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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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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규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다. 그는 개화 사상을 수용하여 서양 문물의 도입과 통상 강화를 주장했으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평양 감사를 지냈다. 1875년 강화도 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으며,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했다. 그의 사상은 동도서기론에 기반하며, 합리적인 외교와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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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박규수
한자 표기朴珪壽
로마자 표기Bak Gyusu
다른 이름환재(瓛齋)
환재(桓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직책
임기 시작1874년 1월 19일
임기 종료1874년 11월 4일
이전한계원
다음김병국
생애
출생1807년 10월 27일
출생지조선 한성 가회동
사망1877년 2월 9일 (71세)
사망지조선 경기도 수원군
가족
배우자연안 이씨
자녀박제응
부모박종채(부), 유씨 부인(모)
친척박지원(친조부), 이준수(장인), 박선수(친아우)
학력
과거 합격헌종 14년(1848) 무신 증광시 병과 25위 (42세 때)
경력
주요 경력홍문관 대제학
의정부 우의정
돈령부지사 (1865년 8월 ~ 1866년 2월)
경기도 수원부 유수 (1876년 2월 ~ 1876년 12월)
정치 성향
정당노론계 낙론 예하 북학파 후예 성향 개화파
기타 정보
본관반남(潘南)
서훈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웹사이트두피디아 박규수

2. 생애

박규수는 180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박지원(연암)이다.

1827년 효명세자와 만나 깊은 신뢰를 쌓는 친구가 되었다. 세자는 박규수에게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묻곤 했다. 3년 후 효명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박규수는 큰 슬픔에 잠겨 20년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1]

1848년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2]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 중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다. 박규수는 허가 없이 대동강에 진입한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에게 조선을 떠날 것을 경고했으나, 선원들이 이를 무시하고 박규수의 부하를 붙잡자 이현익 구출 작전과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참여했다.[4]

1870년대 중반, 박규수는 박영효의 스승이 되어 깨우친 생각들을 전수했다.[2] 그의 사상은 김옥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3] 박규수는 연행사로 두 차례 청나라를 방문하여 서양 정보를 접했으며, 그의 집은 젊은 관료들의 실학 사상 연구 장소로 활용되었다. 박영효의 회상에 따르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은 박규수 집에서 『연암집』을 배우고 평등 사상에 접했다고 한다.[8]

1871년 신미양요흥선대원군 정권의 뜻에 따라 청나라미국에 척사를 정당화하는 문서를 작성했지만, 실제로는 주화론·개국론자로 김윤식에 의하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고립의 근심"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 1873년 대원군 실각 후 일본과 국교 회복을 주장했으며, 강화도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1875년 운요호로 일본이 강화도를 포격하자, 박규수는 제자 김홍집 등과 함께 수교를 촉구하여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 그러나 이후 매국노로 비난받고 모함에 시달리다 병석에 누웠다.[27] 1877년 임지인 수원부 청사에서 사망했다.[27]

2. 1. 생애 초반

박규수 집터 표석


박규수는 1807년(순조 7년) 10월 27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서 현감 박종채(朴宗采)와 전주 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11] 아버지 박종채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은 현감에 그쳤지만, 아들 박규수의 공으로 1863년에 이조참판, 1865년에 이조판서, 1873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규수의 부모는 결혼 후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어느 날 어머니 류씨가 학이 앞길을 인도하는 태몽을 꾸었고, 아버지 박종채는 연암 박지원에게 옥판(玉版)을 선물받는 꿈을 꾸고 임신 사실을 알았다. 박규수는 태몽 때문에 이름을 규학(珪鶴)이라 했다가 30세에 규수로 개명했다.

박규수는 대대로 노론이었지만 고조부 박필균 때부터 당쟁을 거부했고,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 역시 노론 내에서 외척·탕평당에 속했으며, 당시 주류였던 벽파와는 다른 북학파라는 새로운 경향을 창시해 영수(領首)가 되었다. 박규수는 성장 후에도 선대의 사상을 계승해 적극적인 서양 문물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 강화를 주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풍채가 컸고 논어를 즐겨 읽었다. 특히 '효도하는 사람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군자란 남을 공경할 망정 멸시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인배들은 남을 멸시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 (孝民可以爲臣(효민가이위신) / 君子可敬而不可侮(군자가경이불가모) / 小人可侮以不可敬(소인가모이불가경)'는 구절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곱 살 무렵, 박규수가 외가에 놀러 갔을 때의 일화가 있다. 항상 무언가 그리길 좋아했던 그는 땅바닥에 불탑을 그리며 놀았다. 그의 외종조이자 스승인 류화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12]

: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이

: 성인군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 시작한다.

