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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프레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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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울 프레비시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경제학자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옹호하다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보호 무역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프레비시는 경제학의 이론과 무역의 실제 관행을 분리하여 세계 경제를 중심부(선진국)와 주변부(개발도상국)로 나누는 '중심과 주변부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UNCTAD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며 개발도상국의 무역 확대를 주장했으나, UNCTAD의 관료화에 실망하여 사임했다. 그의 사상은 구조주의 경제학, 종속 이론 등 개발 경제학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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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프레비시
기본 정보
이름라울 프레비쉬
출생1901년 4월 17일
출생지산미겔데투쿠만, 아르헨티나
사망1986년 4월 29일
사망지산티아고 데 칠레, 칠레
학문 분야개발경제학
모교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기여싱어-프레비쉬 테제
학파
학파구조학파 경제학
참고 문헌

2. 초기 생애 및 학문적 배경

라울 프레비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경제학부에서 공부하고 교수로 재직했다.[1] 그는 젊은 시절 자유 무역을 옹호했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며 보호 무역으로 관점을 바꾸었다.[1] 이는 186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아르헨티나가 영국에 쇠고기와 밀을 대량 수출하며 경제 성장을 이룬 경험에 기반했지만,[1] 1930년대 대공황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로 아르헨티나 경제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변화하게 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라울 프레비시는 1901년 아르헨티나 투쿠만에서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경제학부에서 공부했으며, 훗날 같은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1] 그의 형 알베르토 프레비시는 유명한 건축가였다.[1]

2. 2. 학문적 배경

그는 아르헨티나 투쿠만에서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경제학부에서 공부했으며, 후에 교수로 재직했다.[1] 젊은 시절 그의 저술은 자유 무역을 옹호하였으나, 1930년대 대공황의 결과로 보호 무역으로 전환했다.[1] 186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아르헨티나가 영국에 대량의 쇠고기와 밀을 수출하면서 기록적인 경제 성장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이전 신념은 뒷받침되었다.[1] 그러나 1930년대에 대공황과 쇠고기와 밀을 구매하기보다는 수출하는 미국의 경제적 지배력이 커지면서 아르헨티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1]

3. 중심과 주변부 이론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어려움은 라울 프레비시가 데이비드 리카도비교 우위 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이는 1940년대 후반 새로운 경제 사상 학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 프레비시는 경제학의 순수 이론적인 측면과 무역의 실제 관행, 무역 기구 및 협약의 기반이 되는 권력 구조를 분리했다. 그는 세계를 경제적인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다.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이고, 주변부는 1차 생산국으로 구성되며, 이 구분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1]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로서 그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의 가격이 제조업에서 생산하는 2차 생산품의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1] 그와 그의 동료들은 1차 상품과 2차 상품의 공급 조건이 다르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이러한 차이의 정확한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농부들은 가격에 관계없이 매년 동일한 양을 심지만, 제조업체는 예상되는 수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 능력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1950년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 또는 CEPAL)의 집행 이사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구체화되지 않았다.[1] 그해에 프레비시는 현재 프레비시-싱어 가설로 알려진 연구인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발전과 주요 문제''를 발표했다.[1] 한스 싱어는 거의 같은 시기에 프레비시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의 논문은 세계 무역 통계 분석을 기반으로 한 보다 경험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프레비시-싱어 가설은 현재의 세계 시스템에서 주변부는 중심부에 수출할 1차 상품을 생산하고, 중심부는 주변부에 수출할 2차 상품을 생산한다는 관찰에서 시작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중심부는 높은 임금과 발달된 노동조합 및 상업 기구를 통해 이익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절감된 비용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주변부에서는 기업과 노동자가 더 취약하며, 기술적 절감분을 낮은 가격 형태로 고객에게 전가해야 한다. 프레비시는 산업화된 국가와 비산업화된 국가 간의 교역 조건이 하락하는 것을 지적했는데, 이는 주변 국가가 동일한 가치의 산업 수입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수출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 기술과 국제 무역의 모든 이점은 중심부에 귀속될 것이다.[2]

프레비시의 영향으로 ECLA는 유엔제3세계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구조주의 경제학의 라틴 아메리카 학파를 탄생시켰다. 많은 학자들이 프레비시가 수입대체산업화(ISI)를 지지한다고 인식하는 반면, 프레비시는 일정 기간 동안 자본재 및 중간재를 선호하여 수입되는 "사치품"을 희생하면서 산업화에 초점을 맞춘 보호주의, 특히 후안 페론이 1956년부터 아르헨티나에서, 그리고 적어도 1963년부터 ISI를 시행한 것을 비판했다.[3] 그는 개발도상국 간의 무역을 포함한 산업화와 경제 협력을 옹호했다.

