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싱 클루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라싱 클루브는 190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창단된 아르헨티나의 축구 클럽이다. 1910년 1부 리그로 승격한 후 1913년부터 1919년까지 7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라 아카데미아'라는 별칭을 얻었다. 196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우승하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1988년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도 우승했다. 2001년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부활했고, 2014년, 2018-19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4번째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으며, 홈 구장은 '엘 실린드로'로 불리는 에스타디오 프레시덴테 페론이다. 최대 라이벌은 CA 인데펜디엔테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라싱 클루브 - 에스타디오 프레시덴테 후안 도밍고 페론
에스타디오 프레시덴테 후안 도밍고 페론은 아르헨티나 축구 클럽 라싱 클럽의 홈 구장이며, 후안 페론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1950년에 완공되었다. - 라싱 클루브 - 클라시코 데 아베야네다
클라시코 데 아베야네다는 아르헨티나 아베야네다를 연고로 하는 CA 인데펜디엔테와 라싱 클루브 간의 더비 경기로, 20세기 초 시작되어 아르헨티나 축구에서 가장 치열하고 중요한 더비 중 하나이며, 두 팀의 홈구장이 가까워 '가장 가까운 더비'라고도 불린다.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구단 - CA 우라칸
클럽 아틀레티코 우라칸은 190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창단되어 항공 개척자의 기구에서 영감을 얻은 이름과 유니폼을 사용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활동, 아마추어 시대 황금기와 '메노티 혁명' 시대를 거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재정난 등으로 부침을 겪었고, 코파 아르헨티나 우승와 프리메라 디비시온 승격으로 부활했으며 CA 산 로렌소 데 알마그로와 중요한 라이벌 관계를 가진 축구 클럽이다.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구단 - CA 리버 플레이트
190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창단된 아르헨티나 축구 클럽 CA 리버 플레이트는 "로스 밀리오나리오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최다 우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라 마키나" 시대, 2부 리그 강등 후 부활, 보카 주니어스와의 수페르클라시코 등으로 유명하고 축구 외 다양한 종목 팀을 운영한다. - 1903년 설립된 축구단 - 클루브 과라니
클루브 과라니는 1903년에 창단된 파라과이의 축구 클럽으로, 파라과이 리그에서 11번 우승했으며 올림피아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 1903년 설립된 축구단 - US 크레모네세
US 크레모네세는 1903년에 창단된 이탈리아 축구 클럽으로, 세리에 A와 B, C1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92-93 시즌 앵글로-이탈리안 컵에서 우승했으며, 2022-23 시즌에는 세리에 A에 참가했었다.
라싱 클루브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클럽 이름 | 라싱 클루브 |
원어 명칭 | Racing Club |
별칭 | La Academia (学院), El Primer Grande (最初の偉大なチーム) |
창단 | 1903년 |
홈구장 | 프레시덴테 페론 |
수용 인원 | 55,000명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 | |
일반 정보 | |
전체 이름 | Racing Club |
별명 | La Academia (아카데미), El Primer Grande (최초의 위대한 팀) |
창립일 | 1903년 3월 25일 (Racing Football Club) |
경기장 | 엘 실린드로 |
수용인원 | 55,000 |
회장 | 디에고 밀리토 |
감독 | 구스타보 코스타스 |
리그 정보 | |
리그 | 프리메라 디비시온 |
시즌 | 2024 |
순위 | 3위 |
유니폼 정보 | |
홈 | 상의: 하늘색과 흰색 줄무늬 하의: 검정색 양말: 검정색 |
원정 | 상의: 검정색 하의: 하늘색 양말: 하늘색 |
써드 | 상의: 하늘색 하의: 검정색 양말: 하얀색 |
관련 정보 | |
소재지 | 아베야네다 |
2. 역사
라싱 클루브의 역사는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레이트 서던 철도 직원들이 축구를 하면서 시작되었다.[11] 1898년 "아르헨티노스 엑셀시오르 클럽"이 창단되었지만 3년 만에 해체되었고, 1901년 "수드 아메리카 푸트볼 클럽 데 바라카스 알 수르" 등이 설립되었다. 1903년 3월 25일, "콜로라도스 우니도스"와 다른 클럽이 합병하여 새로운 클럽이 탄생했다.[11]
클럽 이름은 프랑스계 창립 파트너가 소유한 프랑스 자동차 경주 잡지에서 따온 "라싱 클럽"으로 결정되었다.[12] 라싱은 크리오요인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축구팀이었다. 초기 유니폼은 흰색이었으나, 여러 번의 변경을 거쳐 1910년 5월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현재의 하늘색과 흰색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채택했다.[11]
1905년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에 가입하여 하위 리그에서 뛰기 시작했고,[11] 1910년 보카 주니어스와의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승리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13] 1913년 첫 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1919년까지 7년 연속 리그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1921년과 1925년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8][21] 이 시기 '라 아카데미아(La Academia)'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알베르토 오아코 등 뛰어난 선수들이 활약했다.[17] 1914년, 1917년, 1918년에는 이바구렌 컵에서 우승했다.[16]
1930년대 프로화 시대에 라싱은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1932년 베카르 바렐라 컵, 1933년 코파 데 콤페텐시아 (LAF), 1945년 코파 데 콤페텐시아 브리타니카에서 우승했다.[20] 1949년 프로화 이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50년 에스타디오 후안 도밍고 페론을 완공했다. 1951년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하며 프로화 이후 첫 3연패 팀이 되었다.