: 네게 가르치나니 독서법은 이것이다.[12]

단계적으로 학문을 이루라는 충고였다. 그는 깎아내리고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교육보다는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 청렴했던 가풍 탓에 어려서는 넉넉치 못해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가끔 진외종조부[13] 이정리(李正履), 이정관(李正觀)과, 외종조부 류화(柳訸) 등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폭넓은 견해를 갖게 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조종영(趙鍾永) 등 명망높은 성리학자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만큼 (망년지교, 忘年之交) 학문적으로 성장했다. 18세 무렵에는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했는데, 그중에는 당대의 명필이자 화가이며 금석학자였던 김정희도 있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배워 알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 도봉산 정상에서 하늘을 두고 읊은 시 한 수가 남아있다. 10대 시절의 시집인 <금유시집>에 실린 일부다.[12]

: 세 개의 커다란 환약이 허공에 떠 있구나.

: 하나(A)는 스스로 빛나서 밝구나.

: 하나(B)는 덕성이 고요하여

: 그저 생명을 자라게 할 뿐이구나.

: 하나(C)는 컴컴하기가 거울과 같아서

: 빛을 빌려 비추어주네.[12]

태양(A)·지구(B)·달(C)에 대한 천문학적 통찰을 시로써 정리한 것이다. 또 다른 문집인 <장암시집>에는 "아아! 큰 안목으로 볼 때, 지구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12]

1827년, 박규수는 효명세자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세자는 종종 박규수에게 민감한 정치 및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묻곤 했다. 3년 후 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박규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로 인해 박규수는 20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1]

1848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이 시험에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에 비교적 일찍부터 고위직을 얻을 수 있었다.[2]

2. 1. 1. 출생과 가계



1807년[11](순조 7년) 10월 27일 지금의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현감 박종채(朴宗采)와 전주 류씨(정5품 통덕랑 류영(柳詠)의 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종채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은 현감에 그쳤지만, 아들 박규수가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1863년에 이조참판, 1865년에 이조판서, 1873년에는 영의정에 거듭 추증됐다.

박규수의 부모는 결혼 후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어느날 어머니 류씨가 혼수품으로 데려온 학이 앞길을 인도하는 태몽을 꿨고, 아버지 박종채는 연암 박지원에게 옥판(玉版)을 선물받는 꿈을 꾸고 임신 사실을 알았다. 어렵게 가진 자식이었기에 태몽 때문에 이름을 규학(珪鶴)이라 했다가 30세에 규수로 개명했다.

박규수는 대대로 노론이었지만 일찍이 고조부 박필균 때부터 당쟁을 스스로 거부했고,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 역시 노론 내의 외척·탕평당으로서, 당시 주류였던 벽파와는 다른 북학파라는 새로운 경향을 창시해 영수(領首)가 됐다. 박규수는 성장 후에도 이런 선대의 사상을 계승해 적극적인 서양문물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풍채가 컸고 논어를 즐겨읽어 연습장에 반복했다. 특히 '효도하는 사람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군자란 남을 공경할 망정 멸시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인배들은 남을 멸시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 (孝民可以爲臣(효민가이위신) / 君子可敬而不可侮(군자가경이불가모) / 小人可侮以不可敬(소인가모이불가경)'는 구절을 좋아했다고 한다.

2. 1. 2. 소년 시절



1807년[11](순조 7년) 10월 27일 지금의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현감 박종채(朴宗采)와 정5품 통덕랑 류영(柳詠)의 딸인 전주 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종채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은 현감에 그쳤지만, 잇따른 난을 평정한 아들의 공으로 1863년에 이조참판, 1865년에 이조판서, 그리고 1873년에는 영의정에 거듭 추증됐다.

두 부부는 결혼 후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었다. 어느날 류씨가 혼수품으로 데려온 학이 앞길을 인도하는 태몽을 꿨고, 아버지는 연암 박지원에게 옥판(玉版)을 선물받는 꿈을 꾸고 임신 사실을 알았다. 정말 어렵게 가진 자식이었다. 태몽 때문에 이름을 규학(珪鶴)이라 했다가 30세에 규수로 개명했다.

