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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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냉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던 1712년, 프랑스 원수 빌라르가 오이겐 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영국군의 지원 중단으로 연합군이 분열된 틈을 타 프랑스는 기습 공격으로 드냉을 점령하고,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로 연합군은 전쟁 지속 의지를 상실하고,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며 유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 조약을 통해 전쟁을 종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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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냉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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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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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날짜 | 1712년 7월 24일 |
장소 | 프랑스 노르파드칼레 주 드냉 |
좌표 | 북위 50° 20', 동경 3° 24'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영토 | 프랑스는 마르시엔, 두에, 르퀘스노, 부섕 요새를 대동맹으로부터 회복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합스부르크 군주국 네덜란드 공화국 하노버 |
지휘관 | |
프랑스 | 클로드 드 빌라르 |
합스부르크/네덜란드 | 외젠 공자 아놀드, 알베마를 백작 |
병력 | |
프랑스 | 24,000–26,000명 |
합스부르크/네덜란드 | 8,500–10,500명 |
사상자 | |
프랑스 | 500명 또는 2,100명 |
합스부르크/네덜란드 | 6,500명 또는 8,000명 |
2.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1년부터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10년 이상의 전쟁 후, 프랑스는 재정적, 군사적으로 암울한 시기를 맞았다. 빌라르 원수의 프리들링겐 전투와 호흐슈테트 제1차 전투에서의 초기 승리는 사보이아 공 에우제니오와 말버러 공작 휘하의 연합군에게 많은 패배로 이어졌다. 1708년 오덴나르데 전투의 대패 이후, 북부 프랑스의 거의 모든 요새가 오스트리아-네덜란드-영국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경제 위기도 있었고, 1708-1709년 겨울은 18세기 중 가장 혹독한 겨울 중 하나였으며, 기근과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다.[9]
1712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 드냉 전투는 복잡한 전개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은 크게 세 가지 주요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1709년 프랑스 북부군의 지휘는 빌라르 원수에게 넘어갔고, 그는 사기가 저하된 군대를 재편성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에우제니오 공과 말버러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이 말플라케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을 때, 빌라르는 부상을 입었고 프랑스군은 전장에서 후퇴했지만, 연합군은 두 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고 그들의 작전은 곧 흐지부지되었다. 프랑스의 불안정한 상황은 안정되었고, 연합군은 부르봉 왕가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으며 전쟁은 계속되었다. 영국에서는 반전 토리당이 1710년 집권하는 데 성공했고 프랑스 협상가들과의 합의에 점점 더 동의할 준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11년 작전에서 말버러는 그의 군대를 네 플러스 울트라 방어선을 통과시켜 북부 프랑스의 중요 요새인 부쟁을 함락시키면서 추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9]
