로 16-40 패배를,[10] 황가레이에서 노스 오클랜드와의 경기에서 13점(16-12 승리)을 기록했다. 노스 오클랜드전에서 캠피지는 두 개의 트라이,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를 기록한 후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1] 그는 또한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12]
3. 1. 1. 뉴질랜드 투어 데뷔
캠피지는 1983년에 호주 대표팀으로 7번의 테스트 경기에 출전했다. 여기에는 호주에서 열린 4번의 테스트 경기, 미국과의 1경기, 아르헨티나와의 2경기, 그리고 뉴질랜드와의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가 포함되었으며, 이후 1983년 호주 럭비 유니온 이탈리아 및 프랑스 투어에 참가했다.[1]- 호주 49 – 미국 3 (시드니 – 1983년 7월 9일)
캠피지는 호주가 미국을 상대로 승리한 경기에서 4개의 트라이를 기록하여, 1978년 올 블랙스와의 세 번째 테스트 경기에서 세운 호주 럭비 백 로우 출신 그렉 콘넬센의 호주 대표팀 경기 최다 트라이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2][1]
3. 1. 2. 블레디슬로 컵 논란
캠피지는 1983년에 호주 대표팀으로 7번의 테스트 경기에 출전했다. 여기에는 호주에서 열린 4번의 테스트 경기, USA|미국영어과의 1경기, 아르헨티나와의 2경기, 그리고 뉴질랜드와의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가 포함되었으며, 이후 1983년 호주 럭비 유니온 이탈리아 및 프랑스 투어에 참가했다.[1]- 호주 49 – 미국 3 (시드니 – 1983년 7월 9일)
캠피지는 호주가 미국을 상대로 승리한 경기에서 4개의 트라이를 기록하여, 1978년 올 블랙스와의 세 번째 테스트 경기에서 세운 호주 럭비 백 로우 출신 그렉 콘넬센의 호주 대표팀 경기 최다 트라이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2][1]
3. 2. 1983년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서 캠피지는 파머스턴 노스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그는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5] 그는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5]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에서는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16-40으로 패했다.[6] 황가레이에서 열린 노스 오클랜드와의 경기에서는 13점을 획득, 팀의 16-12 승리를 이끌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7]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8]
월러비스는 이 투어에서 14경기 316점(47개 트라이 포함)을 기록하며 뉴질랜드 투어 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이는 1972년 호주 팀의 13경기 229점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9][10]
3. 2. 1. 미국전 4 트라이
캠피지는 윙어로 뛰면서 골키커 역할을 맡아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에 복귀했지만, 6-15로 패했다.[3]3. 2. 2. 아르헨티나, 뉴질랜드와의 경기
캠피지는 1983년 10월 22일 로비고에서 열린 이탈리아전에서 골킥을 담당했고, 호주는 29-7로 승리했다.[1][2]프랑스와의 두 번째 테스트에서 캠피지는 윙어와 골키커 역할을 맡았지만,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6-15로 패했다.[3]
3. 2. 3. 이탈리아 및 프랑스 투어
로저 굴드(Roger Gould영어)는 이탈리아와의 경기 전에 허벅지 부상이 악화되었다.[1] 그러나 캠피지는 윙으로, 글렌 엘라(Glen Ella영어)는 풀백으로 선발되어 호주 대표팀에서 두 번째 경기를 치렀다.[2] 캠피지는 이탈리아전에서 골킥을 담당했다.[3]로저 굴드는 프랑스와의 경기를 위해 호주 팀에 복귀했다. 그러나 굴드의 부상으로 인해 캠피지는 이탈리아전에서의 골킥 수행에 이어, 왈라비(호주 럭비 유니온 대표팀)의 골킥을 계속 수행했다.
캠피지는 윙어로 뛰면서 골키커 역할을 맡아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프랑스와의 두 번째 경기에 복귀했지만, 6-15로 패했다.[4]
3. 3. 1984년
1982년 호주와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 밤, 개인적인 이유와 사업상의 이유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월러비스의 최고 윙어인 브렌던 문도 포함되었다.[3][4] 이 발표 이후 캠피지는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5][6] 그는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7] 그는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7]
- 호주 18 – 뉴질랜드 33 (오클랜드 – 1982년 9월 11일)
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8][9]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섰다.[8][9]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7]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월러비스의 11번째 투어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으로 16-40 패배를 기록했다.[10] Whangārei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한 시리즈의 세 번째 테스트 경기 전 마지막 경기에서는 13점(16-12 승리)을 기록했으며, 캠피지는 두 개의 트라이,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를 기록한 후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1] 그는 또한 카운티스와의 월러비스의 투어 12번째 경기에서 카운티스 선수 앨런 도슨이 캠피지를 뒤에서 밀어 공을 건드리기 전에 빼앗아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12]
3. 3. 1. 피지전 트라이
1985년 호주는 부상으로 캠피지가 출전하지 못한 가운데 캐나다와의 두 번의 테스트 시리즈로 시즌을 시작했다.[1] 캠피지는 또한 1985년 뉴질랜드에게 9-10으로 패한 단일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전 호주 럭비 선수 마크 엘라는 ''승리의 길''에서 "데이비드 캠피지가 없으니, 우리 백들은 트라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라고 썼다.[2]3. 3. 2. 블레디슬로 컵
David Campese영어는 1985년 부상으로 캐나다와의 두 번의 테스트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1] 또한 같은 해 뉴질랜드에 9-10으로 패한 단일 블레디슬로 컵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전 호주 럭비 선수 마크 엘라는 ''승리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데이비드 캠피지가 없으니, 우리 백들은 트라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2]3. 3. 3. 그랜드 슬램 달성
데이비드 캠피지(David Campese영어)는 1985년에 부상으로 인해 캐나다와의 두 번의 테스트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1] 또한 같은 해 뉴질랜드에 9-10으로 패배한 단일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전 호주 럭비 선수 마크 엘라는 ''승리의 길''에서 "데이비드 캠피지가 없으니, 우리 백들은 트라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라고 썼다.[2]3. 4. 1985년
David Campese영어는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서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스 데뷔전을 치렀다.[1][2] 이 경기에서 그는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켜 26-10 승리에 기여했다.[9] 이후 호크스 베이와의 경기에도 출전했으며,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9]월러비스는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서 14경기 동안 316점을 득점하며 투어 득점 기록을 세웠고,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10][11] 이는 1972년 호주 팀의 기록(13경기 229점)을 넘어선 것이다.[10][11]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1개의 트라이와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9]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에서 2개의 트라이와 1개의 컨버전으로 10점을 기록했으며(16-40 패배),[12] 노스 오클랜드와의 경기에서는 2개의 트라이, 1개의 페널티 킥, 1개의 컨버전으로 13점을 기록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6-12 승리)[13] 또한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는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14]
3. 4. 1. 피지와의 경기
캠피지는 1986년 호주 왈라비의 일원으로 뉴질랜드에서 올 블랙스를 꺾고 럭비 유니온 테스트 시리즈에서 뉴질랜드를 이긴 두 번째 호주 팀이 되었다.캠피지는 뉴질랜드와의 테스트 시리즈 처음 두 번의 테스트에서 풀백으로 뛰었고, 마지막 테스트에서는 윙으로 자리를 옮겼다.