대대로 노론이었지만 일찍이 고조부 박필균 때부터 당쟁을 스스로 거부했고,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 역시 노론 내의 외척·탕평당으로서, 당시 주류였던 벽파와는 다른 북학파라는 새로운 경향을 창시해 영수(領首)가 됐다. 박규수는 성장 후에도 이런 선대의 사상을 계승해 적극적인 서양문물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풍채가 컸고 논어를 즐겨읽어 연습장에 반복했다. 특히 '효도하는 사람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군자란 남을 공경할 망정 멸시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인배들은 남을 멸시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 (孝民可以爲臣(효민가이위신) / 君子可敬而不可侮(군자가경이불가모) / 小人可侮以不可敬(소인가모이불가경)'는 구절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곱 살 무렵, 박규수가 외가에 놀러 갔을 때 일화다. 항상 무언가 그리길 좋아했던 그는 땅바닥에 불탑을 그리며 놀았다. 그런 모습을 외종조이자 스승인 류화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류화는 고명한 성리학자였음에도 '선비가 될 놈이 왠 불탑이냐'라는 식으로 면박을 주진 않았다[12]. 대신 그에게 시 한 수를 지어줬다.[12]

: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이

: 성인군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 시작한다.

: 네게 가르치나니 독서법은 이것이다.[12]

단계적으로 학문을 이루라는 충고였다. 단순히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일곱 살짜리 외조카손자가 혹시라도 가르침을 잊을까 시 한 수[12]를 주었다. 학문의 길을 자연스럽게 가르치고자 했던 셈이다. 이렇게 그는 깎아내고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교육보다는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 청렴했던 가풍 탓에 어려서는 넉넉치 못해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가끔 진외종조부[13] 이정리(李正履), 이정관(李正觀)과, 외종조부 류화(柳訸) 등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폭넓은 견해를 갖게 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조종영(趙鍾永) 등 명망높은 성리학자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만큼 (망년지교, 忘年之交) 학문적으로 성장했다. 18세 무렵에는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이곳저곳 가르침을 청했는데, 개중에는 당대의 명필이자 화가이며 금석학자였던 김정희도 있었다. 또한 김정희의 스승은 역시 연암 박지원의 문인이었던 실학자 박제가였다. 할아버지의 학연을 활용한 셈이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배워 알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 도봉산 정상에서 하늘을 두고 읊은 시 한 수가 남아있다. 10대 시절의 시집인 <금유시집>에 실린 일부다.[12]

: 세 개의 커다란 환약이 허공에 떠 있구나.

: 하나(A)는 스스로 빛나서 밝구나.

: 하나(B)는 덕성이 고요하여

: 그저 생명을 자라게 할 뿐이구나.

: 하나(C)는 컴컴하기가 거울과 같아서

: 빛을 빌려 비추어주네.[12]

태양(A)·지구(B)·달(C)에 대한 천문학적 통찰을 시로써 정리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과학탐구 영역'을 공부한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시로 정리하는 것과 유사하다. 시 쓰기를 통해 복습한 셈이다.[12] 또 다른 문집인 <장암시집>에는 지구과학적 지식을 정리한 것도 보인다. "아아! 큰 안목으로 볼 때, 지구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12]

그를 아는 사람중에는 박규수가 늘 특이한 것에 관심을 둔다며 기인이라 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집안 어른들은 그의 폭넓은 지적 호기심을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북돋아 줬다.[12][14]

2. 1. 3. 청년기와 은둔 생활

1807년(순조 7년) 10월 27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서 현감 박종채(朴宗采)와 전주 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11] 아버지 박종채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은 현감에 그쳤지만, 아들 박규수의 공으로 1863년에 이조참판, 1865년에 이조판서, 1873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규수의 부모는 결혼 후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어느 날 어머니 류씨가 학이 앞길을 인도하는 태몽을 꾸었고, 아버지 박종채는 연암 박지원에게 옥판(玉版)을 선물받는 꿈을 꾸고 임신 사실을 알았다. 박규수는 태몽 때문에 이름을 규학(珪鶴)이라 했다가 30세에 규수로 개명했다.

박규수는 대대로 노론이었지만 고조부 박필균 때부터 당쟁을 거부했고,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 역시 노론 내에서 외척·탕평당에 속했으며, 당시 주류였던 벽파와는 다른 북학파라는 새로운 경향을 창시해 영수(領首)가 되었다. 박규수는 성장 후에도 선대의 사상을 계승해 적극적인 서양 문물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 강화를 주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풍채가 컸고 논어를 즐겨 읽었다. 특히 '효도하는 사람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군자란 남을 공경할 망정 멸시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인배들은 남을 멸시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 (孝民可以爲臣(효민가이위신) / 君子可敬而不可侮(군자가경이불가모) / 小人可侮以不可敬(소인가모이불가경)'는 구절을 좋아했다고 한다.