말버러는 앤 여왕의 총애를 잃었고 그의 정적들은 1711년 12월 그를 육군 원수직에서 해임하기 위해 책략을 썼다.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프랑스 침공을 막기 위해 삼브르강 연안 도시 몽브쥐에서 스헬데강과 지류인 센스강, 스카르프강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1711년 부샹 포위전에서 중심지 부샹을 연합군에게 빼앗기고 스카르프강과 스헬데강 주변 대부분을 점령당했다. 그러나 연합국 중 하나인 영국에서는 정부 수반 로버트 하틀리와 헨리 신존이 전쟁 종결을 모색하여 프랑스와 비밀 협상을 진행했고, 화의의 일환으로 연합군 총사령관 존 처칠을 해임하고 후임인 오몬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에게는 프랑스군과 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9]
1712년 프린츠 오이겐이 연합군 사령관이 되어 프랑스 방어선 돌파를 위해 스헬데강을 도하하여 드냉 마을을 점령, 보급 기지로 삼았다. 오몬드 공작은 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오이겐을 지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5월 21일 신존으로부터 오몬드에게 전투를 삼가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오자, 영국군은 움직임을 멈추고 오이겐 등에게 불신을 받았다. 화의 협상 중 연합군이 승리하여 기세를 올려 화의를 무산시킬 가능성을 우려한 하틀리와 신존은 오몬드에게 전투 중지를 명령했지만, 영국은 연합군과 대치 중인 빌라르와도 내통하고 있어 연합군은 분열 위기에 직면했다.[9]
6월이 되자 오몬드는 오이겐과 네덜란드로부터 영국군을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추궁받았지만 변명으로 일관하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연합군은 드냉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스헬데강 지류인 스케르트강을 건너 영국군 없이 르 케스누아 포위에 나섰다. 르 케스누아는 드냉 동쪽, 드냉과 몽브쥐 중간 지점에 위치한 도시이자 방어선의 거점 중 하나였다. 7월 4일 르 케스누아를 함락시켰으나, 포위 중 영국과 프랑스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6일 영국군은 협정에 따라 전장에서 철수했다.[9]
화의의 증표로 덩케르크는 19일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양도되었으나, 철수한 군대는 1만 2천 명의 영국군뿐이었고, 나머지는 오이겐 휘하에 남았다. 외젠은 10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빌라르 원수의 120,000명 군세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 스헬데강을 건넜다. 그는 신속하게 드냉 마을로 진군하여 그 곳을 차지하고 유리한 고지를 얻음과 동시에 드냉을 그의 보급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몬드 공작 휘하에서 최근까지 자리하고 있던 영국군의 갑작스러운 퇴각(런던으로부터의 비밀스러운 명령에 의하여)으로 인해 동맹군은 힘든 싸움을 하게 되었다. 오이겐이 이끄는 10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은 빌라르가 이끄는 12만 명의 프랑스군과 결전을 치르려고 르 케스누아에서 방어선을 돌파하여 남쪽 랑드르시를 포위, 프랑스 진격을 계획하며 빌라르를 기다렸다. 또한 고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영국군이 급히 귀국하는 바람에 이는 실행되지 못했다.[9]
3. 전개
전투의 발단은 7월 22일 빌라르가 스케르트강을 도하하여 랑드르시 포위군과 대치하고, 기병을 전진시켜 공격하는 척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7월 23일 밤, 빌라르는 기병을 철수시키고 3만 명의 군대를 스케르트강을 따라 북상시켰다. 이튿날인 24일 아침, 알베마르가 이끄는 1만 명의 네덜란드군이 방어하는 드냉에 도착하여 기병을 주변 교량 확보에 투입했다. 이어서 보병으로 드냉을 공격하여 교량에서 네덜란드군의 증원을 저지하고 드냉을 점령했다. 오이겐은 서둘러 드냉으로 향했으나 구원에 실패했고, 알베마르와 네덜란드군은 프랑스군 포로가 되었다.[10]
빌라르 원수는 본격적으로 외젠의 군대를 향해 총검(bayonet) 공격을 개시했다. 우선 12파운드 포로 포격을 가한 뒤 저격부대를 투입하여 오스트리아군과 네덜란드 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어진 총검 육박전에서 외젠의 군대는 수적 열세와 짙은 포연으로 인한 시야 제한으로 오인 사격까지 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오스트리아군은 분산되었고, 네덜란드 군은 프랑스 기병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공격은 주력 부대의 포병과 잔여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세 번의 공격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프랑스군은 계속 진군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강가로 밀어붙였다.
