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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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에 접근했으나,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 정부와 충돌하여 격침된 사건이다. 미국은 일본 개항과 청나라의 무역 개방을 통해 조선 개항을 시도했고,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에 진입하여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조선 관리와의 갈등 끝에 배가 좌초되자, 조선군은 화공선으로 공격하여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이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기념하며, 김응우의 역할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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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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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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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명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관련 사건 | 미국의 신미양요 파견 이전 사건 |
발생일 | 1866년 8월 9일 ~ 1866년 9월 2일 |
위치 | 조선 평안도 평양 대동강 |
결과 | 제너럴 셔먼호 파괴 및 승무원 전원 사망, 1871년 미국의 신미양요 파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조선 | 흥선대원군 박규수 이현익 |
미국 | 페이지 대위 |
병력 규모 | |
미국 | SS 제너럴 셔먼 |
조선 | 거북선 1척, 화공선 9척 |
피해 규모 | |
미국 | 19명 사망, 스쿠너 1척 파괴 |
조선 | 1명 사망, 화공선 6척 파괴 |
민간인 | 7명 사망 |
추가 정보 |
2. 배경
1392년부터 조선의 통치를 받던 한국은 서양 세계에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여러 쇄국 정책을 채택했고, 이는 아편 전쟁으로 청이 외국과의 무역을 개방하게 된 19세기에도 유지되었다.[1][2][3]
아시아에서 서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이 지역으로 건너왔고, 이는 기독교 도입으로 인한 긴장을 유발하여 여러 아시아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중국에서는 홍수전이 이끄는 기독교 반군이 청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의 섭정 흥선대원군은 1866년에 8,000명이 사망하고 프랑스 선교사 여러 명이 포함된 한국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 원정을 파견했지만 실패했고, 이는 한국의 쇄국 정책을 재확인하게 했다.[1]
무역을 위해 한국으로 가려던 외국 상인들은 지역 관리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한국 정부는 서구 열강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미국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1854년 일본 정부에 외국과의 통상 개방을 강요했다. 미국 상인들은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한국이 개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1][7]
2. 1. 미국의 통상 확대 정책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통상을 개설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중국 및 동남아시아에서의 통상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853년 7월 8일 매튜 C. 페리 준장이 에도(현재의 도쿄) 부근의 우라가 항까지 항해한 뒤, 일본은 통상을 개방하였다. 이후 미국은 무력을 앞세워 1854년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였다.[21]1832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 시절, 미국에서는 에드먼드 로버츠가 조선과의 통상 개방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1844년 미국은 제1차 아편 전쟁(1840~42년)으로 힘을 잃은 청나라와 왕샤 조약을 맺어 불평등한 통상을 시작했고, 이 조약으로 아시아가 미국의 상인들에게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21]
같은 해, 미국 의회는 조선의 문호 개방을 위한 안건도 마련했으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1853년 사우스 아메리카 호가 일본으로 항해하던 도중 부산에 입항하여 열흘간 머물렀고, 이때 배의 관리들은 조선 관리들과 식사를 하기도 했다. 1855년과 1865년에는 조선에 표류했던 미국인들이 식량과 식수를 제공받는 등 좋은 대우를 받고, 본국 송환을 위해 청나라로 보내지기도 했다.[21][22]
2. 2. 조선의 쇄국 정책
1863년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외교적인 면에서는 청나라를 제외하고는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쇄국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23]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베이징이 함락되고 청나라 함풍제(咸豊帝)가 피난 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에는 위기감이 확산되었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청나라의 강화를 중재한 러시아가 그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게 되면서 러시아의 남하로 조선은 더욱 압박을 받게 되었다.[23]조선은 1392년부터 서구 세계에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졌으며,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여러 쇄국 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19세기 아시아의 서구 제국주의가 급격히 증가하고, 특히 아편 전쟁으로 청이 외국과의 무역을 개방하게 되면서 유지되었다.[1][2][3]