1827년, 박규수는 효명세자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세자는 종종 박규수에게 민감한 정치 및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묻곤 했다. 3년 후 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박규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로 인해 박규수는 20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1]

1848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이 시험에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에 비교적 일찍부터 고위직을 얻을 수 있었다.[2]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848년(헌종 14년) 42세에 문과 증광시에 병과 25위로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2] 헌종은 '앞으로 크게 쓸 것이니 진력하라'며 격려했다.[18] 이후 사간원 정언,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으로 잠시 외직에 있었다.[18]

1850년(철종 1년) 전라북도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여 대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사적지를 찾아 그의 저서들을 탐독했다.[18] 그해 사헌부 지평으로 복귀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18] 1851년(철종 2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18]

1854년(철종 5년)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고,[18] 1855년(철종 6년) 다시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들을 봉고파직했다.[19] 1858년(철종 9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되었다.[18]

이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처리하고, 개항과 개국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2. 1. 관료 생활 초반

1848년(헌종 14년) 42세에 문과 증광시에 병과 25위로 합격했다.[2] 헌종은 그에게 '앞으로 크게 쓸 것이니 진력하라'고 격려했다.[18] 이후 사간원 정언,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으로 잠시 외직에 있었다.[18]

1850년(철종 1년) 전라북도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여 대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사적지를 찾아 그의 저서들을 탐독하며 감탄했다고 한다.[18] 그해 사헌부 지평으로 복귀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18]

1851년(철종 2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18] 1854년(철종 5년)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다.[18] 1855년(철종 6년) 다시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들을 봉고파직한 기록이 남아있다.[19]

1858년(철종 9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되었다.[18]

2. 2. 2.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1866년(고종 3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했다. 선교사 토마스(최난헌) 등을 태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 정부의 통상 요구 거절에도 불구하고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평양 감사였던 박규수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21]

셔먼호는 상선이었으나 무장을 적재한 상태였고, 밀물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곧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모래톱에 좌초되었다.[10] 박규수는 체포조를 구성하며 상금을 걸었다. 이때 한 교졸[22]이 자원하여 어촌에서 징발한 괴피선[23] 여러 척에 기름 먹인 섶을 가득 실어 셔먼호 옆에 붙였다. 그리고 궁수들에게 불화살을 쏘게 하여 화공을 가했다.[10] 이 화공으로 셔먼 호 내부의 인화물질에 불이 옮겨 붙어 배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배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으나 대부분 사살되었고, 선장과 선교사 토마스는 평양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이 사건의 전말이 조정에 보고된 후, 박규수는 품계가 승진되었고, 지방 아전(중인 계급)에 불과했던 교졸도 정3품 진장[24](鎭將)에 올랐다.[10] 외세에 대한 민심이 흉흉했던 상황에서 박규수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고, 흥선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도 받게 되었다.

2. 2. 3. 개항, 개국론과 갈등

조선 평안도 관찰사 재임 중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겪었는데, 이 사건은 19세기 조선의 쇄국 정책 종결에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4] 1866년 7월 9일, 제너럴 셔먼호는 허가 없이 급사문에 진입했고, 박규수는 선원들에게 조선을 떠날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경고를 무시하고 박규수의 부하인 참위 이현익을 붙잡았다. 박규수는 1866년 7월 24일 이현익 구출 작전과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참여했다.[4]

1871년 신미양요에서는 흥선대원군 정권의 뜻에 따라 청나라미국에 대해 "척사"를 정당화하는 문서 작성에 관여했다. 그러나 박규수 자신은 주화론·개국론자였으며, 제자 김윤식에 따르면 미국과 적극적으로 조약을 체결하여 "고립의 근심"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5]

1873년 대원군 실각 후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과의 국교 회복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황" "칙"의 문자가 문제가 된 서계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자존자칭"의 문제로서 문서를 수령하여 교섭을 재개할 것을 주장했다.[6] 1875년 강화도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대일 국교 회복·무력 충돌 회피를 위해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박규수는 1861년과 1872년 두 차례 연행사로서 청나라를 방문하여 얻은 견문과 청나라를 경유한 서양 정보를 바탕으로 서양을 인식했다.[7] 그의 자택은 젊은 관료들의 실학 사상 연구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박영효의 회상에 따르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박규수 저택에서 『연암집』을 배우고 평등 사상에 접했다고 한다.[8] 이 외에도 유길준 등, 다음 시대의 개화파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 2. 4. 강화도 조약 이후

1875년(고종 12년) 9월 일본은 운요 호로 강화도를 포격했다. 박규수와 그의 제자 김홍집, 역관 오경석 등은 다시 한 번 수교를 강력히 촉구하고 설득해 이듬해 2월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됐다. 이후 박규수는 매국노로 규탄받고 모함에 시달리다 병석에 누웠다. 그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운양 김윤식은 "공(박규수를 지칭)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했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라고 했다.[27]

1875년(고종 12년) 11월 25일 박규수는 대왕대비의 가상존호옥책문제술관(加上尊號玉冊文製述官)을 겸했다.