빌라르는 적의 배치를 조사한 후, 최대한 비밀리에 드냉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기병대 일부는 르 카토를 지나 셀 강을 건너는 다리를 장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5] 저녁 동안, 프랑스 분견대는 아스프레의 제분소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여 강을 막았다. 그날 밤, 프랑스 보병은 랑드르시에 있는 외젠의 군대를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 위협에 대응하여 외젠은 랑드레시를 증원했고, 이로 인해 드냉을 방어하던 알베마르 백작이 지휘하는 연합군 우익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빌라르는 군대의 진격 방향을 바꿔 세 개의 기둥으로 셀 강의 은폐물 뒤에서 드냉을 향하게 했다. 오전 5시에 빌라르와 그의 주요 부관들은 아브네르르섹에서 공격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주변 저지대를 관찰하기 위한 전망대로 그곳의 풍차를 선택했다.[6] 2만 4천 명의 프랑스 보병이 드냉의 1만 500명의 네덜란드 수비대를 공격할 것이었다. 오전 7시, 프랑스 보병들은 뇌빌쉬레스코에 도착하여 즉시 스헬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8시, 연합군은 그 지역에 있는 대규모 프랑스 군대의 존재를 발견하고 놀랐다. 알베마르 백작은 외젠에게 경고했지만, 외젠은 당시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오후 1시까지 공격은 드냉의 울타리를 공격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공병들은 강한 사격 속에서 보병을 이끌고 총검으로 드냉을 점령했다. 많은 수비병들이 사망했고, 나머지 네덜란드 보병들은 제분소 다리를 건너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동안 다리가 무너져 수백 명의 연합군이 익사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외젠은 알베마르를 돕기 위해 프루비에서 스헬트 강을 건너려고 했다. 팅리 공의 지휘하에 프랑스 연대는 반복되는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프루비의 다리를 지켰다. 마침내 날이 저물 무렵 프랑스군은 다리를 파괴하여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 결과 외젠의 군대는 스헬트 강에 의해 좌익이 봉쇄되었고, 연합군은 드냉을 탈환하기 위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알베마르와 그의 참모진은 약 4,100명의 병력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7]
전투 이후에도 빌라르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7월 31일, 드냉 북쪽 보급 기지 마르시엔을 함락시켜 물자와 병력을 확보했다. 보급로가 끊긴 오이겐은 8월, 랑드르시 포위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9월부터 10월까지 빌라르는 두에, 르 케스누아, 부샹을 탈환하고 스헬데강과 스카르프강 유역을 확보했다. 이로써 프랑스군은 몇 달 만에 지난 수년간 잃었던 도시들을 회복하게 되었다.
3. 1. 연합군의 분열과 프랑스의 기회 포착
1712년 프린츠 오이겐이 연합군 사령관이 되어 프랑스 방어선 돌파를 위해 스헬데강을 도하하여 드냉 마을을 점령하고 보급 기지로 삼았다. 오몬드는 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오이겐을 지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5월 21일 헨리 신존으로부터 전투를 삼가라는 명령을 받은 오몬드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는 오이겐 등에게 불신을 샀다.[9] 로버트 하틀리와 헨리 신존은 화의 협상 중 연합군이 승리하여 기세를 올려 화의를 무산시킬 가능성을 우려하여 오몬드에게 전투 중지를 명령했지만, 영국은 연합군과 대치 중인 빌라르와도 내통하고 있어 연합군은 분열 위기에 직면했다.
6월이 되자 오몬드는 오이겐과 네덜란드로부터 영국군을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추궁받았지만 변명으로 일관하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연합군은 드냉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스헬데강 지류인 스케르트강을 건너 영국군 없이 르 케스누아 포위에 나섰다. 르 케스누아는 드냉 동쪽, 드냉과 몽브쥐 중간 지점에 위치한 도시이자 방어선의 거점 중 하나였다. 7월 4일 르 케스누아를 함락시켰으나, 포위 중 영국과 프랑스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6일 영국군은 협정에 따라 전장에서 철수했다.[9]
19일 화의의 증표로 덩케르크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양도되었으나, 철수한 군대는 1만 2천 명의 영국군뿐이었고, 나머지는 오이겐 휘하에 남았다. 오이겐이 이끄는 10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은 빌라르가 이끄는 12만 명의 프랑스군과 결전을 치르려고 르 케스누아에서 방어선을 돌파하여 남쪽 랑드르시를 포위, 프랑스 진격을 계획하며 빌라르를 기다렸다. 또한 고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영국군이 급히 귀국하는 바람에 이는 실행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카토-캉브레지 남동쪽 마장지앙에 주둔하고 있었다. 빌라르는 연합군이 동쪽으로 너무 돌출하여 많은 병력을 분산시키고 있는 점과, 보급로인 드냉과 랑드르시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에 착안하여 드냉을 기습하기로 하고, 우선 오이겐을 견제하는 데 나섰다.
