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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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복위는 수나라 말기 농민 반란의 지도자로, 제주 출신이다. 15세에 반란에 가담하여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묘해초, 조파진 등 다른 반란 지도자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다. 강남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양쯔강 하류 지역을 장악했으나, 당나라에 항복하여 회하 이남을 지배했다. 당나라에 귀부한 후 오왕으로 봉해졌지만, 측근 부공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망했다. 이후 암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당 태종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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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복위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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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두복위 |
로마자 표기 | Du Fuwei |
출생 | 598년 |
사망 | 624년 (26세) |
시대 | 수나라, 당나라 |
활동 | 수나라 말기 ~ 당나라 초 |
관직 | |
동해군 공 | 東海郡公 |
태자소보 | 太子少保 |
오주 총관 | 吳州總管 |
회남 도행대상서 | 淮南道行臺尚書 |
상주 자사 | 上柱刺史 |
봉작 | |
양국공 | 梁國公 |
무안왕 | 懋安王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두릉 |
아들 | 두탄 |
2. 초기 생애와 봉기
두복위는 제주(齊州, 대략 현대의 지난시, 산둥성)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자유로운 영혼으로 생계에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부공석은 종종 부공석의 삼촌으로부터 양을 훔쳐 두복위에게 주었고, 이로 인해 둘 다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3] 그들은 도망쳐 수나라 통치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자가 되었다. 613년 무렵, 두복위는 15세였다. 그의 용맹함 때문에—반란군이 전투를 벌일 때마다 두복위가 항상 먼저 나섰고, 퇴각할 때는 항상 마지막에 남았다고 한다.[3]
그 지역에는 묘해초(苗海潮)라는 또 다른 반란 지도자가 있었고, 두복위는 부공석을 보내 묘해초에게 "우리는 모두 수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참을 수 없어 의로운 마음으로 일어섰습니다. 우리의 세력이 분산되어 있어 포로로 잡힐까 두렵습니다. 군대를 합치면 수나라 군대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지도자가 될 만큼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복종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제 명령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투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묘해초는 두려움에 굴복했다. 두복위는 그들의 군대를 합쳐 회하를 건너 남쪽으로 향했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선언했다. 수나라 장군 송호(宋顥)가 그를 공격했다. 두복위는 패배한 척하며 수나라 군대를 늪지에 가두고 늪지 식물에 불을 질러 많은 수나라 군인을 불에 태워 죽였다. 그는 곧 또 다른 반란 지도자 조파진(趙破陣)을 죽이고 조파진의 군대를 차지했다.[3]
또 다른 반란 지도자 이자통이 615년에 그에게 합류했지만, 곧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부하 왕웅단(王雄誕)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그 후, 그는 수나라 장군 내정(來整)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했고, 왕웅단과 그의 부하 서문군의(西門君儀)의 아내인 왕 부인의 노력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두복위의 군대는 붕괴되었지만, 그는 곧 재집결할 수 있었다.[3]
이 무렵 두복위는 병사들 중 특히 맹렬한 전사 30여 명을 선발하여 아들로 삼았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겨우 17세였고, 그들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군인들 사이에 가족 관계를 만드는 이러한 행동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사례였다.[3] 이들 양자들 중 가장 유능한 자는 왕웅단과 감릉(闞稜)이었다. 두복위와 부공석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군대는 두복위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외에도 부공석을 "삼촌"이라고 불렀다.[3]