국제 사회 연구소(ISS)는 1977년 라울 프레비시에게 명예 펠로우십을 수여했다.

3. 1. 이론의 배경

데이비드 리카도비교 우위 원칙을 재검토하면서, 1940년대 후반 라울 프레비시는 새로운 경제 사상 학파를 창출했다.[1] 그는 경제학의 이론적 측면과 실제 무역 관행, 그리고 무역 기구 및 협약의 권력 구조를 분리해서 보았다. 그 결과 세계를 경제적인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다.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이고, 주변부는 1차 생산국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1]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 시절, 프레비시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의 가격이 제조업 2차 생산품의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하는 것을 알아차렸다.[1]

그와 동료들은 이러한 가격 차이가 1차 상품과 2차 상품의 공급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농부들은 가격에 관계없이 매년 같은 양을 심지만, 제조업체는 예상되는 수요 변화에 따라 생산 능력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프레비시가 1950년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 또는 CEPAL)의 집행 이사로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1]

3. 2. 이론의 핵심 내용

프레비시는 세계 경제를 산업화된 "중심부"와 1차 산품 생산국인 "주변부"로 나누었다.[1]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를 의미하고, 주변부는 1차 생산국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1]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 시절, 프레비시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의 가격이 공산품과 같은 2차 생산품의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1] 그와 그의 동료들은 농산물과 공산품의 공급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가격 변동폭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보았다.[1] 즉, 농부들은 가격에 관계없이 매년 같은 양을 심지만, 제조업체는 예상되는 수요 변화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1]

4. 프레비시-싱어 가설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라울 프레비시는 데이비드 리카도가 설명한 비교 우위 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194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경제 사상 학파를 만들게 되었다. 프레비시는 경제학의 이론적인 면과 실제 무역 관행, 그리고 무역 기구 및 협약의 권력 구조를 분리했다. 그는 세계를 경제적인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는데,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이고, 주변부는 1차 생산국이다. 이 구분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로서 그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의 가격이 제조업에서 만드는 2차 생산품의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레비시와 그의 동료들은 1차 상품과 2차 상품의 공급 조건이 다르다는 가설을 세웠다. 농부들은 가격에 상관없이 매년 같은 양을 심지만, 제조업체는 예상되는 수요 변화에 맞춰 생산 능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50년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의 집행 이사로 임명되면서 프레비시-싱어 가설로 알려진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발전과 주요 문제''를 발표했다.[1] 한스 싱어도 비슷한 시기에 프레비시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는 세계 무역 통계 분석을 기반으로 한 경험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2] 프레비시-싱어 가설은 현재의 세계 시스템에서 주변부는 중심부에 수출할 1차 상품을 생산하고, 중심부는 주변부에 수출할 2차 상품을 생산한다는 관찰에서 시작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중심부는 높은 임금, 발달된 노동조합 및 상업 기구를 통해 이익을 유지할 수 있지만, 주변부의 기업과 노동자는 더 취약하여 기술적 절감분을 낮은 가격으로 고객에게 전가해야 한다. 프레비시는 산업화된 국가와 비산업화된 국가 간의 교역 조건이 하락하여 주변부가 동일한 가치의 산업 수입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수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 기술과 국제 무역의 모든 이점은 중심부에 귀속된다.[2]

프레비시의 영향으로 ECLA는 유엔제3세계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구조주의 경제학의 라틴 아메리카 학파를 탄생시켰다. 많은 학자들이 프레비시가 수입대체산업화(ISI)를 지지한다고 인식하지만, 프레비시는 일정 기간 동안 자본재 및 중간재를 선호하여 수입되는 "사치품"을 희생하면서 산업화에 초점을 맞춘 보호주의, 특히 후안 페론이 시행한 ISI를 비판했다.[3] 그는 개발도상국 간의 무역을 포함한 산업화와 경제 협력을 옹호했다.

국제 사회 연구소(ISS)는 1977년 라울 프레비시에게 명예 펠로우십을 수여했다.