3. 2. 빌라르의 기만 전술과 드냉 기습
외젠은 10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빌라르 원수의 120,000명 군대에 맞서기 위해 스헬트 강을 건넜다. 외젠은 신속하게 드냉 마을을 점령하고 유리한 고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그곳을 보급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몬드 공작 휘하 영국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런던의 비밀 명령에 의한)로 인해 동맹군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4]
1712년 5월, 빌라르는 공세를 준비했다. 프랑스는 아라스에서 캉브레까지 북부 국경에 20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연합군 북부군은 스카르프 강을 따라 두에와 마르시앵 사이에 위치하여 드냉과 랑드르시를 점령했다.
빌라르는 적의 배치를 조사한 후, 최대한 비밀리에 드냉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기병대 일부는 르 카토를 지나 셀 강을 건너는 다리를 장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5] 저녁 동안, 프랑스 분견대는 아스프레의 제분소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여 강을 막았다. 그날 밤, 프랑스 보병은 랑드르시에 있는 외젠의 군대를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 위협에 대응하여 외젠은 랑드르시를 증원했고, 이로 인해 드냉을 방어하던 올버말 백작이 지휘하는 연합군 우익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빌라르는 군대의 진격 방향을 바꿔 세 개의 기둥으로 셀 강의 은폐물 뒤에서 드냉을 향하게 했다. 오전 5시에 빌라르와 그의 주요 부관들은 아브네르르섹에서 공격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주변 저지대를 관찰하기 위한 전망대로 그곳의 풍차를 선택했다.[6] 2만 4천 명의 프랑스 보병이 드냉의 1만 500명의 네덜란드 수비대를 공격할 것이었다. 오전 7시, 프랑스 보병들은 뇌빌쉬레스코에 도착하여 즉시 스헬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8시, 연합군은 그 지역에 있는 대규모 프랑스 군대의 존재를 발견하고 놀랐다. 올버말 백작은 외젠에게 경고했지만, 외젠은 당시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오후 1시까지 공격은 드냉의 울타리를 공격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공병들은 강한 사격 속에서 보병을 이끌고 총검으로 드냉을 점령했다. 많은 수비병들이 사망했고, 나머지 네덜란드 보병들은 제분소 다리를 건너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동안 다리가 무너져 수백 명의 연합군이 익사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외젠은 올버말을 돕기 위해 프루비에서 스헬트 강을 건너려고 했다. 팅리 공의 지휘하에 프랑스 연대는 반복되는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프루비의 다리를 지켰다. 마침내 날이 저물 무렵 프랑스군은 다리를 파괴하여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 결과 외젠의 군대는 스헬트 강에 의해 좌익이 봉쇄되었고, 연합군은 드냉을 탈환하기 위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올버말과 그의 참모진은 약 4,100명의 병력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7]
빌라르는 7월 22일 스케르트강을 도하하여 랑드르시 포위군과 대치하고, 기병을 전진시켜 공격하는 척했다. 다음 7월 23일 밤 기병을 철수시키고 3만 명의 군대를 스케르트강을 따라 북상시켜 다음 날 24일 아침 알베마르가 이끄는 1만 명의 네덜란드군이 방어하는 두나에 도착하여 기병을 주변 교량 확보에 투입했다. 그리고 보병으로 두나를 공격, 교량에서 네덜란드군의 증원을 저지하고 두나를 점령했다. 오이겐은 서둘러 두나로 향했으나 구원에 실패했고, 알베마르와 네덜란드군은 프랑스군 포로가 되었다.[10]
3. 3. 드냉 전투와 연합군의 패배
빌라르 원수는 외젠 공의 군대에 대해 총검(bayonet)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선 12 파운드 포로 포격을 가한 뒤 저격부대를 투입하여 오스트리아군과 네덜란드 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어진 총검 육박전에서 외젠 공의 군대는 수적 열세와 짙은 포연으로 인한 시야 제한으로 오인 사격까지 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오스트리아군은 분산되었고, 네덜란드 군은 프랑스 기병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공격은 주력 부대의 포병과 잔여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세 번의 공격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프랑스군은 계속 진군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강가로 밀어붙였다.