2. 1. 출신 배경과 초기 활동
2. 2. 반란 가담과 초기 활약
두복위는 제주(齊州, 대략 현대의 지난시, 산둥성) 출신으로, 젊은 시절 자유로운 영혼으로 생계에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진다.[3]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부공석은 종종 부공석의 삼촌으로부터 양을 훔쳐 두복위에게 주었고, 이로 인해 둘 다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도망쳐 수나라 통치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자가 되었다. 613년 무렵, 두복위는 15세였으며,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항상 먼저 나서고 퇴각할 때는 마지막에 남는 용맹함을 보였다.[3]
그 지역의 또 다른 반란 지도자 묘해초(苗海潮)에게 두복위는 부공석을 보내 "우리는 모두 수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참을 수 없어 의로운 마음으로 일어섰습니다. 우리의 세력이 분산되어 있어 포로로 잡힐까 두렵습니다. 군대를 합치면 수나라 군대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것입니다."라고 전하며, 묘해초에게 지도자 자리를 제안하거나 전투를 벌일 것을 요구했다. 묘해초는 두려움에 굴복했고, 두복위는 군대를 합쳐 회하를 건너 남쪽으로 향해 스스로 장군이라 선언했다.[3]
수나라 장군 송호(宋顥)가 그를 공격했을 때, 두복위는 패배한 척하며 수나라 군대를 늪지에 가두고 늪지 식물에 불을 질러 많은 수나라 군인을 불에 태워 죽였다. 그는 곧 또 다른 반란 지도자 조파진(趙破陣)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차지했다. 또 다른 반란 지도자 이자통이 615년에 그에게 합류했지만, 곧 그를 암살하려 했다. 두복위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부하 왕웅단(王雄誕)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수나라 장군 내정(來整)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했고, 왕웅단과 서문군의(西門君儀)의 아내 왕 부인의 노력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두복위의 군대는 붕괴되었지만, 곧 재집결할 수 있었다.[3]
이 무렵 두복위는 병사들 중 특히 맹렬한 전사 30여 명을 선발하여 아들로 삼았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겨우 17세였고, 그들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군인들 사이에 가족 관계를 만드는 이러한 행동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사례였다.[3] 이들 양자들 중 가장 유능한 자는 왕웅단과 감릉(闞稜)이었다. 두복위와 부공석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군대는 두복위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외에도 부공석을 "삼촌"이라고 불렀다.[3]
2. 3. 묘해초와의 연합
3. 강남 지역에서의 세력 확장
두복위는 616년 가을 장쑤성 난징의 류허(六合)에 정착했다. 동료 반란 지도자였던 이자통(李子通)과 좌상재(左相才) 또한 근처에 있었다. 당시 수나라 양제는 양저우의 장두(江都)에 머물며 그의 장군 진릉(陳稜)을 보냈는데, 617년 봄 두복위는 진릉에게 여자 옷을 보내고 그를 "진 할머니"라고 칭하여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대로 사용했던 전술을 사용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진릉은 성급하게 공격, 패배하여 도망쳤다. 이후 두복위는 양저우의 가오유(高郵)를 점령하고, 안후이성 차오후 시의 롄양(歷陽)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고 롄양의 사령관을 자처했다.
이 무렵, 두복위는 정예 병사 5,000명을 "상모(上募)"라 칭하고 특별한 특권을 부여했다. 전투 후 등에 상처가 있는 자는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처형했다. 스스로 재산을 모으지 않고 노획물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병사가 전투에서 죽으면, 병사의 아내와 첩에게도 죽음을 강요한 뒤 함께 매장했다.
618년 봄, 양제가 우문화급의 쿠데타로 살해당하자, 우문은 양제의 조카 양호를 황제로 옹립하고 장두를 버리고 북쪽의 동쪽 수도 뤄양으로 향했다. 뤄양에서는 양제의 손자 양동이 황제로 선포되었다. 우문이 장두를 떠나기 전 두복위에게 사자를 보내 롄양 지사로 임명했지만, 두복위는 거절하고 양동에게 복종을 제안했다. 양동은 두복위를 동부 군의 대원수로 임명하고 초왕(楚王)으로 봉했다.