아시아에서 서구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이 지역으로 건너왔고, 이로 인해 기독교의 도입으로 인한 긴장으로 여러 아시아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중국에서는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이 태평천국으로 이어졌는데, 홍수전이 이끄는 기독교 반군이 청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전개와 조선 왕족이 전복적인 종교로 인식한 것에 대응하여, 섭정 흥선대원군은 1866년에 8,000명이 사망하고 프랑스 선교사 여러 명이 포함된 한국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프랑스는 한국 원정을 파견했지만 실패했고, 이는 한국의 쇄국 정책을 재확인하게 했다.[1]
무역을 위해 한국으로 가려던 외국 상인들은 지역 관리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한국 정부는 서구 열강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미국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1854년 일본 정부에 외국과의 통상 개방을 강요했다. 미국 상인들은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한국이 개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1][7]
2. 3. 병인박해와 조선-프랑스 관계 악화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에는 천주교에 대해 이해가 깊었고 탄압할 생각이 없었다.[24] 부인과 딸도 천주교 신자였고, 불우했던 시절 천주교인들과 교류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한불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계획도 있었다.[25]그러나 청나라가 천주교를 박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자,[26] 흥선대원군의 정적들은 천주교와 같은 불순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운현궁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지고,[27] 조대비마저 천주교를 비난하자, 흥선대원군은 정권 유지를 위해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결국 1866년 1월,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시작했다.[28]
이로 인해 2월에는 베르뇌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 6명과 홍봉주, 남종삼, 김면호 등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다. 1866년 5월,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7월에 톈진에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을 만나 프랑스 신부들의 순교 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 보호를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 반란 진압을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약속했다.[29] 이러한 소식은 조선에도 전달되었고, 조선의 관원들은 외양선 출현을 경계하고 감시하며 더욱 긴장하며 대비하였다.

1866년, 섭정 흥선대원군은 조선 내 천주교 신자 8,000명과 프랑스 선교사 여러 명을 처형하는 박해를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 원정을 감행했지만 실패했고, 이는 조선의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
3. 사건 전개
조선이 쇄국 정책을 펴고 있을 때, 보스턴 출신 사업가 W. B. 프레스턴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과의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조선으로 향했다. 제너럴셔먼호에는 선장 페이지, 부선장 윌슨(둘 다 미국인), 영국인 감독 조지 호가스, 중국인 선원 겸 통역관 차오 링펑, 산둥 출신 항해사 2명, 베이징, 말라야, 남중국 출신 선원 10명 등 13명의 아시아인 선원, 광저우 출신 환전상, 웨일스 출신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그리고 프레스턴이 탑승했다.[4]
1866년 8월 9일, 톈진의 영국 무역 회사 메세스 메도우스 앤드 Co.에서 면직물, 주석 제품, 거울, 유리 제품 등을 구매한 후 옌타이를 거쳐 조선 해역으로 출발했다. 8월 16일 대동강에 들어선 제너럴셔먼호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가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기 위해 자주 정박했다. 조선 관리들은 이 배가 조선에서 무역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알렸지만,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이를 무시했다.[1][5][6]
흥선대원군은 제너럴셔먼호를 천주교 신부 처형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온 프랑스 해군의 징벌 임무를 수행하는 군함으로 오인했다. 그는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에게 배를 떠나지 않으면 선원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제너럴셔먼호는 일시적인 강우로 강의 깊이를 잘못 판단하여 조수가 빠지면서 좌초되었다. 8월 27일,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작은 배를 보냈으나, 박규수의 부하 이현익이 탄 정크선에 의해 가로막혔다.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정크선에 탄 사람들을 인질로 잡았고, 박규수는 인질 석방 협상을 시도했지만, 선원들은 쌀, 금, 은, 인삼을 요구하며 대치했다.[1][6]