4. 1. 가설의 등장

1940년대 후반, 데이비드 리카도가 설명한 비교 우위 원칙을 재검토하면서 프레비시는 경제를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다.[1]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 주변부는 1차 생산국을 의미한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 시절, 프레비시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 가격이 제조업에서 생산하는 2차 생산품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하는 현상을 발견했다.[1]

이러한 생각은 1950년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의 집행 이사로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1]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발전과 주요 문제''라는 연구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프레비시-싱어 가설로 알려지게 되었다.[1] 한스 싱어도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세계 무역 통계 분석을 바탕으로 보다 경험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2]

프레비시-싱어 가설은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이익이 중심부에서는 높은 임금, 발달된 노동조합 및 상업 기구를 통해 유지되지만, 주변부에서는 기업과 노동자가 취약하여 기술적 절감분을 낮은 가격으로 고객에게 전가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2] 이로 인해 주변 국가는 동일한 가치의 산업 수입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수출해야 하는 교역 조건의 하락을 겪게 된다.[2]

4. 2. 가설의 내용

프레비시는 경제학을 이론적 측면과 실제 무역 관행으로 분리하여 세계를 경제적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다.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이고, 주변부는 1차 생산국이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 시절, 프레비시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 가격이 제조업 2차 생산품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1]

1950년, 프레비시는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의 집행 이사로 임명된 후, 프레비시-싱어 가설로 알려진 연구인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발전과 주요 문제''를 발표했다.[1] 이 가설은 주변부가 중심부에 1차 상품을 수출하고, 중심부는 주변부에 2차 상품을 수출하는 구조를 지적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중심부는 높은 임금과 발달된 노동조합 및 상업 기구를 통해 이익을 유지하는 반면, 주변부의 기업과 노동자는 취약하여 기술적 절감분을 낮은 가격으로 전가해야 한다. 프레비시는 산업화된 국가와 비산업화된 국가 간의 교역 조건이 하락하여 주변부가 동일한 가치의 산업 수입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기술과 국제 무역의 이점은 중심부에 귀속된다.[2]

5. 유엔 무역 개발 회의 (UNCTAD) 사무총장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유엔 무역 개발 회의(UNCTAD)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UNCTAD를 개발도상국 전체를 대변하는 기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개발 접근 방식은 무역에 중점을 두어 선진국 시장에 대한 특혜 접근 및 지역 통합을 옹호하며 주변 국가 간의 무역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또한 개발도상국이 외부의 도움보다는 내부 개혁을 통해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5. 1. UNCTAD 설립과 활동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유엔 무역 개발 회의(UNCTAD)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1] 그는 UNCTAD를 개발도상국 전체를 대변하는 기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개발 접근 방식은 무역에 중점을 두어 선진국 시장에 대한 특혜 접근 및 지역 통합을 통해 주변 국가 간의 무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개발도상국이 외부의 도움보다는 내부 개혁을 통해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레비시는 UNCTAD에서의 시절이 관료화되고 주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서 좌절스럽고 "무의미"했다고 느꼈다. 1969년 그의 갑작스러운 사임은 조직의 실패에 대한 그의 인내심 상실을 의미했다.[1]

5. 2. 한계와 사임

유엔 무역 개발 회의(UNCTAD)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프레비시는 개발도상국 전체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선진국 시장에 대한 특혜 접근 및 지역 통합을 통한 주변 국가 간 무역 구축과 같이 무역에 더 초점을 맞춘 개발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는 개발도상국이 외부 지원보다는 내부 개혁을 통해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수입대체산업화(ISI)가 적절한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3] 프레비시는 UNCTAD가 관료화되고 주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하여 1969년 갑작스럽게 사임했는데, 이는 조직의 실패에 대한 그의 인내심 상실을 의미했다.

6. 종속 이론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라울 프레비시는 데이비드 리카도가 설명한 비교 우위 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이는 1940년대 후반 새로운 경제 사상 학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레비시는 경제학의 이론적인 측면과 무역의 실제 관행, 그리고 무역 기구 및 협약의 기반이 되는 권력 구조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세계를 경제적인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다.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이고, 주변부는 1차 생산물을 주로 생산하는 국가들이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1]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로 재직하면서, 프레비시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의 가격이 공산품과 같은 2차 생산품의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프레비시가 1950년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의 집행 이사로 임명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그는 프레비시-싱어 가설로 알려진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발전과 주요 문제''라는 연구를 발표했다.[1] 독일 경제학자 한스 싱어도 비슷한 시기에 프레비시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싱어는 세계 무역 통계 분석을 바탕으로 보다 경험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프레비시-싱어 가설은 현재의 세계 시스템에서 주변부는 중심부에 수출할 1차 상품을 생산하고, 중심부는 주변부에 수출할 2차 상품을 생산한다는 관찰에서 시작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기술이 발전하면서 중심부는 높은 임금, 발달된 노동조합 및 상업 기구를 통해 이익을 유지할 수 있지만, 주변부의 기업과 노동자는 더 취약하여 기술 발전으로 인한 비용 절감분을 낮은 가격의 형태로 고객에게 넘겨야 한다. 프레비시는 산업화된 국가와 비산업화된 국가 간의 교역 조건이 하락하는 것을 지적했는데, 이는 주변부 국가가 동일한 가치의 산업 수입품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수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기술과 국제 무역의 모든 이점은 중심부에 돌아가게 된다.[2]

프레비시의 영향으로 ECLA는 유엔제3세계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구조주의 경제학의 라틴 아메리카 학파를 탄생시켰다.