두복위는 진릉, 장쑤성 타이저우의 하이링(海陵)에 있던 이자통, 장쑤성 창저우의 필링(毗陵)에 있었고 양왕(梁王)을 자칭했던 심법흥과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619년 가을, 이자통이 장릉에서 진릉을 포위했고, 진릉은 심법흥과 두복위 모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심법흥은 아들 심관(沈綸)을 보냈고, 두복위도 함께했지만, 이자통은 심관과 두복위가 서로 공격하도록 속였고, 결국 이자통은 장두를 점령했다. 심관과 두복위 모두 물러났고, 이자통은 장두 지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오(吳)나라 황제를 칭했다. 그 해 초 양동의 정권이 무너지자, 두복위는 당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당나라 고조는 두복위를 허주(롄양) 지사, 회수 이남의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초왕의 칭호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다.
3. 1. 수나라와의 전투
3. 2. 이자통과의 갈등과 왕웅단의 활약
3. 3. 상모(上募) 조직과 군사적 특징
4. 양쯔강 하류 지역 쟁탈전
616년 가을, 두복위는 난징 (장쑤성)의 류허(六合)에 정착했다. 당시 수나라 양제는 장쑤성 양저우의 장두(江都)에 머물렀고, 그의 장군 진릉(陳稜)을 보내 두복위를 공격하게 했다. 617년 봄, 두복위는 진릉에게 여자 옷을 보내고 "진 할머니"라고 칭하며 도발했다. 이는 삼국 시대에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대로 사용했던 전술이었지만, 진릉은 이 도발에 넘어가 성급하게 공격했다가 패배하고 도망쳤다. 이후 두복위는 양저우의 가오유(高郵)를 점령하고, 차오후시 (안후이성)의 롄양(歷陽)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두복위는 정예 병사 5,000명을 "상모(上募)"라 칭하고 특별 대우를 했다. 전투 후 등에 상처가 있는 병사는 도망친 것으로 간주하여 처형했고, 전사한 병사의 아내와 첩도 죽여 함께 매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병사들의 충성심을 얻었다.
618년 봄, 양제가 우문화급의 쿠데타로 살해당하자, 두복위는 롄양 지사 임명을 거절하고 양동에게 복종을 제안하여 초왕(楚王)으로 봉해졌다.
이후 두복위는 진릉, 이자통, 심법흥과 양쯔강 하류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619년 가을, 이자통이 장두에서 진릉을 포위하자, 진릉은 심법흥과 두복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자통의 계략으로 심법흥의 아들 심관(沈綸)과 두복위는 서로 공격하게 되었고, 결국 이자통이 장두를 점령했다. 이자통은 오(吳)나라 황제를 칭했다.
왕세충이 양동에게 강요하여 황제 자리를 넘겨받고 수나라가 멸망하자, 두복위는 당나라에 항복했다. 당나라 고조는 두복위를 허주(롄양) 지사, 회수 이남의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초왕 칭호를 유지하도록 했다.
4. 1. 진릉과의 대립
4. 2. 롄양 점령과 세력 기반 마련
4. 3. 이자통, 심법흥과의 삼파전
616년 가을, 두복위는 난징의 류허(六合)에 정착했다. 동료 반란 지도자였던 이자통과 좌상재 또한 근처에 있었다. 당시 수나라 양제는 양저우의 장두(江都)에 머물며 그의 장군 진릉(陳稜)을 보냈다. 617년 봄, 두복위는 진릉에게 여자 옷을 보내고 그를 "진 할머니"라고 칭하는 전술을 사용했으나, 진릉의 성급한 공격을 유발하여 패배시켰다. 이후 두복위는 양저우의 가오유(高郵)를 점령하고, 차오후시의 롄양(歷陽)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다.두복위는 정예 병사 5,000명을 "상모(上募)"라 칭하고 특별한 특권을 부여했다. 전투에서 등 쪽에 상처가 있는 병사는 처형했고, 전사한 병사의 아내와 첩을 순장시키는 방식으로 병사들의 충성을 얻었다.