1958년, 1961년, 1966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6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에는 부진했고, 1983년 프리메라 B로 강등되었다.[28] 1985년 1부 리그로 복귀했다.[29][30]
2010년대 이후 라싱은 2014년, 2018-19 시즌 리그 우승, 2024년 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 2022년 트로페오 데 캄페오네스와 수페르코파 인터나시오날에서 우승하며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2. 1. 창단과 초기 (1903년 ~ 1910년)

클럽의 기원은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레이트 서던 철도 직원들이 회사 소유 구장에서 축구를 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요청이 승인된 후, 그들은 주로 영국 이민자들로 구성된 팀들을 상대로 첫 경기를 시작했다.[11]
1898년 "아르헨티노스 엑셀시오르 클럽"이 창단되었지만 3년 만에 해체되었고, 1901년 "수드 아메리카 푸트볼 클럽 데 바라카스 알 수르", "아메리칸 클럽", "아르헨티노스 우니도스"라는 세 개의 새로운 클럽이 설립되었다. 이 중 바라카스 알 수르가 가장 주목할 만했다. 이후 이 클럽은 곧 해체되었고, 1902년 3월 16일 "콜로라도스 우니도스"가 설립되었다. 1903년 3월 25일, 두 클럽은 합병을 목적으로 메르카도 데 아시엔다에서 만났다.[11]
클럽 이름은 프랑스계 창립 파트너인 헤르만 비다이악이 소유한 프랑스 자동차 경주 잡지에서 따왔다. 이 제안은 호평을 받았고, "라싱 클럽"이라는 이름이 즉시 승인되었다.[12] 라싱은 크리오요인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축구팀이었다.
처음 착용한 유니폼은 흰색이었지만, 1904년 7월 25일 노란색과 검은색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유니폼은 우루과이 클럽 CURCC와 유사하여 일주일 만에 사라졌고, 루이스 카르보네 회장이 제안한 디자인으로 대체되었다. 새 유니폼은 네 개의 사각형(하늘색 두 개, 분홍색 두 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디자인은 1908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후 세 개의 가로 줄무늬(파란색 두 개와 흰색 하나) 디자인으로 변경되었다. 1910년, 5월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하늘색과 흰색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채택했다.[11]
1905년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에 가입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시스템의 하위 리그에서 뛰기 시작했다.[11] 1906년에는 세군다 디비시온에 등록했다.[13]
1909년, 프리메라 디비시온 승격 플레이오프에 참가했지만, 히메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게 패했다. 1910년, 4,000명의 관중 앞에서 보카 주니어스와의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승리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 승격을 이끈 선발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선수 |
---|
페르난데스 |
세미나리오, 앨런 |
위네, 후안 오야코, 앙헬 베툴라르 |
오야르사발, A. 오야코, 피르포, 프레스, 후안 페리네티 |
프레스와 A. 오야코가 득점했다.[13] 이 승격으로 클럽의 인기가 높아졌다.[11]
2. 2. 라 아카데미아 시대 (1911년 ~ 1925년)
1911년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데뷔하여 4위로 시즌을 마쳤다.[14] 1913년, 라싱은 산 이시드로와 리버 플레이트를 플레이오프에서 꺾고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5] 이후 1914년,[16] 1915년,[17] 1916년, 1917년,[16] 1918년, 그리고 1919년 아소시아시온 아마추어 데 풋볼 리그에서까지 연속 우승하며 7년 연속 리그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18] 1921년과 1925년에도 추가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1]이 시기 라싱은 '라 아카데미아(La Academia)'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알베르토 오아코, 알베르토 마르코베키오, 나탈리오 페리네티 등 뛰어난 선수들이 활약했다. 특히 1915년에는 24경기에서 95골을 넣고 5골만 허용하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7]