1876년(고종 13년) 1월 건강이 좋지 않았을 뿐더러 칠순을 맞은 그는 치사(은거)를 상주했으나 불허됐고, 대신 노신들의 모임인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돼 궤장(지팡이)과 의자, 안마를 하사받았다.

1876년(고종 13년) 2월 수원부 유수(水原府 留守)에 임명됐으나 건강이 악화돼 가지 못했고, 병세가 차도를 보이던 8월 9일 수원부 유수에 재차 임명돼 수원으로 내려갔다.

1877년(고종 14년) 2월 9일[27]에 임지인 수원부 청사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종은 '도량과 식견이 고명하고, 문학이 박식해서 내가 의지하고 온 조야(朝野)가 기대하던 사람이다. 근래에 우의정의 벼슬을 벗은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거기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바로 평시에 정력이 강직하여 잠시 휴식하게 해주면 다시 등용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까닭 모를 병으로 갑자기 영영 가버릴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 슬픔과 한탄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라며 슬퍼하며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3년치 녹봉(祿俸)을 부의로 지급했다.

2. 2. 5. 사후

1877년(고종 14년)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하계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 20-3번지에 있는 서라벌 고등학교 자리에 안장되었다.[28]

1878년(고종 15년) 11월 1일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웅렬, 김홍집, 윤치호, 홍영식, 서재필 등에게 계승되었다. 박규수가 죽은 후에도 유대치, 오경석 등이 문하생들의 훈육을 맡았다. 양무 운동을 모델로 동도서기를 주장했던 박규수와 달리,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급진적인 개화를 추구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 그의 제자들이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대거 일본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문하생들이 역적으로 몰리자 이미 사망한 박규수 역시 관작을 모두 삭탈당했으며, 집은 헐려 공터가 되었다가 1906년 보성중학교 부지가 되었다.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파들이 조정에 복귀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한 뒤에야 사면복권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그의 개화 사상과 삶을 소개한 문집이 처음 간행되었다. 연암집 역시 처음으로 정식 간행되었다.

1921년 3월 31일 일제강점기였지만 이왕직(李王職) 등으로 명맥은 유지하던 순종의 명으로 신응조(申應朝), 이돈우(李敦宇),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950년 6.25 전쟁경기도 광주군에 보관 중이던 그의 저서와 유물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개화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아 잊혀져 가는 듯했던 그의 사상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한글로 번역되었고, 1970년대 중반부터 일본 덴리대학교 조선학회에서도 그의 저서와 사상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3. 사상과 신념

박규수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북학파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을 계승하고, 두 차례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하며 세계 정세와 서구 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여 개항을 주장했다.[7] 효명세자와 친분이 두터웠으나, 세자가 요절하자 20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1] 1848년 과거에 합격 후 관직에 진출, 평안도 관찰사 재임 중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겪으며 쇄국 정책의 한계를 인식했다.[4]

신미양요에서 척사 정책 지지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주화론과 개국론을 펴며 미국과 조약 체결로 "고립의 근심"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 1870년대 중반부터 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수, 김옥균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3] 그의 집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연암집』을 배우고 평등 사상을 접하는 실학 사상 연구 장소였다.[8]

박규수는 백성이 먼저고 사대부는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재산보다 백성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3. 1. 개항, 개국론

그는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개항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후대의 개화파에게 전달하여 북학파의 개혁, 실용주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현실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했다.

그의 개국론은 운양호 사건 직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 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 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개항파로 알려진 박규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균관대학교 한국한문학과 김명호 교수에 따르면, 그가 척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양이 정책에 동조했으며 다만 교섭 여지를 주어 서양을 중화문명에 귀의시키려 했을 뿐이란 것이다.[29]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던 1866년 박규수는 강경한 척화파처럼 보인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도 그가 미국·중국 등에 직접 지어 보낸 각종 문서는 어디까지나 정부 측의 강경한 입장 내지 힐문장들이었다.[29]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했다.