캠피지가 참여한 세 가지 장면이 뉴질랜드와의 첫 번째 테스트 보고서에 자주 기록된다.
"스크럼에서 승리한 후, 닉 파르-존스가 오픈 사이드에서 멋진 돌파를 했고, 넘어졌지만, 캠피지는 날카로운 반응으로 공을 라인 너머로 차서 다이빙하며 리나그에게 쉬운 컨버전을 위한 트라이를 만들었다."[3] "파르-존스에서 공은 브렛 파퍼스에게 전달되었고, 캠피지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윙어 존 키르완이 버크에게서 인필드로 유인될 때까지 패스를 잡고 있었다. 캠피지는 공을 버크에게 던졌고, 버크는 공을 받아 코너까지 질주했다."[4] "캠피지는 트라이 하나를 득점하고 다른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올 블랙스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프웨이 근처에서 태클을 당했을 때 인필드 패스는 올 블랙스 센터 조 스탠리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필드를 내려가 리나그에게 잡혔을 때 플랭커 마크 브룩-코우든에게 패스하여 트라이를 만들었다."[4]
호주는 1986년 블레디슬로 컵 2차 테스트에서 뉴질랜드에 12–13으로 패했다. 테스트 이후, 호주 코치 앨런 존스가 젖은 날씨에서 풀백이 몇 번의 '하이킥'을 놓친 후 캠피지의 경기력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 캠피지는 그날 밤 늦게 호텔 방에서 존스를 찾아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려 했지만, 존스로부터 수 분 동안 지속된 언어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5] 존스는 캠피지에게 "나는 신문들에게 당신이 럭비의 브래드먼이라고 말했지만, 이제 나를 실망시켰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5]
고든 브레이는 ''데이비드 캠피지''(1996)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몇 시간 후 나이트클럽에서 그는 너무나 괴로워하며 럭비에서 은퇴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재능 있는 운동 선수이자 연예인이 절망하고 격앙된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세계의 럭비 팬들은 마크 엘라가 그날 밤 그의 팀 동료를 위로해준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6]
몇 년 후 ''월라비 골드: 호주 테스트 럭비의 역사''(2003)에서 앨런 존스는 명예 훼손 혐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그건 헛소리일 뿐입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오늘 우리는 풀백 없이 경기를 했다고 누군가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한두 가지 나쁜 일을 하고 15가지 좋은 일을 했을 캠피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미스 월드에게 그녀가 방에서 가장 못생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건물에 발을 들인 적이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일에 대한 날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 거래의 민간 전설의 일부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말 대 다른 사람의 말입니다."[7]
''승리의 길: 1980년대 왈라비 파워''에서 ''데일리 미러''의 테리 스미스는 "어떤 매우 유명한 선수는 팀 동료들이 존스에게 그를 유지하도록 촉구하기 전까지 뉴질랜드에서 테스트 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라고 썼다.[8] 존스는 마지막 테스트에서 풀백 대신 윙으로 캠피지를 선택했다. 이 테스트는 캠피지가 올 블랙스 윙어 존 키르완과 처음으로 맞붙는 경기였다.
3. 5. 1986년
1982년, 브렌던 문을 포함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 및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불참을 선언하면서 캠피지는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47개의 트라이를 포함하여 316점을 득점하며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 득점 기록을 세웠다.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을 기록했으며, Whangārei에서 노스 오클랜드와의 경기에서는 13점(16-12 승리)을 기록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는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
3. 5. 1. 이탈리아, 프랑스전 활약
캠피지는 "1987년 첫 월드컵은 호주와 저 개인에게 모두 재앙이었다."라고 썼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1987년 월드컵 전 브리즈번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평가전을 놓쳤지만, 잉글랜드와의 첫 월드컵 조별 경기에서 월러비스로 복귀했다.- 월드컵 조별 경기: 호주 19 – 잉글랜드 6 (시드니 – 1987년 5월 23일)
캠피지는 첫 월드컵 경기에서 가장 큰 논란에 휩싸였다. 럭비 작가 피터 젠킨스는 "호주가 첫 트라이를 기록하는 데에는 후반 10분이 걸렸는데, 이는 논란이 있는 것이었다. 캠피지가 넘어졌을 때였다. 그는 잉글랜드 라이벌 로리 언더우드의 무릎에 공을 올려놓았고, 공은 튕겨져 나가 리나가 잉글랜드 라인 너머로 공을 그라운드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키스 로렌스 심판은 이미 캠피지에게 트라이를 선언했다."라고 썼다. 캠피지는 나중에 "가장 큰 논쟁은 제가 제대로 터치다운하지 않은 트라이를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득점이 아니었다. 비디오를 보면 심판의 결정에 제가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 월드컵 조별 경기: 호주 47 – 미국 21 (브리즈번 – 1987년 5월 31일)
럭비 작가 피터 젠킨스는 "이전 주에 존스에게 방어에 소극적이라고 비판받았던 캠피지는 이 경기 후 코치로부터 '환상적'이라는 한 단어의 칭찬을 받았다. 캠피지는 23번째 트라이를 기록했는데, 세계 기록에 단 하나 부족했다."라고 썼다.
- 월드컵 조별 경기: 호주 42 – 일본 23 (시드니 – 1987년 6월 3일)
풀백으로 출전한 캠피지는 일본과의 호주 월드컵 조별 경기에서 24번째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하여 당시 스코틀랜드의 이안 스미스(1924–33)와 함께 트라이 세계 기록을 세웠다.