1914년에는 로사리오 센트럴을 꺾고 이바구렌 컵에서 우승했고,[16] 1917년과 1918년에도 이바구렌 컵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16]
2. 3. 프로화 시대와 국제 무대 (1930년대 ~ 1960년대)
라싱은 아르헨티나 최초의 프로 리그인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1932년 베카르 바렐라 컵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3-0으로 꺾고 우승했으며, 1년 후 코파 데 콤페텐시아 (LAF)에서 산 로렌소 데 알마그로를 4-0으로 대파하고 우승했다. 그러나 리그에서는 1932년, 1933년, 1936년에 3위를 차지한 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에바리스토 바레라는 1934년에 34골, 1936년에 32골로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19] 1945년에는 코파 데 콤페텐시아 브리타니카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4-1로 꺾고 우승했다.[20]
1949년, 라싱은 프로화 이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자밀 시메스가 득점왕에 올랐다. 1950년에는 에스타디오 후안 도밍고 페론이 완공되었고, 벨레스 사르스피엘드와의 개장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했다. 리그에서는 2연패를 달성했으며, 시메스가 다시 2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1951년에는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반피엘드를 꺾고 3연패를 달성했다. 기예르모 스타빌레 감독이 이끈 팀은 프로화 이후 처음으로 3연패를 달성한 팀이 되었다.
1952년 시즌에는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했지만, 리버 플레이트에 이어 2위로 4연패를 놓쳤다. 1953년 시즌에도 좋은 결과를 내며 3위를 기록했지만, 1954년 시즌에는 10위로 마감했다. 1958년에는 호세 델라 토레 감독 아래에서 13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59년 시즌에는 2위를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노르베르토 멘데스, 루벤 브라보, 시메스, 마리오 보제, 알베르토 라스텔리, 페드로 데라차, 에스라 수에도, 마누엘 블랑코, 에르네스토 구티에레스, 페드로 만프레디니, 아르날도 바라, 후안 호세 피스투, 루벤 엑토르 소사, 오레스테스 코르바타 등 많은 명선수들이 라싱에 재적하며 성공에 기여했다.
1960년 시즌에는 리그 최다 득점인 72득점을 기록하며 4위를 차지했다. 이 시즌의 CA 로사리오 센트럴전에서는 11-3으로 승리하여 리그 최대 득점차 승리 기록을 경신했다.[64] 1961년 시즌에도 리그 최다 득점인 68득점을 기록하고 승점 47점을 획득하여 14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후안 호세 피스루티 감독이 이끈 1966년에는 리그 최다 득점 (70점)과 최소 실점 (24점)을 기록하고 승점 61점을 획득하여 5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39경기 연속 무패의 리그 기록을 세웠다. 메트로폴리타노 1967에서는 결승에 진출했지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에 0-3으로 패했다. 같은 해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결승에서 나시오날 (우루과이)을 2-1로 꺾고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13골을 기록한 노르베르토 라포가 득점왕에 올랐다. 같은 해에는 인터콘티넨탈컵에도 출전하여 UEFA 챔피언스컵 우승팀 셀틱 FC (스코틀랜드)와 대결했다. 글래스고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0-1로 패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2-1로 승리했다. 1승 1패가 되어 대회 규정에 따라 몬테비데오에서 플레이오프가 열렸고, 후안 카를로스 카르데나스의 득점으로 1-0으로 승리했다.
당시 선수로는 골키퍼 아구스틴 마리오 세하스, 소사, 로베르토 페르푸모, 알피오 바실레, 라포, 루벤 오스발도 디아스, 넬손 차바이, 하이메 마르티놀리, 카르데나스, 후안 카를로스 루리, 후안 호세 로드리게스, 움베르토 마스키오, 페데리코 사치, 콜바타 등이 있었다.