김명호 교수에 의하면 “박규수가 양이를 주장하는 이항로의 상소를 칭찬했으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 불허 등을 담은 대원군의 양이책을 전폭 지지했다”며 박규수를 대표적인 주화론자나 개국을 구상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29] 그는 “신미양요 시기에 박규수가 대미 수교를 원했다는 종래의 논의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확대해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29]

한편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했다가 살해된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을 거슬러 온 것이 박규수의 초청 때문이었다는 설에 대해서도 김명호 교수는 이를 부정했다. 토마스 목사가 베이징에서 박규수를 만나 선교 활동의 지지와 후원 약속을 받았다는 설은 전혀 사실 무근으로, 셔먼호 사건을 전후해 박규수는 베이징에 간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29]

1870년대 중반, 박규수는 박영효의 스승이 되었다. 박영효가 먼저 박규수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그는 깨우친 생각들을 전수하기로 결심했다.[2] 박규수의 사상은 한국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한국 개혁가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급속도로 기술 발전을 이루고 있던 메이지 일본의 군사적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외국의 과학과 기술을 한국에 도입하려 했다.[3]

1871년의 신미양요에서는, 흥선대원군 정권의 묘의에 따라, 청나라·미국에 대해 "척사"를 정당화하는 문서의 기안에 관여했다. 그러나 박규수 자신은 주화론·개국론자였으며, 제자 김윤식에 따르면, 미국과 적극적으로 조약 체결을 하여 "고립의 근심"을 피해야 한다는 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5].

1873년, 대원군 실각 후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과의 국교 회복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황" "칙"의 문자가 문제가 된 서계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자존자칭"의 문제로서 문서를 수령하여 교섭을 재개할 것을 주장했다[6]. 1875년의 강화도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대일 국교 회복·무력 충돌 회피를 위해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박규수의 서양 인식은, 연행사로서, 1861년과 1872년 2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견문과, 청나라를 경유한 서양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7]. 박규수의 자택은, 젊은 관료들에 의한 실학 사상 연구의 장으로서 기능했다. 후년의 박영효의 회상에 따르면,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과 함께 박규수 저택에서 『연암집』을 배우고, 평등 사상에 접했다고 한다[8]. 이 외에도 유길준 등, 다음 시대의 개화파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3. 2. 쇄국 정책에 대한 비판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30] 그는 적극적인 서양 문물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 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그의 개국론은 운양호 사건 직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3. 3. 위선적인 도덕관에 대한 비판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1] 그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도입하고 외국과 통상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1]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했다.[1]

그는 외교 관계에 있어서 도의적인 것이나 감정보다는 실리를 찾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라고 주장했다.[1] 이에 따라 위정척사파의 맹목적인 폐쇄론에 저항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외국의 주장이 합당하다면 이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 그는 외국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편 타협을 통해 절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

3. 4. 합리적인 외교론

그는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개항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1] 그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후대의 개화파에게 전달하여 북학파의 개혁, 실용주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현실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했다.

그의 개국론은 운양호 사건 직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 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1]

고종 재위 기간 동안, 왕비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신정왕후는 사후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부인이었다. 박규수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 중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19세기 한국의 쇄국 정책 종결에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4] 1871년의 신미양요에서는, 흥선대원군 정권의 묘의에 따라, 청나라·미국에 대해 "척사"를 정당화하는 문서의 기안에 관여했다. 그러나 박규수 자신은 주화론·개국론자였으며, 제자 김윤식에 따르면, 미국과 적극적으로 조약 체결을 하여 "고립의 근심"을 피해야 한다는 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5]

박규수의 서양 인식은, 연행사로서 1861년과 1872년 2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견문과, 청나라를 경유한 서양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7]

3. 5. 동도서기론

그는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개항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후대의 개화파에게 전달하여 북학파의 개혁, 실용주의 학문을 가르쳤으며, 현실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했다.

그의 개국론은 운양호 사건 직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 문물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 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2] 김옥균은 급속도로 기술 발전을 이루고 있던 메이지 일본의 군사적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외국의 과학과 기술을 한국에 도입하려 했다.[3]

3. 6. 사대부와 백성

박규수는 백성이 있은 뒤에야 사대부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대부가 백성의 윗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 직분이라 가르쳤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화이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대에까지는 한성부의 벌열가문이었지만 조부 박지원의 대부터는 재산이 없었다.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문하생인 생원 주씨(周氏)가 박규수 모르게 논 80석을 사뒀다. 그런데 신씨(申氏) 성을 가진 시골 노인이 찾아와 '연전에 사기를 당해 대감댁 땅을 모르고 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했다. 박규수는 주 생원을 불러 땅 문서를 신씨 노인에게 주라고 했다. 주생원이 후생들을 위해 그러지 말라고 애걸하였으나 박규수는 '백성이 있고 사대부가 있는 법'이라며 끝내 노인에게 주게 했다.

