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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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석기는 대한제국 관료, 독립운동가, 목회자, 서예가이다. 함경도 북청군 출신으로, 대한제국 하급 관료로 근무했으며, 청나라 만주 지역에서 잠시 거주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으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 한국독립당 대표전임고문을 지냈으며, 만년에는 수원에서 목회와 농사, 서예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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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참여, 신사참배 저항 등의 활동을 한 일제강점기 목사이자 교육자이며 해방 후 조선민주당 창당, 제헌 국회의원, 무임소장관, 사회부 장관 등을 역임하고 신흥대학 학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 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 - 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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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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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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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동석기 |
원래 이름 | 董錫琪 |
출생일 | 1881년 4월 6일 |
출생지 | 조선 함경도 북청군 이곡면 초동리 1748번지 |
사망일 | 1971년 12월 26일 |
사망지 |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 |
거주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 86번지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
군주 | 대한제국 고종 이형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해주 최씨 부인 |
학력 | 협성신학교(1913년) |
자녀 | 슬하 2남 5녀 |
경력 | |
경력 | 일제 강점기 시대 기독교 목사 한국독립당 대표전임고문 겸 대표전임위원 |
서훈 | |
서훈 | 1996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추서(1996년 6월 6일) |
관직 | |
직책 | 대한제국 강원도 춘천군 동산면 예하 면서기관 |
임기 | 1899년 3월 25일 ~ 1902년 6월 11일 |
2. 별칭
호는 이곡(泥谷)·지명(支銘)·우원(雨園)·은향(恩鄕)·박토(博土)·평토(平土)·남양(南陽)·평농(平農)이며, 1903년 청나라 만주 지린성 랴오위안과 쑹위안에서 잠시 거주할 때 사용한 중국어 가명(假名)은 '''인전'''(殷震, 은진)·'''둥셴쭝'''(董獻宗, 동헌종)이다.
이명하 선생은 함경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잠시 청나라 만주 지방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이후 경기도 수원군으로 이주하여 성장했으며,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대한제국 하급 관료 생활을 하였다. 관료 직에서 물러난 후 1903년부터 1906년까지 다시 청나라 만주 지방에서 거주하다가 귀국하여 경술국치 이후 1916년 기독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3. 생애
1919년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박희도를 통해 3·1 운동 계획을 접하고 북감리교 계파의 운동을 주도했다. 탑동공원에서 열린 대한독립선언식에 참가하고 만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징역 7개월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에는 한국독립당에서 잠시 활동했으나 곧 사퇴하고, 경기도 수원에서 목회 활동과 농사, 서예 등으로 만년을 보냈다.
3. 1. 초기 생애와 대한제국 관료 시절
함경도 북청군 이곡면 초동리 1748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청나라 만저우 지방 펑톈 성 펑톈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 후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 86번지로 이주하였고, 1899년 3월부터 1902년 6월까지 대한제국 하급 관료(대한제국 강원도 춘천군 동산면 예하 면서기관) 직책을 지냈다. 1902년 6월에 대한제국 관료 직책을 사퇴하였다.
3. 2. 청나라 간이 거주와 귀국
그는 1903년 1월에서 1906년 2월까지 청나라 만주 지방 지린 성 랴오위안, 쑹위안, 바이청에서 잠시 거주했다. 1906년 2월 대한제국으로 귀국하여 경기도 수원 향리에 돌아와 경술국치 이후 1916년 기독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3. 3. 3.1 운동 참여와 투옥
이명하는 1919년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거행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3·1 운동 주도자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를 통해 3·1 운동 계획을 접하고 적극 동참했다.
이명하는 북감리교 목사로서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추진 과정에서 북감리교 계파의 운동을 적극 주도했으며,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동에서 거행된 대한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 그는 대한독립선언식 직후 오후 2시 30분경, 학생·시민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7개월형,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3. 4. 해방 이후의 행적
1945년 경기도 시흥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였고, 같은 해 11월에 경기도 수원 향리로 귀향하였다. 1948년 2월 15일부터 5월 31일까지 한국독립당 대표전임고문 겸 대표전임위원 직을 맡았으나, 같은 해 5월 31일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그 후 경기도 수원에서 목회 활동과 농사, 서예 등으로 만년을 보냈다.
4.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6년 6월 6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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