- 월드컵 8강전: 호주 33 – 아일랜드 15 (시드니 - 1987년 6월 7일)
- 월드컵 준결승: 호주 24 – 프랑스 30 (시드니 – 1987년 6월 13일)
캠피지는 이 경기를 호주를 위해 뛰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테스트 경기라고 불렀다. 그는 준결승 후반 6분 만에 세계 기록인 25번째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하여, 스코틀랜드 윙어 이안 스미스의 54년 된 국제 테스트 트라이 최다 기록을 넘어섰다.[12]
- 월드컵 3위 결정전: 호주 21 – 웨일스 22 (로토루아 – 1987년 6월 18일)
3. 5. 2. 블레디슬로 컵 우승
캠피지는 "1987년 첫 월드컵은 호주와 저 개인에게 모두 재앙이었다."라고 썼다.[1] 그는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전 브리즈번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평가전을 놓쳤지만, 잉글랜드와의 첫 월드컵 조별 경기에서 월러비스로 복귀했다.- 월드컵 조별 경기: 호주 19 – 잉글랜드 6 (시드니 – 1987년 5월 23일)
캠피지는 첫 월드컵 경기에서 가장 큰 논란에 휩싸였다. 럭비 작가 피터 젠킨스는 "호주가 첫 트라이를 기록하는 데에는 후반 10분이 걸렸는데, 이는 논란이 있는 것이었다. 캠피지가 넘어졌을 때였다. 그는 잉글랜드 라이벌 로리 언더우드의 무릎에 공을 올려놓았고, 공은 튕겨져 나가 리나가 잉글랜드 라인 너머로 공을 그라운드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키스 로렌스 심판은 이미 캠피지에게 트라이를 선언했다."라고 말했다.[2] 캠피지는 나중에 "가장 큰 논쟁은 제가 제대로 터치다운하지 않은 트라이를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득점이 아니었다. 비디오를 보면 심판의 결정에 제가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3]
- 월드컵 조별 경기: 호주 47 – 미국 21 (브리즈번 – 1987년 5월 31일)
럭비 작가 피터 젠킨스는 "이전 주에 존스에게 방어에 소극적이라고 비판받았던 캠피지는 이 경기 후 코치로부터 '환상적'이라는 한 단어의 칭찬을 받았다. 캠피지는 23번째 트라이를 기록했는데, 세계 기록에 단 하나 부족했다."라고 썼다.[4]
- 월드컵 조별 경기: 호주 42 – 일본 23 (시드니 – 1987년 6월 3일)
풀백으로 출전한 캠피지는 일본과의 호주 월드컵 조별 경기에서 24번째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하여 당시 스코틀랜드의 이안 스미스 (1924–33)와 함께 트라이 세계 기록을 세웠다.[5]
- 월드컵 8강전: 호주 33 – 아일랜드 15 (시드니 - 1987년 6월 7일)
- 월드컵 준결승: 호주 24 – 프랑스 30 (시드니 – 1987년 6월 13일)
캠피지는 이 경기를 호주를 위해 뛰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테스트 경기라고 불렀다.[6][7] 그는 준결승 후반 6분 만에 세계 기록인 25번째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하여, 스코틀랜드 윙어 이안 스미스의 54년 된 국제 테스트 트라이 최다 기록을 넘어섰다.[12]
- 월드컵 3위 결정전: 호주 21 – 웨일스 22 (로토루아 – 1987년 6월 18일)
3. 6. 1987년
1982년, 브렌던 문을 포함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 및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불참을 선언하면서 캠피지가 투어에 선발되었다.[1] 그는 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2] 이 경기에서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3]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경기에 출전한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3]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4]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4]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3]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월러비스의 11번째 투어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으로 16-40 패배를 기록했다.[5] Whangārei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13점(16-12 승리)을 기록하며 두 개의 트라이,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를 기록한 후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6] 또한 카운티스와의 월러비스의 투어 12번째 경기에서 카운티스 선수 앨런 도슨이 캠피지를 뒤에서 밀어 공을 건드리기 전에 빼앗아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7]
3. 6. 1. 럭비 월드컵
캠피지는 발목 부상 이후 잉글랜드와의 두 차례의 테스트 시리즈를 위해 테스트 레벨 럭비에 복귀했다. 해당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경기일자 | 경기장소 | 경기결과 |
|---|---|---|
| 1988년 5월 29일 | 브리즈번 | 오스트레일리아 22 - 잉글랜드 16 |
3. 7. 1988년
1982년, 브렌던 문을 포함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 및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불참을 선언하면서 캠피지가 투어에 선발되었다. 캠피지는 파머스턴노스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 이 경기에서 그는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1] 그는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1]- 호주 18 – 뉴질랜드 33 (오클랜드 – 1982년 9월 11일)
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2]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섰다.[2]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1]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 (16-40 패배),[3]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13점(16-12 승리)을 기록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4] 그는 또한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5]
3. 7. 1. 잉글랜드, 블레디슬로 컵
캠피지는 투어에서 15번의 트라이를 기록했고, 개인 통산 72점을 획득했다.[13] 호주가 투어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캠피지의 활약은 영국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캠피지는 왈라비 대표팀 주장 닉 파-존스와 함께 휴식을 취한 후, 투어 4번째 경기인 사우스-웨스트 디비전과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출전했지만, 10-16으로 패했다.[14] 마이클 린치가 호주 팀에 복귀하면서 캠피지는 미들랜즈 디비전과의 5번째 지역 경기에서 다시 선발되었고, 60분에는 브래드 기르반의 트라이를 돕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 잉글랜드 학생팀과의 투어 6번째 경기에서 캠피지는 두 번의 트라이를 기록하고, 세 번의 컨버전과 두 번의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36-13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하며 20점을 획득했다.
캠피지는 호주의 투어 9번째 경기인 사우스 오브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 출전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럭비 기자 그렉 그로든은 "호주는 니우킬라, 고울리, 데이비드 캠피지의 솜씨 있는 트라이로 전반전에 23-0으로 앞서 나갈 자격이 충분했다. 캠피지는 30분에 가벼운 사타구니 부상으로 경기장을 떠났다."라고 보도했다.[16] 캠피지는 이후 스코틀랜드 노스 앤 미들랜즈와의 투어 10번째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 호주 19 – 잉글랜드 28 (런던 – 1988년 11월 5일)
- 호주 32 – 스코틀랜드 13 (에든버러 – 1988년 11월 19일)
캠피지는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두 번의 트라이를 기록하며 32-13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는데, 호주는 5번, 스코틀랜드는 2번의 트라이를 기록했다. 전 왈라비 주장이자 ''노디: 마이클 린치의 공식 전기''의 저자인 앤드루 슬랙은 "호주는 32-13으로 승리했고, 린치는 11번의 시도 중 5번의 킥을 성공시켰지만, 두 번의 섬세한 칩킥이 데이비드 캠피지를 위한 트라이를 만들어 호주의 럭비 명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라고 썼다. 슬랙은 또한 "캠피지는 의심할 여지 없는 투어의 스타였고, 이는 경기가 끝난 후 '데이비드 캠피지는 물 위를 걷는다'라는 커다란 배너를 흔들며 머리필드 피치를 뛰어다니는 네 명의 젊은이들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라고 썼다.