4. 기타

연암 박지원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본래 친구였으나, 박지원유한준의 글을 풍자하면서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이 싸움은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에서 유한준의 집안을 百世之讐|백세지수중국어라 칭하며 원수로 규정했고,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도 박지원을 비난하는 등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31]

1871년, 홍문관 제학이었던 박규수는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유길준을 불렀다. 박규수는 유길준에게 집안 간의 오랜 불화를 풀고 화목하게 지내자고 제안했고, 유길준은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스승으로 예우하고 개화파로서의 삶을 살았다.

박규수는 박지원, 박제가노론북학파 외에도 남인정약용, 서유구, 북인유형원, 윤휴 등의 학문도 폭넓게 사숙했다.[1] 그의 학풍은 제자 김윤식의 지적처럼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고고(考古)·의기(儀器)·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했다.

유대치, 오경석 등과는 신분을 초월하여 친구로 사귀었고, 승려 이동인과도 사상을 떠나 교류했다. 박규수는 사람을 신분이나 지위가 아닌 됨됨이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림을 좋아하여 수백 여 편의 그림과 글씨를 남겼으나, 6.25 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12] 고전 읽기와 공부 방법을 엮은 '상고도회문의례' 16권을 저술했고, 지구본 설계도 평혼의(平渾儀)와 천문지도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 등이 전해진다.[32]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東津方略)과 평안도 전도, 세계 지도인 혼평의(渾平義)와 천문도, 간평의(簡平義) 등 천문지도를 제작했다.

해시계이자 천문도인 박규수의 '간평의(簡平儀)' 종이 제작본은 2006년 5월 실학박물관 기공식 때 공개되었다.[33]

4. 1. 유길준 가문과의 악연

연암 박지원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당대 쌍벽을 이루던 문장가들로 본래 문우(文友)이자 친구였으나, 연암 박지원유한준의 글을 풍자하면서 감정싸움이 시작되어 결국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이 싸움은 대를 이어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깎아내리는 글로 이어졌다. 박종채유한준의 집안을 百世之讐|백세지수중국어라 칭하며 원수로 규정했고,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도 연암 박지원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었다고 비난하는 등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31]

1871년, 홍문관 제학이었던 박규수는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읽고 장원급제자를 불렀다. 그는 16세의 유길준으로, 유한준의 5대손이었다. 유길준의 아버지 유진수는 '원수 같은 자를 찾아간다'며 반대했지만, 박규수는 유길준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칭찬했다. 박규수는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다시 화목하게 지낸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한 감정을 우리가 푸는 것이 아니겠냐'며 감개무량해했다. 그는 유길준에게 힘써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舊怨|구원중국어을 잊고 자주 찾아오라고 했다. 박규수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그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개화파로서의 삶을 살았다.

4. 2. 학문 연구와 교유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박규수는 박지원, 박제가노론북학파 외에도 남인정약용, 서유구, 북인유형원, 윤휴 등의 학문도 폭넓게 사숙했다.[1] 다양한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사숙하였던 탓에 어떤 특정한 사상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소론유수원의 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학풍은 제자 김윤식의 지적처럼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고고(考古)·의기(儀器)·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했다.

박규수는 할아버지 박지원을 비롯하여 유형원, 박제가, 이익,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 조종영, 홍석주, 윤정현 등을 선배로서 사숙했고,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 신응조, 윤종의, 신석우 등과는 문우로서 교유했다.

백의정승 유대치, 중인 출신 외교관 오경석 등과는 신분을 초월하여 친구로 사귀었고, 승려 이동인은 사상을 떠나 친구로 지냈다. 박규수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해야 된다고 했다.

4. 3. 작품 활동과 지도 제작



그는 그림을 좋아하여 수백 여 편의 그림과 글씨를 남겼다고 하나, 6.25 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12] 그의 글씨는 청나라 고관대작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고전 읽기와 공부 방법을 흥미롭게 엮은 '상고도회문의례' 16권을 저술하였고, 그가 직접 제작한 지구본 설계도 평혼의(平渾儀)와 천문지도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 등이 현재 전해진다.[32]

문인화와 수묵화 외에도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東津方略)과 평안도 전도를 그렸다. 청나라의 세계지도와 천문도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해 세계 지도인 혼평의(渾平義)와 천문도, 간평의(簡平義) 등 천문지도를 제작했다.

