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법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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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법흥은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오흥군 태수였던 그는 우문화급의 쿠데타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세력을 확장했다. 스스로 강남 대사령관을 칭하고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며, 양왕을 자칭하며 비릉에 수도를 두었다. 하지만 가혹한 통치와 경쟁 세력과의 다툼 끝에 이자통에게 패배하여 도주하던 중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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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법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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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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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심 |
이름 | 법흥 |
시호 | 장 |
작위 | 양왕 |
시대 | 수나라 말기 |
활동 년대 | 7세기 초 |
출생 | 오흥군 무강현 |
사망 | 619년 |
별칭 | 심사안 (沈士安) |
로마자 표기 | Sim Beob-heung |
한자 | 沈法興 |
간체자 | 沈法兴 |
병음 | Shěn Fǎxīng |
한국어 | 심법흥 |
일본어 | しん ほうこう |
생애 | |
주요 활동 | 두복위 격파 이자통에게 살해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심소략 (沈昭略) |
2. 생애
심법흥은 남조 진의 광주 자사 심각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나라 대업 말년에 오흥군수로 임명되어 동양의 루세간을 토벌했다.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살해되자, 우문화급의 처단을 명분으로 단양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동양을 출발하여 강도를 함락시키고 여항을 점령했으며, 오정에 이르러 병력이 6만 명에 달했다. 비릉에서 루도덕을 기습하여 그 성을 거점으로 삼고, 강남도행군총관을 자칭했다. 월왕 양동이 즉위하자 대사마·녹상서사·천문공이 되었다. 진과인, 손사한, 장원초, 은천, 서령언, 유자익, 이백약 등을 등용했다. 양동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619년 9월, 양왕을 자칭하고, 연강을 연호로 세웠다.
620년, 이자통의 공격을 받아 부장 장원초를 파견하여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고, 심법흥은 비릉을 포기하고 오군으로 도주했다. 두복위가 보공석에게 정예 수천 명을 이끌고 이자통을 공격하게 하자, 패배한 이자통은 태호로 도주했고, 이 곳으로 피신해 있던 심법흥을 다시 공격했다. 심법흥은 성을 버리고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오군의 문인수안에게 항복했다. 문인수안은 부장 엽효변을 보내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심법흥은 직전에 마음을 바꿔 엽효변을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어 엽효변의 군대에게 공격을 받게 되었고, 퇴로를 잃은 심법흥은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2. 1. 배경 및 초기 거병
심법흥은 호주(湖州|호주중국어, 대략 현대의 후저우시, 저장 성) 출신이었다.[2] 그의 아버지 심각(沈恪|심각중국어)은 진의 장군으로, 582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진나라의 다섯 황제를 모두 섬겼으며, 동흥현후(東興縣侯)의 작위를 받았다.[2] 심각이 죽은 후, 심법흥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진나라는 589년 수나라에 의해 멸망했다.618년 시점에서 심법흥은 수 양제 휘하에서 진나라의 호주를 새롭게 명명한 오흥군(吳興|오흥군중국어)의 태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농민 반란 지도자 누세간(樓世幹|누세간중국어)을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양제가 장군 우문화급이 이끄는 쿠데타로 강도(江都|강도중국어, 현대의 양저우 시, 장쑤 성)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심법흥은 자신이 우문화를 공격한다고 주장하며, 이 지역의 군대(6만 명 이상)를 모아 유항(餘杭|유항중국어, 현대의 항저우 시, 저장 성), 필릉(毗陵|필릉중국어, 현대의 창저우 시, 장쑤 성), 단양(丹楊|단양중국어, 현대의 난징 시, 장쑤 성)을 포함한 10개 이상의 군을 점령했다. 그는 스스로 강남(양쯔강 남쪽)의 대사령관이라고 선포하고 황제의 권력을 행사했다.
618년 가을, 심법흥은 수 황제 양동, 즉 양제의 손자였던, 당시 동쪽 수도 뤄양에 있던 양동에게 신하가 될 것을 알리는 사신을 보냈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지극히 존경받는 무관 지휘관, 대서기관, 천문공의 칭호를 부여했고, 양동이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거나 그에게 그 직책을 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2. 2. 양왕(梁王) 즉위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살해되고, 619년 왕세충이 양동에게 강제로 양위하게 하여 정나라를 건국하면서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심법흥은 회하 남쪽 지역을 평정할 수 있다고 믿고 스스로 양왕(梁王)이라 칭하며 비릉을 수도로 삼았다. 그의 정부 조직은 대체로 진나라를 본받았다.[1] 그러나 심법흥은 잔혹한 학살로 반대 세력을 억눌렀으며, 군대가 작은 잘못이라도 범하면 참수했기 때문에 부하들의 경멸을 받았다.[1] 무덕 2년 9월, 양왕을 자칭하고 연강을 연호로 사용했다.[2]2. 3. 패배와 죽음
620년, 당시 오(吳) 황제를 칭한 이자통은 양쯔강을 건너 심법흥의 주요 도시인 징커우(京口, 현재 장쑤성 전장시)를 점령했다. 심법흥은 관료 장원초(蔣元超)를 보내 이자통에 맞섰으나, 이자통은 장원초를 격파하고 죽였다. 심법흥은 필릉을 버리고 오군 (대략 현재 장쑤성 쑤저우시)으로 도망쳤다. 필릉과 단양은 이자통의 손에 들어갔다.당나라에 귀순하여 황실 성씨인 이(李)씨를 하사받아 이부위로 알려진 두복위는 장군 부공석, 간릉(闞稜), 왕웅단(王雄誕)을 보내 이자통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자통은 식량이 바닥나자 강도를 버리고 징커우로 도망쳤지만, 징커우 또한 버리고 심법흥을 공격했다. 심법흥은 수백 명의 병력과 함께 오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현지 농민 지도자인 문인수안(聞人遂安)은 장군 엽효변(葉孝辯)을 보내 심법흥을 맞이하고 호위했다. 심법흥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가는 길에 마음을 바꿔 엽효변을 암살하고 회계 (현재 저장성 사오싱시)로 도망칠 생각을 했다. 엽효변이 이 음모를 알아차리자 심법흥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느껴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자통은 심법흥의 남은 영토, 대략 현재 저장성을 차지했다.
3. 연호
延康|연강중국어 (619년 ~ 620년)
참조
[1]
서적
Jiu Tang Shu
[2]
논문
How Officials Rose to Success and Migrated to the Center: Considering the Tombs of Meritorious Officials at Zhaoling
https://muse.jhu.edu[...]
2022-12-07
[3]
서적
Che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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