6. 1. 종속 이론의 등장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의 경제학자들은 프레비시의 구조주의 사상을 종속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종속 이론은 주변부 국가의 경제 발전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2]

6. 2. 프레비시와 종속 이론의 관계

데이비드 리카도가 설명한 비교 우위 원칙에 대한 프레비시의 재검토는 1940년대 후반 새로운 경제 사상 학파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세계를 경제적인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다. 중심부는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이고, 주변부는 1차 생산국이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 시절, 프레비시는 대공황 기간 동안 농산물과 같은 1차 생산품의 가격이 제조업 2차 생산품의 가격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1]

1950년, 그는 프레비시-싱어 가설로 알려진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발전과 주요 문제''를 발표했다.[1] 이 가설은 현재의 세계 시스템에서 주변부는 중심부에 수출할 1차 상품을 생산하고, 중심부는 주변부에 수출할 2차 상품을 생산한다는 관찰에서 시작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중심부는 높은 임금과 발달된 노동조합 및 상업 기구를 통해 이익을 유지할 수 있지만, 주변부의 기업과 노동자는 더 취약하며 기술적 절감분을 낮은 가격 형태로 고객에게 전가해야 한다. 프레비시는 산업화된 국가와 비산업화된 국가 간의 교역 조건의 하락을 지적했는데, 이는 주변 국가가 동일한 가치의 산업 수입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수출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 기술과 국제 무역의 모든 이점은 중심부에 귀속될 것이다.[2]

프레비시의 영향으로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는 구조주의 경제학의 라틴 아메리카 학파를 탄생시켰다. 많은 학자들이 프레비시가 수입대체산업화(ISI)를 지지한다고 인식했지만, 그는 후안 페론이 시행한 ISI를 비판했다.[3]

1960년대, ECLA의 경제학자들은 프레비시의 구조주의에 대한 생각을 종속 이론으로 확장했다. 종속 이론은 프레비시와 ECLA의 원래 목적과는 정반대였지만, 그는 신고전 경제학이 주변부의 희생을 통해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7. 유산 및 평가

라울 프레비시는 경제학자로서, 특히 그의 중심-주변부 이론은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론은 세계 경제 시스템에서 주변부 국가들이 겪는 불리함을 지적하며,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7. 1. 라틴 아메리카에 미친 영향

프레비시의 사상은 칠레 대학교를 중심으로 칠레의 경제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4] 특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 이전 시기에 그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4] 그의 영향으로 유엔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는 유엔 내 제3세계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구조주의 경제학의 라틴 아메리카 학파를 탄생시켰다.[3]

7. 2. 한국에 대한 시사점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 경제 발전 과정에서 선진국과의 관계, 무역 불균형 문제 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라울 프레비시의 이론을 통해 고찰할 수 있다. 프레비시는 세계 경제를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고, 기술 발전과 국제 무역의 이익이 중심부에 집중되는 현상을 지적했다.[2]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프레비시의 이론을 바탕으로 불평등한 국제 경제 구조를 비판하고, 개발도상국의 경제 주권 확보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수입대체산업화와 같은 정책을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프레비시는 후안 페론이 시행한 수입대체산업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개발도상국 간의 무역을 포함한 산업화와 경제 협력을 옹호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3]

반면, 국민의힘은 프레비시의 이론이 과도하게 비관적이며, 자유 시장 경제의 효율성을 간과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들은 비교 우위에 따른 자유 무역이 장기적으로 모든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8. 주요 저작


  • Commercial Policy in the Underdeveloped Countries영어 (개발도상국의 상업 정책), ''American Economic Review'', 49, 1959, 251–273쪽.
  •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발전과 주요 문제들'' (뉴욕: 유엔, 1950)
  • Change and Development: Latin America's Great Task영어 (변화와 발전: 라틴 아메리카의 위대한 과제) (미주 개발 은행, 1970)

참조

[1] 서적 The process of economic development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9
[2] 간행물 Prebisch and the terms of trade https://doi.org/10.1[...] 2024
[3] 서적 The Life and Times of Raul Prebisch, 1901–1986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8
[4] 학술지 Chile Con Chicago: A Review Essay 1995-12
[5] 서적 The process of economic development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9
[6] 서적 The process of economic development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9
[7] 서적 The process of economic development https://archive.org/[...]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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