618년 봄, 우문화급의 쿠데타로 양제가 살해된 후, 두복위는 우문화급이 보낸 롄양 지사 임명을 거절하고, 대신 뤄양에서 황제로 선포된 양동에게 복종하여 초왕(楚王)으로 봉해졌다.
이후 두복위는 진릉, 이자통, 심법흥과 이 지역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619년 가을, 이자통이 장릉에서 진릉을 포위하자, 두복위는 심법흥과 함께 진릉을 도우려 했으나, 이자통의 계략으로 실패했다. 이자통은 장두를 점령하고 오(吳)나라 황제를 칭했다. 두복위는 당나라에 항복하여 허주 지사 및 회수 이남의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초왕 칭호를 유지했다.
5. 당나라 귀부와 강남 평정
620년 여름, 고조는 두복위의 작위를 오왕(吳王)으로 바꾸고, 황실의 성인 이(李)를 하사했다. 이후 두복위는 이복위(李伏威)로 불리게 되었다. 부공석(輔公祏)은 서공(舒公)으로 봉해졌다.
그해 말, 이자통(李子通)이 심법흥(沈法興)을 공격하여 징커우(京口, 현대 장쑤성 전장시), 단양(丹楊, 현대 난징), 심법흥의 수도 필릉(毗陵)을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를 점령하여 심법흥을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에 이복위는 부공석을 보내 이자통을 공격하게 했으며, 감릉(阚棱)과 왕웅단(王雄旦)을 부공석의 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이자통을 격파했고, 이자통의 식량 보급은 곧 바닥났다. 이자통은 강도(江都)를 버리고 징커우로 도주한 후, 동쪽으로 더 멀리 도망쳐 심법흥을 공격하여 심법흥이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자통은 현대 저장성을 심법흥으로부터 빼앗았고, 현대 장쑤성 중부와 남부는 이복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복위는 본거지를 리양(溧陽)에서 단양으로 옮겼다.
621년 봄, 고조의 아들 이세민 진왕이 정(鄭)의 수도 낙양을 포위하자, 두복위는 장수 진정통(陳正通)과 서소종(徐紹宗)을 2,000명의 병력과 함께 이세민의 원정에 파견했다. 진정통과 서소종은 정의 도시 량청(梁城, 현대 허난성 루저우시)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621년 겨울, 이복위는 왕웅단을 이자통에게 보냈다. 왕웅단은 먼저 이자통을 속여 항저우(杭州, 현대 저장성 항저우시)로 도망가게 한 후, 이자통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복위는 이자통과 이자통의 핵심 관료 락백통(樂伯通)을 당의 수도 장안으로 보냈으나, 고조는 그들을 살려주었다. 왕웅단은 이어서 다른 두 명의 주요 반란 지도자 왕화(汪華)와 문인수안(聞人遂安)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이 시점에서 이복위는 회하(淮河) 이남의 모든 영토를 지배했으며, 남쪽으로는 선하령(仙霞嶺, 즉, 현대 저장성과 푸젠성의 경계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5. 1. 당나라 고조에게 귀부
620년 여름, 당 고조는 두복위의 작위를 오왕(吳王)으로 바꾸고, 황실의 성인 이(李)를 하사했다. 이후 두복위는 이복위(李伏威)로 불리게 되었다. 부공석은 서공(舒公)으로 봉해졌다.그해 말, 이자통이 심법흥을 공격하여 징커우(京口, 현대 장쑤성 전장시), 단양(丹楊, 현대 난징), 심법흥의 수도 필릉을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를 점령하여 심법흥을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에 이복위는 부공석을 보내 이자통을 공격하게 했으며, 감릉과 왕웅단을 부공석의 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이자통을 격파했고, 이자통의 식량 보급은 곧 바닥났다. 이자통은 강도를 버리고 징커우로 도주한 후, 동쪽으로 더 멀리 도망쳐 심법흥을 공격하여 심법흥이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자통은 현대 저장성을 심법흥으로부터 빼앗았고, 현대 장쑤성 중부와 남부는 이복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복위는 본거지를 리양에서 단양으로 옮겼다.
