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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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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1840년 웨일스에서 태어난 개신교 선교사로,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통역관으로 조선에 왔다가 평양에서 순교했다. 그는 1865년에도 조선을 방문하여 성경을 배포하고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연루되어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의 순교는 한국 개신교 초기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남긴 성경을 통해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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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사진
출생일약 1840년 9월 17일
출생지웨일스, 포이스 주, 래이아더
실종일약 1866년 8월 31일 (향년 약 26세)
사망일약 1866년 8월 31일 (향년 약 26세)
직업선교사
알려진 이유한국의 순교자로 선포됨
배우자캐롤라인 고드프리(1863년 결혼, 1864년 사별)

2. 생애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는 1840년 영국 웨일스 라드노셔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 런던 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 과정과 신학 과정을 마치고, 1863년 6월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1]

산둥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영향으로 토머스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또한 박해를 피해 산둥성으로 피난 온 조선 천주교인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선교의 뜻을 품게 되었다.[10] 1865년, 조선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관에 사표를 낸 후 윌리엄슨이 제공한 여러 권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배에 승선했다.[10]

1865년 가을, 토마스는 한문 성경을 가지고 조선으로 향했다. 황해도 연안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 동안 머물면서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고,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며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심한 폭풍으로 인해 만주 해안으로 표류했다가 북경으로 돌아가야 했다.[1]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하자, 토마스는 이에 항의하러 조선으로 가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베트남 반란 진압을 위해 출동하여 계획이 무산되었다. 대신 토마스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여 1866년 8월 9일에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12]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서양과의 교역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제너럴 셔먼 호는 이에 불응하고 평양 시민들에게 불법 선교를 하는 등 무력 시위를 벌였다.[14]

1866년 9월 5일,[16] 큰 비가 그치고 대동강 수심이 얕아지자 제너럴 셔먼 호는 모래톱에 좌초되었다.[16] 박규수는 화공 작전을 펼쳐 배를 불태웠다.[9][17][18] 배에 타고 있던 23명의 선원 중 상당수가 사망했고, 토머스 목사 또한 이때 순교하였다.[9][17][18] 그의 나이 27세였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는 1840년 영국 웨일스 라드노셔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1] 런던 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 과정과 신학 과정을 마치고, 1863년 6월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1]

2. 2. 중국 선교와 조선에 대한 관심

산둥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영향으로 토머스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또한 박해를 피해 산둥성으로 피난 온 조선 천주교인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선교의 뜻을 품게 되었다.[10] 1865년, 조선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관에 사표를 낸 후 윌리엄슨이 제공한 여러 권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배에 승선했다.[10]

1865년 가을, 황해도 연안에 도착한 토머스는 한문성경을 나누어주며 선교도 하고 천주교 신자들도 만나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11] 약 두 달 반 정도가 흐른 어느 날 심한 폭풍에 휩쓸려 타고 온 배가 만주 해안으로 표류하게 되었고, 부득이 북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경에서는 런던 선교회 산하 학교에서 학장 서리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그의 관심은 온통 조선 선교에 있었다고 한다.[12]

2. 3. 1차 조선 방문 (1865년)

1865년 가을, 토마스는 윌리엄슨이 제공한 한문 성경을 가지고 조선으로 향했다. 황해도 연안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 동안 머물면서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고,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며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심한 폭풍으로 인해 만주 해안으로 표류했다가 북경으로 돌아가야 했다.[1] 토마스는 이때의 경험을 일기로 남겼는데, 1865년 11월 3일과 4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1]

  • 11월 3일: 반 다스중국어의 뱃사람들이 조개류를 잡으러 해안에 갔다가 섬 주민 20명 정도에게 다리를 심하게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아홉 척의 작은 함대는 분개하여 50명을 보내 싸우려 했다. 섬 주민들은 언덕 꼭대기에 모여 있었고, 몇몇은 절벽에서 전투 동작을 하고 있었다. 함대는 꾸준히 전진하며 사격을 가했고, 가장 대담한 두 척의 배가 해안으로 전진하여 주민들이 돌을 던지는 와중에 작은 정크선을 빼앗아 돌아왔다.

  • 11월 4일: 폭풍우가 친 다음 날, 섬 주민 두 명이 간조 때 땅에 막대기를 꽂고 종이 조각을 붙여 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밀수 거래는 엄격히 처벌받는 거래이며, 당신들은 소란을 피우고 신성한 섬에서 나무를 베어 폭풍을 초래할 위험을 감수했다. 죄가 매우 크니, 군사 관리 한 명이 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와서 싸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해하고 보고하지 않으려 하니, 빼앗아간 배를 돌려주면 적대적인 감정을 품지 않겠다."

2. 4. 2차 조선 방문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하자, 토마스는 이에 항의하러 조선으로 가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베트남 반란 진압을 위해 출동하여 계획이 무산되었다. 대신 토마스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여 1866년 8월 9일에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12] 제너럴 셔먼호는 8월 14일에 충남 서해안에 도착하였다.[13]

제너럴 셔먼호는 8월 하순에 대동강으로 진입하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관리들은 서양과의 교역이 국법으로 금지되었으므로 불가하니 돌아갈 것을 통보하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이에 불응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수로를 탐사하고 평양 시민들에게 불법 선교를 하였다. 조선 관리 이현익이 이를 제지하자 그를 감금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평양성 관민(官民)들은 강변으로 몰려들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제너럴 셔먼호는 소총과 대포를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14]

2. 5. 순교와 사망

1866년 8월, 토머스 선교사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의 항해사 겸 통역으로 조선에 왔다.[12] 배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서양과의 교역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제너럴셔먼 호는 이에 불응하고 평양 시민들에게 불법 선교를 하는 등 무력 시위를 벌였다.[14]

1866년 9월 5일[16], 큰 비가 그치고 대동강 수심이 얕아지자 제너럴셔먼 호는 모래톱에 좌초되었다.[16] 박규수는 화공 작전을 펼쳐 배를 불태웠다.[9][17][18] 배에 타고 있던 23명의 선원 중 상당수가 사망했고, 토머스 목사 또한 이때 순교하였다.[9][17][18] 그의 나이 27세였다.