2. 4. 시련과 부활 (1970년대 ~ 2000년대)
1970년대 동안 라싱은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1972년 메트로폴리타노에서는 34경기 43점을 기록하며 산 로렌소에 이어 2위를 차지했는데, 이 해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우발도 피욜이 데뷔한 해였다. 피욜은 한 시즌에 6개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는 기록을 세웠다.[27]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라싱은 부진한 시즌을 보냈고, 1976년에는 강등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당시 라싱은 최하위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27]1983년 라싱은 지난 두 시즌의 평균 승점으로 결정되는 종합 순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며 프리메라 B로 강등되었다.[28] 2부 리그에서의 첫 해, 라싱은 데포르티보 에스파뇰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데포르티보 모론과 라누스를 꺾었지만, 결승전에서 히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LP)에 패했다.[28]
1년 후, 2부 리그에서 두 시즌을 보낸 라싱은 1985년 12월 아틀란타를 상대로 한 두 번째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1986–87 시즌에 1부 리그로 복귀했다. 라싱은 1차전에서 4-0으로 승리했고, 2차전은 1-1로 마무리되어 합계 5-1로 승리했다.[29][30]
2. 5. 현재 (2010년대 ~ 현재)
라싱 클루브는 2014년과 2018-19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우승하며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2024년에는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우승하며, 마지막 국제 대회 우승 이후 36년 만에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디에고 밀리토, 리산드로 로페스 등 스타 선수들이 활약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22년에는 트로페오 데 캄페오네스와 수페르코파 인터나시오날에서 우승했다.3. 경기장
라싱 클루브는 에스타디오 후안 도밍고 페론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 경기장은 '''라싱 클루브'''의 서포터였던 후안 도밍고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원통(영어: cylinder, 스페인어: cilindro)과 같은 외관 때문에 일반적으로 엘 실린드로 데 아베야네다(El Cilindro de Avellaned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엘 실린드로는 1950년에 완공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처음으로 전체를 덮는 지붕이 있는 경기장이었다. 1997년에 개축되었으며[68], 한때 120,000명을 수용했지만 64,161명 수용으로 줄었다.[69] 현재 관중 수용 인원의 한도는 53,000여 명까지 줄었지만, 엘 모누멘탈에 이어 아르헨티나에서 두 번째로 큰 경기장이다. 엘 실린드로는 라이벌 CA 인데펜디엔테의 홈 경기장인 에스타디오 리베르타도레스 데 아메리카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져 있다.[60]
4. 라이벌
라싱 클루브의 최대 라이벌은 같은 아베야네다를 연고지로 하는 CA 인데펜디엔테이다. 두 팀의 홈구장은 불과 20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양 팀의 경기는 클라시코 데 아베야네다라고 불리며, 아르헨티나에서 보카 주니어스와 CA 리버 플레이트의 수페르클라시코 다음으로 많은 관심을 받는, 아르헨티나에서 두 번째로 권위 있는 더비 매치이다.[67]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상대 전적은 인데펜디엔테가 우세하다.
보카 주니어스, CA 리버 플레이트, CA 산 로렌소 데 알마그로와의 빅 5 간의 대결도 클라시코라고 불리며 많은 관심을 받는다.
2011년에는 CA 벨레스 사르스피엘드가 프로화 이후 우승 횟수에서 라싱 클루브를 추월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벨레스 선수들이 언론을 통해 "빅 클럽이라고 불리는 라싱 클루브보다 우리들이 더 위다"라는 도발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벨레스 사르스피엘드와의 대결도 이전보다 훨씬 열기를 띠게 되었다.
5. 우승 기록
라싱 클루브는 국내 및 국제 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 라싱은 1988년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브라질의 크루제이루를 꺾고 우승하며 세 번째 국제 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31] 같은 해, 코스타리카의 에레디아노를 3-0으로 꺾고 비공식 대회인 수페르코파 인터아메리카나에서도 우승했다.[31]
1990년대에는 리그 우승에 근접하기도 했다. 1993 아페르투라에서는 3위를 기록했고, 1995 아페르투라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4년, 디에고 코카 감독과 주장 디에고 밀리토의 활약으로 13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5. 1. 국내 대회
대회 | 우승 횟수 | 우승 연도 |
---|---|---|
프리메라 디비시온 | 18 | 1913, 1914, 1915, 1916, 1917, 1918, 1919, 1921, 1925, 1949, 1950, 1951, 1958, 1961, 1966, 2001 아페르투라, 2014, 2018-19 |
코파 닥터 카를로스 이바구렌 | 5 | 1913, 1914, 1916, 1917, 1918[58] |
코파 데 오노르 | 4 | 1912, 1913, 1915, 1917[58] |
코파 베카르 바렐라 | 1 | 1932[58] |
코파 데 콤페텐시아 (LAF) | 1 | 1933[58] |
코파 데 콤페텐시아 브리타니카 | 1 | 1945[58] |
트로페오 데 캄페오네스 (SAF) | 1 | 2019 |
트로페오 데 캄페오네스 (LPF) | 1 | 2022 |
수페르코파 인터나시오날 | 1 | 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