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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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원군은 현재의 화성시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 구역이다. 선사 시대에는 '모수국', 삼국 시대에는 '매홀군'으로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수주'로 승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수원'으로 최종 개명되어 수원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정조 시대에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하고 수원 화성, 화성 행궁을 건설하면서 도시가 발전했으나, 정조 사후 쇠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성 행궁이 철거되고 한국 전쟁으로 화성이 피해를 입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복원되었다. 1949년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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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선사 시대에 '모수국'으로 불린 수원[1]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후 '매홀군'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1] 940년(태조 재위 후반기) '수주'(水州)로 승격되었으며, 한남 또는 수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4년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1413년(태종 13년) '수원'(水原)으로 최종 개명되며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수원도호부의 관할은 1도호부(남양도호부), 2군(안산, 안성), 4현(진위, 용인, 양성, 양지)이었다. 정조(正祖)가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顯隆園)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전하면서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때 묵는 화성 행궁이 건립되었다. 정조는 장용영을 수원에 두고 상업을 발전시켜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정조 사후 특권이 폐지되면서 19세기에는 도시가 쇠퇴하였다. 일제강점기 화성 행궁이 철거되었고 한국 전쟁으로 화성마저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복원된 상태이다.[1]
2. 1. 삼국시대 이전
수원은 선사 시대에 '모수국'으로 불렸다.[1]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후 '매홀군'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1]2. 2. 삼국시대 ~ 조선 초기
삼국시대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후 '매홀군'으로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940년(태조 재위 후반기) '수주'(水州)로 승격되었으며, 한남 또는 수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4년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1413년(태종 13년) '수원'(水原)으로 최종 개명되며 수원도호부가 설치되었다.
2. 3. 조선 후기 (정조 시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시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전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였다.[1] 이와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이 능행차 때 묵는 화성 행궁을 건립하였다.[1]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수원에 두고 상업을 발전시켰으며, 수원은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1] 그러나 정조 사후 그가 베풀던 특권이 폐지되면서 19세기에는 도시가 쇠퇴하였다.[1]2. 4.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화성 행궁은 철거되었고, 한국 전쟁으로 화성마저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행궁 대부분이 복원된 상태이다.[1]3. 상세 변천 사항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남양군(영흥면과 대부면 제외), 광주군 의곡면·왕륜면, 안산군 월곡면·북방면·성곶면이 수원군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수원군은 21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5]과 현재의 행정구역은 아래 표와 같다.
3. 1. 조선시대 행정구역 개편
- 1394년: 양광도가 충청도와 경기도로 개편되었다.
- 1895년 음력 윤5월 1일: 23부제 실시로 수원군이 인천부에 편입되었다.[1]
- 1896년 8월 4일: 23부제 폐지로 수원군이 다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2]
3. 2.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1906년 오정면, 압정면, 장안면, 초장면, 팔탄면, 분향면을 남양군으로, 오타면을 진위군으로 이관하였다.[3]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남양군(영흥면과 대부면 제외)과 광주군 의곡면·왕륜면, 안산군 월곡면·북방면·성곶면이 수원군으로 통합되었다.[4] 통합된 수원군은 21면으로 구성되었다.
193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03호에 따라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고, 수원읍의 리(里)를 정(町)과 정목(丁目)으로 세분하였다.[6]
193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94호에 따라 일형면, 안룡면, 태장면의 각 일부가 수원읍에 편입되었고, 일형면과 의왕면을 일왕면으로 합면하였다.[7]
1941년 10월 1일 성호면이 오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이 수원부로 분리·승격하였고,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8]
참조
[1]
법률
칙령 제98호 地方制度改正件
1895-05-26
[2]
법률
칙령 제36호 地方制度官制改正件
1896-08-04
[3]
법률
광무 10년 칙령 제49호
[4]
법률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1913-12-29
[5]
간행물
(신구대조) 조선 전도부군면리동 명칭 일람
1917
[6]
법률
조선총독부령 제103호
1930-12-29
[7]
법률
조선총독부령 제94호
1936-09-14
[8]
법률
대통령령 제161호 부의설치및군의명칭·관할구역변경의건
194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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