제너럴셔먼호가 좌초되자 주변에 모여든 구경꾼들은 상황이 악화되면서 분노하여 화살, 돌, 화차 로켓을 제너럴셔먼호에 쏘아댔다. 혼란 중에 조선 병사 박종원이 작은 배를 지휘해 이현익을 구출했고, 제너럴셔먼호는 12파운드포로 구경꾼들을 포격하여 7명이 사망했다. 9월 2일, 흥선대원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을 파견하여 제너럴셔먼호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조선군은 금속판과 소가죽으로 보호하고 숨겨진 대포를 장착한 개조된 거북선을 건조하여 공격했으나, 제너럴셔먼호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 군함의 선원 1명이 사망했다.[1][7]
첫 공격이 실패하자, 조선군은 장작, 초석, 유황을 실은 작은 배 세 척을 밧줄로 묶어 불을 붙여 제너럴셔먼호로 보냈다. 첫 번째 화공선은 빗나갔고, 두 번째는 제너럴셔먼호에서 튕겨 나갔지만, 세 번째 화공선이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제너럴셔먼호의 선원과 승객들은 배에서 탈출했지만, 해안에 있던 분노한 구경꾼들에게 살해당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자신을 죽인 사람에게 성경을 건네주려다 죽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정부는 제너럴셔먼호의 대포를 인양하고, 이 사건을 승리로 기념했다.[1]
3. 1. 제너럴 셔먼호의 출항과 조선 접근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는 통상을 목적으로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 배에는 미국인 선장과 선원, 영국인, 중국인, 그리고 통역을 맡은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등이 탑승하고 있었다.[30] 제너럴셔먼호는 대포 2문이 설치된 증기선이었고, 선원들은 전원이 무장하고 있었다.[30]당시 톈진에 기반을 둔 영국의 메도즈 상사는 조선과 통상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에 따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와 용선 계약을 맺었다.[30] 배에는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의 상품이 선적되었고, 화물관리인으로 영국 출신 호가스(Hogarth)가 승선했다.[30]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는 1865년에 조선에 밀입국하여 조선어를 배운 경험이 있어 통역으로 승선했다.[30]
배의 이름은 미국의 군인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이름을 딴 것이었고, 톈진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 W. B. Preston)의 소유였다.[30] 제너럴셔먼호에는 선장 페이지(Page), 1등 항해사 윌슨(Willson), 13명의 청국인, 3명의 말레이시아인 선원 등 총 23명이 승선했으며, 선원들은 전원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30]
제너럴셔먼호는 선주 프레스턴을 태운 후 1866년 8월 9일에 체푸(Chefoo, 현재의 옌타이)를 출항하여 조선으로 향했다.[30]
3. 2. 조선 관리와의 초기 접촉과 통상 요구
1866년 8월 14일, 제너럴셔먼호는 충청남도 해안가에 도착하여 조선 관리들과 접촉,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서양과의 통상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불법 항해이므로 신속히 물러갈 것을 요구했다.[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중국 정크선의 인도로 8월 20일(음력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 경내에 진입했다. 당시 정크선의 선장 유화태는 1865년 말 토마스가 황해 지역에 왔을 때 탔던 배의 선장으로, 토마스에 따르면 20년 이상 조선인과 무역을 했던 사람이었다.[32]그해 봄에 벌어진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 군함의 보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조선 관원들은 긴장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자, 조선 관리들은 조심스럽게 이들과 접촉했다. 제너럴 셔먼호 측은 상거래를 요구하며, 비단, 자명종 등을 쌀, 사금, 홍삼, 호표피 등과 교역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관리들은 서양과의 교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불가능하지만, 식량과 보급품은 제공할 수 있다고 하며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려 하였다. 또한, 더 이상의 항해는 불법이니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3. 3. 대동강 진입과 갈등 심화
8월 21일(음력 7월 12일)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측의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올라왔다. 이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는 자신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조선의 중군(中軍) 이현익을 붙잡아 감금했다.[1]평양성 내의 관민(官民)은 이 사건에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이들에게 소총과 대포를 마구 쏘아댔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15] 강변의 군민들은 돌팔매, 활, 소총으로 셔먼호에 맞서 싸웠으며, 퇴교(退校) 박춘권은 배를 타고 가 이현익을 구출해 냈다.