621년 봄, 고조의 아들 이세민 진왕이 정(鄭)의 수도 낙양을 포위하자, 두복위는 장수 진정통과 서소종을 2,000명의 병력과 함께 이세민의 원정에 파견했다. 진정통과 서소종은 정의 도시 량청(梁城, 현대 허난성 루저우시)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621년 겨울, 이복위는 왕웅단을 이자통에게 보냈다. 왕웅단은 먼저 이자통을 속여 항저우(杭州, 현대 저장성 항저우시)로 도망가게 한 후, 이자통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복위는 이자통과 이자통의 핵심 관료 락백통을 당의 수도 장안으로 보냈으나, 고조는 그들을 살려주었다. 왕웅단은 이어서 다른 두 명의 주요 반란 지도자 왕화와 문인수안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이 시점에서 이복위는 회하 이남의 모든 영토를 지배했으며, 남쪽으로는 선하령(仙霞嶺, 즉, 현대 저장성과 푸젠성의 경계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5. 2. 오왕(吳王) 책봉과 이(李)씨 성 하사
620년 여름, 고조는 두복위의 작위를 오왕(吳王)으로 바꾸고, 황실의 성인 이(李)를 하사했다. 이후 두복위는 이복위(李伏威)로 불리게 되었다. 부공석(輔公祏)은 서공(舒公)으로 봉해졌다.그해 말, 이자통(李子通)이 심법흥(沈法興)을 공격하여 징커우(京口, 현대 장쑤성 전장시), 단양(丹楊, 현대 난징) 등 여러 주요 도시를 점령하자, 이복위는 부공석을 보내 이자통을 공격하게 했다. 감릉(阚棱)과 왕웅단(王雄旦)이 부공석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이자통을 격파했다. 이자통은 강도(江都)를 버리고 징커우로 도주한 후, 동쪽으로 더 멀리 도망쳐 심법흥을 공격하여 심법흥이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자통은 현대 저장성을 심법흥으로부터 빼앗았고, 현대 장쑤성 중부와 남부는 이복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복위는 본거지를 리양(溧陽)에서 단양으로 옮겼다.
621년 봄, 고조의 아들 이세민 진왕이 정(鄭)의 수도 낙양을 포위하자, 두복위는 장수 진정통(陳正通)과 서소종(徐紹宗)을 2,000명의 병력과 함께 이세민의 원정에 파견했다. 진정통과 서소종은 정의 도시 량청(梁城, 현대 허난성 루저우시)을 함락시켰다.
621년 겨울, 이복위는 왕웅단을 이자통에게 보냈다. 왕웅단은 이자통을 속여 항저우(杭州, 현대 저장성 항저우시)로 도망가게 한 후, 이자통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복위는 이자통과 락백통(樂伯通)을 당의 수도 장안으로 보냈으나, 고조는 그들을 살려주었다. 왕웅단은 이어서 왕화(汪華)와 문인수안(聞人遂安)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이 시점에서 이복위는 회하(淮河) 이남의 모든 영토를 지배했으며, 남쪽으로는 선하령(仙霞嶺, 즉, 현대 저장성과 푸젠성의 경계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5. 3. 이자통, 심법흥 제압
620년 여름, 고조(高祖)는 두복위(杜伏威)의 작위를 오왕(吳王)으로 바꾸고, 황실의 성인 이(李)를 하사했다. 이후 두복위는 이복위(李伏威)로 불리게 되었다. 부공석(輔公祏)은 서공(舒公)으로 봉해졌다.그해 말, 이자통(李子通)이 심법흥(沈法興)을 공격하여 징커우(京口, 현대 장쑤성 전장시), 단양(丹楊, 현대 난징)을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이복위는 부공석을 보내 이자통을 공격하게 했으며, 감릉(阚棱)과 왕웅단(王雄旦)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이자통은 강도(江都)를 버리고 징커우로 도주한 후, 동쪽으로 더 멀리 도망쳐 심법흥을 공격하여 심법흥이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자통은 현대 저장성을 심법흥으로부터 빼앗았고, 현대 장쑤성 중부와 남부는 이복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복위는 본거지를 리양(溧陽)에서 단양으로 옮겼다.