빌라르는 적의 배치를 조사한 후, 비밀리에 드냉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르 카토를 지나 스헬트 강과 합류하는 셀 강을 건너는 다리를 장악했다.[5] 저녁 동안, 프랑스 분견대는 아스프레의 제분소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여 강을 막았다. 밤에는 프랑스 보병이 랑드레시에 있는 외젠 공의 군대를 향해 행군하여, 랑드레시를 증원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드냉을 방어하던 올버말 백작 휘하의 연합군 우익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새벽에 빌라르는 군대의 진격 방향을 바꿔 세 개의 기둥으로 셀 강의 은폐물 뒤에서 드냉을 향하게 했다. 오전 5시, 빌라르와 부관들은 아브네르르섹에서 공격 계획을 세웠고, 주변 저지대를 관찰하기 위해 풍차를 전망대로 선택했다.[6] 2만 4천 명의 프랑스 보병이 드냉의 1만 500명의 네덜란드 수비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오전 7시, 프랑스 보병들은 뇌빌쉬레스코에 도착하여 스헬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8시, 연합군은 프랑스 군대의 존재를 발견하고 놀랐다. 올버말 백작은 외젠 공에게 경고했지만, 당시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오후 1시, 프랑스군은 드냉을 총검으로 점령했다. 많은 네덜란드 수비병들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제분소 다리를 건너 도망치려다 다리가 무너져 수백 명이 익사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외젠 공은 프루비에서 스헬트 강을 건너 올버말을 도우려 했다. 팅리 공 휘하의 프랑스 연대는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막고 프루비의 다리를 지켰다. 저물 무렵 프랑스군은 다리를 파괴하여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사보이 공의 군대는 스헬트 강에 의해 좌익이 봉쇄되었고, 연합군은 드냉을 탈환하기 위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올버말과 참모진은 약 4,100명의 병력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연합군은 6,500~8,000명의 손실을 입었고, 대부분 네덜란드군이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0~2,100명이었다.[7]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삼브르강 연안 도시 몽브쥐에서 스헬데강과 지류인 센스강, 스카르프강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1711년 부샹 포위전에서 중심지 부샹을 연합군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로버트 하틀리와 헨리 신존이 프랑스와 비밀 협상을 진행했고, 말보로 공작존 처칠을 해임하고 후임인 오몬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에게는 프랑스군과 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1712년 프린츠 오이겐이 연합군 사령관이 되어 프랑스 방어선 돌파를 위해 스헬데강을 도하하여 두나(Dena) 마을을 점령, 보급 기지로 삼았다. 5월 21일 신존으로부터 전투를 삼가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영국군은 움직임을 멈추고 오이겐 등에게 불신을 받았다.
6월이 되자 오몬드는 오이겐과 네덜란드로부터 영국군을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추궁받았지만 변명으로 일관했다. 연합군은 영국군 없이 르 케스누아 포위에 나섰고, 7월 4일 르 케스누아를 함락시켰으나, 포위 중 영국과 프랑스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6일 영국군은 전장에서 철수했다.[9]
덩케르크는 19일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양도되었으나, 철수한 군대는 1만 2천 명의 영국군뿐이었고, 나머지는 오이겐 휘하에 남았다. 오이겐이 이끄는 10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은 빌라르가 이끄는 12만 명의 프랑스군과 결전을 치르려고 르 케스누아에서 방어선을 돌파하여 남쪽 랑드르시를 포위, 프랑스 진격을 계획하며 빌라르를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카토-캉브레지 남동쪽 마장지앙에 주둔하고 있었다. 빌라르는 연합군이 동쪽으로 너무 돌출하여 병력을 분산시키고 있고, 보급로인 두나와 랑드르시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에 착안하여 두나를 기습하기로 했다.