3. 4. 좌초와 조선군의 공격
제너럴 셔먼호는 일시적인 강우로 강의 깊이를 잘못 판단했고, 조수가 물러가면서 강에 좌초되었다.[1] 1866년 8월 27일, 선원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작은 배를 파견했으나, 박규수의 부하인 조선 관리 이현익이 탄 정크선에 의해 가로막혔다.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은 정크선에 탄 사람들을 인질로 잡았다. 박규수는 석방을 협상하려 했지만, 선원들은 인질 석방에 대한 대가로 쌀, 금, 은, 인삼을 요구했다.[1][6]좌초된 상선 근처에 모여든 일반 구경꾼들은 상황이 전개되면서 분노하여 화살, 돌, 그리고 화차 로켓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혼란 속에, 조선 병사 박종원은 작은 배를 지휘하여 이현익을 구출했다. 이에 대응하여, 제너럴 셔먼호는 12파운드포로 일반 구경꾼들을 포격하여 7명을 죽였다.[1]
대원군은 9월 2일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을 파견하여 좌초된 상선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조선군은 처음에 금속판과 소가죽으로 보호하고 숨겨진 대포를 장착한 개조된 거북선을 건조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거북선의 대포는 제너럴 셔먼호의 장갑을 뚫지 못했고, 반격으로 조선 군함의 선원 1명이 사망했다.[1][7]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한 후, 조선군은 장작, 초석, 유황을 실은 작은 배 세 척을 밧줄로 묶어 불을 붙여 제너럴 셔먼호를 향해 흘려 보냈다. 첫 번째 화공선은 목표물을 빗나갔고 두 번째 파도는 제너럴 셔먼호에서 튕겨져 나갔지만, 세 번째 파도가 상선에 불을 질렀다.[1]
박규수는 1866년 9월 5일(음력 7월 27일)부터 포격을 가한 뒤 대동강 물에 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였고 화공선을 띄워 공격하며 결국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다.[16][17][18] 배에 불이 번지자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와 중국 상인 조능봉이 뱃머리로 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성난 평양 부민들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생존자들도 전원 사망했다.[33]
4. 결과 및 영향
사건 이후, 미국은 1867년 1월 슈펠트와 1868년 4월 페비거의 탐문 항행을 통해 셔먼호가 조선으로부터 오인받았고, 승조원의 도발적 행동으로 인해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20] 그러나 미국 정부는 강경한 포함책략에 따라 1871년 대한포함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응징적인 조선 원정을 단행하여 신미양요가 발발하였다.
미국 정부는 한국 관리들이 사건에 대해 알리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제너럴셔먼호를 영국 또는 프랑스 선박이라고 믿었고, 미국 정부에 알릴 경우 징벌적 원정이나 배상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
1871년, 미 국무부는 프레데릭 로를 미국 해군의 아시아 함대와 함께 제너럴셔먼호의 실종을 조사하고, 한국 정부와 통상 조약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했다. 원정대는 5월 16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일주일 후 인천에 도착한 뒤, 5월 28일 강화도에 닻을 내렸다. 5월 30일과 31일, 원정대는 한국 관리들과 접촉했지만, 그들은 미국 측의 협상 제안을 거부했다. 6월 1일, 원정대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한국군에게 기습을 받았고, 미국군은 기습 부대를 격퇴했다. 사과를 받지 못하고 제너럴셔먼호의 운명을 확인한 후, 미국 원정대는 일련의 한국 요새를 공격하고 점령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승리했지만, 한국 정부는 1876년 일·조 통상 조약에서만 종료될 고립주의 노선을 유지했다.[1][8]
4. 1. 조선의 쇄국 정책 강화
당시 조선 흥선대원군 정권은 이 사건과 같은 해 10월 26일(음력 9월)에 일어난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20]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5년 미국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권력을 승계받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탄핵(1868년) 등 어수선한 미국 국내 사정으로 바로 처리되지 못하고 5년 후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한편, 대동강에 침몰한 제너럴 셔먼호를 인양하여 철갑증기선을 건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수십만 냥을 들여 10개월 만에 복원하기는 했으나,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펴는 동안 증기선을 만들거나 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34][35]