- 호주 40 – 22 바바리안스 (카디프 – 1988년 11월 26일)
경기 후반 15분에 캠피지는 일시적으로 마크되지 않은 상태에서 왼쪽 윙에서 컷아웃 패스를 받았다. 그는 약 7명의 바바리안스 선수들을 제치고 바바리안스 22미터 라인까지 진출하는 런을 펼쳤다. 공을 오프로드하고 경기를 계속 이어간 캠피지는 다시 일어나 첫 번째 리시버 위치를 잡았다. 캠피지는 경기 마지막 플레이로 두 번째 트라이를 기록했고, 카디프 암스 파크의 관중들은 그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는 이 트라이를 자신의 국제 럭비 최고의 트라이로 묘사했다.
- 호주 55 – 이탈리아 6 (로마 – 1988년 12월 3일)
캠피지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세 번의 트라이를 기록하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3. 7. 2. 영국,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투어
캠피지는 투어에서 15번의 트라이를 기록했고, 개인 통산 72점을 획득했다.[13] 호주가 투어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캠피지의 활약은 영국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캠피지는 왈라비 대표팀 주장 닉 파-존스와 함께 휴식을 취한 후, 투어 4번째 경기인 사우스-웨스트 디비전과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 이 경기는 10-16으로 패했다.[14] 마이클 린치가 호주 팀에 복귀하면서 캠피지는 미들랜즈 디비전과의 5번째 지역 경기에서 다시 선발되었고, 60분에는 브래드 기르반의 트라이를 돕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 잉글랜드 학생팀과의 투어 6번째 경기에서 캠피지는 두 번의 트라이를 기록하고, 세 번의 컨버전과 두 번의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36-13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하며 20점을 획득했다.
캠피지는 호주의 투어 9번째 경기인 사우스 오브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 출전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럭비 기자 그렉 그로든은 "호주는 니우킬라, 고울리, 데이비드 캠피지의 솜씨 있는 트라이로 전반전에 23-0으로 앞서 나갈 자격이 충분했다. 캠피지는 30분에 가벼운 사타구니 부상으로 경기장을 떠났다."라고 보도했다.[16] 캠피지는 이후 스코틀랜드 노스 앤 미들랜즈와의 투어 10번째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 호주 19 – 잉글랜드 28 (런던 – 1988년 11월 5일)
- 호주 32 – 스코틀랜드 13 (에든버러 – 1988년 11월 19일) 캠피지는 스코틀랜드 럭비 팀과의 경기에서 두 번의 트라이를 기록하며 32-13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는데, 호주는 5번, 스코틀랜드는 2번의 트라이를 기록했다. 전 왈라비 주장이자 ''노디: 마이클 린치의 공식 전기''의 저자인 앤드루 슬랙은 "호주는 32-13으로 승리했고, 린치는 11번의 시도 중 5번의 킥을 성공시켰지만, 두 번의 섬세한 칩킥이 데이비드 캠피지를 위한 트라이를 만들어 호주의 럭비 명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라고 썼다. 슬랙은 또한 "캠피지는 의심할 여지 없는 투어의 스타였고, 이는 경기가 끝난 후 '데이비드 캠피지는 물 위를 걷는다'라는 커다란 배너를 흔들며 머리필드 피치를 뛰어다니는 네 명의 젊은이들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라고 썼다.
- 호주 40 – 22 바바리안스 (카디프 – 1988년 11월 26일) 경기 후반 15분에 캠피지는 일시적으로 마크되지 않은 상태에서 왼쪽 윙에서 컷아웃 패스를 받았다. 그는 약 7명의 바바리안스 선수들을 제치고 바바리안스 22미터 라인까지 진출하는 런을 펼쳤다. 공을 오프로드하고 경기를 계속 이어간 캠피지는 다시 일어나 첫 번째 리시버 위치를 잡았다. 캠피지는 경기 마지막 플레이로 두 번째 트라이를 기록했고, 카디프 암스 파크의 관중들은 그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는 이 트라이를 자신의 국제 럭비 최고의 트라이로 묘사했다.
- 호주 55 – 이탈리아 6 (로마 – 1988년 12월 3일) 캠피지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세 번의 트라이를 기록하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3. 8. 1989년
1982년, 브렌던 문을 포함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 및 사업상의 이유로 뉴질랜드 투어에 불참을 선언하면서[1] 데이비드 캠피지가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러,[2]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키며 26-10 승리에 기여했다.[3] 이후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경기에 출전한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3]
월러비스는 이 투어에서 14경기 316득점(47트라이 포함)을 기록하며 뉴질랜드 투어 득점 신기록을 세웠다.[4] 이는 1972년 호주 팀의 13경기 229득점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4]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전(트라이 1개, 3골),[3] 베이 오브 플렌티전(트라이 2개, 1컨버전, 10득점, 16-40 패),[5] 노스 오클랜드전(트라이 2개, 페널티킥 1개, 컨버전 1개, 13득점, 16-12 승, '경기 최우수 선수' 선정)[6] 등 맹활약을 펼쳤다.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는 상대 선수 반칙으로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7]
3. 8. 1. 브리티시 & 아이리시 라이온스전
Australia영어 12 - All Blacks영어 243. 8. 2. 블레디슬로 컵, 프랑스 투어
Australia영어 12 - All Blacks영어 243. 9. 1990년
1982년 호주와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 밤, 개인 및 사업상의 이유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월러비스의 최고 윙어인 브렌던 문도 포함되었다.[1][2] 이 발표 이후 캠피지는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3][4] 이 경기에서 그는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5] 그는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5]
- 호주 18 – 뉴질랜드 33 (오클랜드 – 1982년 9월 11일)
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6][7]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섰다.[6][7]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5]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월러비스의 11번째 투어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으로 16-40 패배를 기록했다.[8] Whangārei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한 시리즈의 세 번째 테스트 경기 전 마지막 경기에서는 13점(16-12 승리)을 기록했으며, 두 개의 트라이,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를 기록한 후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9] 그는 또한 카운티스와의 월러비스의 투어 12번째 경기에서 카운티스 선수 앨런 도슨이 캠피지를 뒤에서 밀어 공을 건드리기 전에 빼앗아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10]
3. 9. 1. 대표팀 제외와 복귀
캠피지는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서 월러비 데뷔 이후 처음으로 호주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캠피지가 이탈리아에서 충분히 일찍 복귀하지 않아 호주 대표팀 선발 위원들이 클럽 경기에서의 그의 컨디션을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1990년 6월 30일 시드니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3차전은 캠피지가 풀백으로 복귀하여 호주 대표팀 50번째 경기를 기념하는 경기였다.[1] 그는 사이먼 포이드빈에 이어 이 기록을 달성한 두 번째 선수였다.[1]
호주는 뉴질랜드 3차전 투어에 앞서 7월 8일 브리즈번에서 미국과 단독 테스트 경기를 치렀고, 캠피지는 이 경기에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 캠피지는 자신의 경력에서 유일하게 드롭 골을 성공시켰다.[1]
3. 9. 2. 미국, 블레디슬로 컵
캠피지는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서 월러비 데뷔 이후 처음으로 호주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캠피지는 이탈리아에서 충분히 일찍 복귀하지 않아 호주 대표팀 선발 위원들이 클럽 경기에서의 그의 컨디션을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1]1990년 6월 24일 브리즈번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 호주는 48-31로 승리했다.[1] 6월 30일 시드니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호주가 19-28로 패했다.[1] 캠피지는 프랑스와의 3차전에 풀백으로 복귀했는데, 이 경기는 그의 호주 대표팀 50번째 경기였다.[1] 그는 사이먼 포이드빈에 이어 두 번째로 50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했다.[1]