621년 봄, 고조의 아들 이세민 진왕이 정(鄭)의 수도 낙양을 포위하자, 두복위는 장수 진정통(陳正通)과 서소종(徐紹宗)을 2,000명의 병력과 함께 이세민의 원정에 파견했다. 진정통과 서소종은 정의 도시 량청(梁城, 현대 허난성 루저우시)을 함락시켰다.
621년 겨울, 이복위는 왕웅단을 이자통에게 보냈다. 왕웅단은 이자통을 항복하게 만들었고, 이복위는 이자통과 이자통의 핵심 관료 락백통(樂伯通)을 당의 수도 장안으로 보냈다. 왕웅단은 이어서 다른 두 명의 주요 반란 지도자 왕화(汪華)와 문인수안(聞人遂安)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이 시점에서 이복위는 회하(淮河) 이남의 모든 영토를 지배했으며, 남쪽으로는 선하령(仙霞嶺, 즉, 현대 저장성과 푸젠성의 경계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5. 4. 당 태종의 정(鄭)나라 공격 지원
5. 5. 왕웅단의 활약과 강남 평정
6. 두복위의 죽음과 부공석의 반란
이부위는 겉으로는 부공석을 형제처럼 대했지만, 실제로는 부공석을 의심하여 왕웅단과 간냉에게 자신의 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했다. 부공석은 이러한 처우에 불만을 품었지만, 이에 대응하여 더 이상 세속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친구 좌유선과 함께 연금술을 수행했다. 이부위 자신도 연금술에 정통했으며, 장수하기 위한 일환으로 그 안에 포함된 독성에도 불구하고 운모를 자주 섭취했다고 한다.
622년 가을, 이세민은 서원랑의 군대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있었고, 그의 군대는 이부위의 영토 근처에 있었다. 이부위는 자신의 충성심에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간냉을 데리고 장안으로 가서 고조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요청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부공석에게 군대를 맡기고 왕웅단을 부공석의 부관으로 삼아 실질적인 지휘를 맡겼으며, 왕웅단에게 은밀히 경고했다. "만약 내가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면, 부공석이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시오." 이부위가 장안에 도착하자 고조 황제는 그에게 황제의 자리에 함께 앉도록 하는 특별 대우를 베풀었고, 다른 경우에는 고조 황제의 아들 이원길 제왕보다 더 높은 영예를 주었다. 그러나 이부위나 간냉이 단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간냉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623년 봄, 그는 이부위에게 ''태보''(太保, 삼공)의 명예직을 추가로 수여했다.