4. 2. 신미양요의 원인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20] 사건 발생 후, 미국은 1867년 1월 슈펠트의 탐문 항행과 1868년 4월 페비거의 탐문 항행을 통해 셔먼호가 조선으로부터 오인받았고, 승조원의 도발적 행동으로 인해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강경한 포함책략에 따라 1871년 대한포함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응징적인 조선 원정을 단행하였다.[20]미국 정부는 한국 관리들이 사건에 대해 알리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제너럴셔먼호를 영국 또는 프랑스 선박이라고 믿었고, 미국 정부에 알릴 경우 징벌적 원정이나 배상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871년, 미 국무부는 프레데릭 로를 미국 해군의 아시아 함대와 함께 제너럴셔먼호의 실종을 조사하고, 한국 정부와 통상 조약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했다.[1]
원정대는 5월 16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일주일 후 인천에 도착한 뒤, 5월 28일 강화도에 닻을 내렸다. 5월 30일과 31일, 원정대는 한국 관리들과 접촉했지만, 그들은 미국 측의 협상 제안을 거부했다. 6월 1일, 원정대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한국군에게 기습을 받았고, 미국군은 기습 부대를 격퇴했다. 사과를 받지 못하고 제너럴셔먼호의 운명을 확인한 후, 미국 원정대는 일련의 한국 요새를 공격하고 점령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승리했지만, 한국 정부는 1876년 일·조 통상 조약에서만 종료될 고립주의 노선을 유지했다.[1][8]
4. 3. 현대사에서의 의미
북한은 1986년 9월 2일 대동강변에 셔먼호 격침비를 세웠으며, 그 바로 옆에 1968년 1월에 나포한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호를 정박시켜 대미(對美) 항전의 '전리품'으로 전시하고 있다.[36] 남한과 북한 모두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한말 구미 열강의 침략 사례로 기록하고 있지만, 미국과 적대 관계에 있는 북한은 셔먼호 격침비까지 세우고 매년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36] 또한, 북한은 김일성의 고조부인 김응우(1848∼1878)가 1866년 9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불법 침입한 제너럴셔먼호를 침몰시키는 데 앞장섰다고 선전하고 있다.[36]5. 논란과 쟁점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논란과 쟁점이 존재한다.
- 제너럴 셔먼호의 정확한 성격에 대한 논란
- 김응우의 역할에 대한 논란[1]
5. 1. 제너럴 셔먼호의 성격
제너럴 셔먼호는 원래 영국 군함이었으나, 1863년 1월 29일에 나포되어 남북전쟁에서 북부군 군함 USS 프린세스 로열로 사용되었다. 이후 1865년 8월 17일 민간에 판매되어 제너럴 셔먼호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는 1868년에 민간에 판매되었고, 1874년 1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여,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4]
제너럴 셔먼호는 보스턴 사업가 W. B. 프레스턴 소유의 무장 상선이었다. 선장 페이지, 부선장 윌슨(둘 다 미국인), 영국인 감독 조지 호가스, 중국인 선원이자 통역관 차오 링펑, 산둥 출신 항해사 2명, 베이징, 말라야, 남중국 출신 선원 10명(이들은 아마도 헨리 앤드레스 버거빈의 용병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을 포함한 13명의 아시아인 선원, 광저우 출신 환전상, 웨일스 출신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와 프레스턴이 탑승했다.[4]
제너럴 셔먼호의 무장은 다음과 같다.
- 4 X 8" Sg.
- 16 X 32 pdrs
배의 크기와 승무원 수는 다음과 같다.
항목 | 내용 |
---|---|
배수량 | 614톤 |
길이 | 38.81m |
선폭 | 10.5m |
흘수 | 503cm |
추진 방식 | 요트(Sail) + 외륜(Side-wheel steamer) |
승무원 | 150명 |
5. 2. 김응우의 역할
북한은 김형직의 조상인 김응우가 의병을 이끌고 배에 장작을 실어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한다.[1] 그러나 당시 조선 자료에는 김응우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 실제로 그가 참여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1]6.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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