1990년 7월 8일 브리즈번에서 열린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호주가 67-9로 승리했다.[1] 이 경기는 캠피지가 드롭 골을 성공시킨 유일한 경기였다.[1]
3. 10. 1991년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서 데이비드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캠피지는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 네이피어에서 열린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도 출전했으며,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섰다.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 외에도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을 기록했고(16-40 패배), 황거레이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13점(16-12 승리)을 기록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는 상대 선수에게 밀려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
3. 10. 1. 웨일스, 잉글랜드, 블레디슬로 컵
캠피지는 1991년 잉글랜드 럭비 유니온 호주 및 피지 투어 기간 동안 잉글랜드와의 단일 테스트 경기에서 월러비스 선수로 활약했다.[1]| 경기일 | 경기장소 | 결과 |
|---|---|---|
| 1991년 7월 27일 | 시드니 | 호주 40 – 잉글랜드 15 |
3. 10. 2. 럭비 월드컵 우승
캠피지는 1991년 잉글랜드 럭비 유니온 호주 및 피지 투어 기간 동안 잉글랜드와의 단일 테스트 경기에서 월러비스 선수로 활약했다.- 호주 40 – 잉글랜드 15 (시드니 – 1991년 7월 27일)
3. 11. 1992년
1982년, 호주와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 밤에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적인 이유와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월러비스의 최고 윙어인 브렌던 문도 포함되었다.[3][4] 이 발표 이후 캠피지는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5][6]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7]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7]
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8][9]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섰다.[8][9]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7]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월러비스의 11번째 투어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으로 16-40 패배를 기록했다.[10] Whangārei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한 마지막 경기에서는 13점(16-12 승리)을 기록했으며, 캠피지는 두 개의 트라이,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를 기록한 후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1] 카운티스와의 월러비스 투어 12번째 경기에서 카운티스 선수 앨런 도슨이 캠피지를 뒤에서 밀어 공을 건드리기 전에 빼앗아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12]
3. 11. 1. 스코틀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전
David Campese영어는 부상으로 교체되었고, Peter Jorgensen영어이 그를 대신했다.[1]국제 럭비 평의회(IRB)는 아파르트헤이트 보이콧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제 테스트 레벨 럭비 참가를 금지했는데, 이 경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두 번째 국제 경기였다. David Campese영어는 70번째 테스트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호주 선수이자, 50번의 트라이를 기록한 최초의 럭비 선수였다.[2]
3. 11. 2. 유럽 투어
David Campese영어는 1992년 유럽 투어에서 두 경기에 출전했다.1992년 6월 21일 브리즈번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부상으로 교체되어 Peter Jorgensen영어이 대신 출전했다.[1]
1992년 8월 22일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David Campese영어는 70번째 테스트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호주 선수가 되었고, 50번의 트라이를 기록한 최초의 럭비 선수가 되었다.[2] 이 경기는 국제 럭비 평의회(IRB)가 아파르트헤이트 보이콧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제 테스트 레벨 럭비 참가를 금지한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두 번째 국제 경기였다.[2]
| 날짜 | 장소 | 상대 | 결과 |
|---|---|---|---|
| 1992년 6월 21일 | 브리즈번 | 스코틀랜드 | 37 – 13 (승) |
| 1992년 8월 22일 | 케이프타운 | 남아프리카 공화국 | 26 – 3 (승) |
3. 12. 1993년
1982년 뉴질랜드 투어에서 데이비드 캠피지는 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다.[25] 이 경기에서 그는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했다.[25]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도 출전했으며, 이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25]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47개의 트라이를 포함하여 316점을 득점하며 뉴질랜드 투어 득점 기록을 세웠다.[25] 이는 1972년 호주 팀의 13경기 229점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25]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25]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에서는 트라이 2개와 컨버전으로 10점을 기록했다.[25] Whangārei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는 13점(16-12 승리)을 기록하며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25] 카운티스와의 경기에서는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25]
3. 12. 1. 통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전
David Campese영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첫 번째 테스트 경기 초반에 스프링복스 선수인 피터 뮬러와 제임스 스몰과 몸싸움에 휘말렸다.호주는 마티 로벅이 성공시킨 세 개의 페널티 골에 힘입어 16분 만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9-0으로 앞섰다. 하지만 전반전 마지막 10분 동안 스프링복스 인사이드 센터 하인리히 퓔스는 킥을 날렸고, 캠피지는 뒤로 달려가 공을 잡아야 했다. 캠피지와 스프링복스 아웃사이드 센터 피터 뮬러가 뒤쫓아갔다. 캠피지는 공을 잡을 수 없었고, 대신 호주 트라이 라인에서 약 1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미끄러져 뮬러가 공을 잡아 트라이를 기록하게 했다.[25]
캠피지의 선수 경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캠피지: 럭비는 내 인생''에서 캠피지는 이 테스트에서 초반의 실수를 만회하려다가 "너무 열심히 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캠피지의 첫 번째 테스트 경기 후, 1984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호주팀의 코치 알렉 이반스는 캠피지를 호주팀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캠피지는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서의 부진에서 벗어나 두 번째 테스트에서 팀 호란의 트라이를 도왔다. 호주는 자국 영토에서 스크럼을 가졌고, 캠피지는 클리어링 킥을 할 위치에 있었다. 캠피지는 대신 달리기를 선택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오픈사이드 플랭커 프랑수아 피에나르를 제쳤다. 캠피지의 달리기는 경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로 이끌었다. 캠피지는 이후 호주 럭비 해설가 데이비드 포드햄이 '규율을 지키지 않는 패스'라고 묘사한, 땅으로 패스를 연결했고, 호주 에잇맨 팀 개빈이 공을 잡았다. 두 단계 후 캠피지는 닉 파-존스로부터 첫 번째 리시버 위치에서 패스를 받아, 그의 상대 윙어 자크 올리비에가 잡을 수 없는 하이 킥을 날렸다. 공은 운 좋게 튀었고, 팀 호란이 공을 쫓아가 잡아 트라이를 기록할 수 있었다.[25]
''My Game Your Game영어''에서 캠피지는 19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세 번째 테스트 경기를 자신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훌륭한 경기 중 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 테스트 경력을 되돌아보면, 제 최고의 경기들은 1991년 영국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1988년 투어, 1984년 그랜드 슬램 투어와 같이 호주 밖에서 펼쳐졌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홈에서도 몇 번 좋은 순간들이 있었는데, 1993년 시드니 풋볼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세 번째 테스트 경기가 그 중 하나입니다."