토머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다. 제너럴 셔먼 호 선원들에게 살해된 사람들의 친척들에 의해 보복으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토머스는 성경을 들고 해안으로 뛰어내려 공격자들에게 "예수, 예수!"라고 한국어로 외치며 성경을 건넸다고 한다. 박춘권에게 성경을 건네주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

3. 순교의 영향과 논란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는 카를 귀츨라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조선) 땅을 밟은 개신교 선교사였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한문 성경을 배포하고 순교하였다.[19]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할 때 나눠준 성경을 읽고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17] 토머스 선교사에게 칼을 휘둘렀으나, 그에게서 받은 성경을 읽고 후에 개종하였다고 하는 박춘권이 그 예이다.[19] 박용식은 강가에 버려진 성경을 가져가 집의 벽지로 사용했는데, 사람들이 이 벽지를 읽고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3][4]

Robert Jermain Thomas영어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통역으로 승선했는데, 이 사건은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제너럴 셔먼호는 무장 상선으로, 조선의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들은 조선인들에게 먼저 발포하고 관리를 납치하는 등 폭력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며, 토머스 역시 이러한 침략 행위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3. 1. 긍정적 평가

카를 귀츨라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조선) 땅을 밟은 개신교 선교사였다. 개인 자격이 아닌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한문 성경을 배포하고 순교하였다.[19]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할 때 나눠준 성경을 읽고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17] 토마스 선교사에게 칼을 휘둘렀으나, 그에게서 받은 성경을 읽고 후에 개종하였다고 하는 박춘권이 그 예이다.[19] 정부 관리였던 박용식은 강가에 버려진 성경을 가져가 집의 벽지로 사용했는데, 사람들이 이 벽지를 읽고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3][4]

1900년대 초, 지역 기독교 공동체는 이 사실을 밝혔고, 사람들은 말씀을 읽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다. 그 결과, 그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 토마스 선교사의 영향으로 평양은 15년 만에 100개의 교회가 있는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2]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 대학 강사인 최성호는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은 웨일스에 대해 잘 몰라도 토마스 선교사가 웨일스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5]

3. 2. 비판적 시각

Robert Jermain Thomas영어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통역으로 승선했는데, 이 사건은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제너럴 셔먼호는 무장 상선으로, 조선의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들은 조선인들에게 먼저 발포하고 관리를 납치하는 등 폭력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며, 토머스 역시 이러한 침략 행위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4. 유산

토마스 선교사는 카를 귀츨라프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 땅을 밟은 개신교 선교사였다. 개인 자격이 아닌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내한했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한문 성경을 배포하며 선교 활동을 하다 순교했다. 일부 기독교 역사가들은 그의 순교가 헛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강변으로 올라와 품에 있던 성경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 박춘권에게도 성경 한 권을 주고 사망했다고 한다.[19] 박춘권은 훗날 성경을 읽고 개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토마스 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읽고 개종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17] 박용식이라는 정부 관리는 강둑에 버려진 성경을 집으로 가져가 벽지로 사용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복음을 읽을 수 있었다.[4]

이 사실은 1900년대 초 지역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밝혀졌고, 사람들은 벽에 적힌 말씀을 읽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결국 그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 토마스의 영향력은 사후에 더욱 커졌다. 불과 15년 만에 평양은 100개의 교회가 있는 강력한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2]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 대학 강사인 최성호에 따르면,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은 웨일스가 고유의 언어와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는 몰라도 토마스가 웨일스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한다.[5]

5. 가족 관계

토마스는 1863년에 캐롤라인 고드프리(1835년 출생)와 결혼했다.[6] 그러나 캐롤라인은 상하이에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유산으로 사망했다.[7]

참조

[1] 문서 The West Coast of Korea 1866-06-11
[2] 뉴스 North Korea's Christian martyrs https://www.bbc.co.u[...] 2016-12-26
[3] 웹사이트 The Man Who Brought the Gospel to Korea http://daibach-welld[...] 2019-06-03
[4] 웹사이트 The Man Who Brought the Gospel to Korea http://daibach-welld[...] daibach-welldigger 2019-06-03
[5] 뉴스 The business of relationships http://www.westwales[...] 2010-01
[6] 웹사이트 The Record of the Reverend R. Jermain Thomas, as found in the archives of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https://archiveshub.[...] 2024-02-15
[7]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ristian Missions Simon & Schuster Macmillan
[8]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9] 조선왕조실록 '[조선 왕조 실록]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계미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
[10]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1]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제너럴셔먼호사건 [─號事件]' https://terms.naver.[...]
[13] 조선왕조실록 '[조선 왕조 실록]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5일(양력 8월 14일)' https://sillok.histo[...]
[14]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 [─號事件]' https://terms.naver.[...]
[1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30일 병술 2번째기사' https://sillok.histo[...]
[16] 문서
[17]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8] 뉴스 North Korea's Christian martyrs https://www.bbc.co.u[...] 2016-12-26
[1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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