해시계이자 천문도인 박규수의 '간평의(簡平儀)' 종이 제작본은 2006년 5월 실학박물관 기공식 때 공개되었다.[33]

5. 저작


  • 《환재집》(瓛齋集)
  • 《환재직계》(瓛齋織啓)
  • 《환재수계》(瓛齋繡啓)
  •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儀例)
  • 《장암문고》(莊菴文稿)
  • 《환재유고》(瓛齋遺稿)

5. 1. 시집


  • 환재집(瓛齋集)
  • 환재직계(瓛齋織啓)
  • 환재수계 (瓛齋繡啓)
  • 편저 거가잡복고 (居家雜服攷)
  •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儀例)
  • 금유시초(錦㽔詩鈔)
  • 장암문고(莊菴文稿)
  • 환재유고(瓛齋遺稿)
  • 1848 벽위신편평어「闢衛新編評語」[34]

5. 2. 작품



박규수는 그림에 재능을 보여 수백여 점의 그림과 글씨를 남겼으나, 6.25 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12] 그의 글씨는 청나라 고관대작들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고전 읽기와 공부 방법을 엮은 '상고도회문의례' 16권을 저술했고, 그가 직접 제작한 지구본 설계도인 평혼의(平渾儀)와 천문지도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 등이 현재 전해진다.[32]

문인화수묵화 외에도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東津方略)과 평안도 전도를 그렸다. 청나라의 세계지도와 천문도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해 세계 지도인 혼평의(渾平義)와 천문도, 간평의(簡平義) 등 천문지도를 제작했다.

박규수의 해시계이자 천문도인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은 2006년 5월 실학박물관 기공식 때 공개되었다.[33]

  • 금유시집(錦㽔詩集)
  • 장암시집(莊菴詩集)
  • 금유지림(錦㽔志林)
  • 환재집(瓛齋集)
  • 환재직계(瓛齋織啓)
  • 환재수계(瓛齋繡啓)
  •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儀例)
  • 장암문고(莊菴文稿)
  • 환재유고(瓛齋遺稿)

6. 관련 사건


  • 효명세자와의 만남 (1827년): 박규수는 효명세자와 깊은 신뢰를 쌓는 친구가 되었으며, 세자는 종종 박규수에게 정치 및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박규수는 20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1]
  • 과거 합격 (1848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2]
  • 박영효의 스승 (1870년대 중반): 박영효의 스승이 되어 그에게 깨우친 생각들을 전수했다.[2]
  • 김옥균에게 영향: 박규수의 사상은 한국 개혁가 김옥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김옥균메이지 일본의 군사적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외국의 과학과 기술을 한국에 도입하려 했다.[3]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1866년): 평안도 관찰사 재임 중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다.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에게 조선을 떠날 것을 경고했으나, 선원들은 이를 무시하고 박규수의 부하 참위 이현익을 붙잡았다. 박규수는 이현익 구출 작전과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참여했다.[4]
  • 동치제 조정 특사 (1872년): 동치제 조정에 파견되는 조선의 수석 특사로 임명되었다.[4]
  • 신미양요
  • 병인양요
  • 강화도 조약
  • 갑신정변
  • 북학의

참조

[1] 뉴스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1-07-23
[2] 서적 친일파99인 돌베개 1993
[3] 서적 God, Mammon and the Japanese: 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ican relations, 1884-1905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6
[4]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2006
[5] 문서 瓛斎集「美兵船滋擾咨」に対する金允植の按文
[6] 문서 瓛斎集巻之十一「上大院君書」
[7] 서적 조선유교의 이천년
[8] 서적 신정 조선근대사
[9] 웹사이트 명분론(名分論) https://encykorea.ak[...] 2023-06-12
[10]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11] 문서 박규수 생년월일 설
[12] 뉴스 (역사 파고들기④) '조선 천재' 박규수의 특별한 학습법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05-31
[13] 문서 박규수의 진외종조부
[14] 문서 박규수 시대의 지구관
[15] 뉴스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16] 문서 옥홀
[17] 문서 연암집 간행
[18] 문서 봉고파직(封庫罷職)
[19] 웹사이트 수계 https://terms.naver.[...]
[20] 문서 입승대통
[21] 서적 호암전집 조광사 1939
[22] 문서 교졸
[23] 문서 괴피선
[24] 문서 진영장
[25] 문서 무군무부(無君無父)
[26] 문서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청국의 외교
[27] 문서 음력 1876년 12월 27일
[28] 문서 박규수 묘소 이장 1989-08-02
[29] 뉴스 박규수는 쇄국 동조한 대원군 측근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05-01-27
[30] 뉴스 [정동칼럼] 정치불신의 프레임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0-03-10
[31] 문서 유한준과 박지원의 문장론 비교
[32] 뉴스 실학 유물 별게 다 있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10-03
[33] 뉴스 박지원 초상 원본·묵매도 최초 공개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7-05-07
[34] 논문 김명호 : 문헌 해제 1. 朴珪壽, 「闢衛新編評語」 http://has.hallym.ac[...] 201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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