시리즈의 첫 두 번의 테스트 경기 후, 캠피지는 짧은 킥오프 후 몰이 형성될 때 상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윙어가 공을 잡기 위한 경쟁에서 20미터 이상 뒤에 서 있는 것을 알아챘다. 테스트 전에 캠피지는 닉 파-존스와 상대 윙어가 백필드에서 멀리 서 있는 것을 보면, 그에게 "Leaguey영어"라고 외쳐 그와 함께 블라인드 사이드 움직임을 시도하라는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세 번째 테스트의 후반 19분 호주는 자국 진영에서 롤링 몰을 형성했다. 닉 파-존스 (호주 대표로 마지막 테스트 경기를 치름)는 캠피지와 그의 대표팀 경력에서 마지막으로 호흡을 맞췄다. 그는 블라인드 사이드로 내려가 캠피지에게 공을 넘겼고, 캠피지는 로버트 뒤 프리를 지나 달려갔다. 캠피지는 사이드라인을 따라 달려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로 경기를 이끌었다. 그는 이후 지원을 위해 파-존스에게 안쪽 패스를 했고, 파-존스는 다시 지원을 위해 팀 개빈에게 안쪽으로 패스했다. 개빈은 공을 들고 컨택트했다. 공은 럭에서 파-존스에게 다시 돌아갔고, 그는 필 컨스에게 넘겨주었고, 컨스는 강력한 러닝으로 호주를 위해 거리를 확보했다. 다음 단계의 경기가 전개되면서 캠피지는 센터로 재배치되어 패스를 받아 작은 돌파를 시도했고, 여러 남아프리카 공화국 선수들을 넘어 지원을 위해 팀 호란에게 패스를 넘겼고, 호란은 테스트 경기 59분에 트라이를 기록했다.
캠피지는 이 경기의 활약으로 경기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이 경기 후,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스피로 자보스는 캠피지를 "럭비의 모차르트"라고 칭했다.
3. 12. 2. 캐나다, 프랑스 투어
1993년, 데이비드 캠피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3연전 테스트 시리즈에 참여했다. 첫 번째 경기에서 캠피지는 피터 뮬러와 제임스 스몰과의 몸싸움에 휘말렸고, 공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뮬러에게 트라이를 허용하는 실수를 범했다.[25] 그는 이 실수를 만회하려 "너무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첫 경기 후, 1984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호주팀 코치 알렉 이반스는 캠피지를 대표팀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두 번째 경기에서 캠피지는 첫 경기 부진을 딛고 팀 호란의 트라이를 도왔다. 캠피지는 남아공 오픈사이드 플랭커 프랑수아 피에나르를 제치고 달려 남아공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후 "규율을 지키지 않는 패스"를 연결했고, 두 단계 후 다시 패스를 받아 상대 윙어 자크 올리비에가 잡을 수 없는 하이킥을 날렸다. 이 공은 운 좋게 튀어 팀 호란이 트라이를 기록했다.[25]
세 번째 경기에서 캠피지는 자신의 선수 경력 중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그는 닉 파존스와의 블라인드 사이드 움직임을 통해 로버트 뒤 프리를 제치고 남아공 진영으로 질주했다. 이후 파존스와 팀 개빈을 거쳐 필 컨스에게 연결되었고, 컨스는 강력한 러닝으로 거리를 확보했다. 캠피지는 센터로 이동해 다시 패스를 받아 돌파 후 팀 호란에게 패스했고, 호란은 트라이를 성공시켰다.
캠피지는 이 경기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25]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스피로 자보스는 그를 "럭비의 모차르트"라고 칭송했다.
3. 13. 1994년
1982년 호주와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 날, 브렌던 문을 포함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적인 이유와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3][4] 이 발표 이후 캠피지가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파머스턴 노스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5][6] 이 경기에서 그는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7] 그는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7]
- 호주 18 – 뉴질랜드 33 (오클랜드 – 1982년 9월 11일)
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8][9]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섰다.[8][9]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고,[7]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월러비스의 11번째 투어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으로 16-40 패배를 기록했으며,[10] 황가레이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13점(16-12 승리)을 기록하며 두 개의 트라이,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를 기록한 후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1] 그는 또한 카운티스와의 월러비스의 투어 12번째 경기에서 카운티스 선수 앨런 도슨이 캠피지를 뒤에서 밀어 공을 건드리기 전에 빼앗아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12]
3. 13. 1. 이탈리아, 서사모아전
캠피지는 1994년 이탈리아 럭비 유니온 호주 투어 기간 동안 이탈리아와의 두 차례 테스트 시리즈에 출전한 월러비의 일원이었다.[1]
3. 14. 1995년
1982년 뉴질랜드 럭비 연맹 투어에서 데이비드 캠피지는 여러 경기에 출전하여 다음과 같이 득점을 올렸다.