한편, 623년 가을, 부공석은 왕웅단을 속여 그의 지휘권을 넘겨받고 그를 죽인 후, 이부위가 억류되었으며 그가 비밀리에 자신에게 당나라에 반기를 들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부공석은 곧 스스로를 송 황제라고 선언했다. 624년 4월, 이부위는 갑자기 사망했는데, 공식 기록에서는 연금술적 수행의 일환으로 복용하던 물질에 중독된 것으로 시사했지만, 또한 고조 황제의 명령으로 암살되었을 가능성을 은밀하게 열어두었다. 이효공이 그해 말 부공석을 격파하고 죽인 후, 이효공은 부공석이 이부위의 명령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믿었고, 이를 고조 황제에게 보고했다. 고조 황제는 이부위의 작위를 추탈하고 그의 아내와 자녀를 체포하여 노예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626년 이세민이 황제가 된 후, 그는 이부위가 부공석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부위의 작위를 복원하고 그의 아내와 자녀를 석방했으며, 공작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
6. 1. 부공석과의 갈등과 장안 입조
6. 2. 부공석의 반란과 두복위의 죽음
이부위는 겉으로는 부공석을 형제처럼 대했지만, 실제로는 부공석을 의심하여 왕웅단과 간냉에게 자신의 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했다. 부공석은 이러한 처우에 불만을 품었지만, 이에 대응하여 더 이상 세속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친구 좌유선과 함께 연금술을 수행했다. 이부위 자신도 연금술에 정통했으며, 장수하기 위한 일환으로 그 안에 포함된 독성에도 불구하고 운모를 자주 섭취했다고 한다.622년 가을, 이세민은 서원랑의 군대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있었고, 그의 군대는 이부위의 영토 근처에 있었다. 이부위는 자신의 충성심에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간냉을 데리고 장안으로 가서 고조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요청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부공석에게 군대를 맡기고 왕웅단을 부공석의 부관으로 삼아 실질적인 지휘를 맡겼으며, 왕웅단에게 은밀히 경고했다. "만약 내가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면, 부공석이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시오." 이부위가 장안에 도착하자 고조 황제는 그에게 황제의 자리에 함께 앉도록 하는 특별 대우를 베풀었고, 다른 경우에는 고조 황제의 아들 이원길 제왕보다 더 높은 영예를 주었다. 그러나 이부위나 간냉이 단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간냉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623년 봄, 그는 이부위에게 ''태보''(太保, 삼공)의 명예직을 추가로 수여했다.
한편, 623년 가을, 부공석은 왕웅단을 속여 그의 지휘권을 넘겨받고 그를 죽인 후, 이부위가 억류되었으며 그가 비밀리에 자신에게 당나라에 반기를 들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부공석은 곧 스스로를 송 황제라고 선언했다. 624년 4월, 이부위는 갑자기 사망했는데, 공식 기록에서는 연금술적 수행의 일환으로 복용하던 물질에 중독된 것으로 시사했지만, 또한 고조 황제의 명령으로 암살되었을 가능성을 은밀하게 열어두었다. 조군왕의 아들인 이효공]]이 그해 말 부공석을 격파하고 죽인 후, 이효공은 부공석이 이부위의 명령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믿었고, 이를 고조 황제에게 보고했다. 고조 황제는 이부위의 작위를 추탈하고 그의 아내와 자녀를 체포하여 노예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626년 태종 황제가 된 후, 그는 이부위가 부공석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부위의 작위를 복원하고 그의 아내와 자녀를 석방했으며, 공작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
6. 3. 사후 처리와 명예 회복
이부위는 겉으로는 부공석을 형제처럼 대했지만, 실제로는 의심하여 왕웅단과 간냉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부공석은 이에 불만을 품고 연금술을 수행했다. 이부위 역시 연금술에 정통하여 운모를 자주 섭취했다고 한다.622년 가을, 이부위는 당 고조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장안으로 갔고, 고조는 이부위에게 특별 대우를 했다. 그러나 이부위와 간냉은 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간냉은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623년 봄, 이부위에게 ''태보''(太保, 삼공)의 명예직이 추가되었다.
623년 가을, 부공석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송 황제라 칭했다. 624년 4월, 이부위는 사망했는데, 공식 기록에서는 연금술 수행 중 복용한 물질에 중독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암살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효공이 부공석을 격파하고 죽인 후, 고조는 이부위의 작위를 추탈하고 가족을 노예로 만들었다. 626년 이세민(태종)은 이부위의 작위를 복원하고 가족을 석방했으며, 공작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
7. 역사적 평가
7. 1. 긍정적 평가
7. 2. 부정적 평가
7. 3. 종합적 평가
참조
[1]
서적
大唐故上柱国杜公墓志铭
Old Book of Tang, vol. 56
[2]
기타
[3]
서적
Zizhi Tongjian
Bo Yang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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