22일 빌라르는 스케르트강을 도하하여 랑드르시 포위군과 대치하고, 기병을 전진시켜 공격하는 척했다. 다음 23일 밤 기병을 철수시키고 3만 명의 군대를 스케르트강을 따라 북상시켜 다음 날 24일 아침 알베마르가 이끄는 1만 명의 네덜란드군이 방어하는 두나에 도착하여 기병을 주변 교량 확보에 투입했다. 그리고 보병으로 두나를 공격, 교량에서 네덜란드군의 증원을 저지하고 두나를 점령했다. 오이겐은 서둘러 두나로 향했으나 구원에 실패했고, 알베마르와 네덜란드군은 프랑스군 포로가 되었다.[10]
전후에도 빌라르의 기세는 멈추지 않아, 31일 두나 북쪽 보급 기지 마르시엔도 함락시켜 물자와 병력을 확보했고, 보급로가 끊긴 오이겐은 8월 랑드르시 포위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9월부터 10월까지 빌라르는 두에, 르 케스누아, 부샹을 탈환하고 스헬데강과 스카르프강 유역을 확보하며, 몇 달 만에 프랑스군은 지난 수년간 잃었던 도시들을 회복하게 되었다.
4. 결과
빌라르는 22일 스케르트강을 도하하여 랑드르시 포위군과 대치하고, 기병을 전진시켜 공격하는 척했다. 다음 23일 밤 기병을 철수시키고 3만 명의 군대를 스케르트강을 따라 북상시켜 다음 날 24일 아침 알베마르가 이끄는 1만 명의 네덜란드군이 방어하는 드냉에 도착, 기병으로 주변 교량을 확보하고 보병으로 드냉을 공격하여 네덜란드군의 증원을 저지하며 함락시켰다. 오이겐은 서둘러 드냉으로 향했으나 구원에 실패했고, 알베마르와 네덜란드군은 포로가 되었다.[10]
4. 1. 전후 상황 및 영향
드냉 전투는 동맹군에게 심각한 군사적, 정치적 패배였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전쟁 지속 의지를 잃었고, 보급 거점인 드냉을 상실해 동맹군의 보급도 어려웠다. 빌라르는 별동대를 파견해 지속적으로 동맹군의 보급선을 위협했고, 위기에 빠졌던 프랑스의 위치를 다시 정상으로 회복시켰다. 동맹군은 사실상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8]드냉 전투는 당시에는 결정적인 승리로 인식되지 않았다. 외젠 왕자의 군대 대부분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냉 함락으로 연합군의 전선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후 몇 달 동안 프랑스는 이전 몇 년 동안 잃었던 지역의 도시들을 대부분 회복했다.[8]
빌라르는 거의 즉시 주요 연합군 보급 기지인 마르시앵을 포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100문의 대포와 최대 9,000명의 포로, 그리고 많은 양의 군수품과 장비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갔다. 이로 인해 외젠의 보급선이 위협받자 오스트리아군은 랑드르시 포위 공격을 해제하고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빌라르는 단기간의 포위 공격 후 두에(7월 31일)와 르 케누아(10월 8일)를 점령하며 응수했다. 르 케누아의 함락으로만 연합군은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음으로 빌라르는 말보로 공작의 마지막 승리였던 부샹을 공격하여 10월 19일에 도시를 함락시키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루이 14세의 전쟁 전 영토를 효과적으로 회복했다. 이는 파리를 보호하는 중요한 이중 방어선인 pré carré|프레 카레프랑스어를 재확립하는 효과를 가져와, 루이 14세를 프랑스 수도로의 행군을 통해 항복시키려는 연합군의 희망을 완전히 꺾었다.[8]
승리 소식이 베르사유에 전해지자 궁정은 기쁨에 휩싸였다. 루이 14세는 60년 통치 기간 중 처음으로 신하들에게 지지에 감사했다고 한다.[8]
프랑스의 북부 영토 손실이 만회되고 루이 14세의 왕국이 안전해짐에 따라 10년 동안 지속된 플랑드르 전쟁은 끝났다. 다른 전장에서는 연합군의 전쟁 목표를 달성할 만한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알프스에서는 베릭 원수가 3만 5천 명의 병력으로 5만 명의 오스트리아군과 사보이아군을 안전하게 막았고, 카탈루냐에서는 스타르헨베르크 휘하의 연합군이 브리우에가 전투와 빌라비시오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흔들리고 있었다. 포르투갈 국경에서는 남은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바이 백작 휘하의 스페인 군대 앞에 후퇴하며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에 대한 마지막 심각한 위협을 제거했다. 라인 지방에서는 뷔르템베르크 공작이 프랑스군의 진영을 포격했지만, 프랑스군은 기병 기습으로 반격했고 양측은 겨울 숙영지에 주둔했다.[8]