3. 15. 1996년
1982년, 호주와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 날 밤, 브렌던 문을 포함한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 및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불참을 선언하면서 캠피지가 투어에 선발되었다.[1][2]캠피지는 파머스턴 노스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러,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3][4][5] 이후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5]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6][7]
캠피지는 투어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 트라이 1개,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 성공[5]
-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경기: 트라이 2개, 컨버전 1개 (총 10점), 16-40 패배[8]
- 황가레이에서 노스 오클랜드와의 경기: 트라이 2개,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 (총 13점), 16-12 승리, '경기 최우수 선수' 선정[9]
- 카운티스와의 경기: 카운티스 선수 앨런 도슨에게 밀려 트라이 실패[10]
3. 15. 1. 웨일스, 캐나다전
캠피지는 오클랜드에서 열린 뉴질랜드와의 첫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서 호주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1995년 오클랜드에서 열린 첫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서 호주 풀백 매트 버크가 부상을 당하자, 호주 대표팀 선발 위원회는 버크를 대신하여 로드 카퍼를 호주 대표팀에 선발했다. 카퍼는 훈련 중 다리가 부러졌다. 캠피지는 왈라비 훈련 세션에 다시 소집되었으며, 버크가 건강을 회복하면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받았다. 버크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호주 센터 다니엘 허버트의 또 다른 부상으로 인해 캠피지는 1995년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서 벤치에 앉게 되었다.[1]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호주 23 – 뉴질랜드 34, 시드니 – 1995년 7월 29일)는 캠피지의 럭비 경력에서 벤치에서 시작한 유일한 경기였다. 호주 윙어 데미안 스미스가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전반전에 부상을 입어 캠피지는 후반전에 교체 선수로 출전하여 호주 대표팀에서 92번째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는 캠피지가 올 블랙스 윙어 조나 로무와 직접 대결한 유일한 경기였다.[1]
캠피지는 "Campo: Still Entertaining"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우연히 조나는 후반 초반에 공을 잡고 나에게 달려왔다… 눈을 감았던 것 같지만 그를 태클했다. 후반에 그는 나를 밀치고 트라이를 기록했지만, 적어도 그를 한 번 쓰러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다." 테스트 경기 후 캠피지와 로무는 탈의실에서 만나 유니폼을 교환했다. 캠피지의 92번째 테스트 경기는 그가 아마추어 시대에 치른 마지막 테스트 경기였다.[1]
3. 15. 2. 유럽 투어와 은퇴
1982년 호주와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테스트 경기 날 밤, 10명의 호주 럭비 선수들이 개인적인 이유와 사업상의 이유로 1982년 뉴질랜드 호주 투어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월러비스의 최고 윙어인 브렌던 문도 포함되었다.[1][2] 이 발표 이후 캠피지가 투어에 선발되었다.캠피지는 파머스턴 노스에서 열린 마나와투와의 경기에서 월러비 데뷔전을 치렀으며,[3][4] 단독 트라이를 기록하고 26-10 승리에서 5번의 시도 중 3번의 골을 성공시켰다.[5] 네이피어에서 호크스 베이와의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두 경기 후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 선발되었다.[5]
- 호주 18 – 뉴질랜드 33 (오클랜드 – 1982년 9월 11일)
캠피지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월러비스는 14경기에서 316점을 득점하여 뉴질랜드 호주 럭비 연맹 투어의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47개의 트라이도 포함되었다.[6][7] 이는 13경기에서 229점을 득점한 1972년 호주 팀의 기록을 넘어섰다.[6][7]
캠피지는 마나와투와의 데뷔 경기에서 트라이 1개와 5번의 시도 중 3개의 골을 성공시켰다.[5] 베이 오브 플렌티와의 월러비스의 11번째 투어 경기에서 트라이 2개와 컨버전(10점)으로 16-40 패배를 기록했다.[8] 황가레이에서 노스 오클랜드를 상대로 13점(16-12 승리)을 기록했으며, 두 개의 트라이, 페널티 킥 1개, 컨버전 1개를 기록한 후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9] 카운티스와의 월러비스의 투어 12번째 경기에서 카운티스 선수 앨런 도슨이 캠피지를 뒤에서 밀어 공을 건드리기 전에 빼앗아 트라이를 놓치기도 했다.[10]
캠피지는 오클랜드에서 열린 뉴질랜드와의 첫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 호주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1995년 오클랜드에서 열린 첫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서 호주 풀백 매트 버크가 부상을 당하자, 호주 대표팀 선발 위원회는 버크를 대신하여 로드 카퍼를 호주 대표팀에 선발했다. 카퍼는 훈련 중 다리가 부러졌다. 캠피지는 왈라비 훈련 세션에 다시 소집되었으며, 버크가 건강을 회복하면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받았다. 버크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호주 센터 다니엘 허버트의 또 다른 부상으로 인해 캠피지는 1995년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에서 벤치에 앉게 되었다.
-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호주 23 – 뉴질랜드 34 (시드니 – 1995년 7월 29일)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경기는 캠피지의 럭비 경력에서 벤치에서 시작한 유일한 경기였다. 호주 윙어 데미안 스미스가 두 번째 블레디슬로 컵 테스트 전반전에 부상을 입어 캠피지는 후반전에 교체 선수로 출전하여 호주 대표팀에서 92번째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는 캠피지가 올 블랙스 윙어 조나 로무와 직접 대결한 유일한 경기였다.
캠피지는 "Campo: Still Entertaining"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우연히 조나는 후반 초반에 공을 잡고 나에게 달려왔다… 눈을 감았던 것 같지만 그를 태클했다. 후반에 그는 나를 밀치고 트라이를 기록했지만, 적어도 그를 한 번 쓰러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다." 테스트 경기 후 캠피지와 로무는 탈의실에서 만나 유니폼을 교환했다. 캠피지의 92번째 테스트 경기는 그가 아마추어 시대에 치른 마지막 테스트 경기였다.
4. 럭비 세븐스
데이비드 캠피지는 럭비 세븐스 선수로도 유명했다. 그는 홍콩 세븐스에 12번 출전했으며(1983–1990, 1993–94, 1997–98)[3], 이 기간 동안 호주 대표팀 소속으로 3번 우승(1983, 1985, 1988)했고, 1988년에는 대회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되는 레슬리 윌리엄스 상을 수상했다.[4][5] 1987년, 캠피지는 콘코드 오벌에서 열린 뉴사우스웨일스 세븐스 토너먼트에서 호주 대표로 출전, 결승전에서 뉴질랜드를 22-1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6]
1990년에는 100번째 Melrose Sevens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우승한 Randwick 럭비 클럽 소속으로 뛰며, Randwick의 92점 중 44점을 기록했다. 1993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머레이필드에서 열린 첫 럭비 월드컵 세븐스에 참가한 호주 대표팀은 결승에서 잉글랜드에 17-21로 패했다.[7][8]
1998년, 그는 호주를 이끌고 파리 세븐스에서 10년 만에 첫 럭비 세븐스 토너먼트 우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1998년 코먼웰스 게임에서 호주 럭비 세븐스 팀 주장을 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 2015년 홍콩 럭비 풋볼 유니온(HKRFU)은 캠피지를 지난 40년간 홍콩 세븐스에서 활약한 7명의 가장 중요한 선수들을 기리는 HKRFU의 기념 캠페인인 'The Hong Kong Magnificent Sevens'의 일원으로 선정했다.[4][9]
그는 수비 선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특유의 "구스 스텝" 기술로 유명하다.
5. 럭비 리그 제안
1996년 호주 럭비 유니온 유럽 투어는 데이비드 캠피지가 국제 테스트 럭비에서 은퇴하기 전 마지막 럭비 투어였다. 이 투어에는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와의 테스트 경기가 포함되었지만, 캠피지는 이탈리아와 웨일스전에서만 출전했다.
캠피지는 트위케넘에서 열린 바바리안스와의 경기에서 호주 대표팀 소속으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경기 전, 캠피지에게는 마지막 경기에서 바바리안스 팀 소속으로 뛸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호주 팀 관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1] 경기가 끝난 후, 캠피지는 명예의 랩을 돌았고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으며 국제 경력을 마무리했다.[2]
| 날짜 | 상대 | 경기 결과 | 비고 |
|---|---|---|---|
| 1996년 10월 23일 | Italia|이탈리아it | 40 – 18 (승) | 캠피지의 100번째 국제 테스트 경기[1] |
| 1996년 12월 1일 | Cymru|웨일스cy | 28 – 19 (승) | 캠피지의 101번째이자 마지막 테스트 경기 |
| 1996년 12월 7일 | 바바리안스 | 39 – 12 (승) | 캠피지의 호주 대표팀 마지막 경기[1][2] |
6. 유산 및 영예
데이비드 캠피지는 1982년 뉴질랜드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월라비 데뷔를 했으며, 처음 두 번의 테스트에서 각각 한 번의 트라이를 기록했다.[3] 1983년 미국을 상대로 호주를 위해 4번의 트라이를 기록하여 당시 호주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3] 그는 1984년 영국 및 아일랜드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럭비 유니언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에이트 월라비와 함께 투어했으며,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등 4개의 홈 네이션을 모두 꺾은 최초의 호주 팀이었다.[3]
1986년 뉴질랜드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월라비의 일원으로 올 블랙스를 2-1로 꺾었는데, 이는 뉴질랜드에서 테스트 시리즈에서 승리한 6개의 국제 팀 중 하나이자 두 번째 호주 팀이었다.[3] 그는 첫 1987년 럭비 월드컵에 참가했으며,[3]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서 당시 국제 럭비 선수 최다 트라이 기록을 경신했다.[3] 캠피지는 1991년 럭비 월드컵에서 우승한 월라비의 일원이었으며,[3] 이 대회에서 6개의 트라이로 공동 최다 트라이 기록을 세웠고,[3] "대회 선수"로 칭송받았다.[3]
캠피지는 1992년 월라비가 올 블랙스를 2-1로 꺾으면서 두 번째 Bledisloe Cup을 획득했다.[3] 1992년 남아프리카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남아프리카를 상대로 통산 50번째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했다.[3] 1994년에 세 번째 Bledisloe Cup을 획득했으며, 호주 팀은 단독 테스트에서 뉴질랜드를 꺾었다.[3] 1996년 유럽 럭비 유니언 호주 투어에서 캠피지는 100번의 테스트 출전이라는 이정표를 달성한 최초의 호주 럭비 유니언 선수이자 두 번째 국제 선수가 되었다. 투어 종료와 함께 국제 럭비를 은퇴했으며, 101번의 테스트에 출전하여 당시 세계 기록인 64개의 테스트 트라이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이후 오하타 다이스케 (2006년 5월 14일)와 브라이언 하바나에 의해 경신되었다.
주(state) 수준에서 캠피지는 호주 수도 특별구와 뉴사우스웨일스를 모두 대표했다. 1983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한 호주 수도 특별구의 승리에서 두 번의 트라이, 네 번의 컨버전, 그리고 페널티 골을 기록했다.[3] 1991년, 웨일스를 상대로 한 71-8 승리에서 뉴사우스웨일스를 위해 다섯 번의 트라이를 기록했다.[3] 클럽 수준에서 1979년부터 1986년까지 Queanbeyan Whites에서, 1987년부터 1999년까지 Randwick에서 뛰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Queanbeyan Whites와 함께 3번 연속 그랜드 파이널에서 우승했으며, 1983년 그랜드 파이널에서는 29-12 승리에서 팀의 모든 득점을 기록하며 네 번의 트라이, 두 번의 컨버전, 세 번의 페널티 골을 넣었다.[3] 1987년부터 1992년까지 6번의 연속 우승을 포함하여 Randwick와 함께 8번의 그랜드 파이널에서 우승했으며, 1994년과 1996년에도 우승했다.[3]
이탈리아에서 9년 동안 (1984/85-1992/93) 럭비 유니언을 했으며, 두 팀과 함께 Top12에서 다섯 번 우승했다. 1984/85년부터 1987/88년까지 Petrarca Padova에서 뛰었으며, 클럽에서 처음 3년 동안 (1984/85-1986/87) 이탈리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88년 Amatori로 이적하여 1990/91 시즌과 1992/93 시즌 이탈리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91/92 시즌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럭비 세븐스 선수로도 유명하다. 홍콩 세븐스에 12번 출전했으며 (1983-1990, 1993-94, 1997-98),[3] 이 기간 동안 3번의 호주 우승 캠페인 (1983, 1985 및 1988)에 참가했으며, 1988년에는 대회 선수로 레슬리 윌리엄스 상을 수상했다.[4][5] 1987년 캠피지는 콘코드 오벌에서 열린 뉴사우스웨일스 세븐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으며, 호주 팀은 결승전에서 뉴질랜드를 22-12로 꺾었다.[6] 1990년 100번째 Melrose Sevens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우승한 Randwick 럭비 클럽에서 뛰었으며, Randwick의 92점 중 44점을 기록했다.[3] 1993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머레이필드에서 열린 첫 럭비 월드컵 세븐스 토너먼트에 참가했으며, 호주 팀은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에 17-21로 패했다.[7][8] 1998년 호주를 이끌고 파리 세븐스에서 10년 만에 첫 럭비 세븐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3] 1998년 코먼웰스 게임에서 호주 럭비 세븐스 팀의 주장을 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3] 2015년 홍콩 럭비 풋볼 유니온(HKRFU)은 캠피지를 지난 40년간 홍콩 세븐스에서 활약한 7명의 가장 중요한 선수들을 기리는 HKRFU의 기념 캠페인인 'The Hong Kong Magnificent Sevens'의 7명의 멤버 중 한 명으로 발표했다.[4][9]
그는 상대를 넘어뜨리려 애쓰게 만드는 히치킥 동작인 "구스 스텝"으로 유명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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