이러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은 영국과 함께 루이 14세와 별도의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위트레흐트 조약), 외젠은 제국군을 독일로 돌려 라인 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다음 시즌에 빌라르와 외젠이 새로운 전장에서 작전을 재개했을 때, 프랑스군은 다시 승리하여 프라이부르크와 란다우의 요새를 점령하고 황제로 하여금 평화를 청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평화 협정을 협상할 권한을 받아 결국 라슈타트 조약의 조건을 작성하여 마지막 전투를 끝냈다.[8] 외젠의 명성은 1717년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터키군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면서 회복되었다.[8]
빌라르의 공세는 계속되어, 31일 드냉 북쪽 보급 기지 마르시앵을 함락시켜 물자와 병력을 확보했고, 보급로가 끊긴 오이겐은 8월 랑드르시 포위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9월부터 10월까지 빌라르는 두에, 르 케누아, 부샹을 탈환하고 스헬데강과 스카르프강 유역을 확보하며, 몇 달 만에 프랑스군은 지난 수년간 잃었던 도시들을 회복했다. 빌라르의 활약으로 다른 연합국과의 화의 협상이 진행되어 다음 해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1714년 라슈타트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11]
참조
[1]
서적
Journal of an Officer in the Commissariat Department of the Army: Comprising a Narrative of the Campaigns Under His Grace the Duke of Wellington, in Portugal, Spain, France, and the Netherlands, in the Years 1811, 1812, 1813, 1814, & 1815: And a Short Account of the Army of Occupation in France, During the Years 1816, 1817, & 1818
https://archive.org/[...]
author
2013-04-23
[2]
서적
Vauban Under Siege: Engineering Efficiency and Martial Vigor in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https://books.google[...]
Brill
2013-04-23
[3]
서적
Marlborough as Military Commander
[4]
서적
[5]
웹사이트
Selle (affluent de l'Escaut)
https://fr.wikipedia[...]
[6]
문서
still standing today, with in one of its arches, a stone dated 1690.
[7]
서적
Marlborough as Military Commander
[8]
서적
[9]
서적
ヴォルテール、P132 - P133、友清、P317 - P333、P337 - P348、マッケイ、P181 - P182。
[10]
서적
ヴォルテール、P133 - P136、友清、P348 - P350、マッケイ、P182 - P183。
[11]
서적
ヴォルテール、P136 - P137、友清、P350 - P352、マッケイ、P183 - P185。
[12]
서적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13]
문서
Chandler puts the figure at 24,000
[14]
서적
Marlborough as Military Comm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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