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파빌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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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열 파빌리언은 1783년 브라이턴을 처음 방문한 웨일스 공(훗날 조지 4세)의 별장으로 시작되어, 헨리 홀랜드, 피터 프레데릭 로빈슨, 윌리엄 포든을 거쳐 존 내시에 의해 재설계되고 확장되었다.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의 외관과 중국 및 인도 스타일의 실내 장식으로 독특한 모습을 갖추었으며, 1845년 빅토리아 여왕의 마지막 방문 이후 브라이턴 시에 매각되어 공공 명소로 탈바꿈했다. 현재는 연간 약 40만 명이 방문하며, 결혼식 장소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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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열 파빌리언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건물 유형 | 궁전 |
| 건축 양식 | 인도-사라센 건축 |
| 위치 | 브라이턴 |
| 역사 | |
| 착공 | 1787년 |
| 완공 | 1823년 |
| 소유 및 관리 | |
| 소유주 | 로열 파빌리온 & 뮤지엄 트러스트 |
| 건축 및 디자인 | |
| 건축가 | 존 내시 |
| 기타 정보 | |
| 웹사이트 | 로열 파빌리온 공식 웹사이트 |
| 문화재 지정 번호 | 1380680 |
2. 역사
로열 파빌리언의 역사는 훗날 조지 4세가 되는 웨일스 공이 1783년 브라이턴을 처음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브라이턴은 그의 삼촌 커벌랜드 공작 헨리 왕자가 머물면서 상류 사회의 휴양지로 부상하던 곳이었다. 웨일스 공은 통풍 치료를 위한 주치의의 권유와 런던 왕실을 벗어나 마리아 피츠허버트(Maria Fitzherbert)와 시간을 보내려는 개인적인 이유 등으로 브라이턴에 머물게 되었고, 1786년 올드 스테인(Old Steine) 근처의 소박한 농가를 빌렸다.[22]
1787년, 웨일스 공은 칼턴 하우스(Carlton House)를 설계했던 건축가 헨리 홀랜드에게 의뢰하여 농가를 확장했고, 이는 프랑스풍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해양 파빌리언(Marine Pavilion)'으로 발전했다.[22] 이후 1801년부터 1808년까지 피터 프레데릭 로빈슨(Peter Frederick Robinson)과 윌리엄 포든(William Porden)에 의해 식당, 온실, 그리고 인도 양식의 웅장한 마구간 등이 추가되며 건물은 더욱 확장되었다.[3]
파빌리언이 오늘날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15년부터 1822년까지 건축가 존 내시가 진행한 대대적인 개축 덕분이다.[4] 내시는 당시 유행하던 피크처레스크 양식에 따라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의 외관과 시누아즈리(중국풍) 및 인도풍 요소가 혼합된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내부 디자인을 완성했다. 이는 프레데릭 크레이스(Frederick Crace)와 로버트 존스가 주로 담당했으며, 당시 주류였던 리젠시 양식과는 확연히 다른 파격적인 시도였다. '쾌락왕'으로 불린[24] 조지 4세는 파빌리언 건축과 사교 활동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는데, 이는 예술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25]
1830년 조지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은 윌리엄 4세도 파빌리언을 자주 이용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브라이턴의 번잡함과 파빌리언의 사생활 부족, 협소함 등을 이유로 이곳을 선호하지 않았다.[5] 결국 1845년 브라이턴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여왕은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를 새로운 여름 별장으로 선택했고, 정부는 파빌리언 매각을 추진했다. 1850년, 브라이턴 시는 '브라이턴 개선(로열 파빌리언 및 부지 구매)법'(Brighton Improvement (Purchase of the Royal Pavilion and Grounds) Act 1850)에 따라 파빌리언을 5.3만파운드에 매입했다.[6]
시 소유가 된 파빌리언은 집회실 등으로 활용되었고, 인접했던 왕실 마구간은 콘서트홀(브라이튼 돔)으로 개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 병원으로 전환되어 인도군 부상병과 영국군 사지 절단 환자들을 치료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9] 전쟁 중 인도 병사들을 치료했던 것을 기념하여 1921년에는 파티알라의 마하라자가 기증한 인도 스타일의 정문이 세워졌다.[12]
매각 당시 대부분의 가구는 왕실로 옮겨졌으나, 1860년대 후반 빅토리아 여왕을 시작으로 조지 5세와 메리 여왕,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상당수의 원래 가구와 비품을 반환하거나 영구 대여해주면서[14], 브라이턴 시는 파빌리언을 조지 4세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2020년부터는 '로열 파빌리언 & 박물관 트러스트'(Royal Pavilion & Museums Trust)라는 자선 단체가 건물과 소장품의 관리 및 운영을 맡고 있다.[7][8]
2. 1. 건립 배경
훗날 조지 4세가 되는 웨일스 공은 1783년, 21세의 나이로 브라이턴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브라이턴은 그의 삼촌인 커벌랜드 공작 헨리 왕자가 머물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해변 도시였다. 헨리 왕자는 요리, 도박, 극장, 방탕한 생활을 즐겼는데, 젊은 웨일스 공 역시 이러한 취향을 공유하며 삼촌과 함께 브라이턴의 그로브 하우스(Grove House)에서 지냈다. 또한, 웨일스 공은 주치의로부터 바닷물과 신선한 공기가 자신의 통풍 치료에 좋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브라이턴은 1750년대 영국 의사 리처드 러셀이 해수욕을 건강 요법으로 권장하면서 상류층과 중산층의 휴양지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곳이었는데, 웨일스 공이 이곳에 별장을 마련하면서 고급 휴양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23]1786년, 런던의 칼턴 하우스(Carlton House) 건설 비용 문제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의회의 조사를 받게 된 웨일스 공은 브라이턴의 올드 스테인(Old Steine) 근처에 있는 소박한 농가를 빌렸다.[22] 이곳은 당시 방문객들이 산책로로 이용하던 풀밭 지역이었다. 런던 왕실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웨일스 공이 오랜 연인 마리아 피츠허버트(Maria Fitzherbert)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는 피츠허버트와 결혼하고 싶어 했으나, 그녀가 로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1772년 왕실 결혼법(Royal Marriages Act 1772)에 따라 결혼이 금지되었다.
1787년, 웨일스 공은 칼턴 하우스를 디자인했던 건축가 헨리 홀랜드에게 의뢰하여 기존 농가를 확장했다. 이 건물은 중앙에 로툰다가 있고 양옆으로 날개가 펼쳐진 형태의 '해양 파빌리언(Marine Pavilion)'이 되었으며, 아침 식사실, 식당, 도서관 등 세 개의 주요 방으로 구성되었다. 내부는 홀랜드 특유의 프랑스풍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꾸며졌고, 비아지오 레베카(Biagio Rebecca)의 장식 그림이 더해졌다.[22]
1801년부터 1802년 사이에는 홀랜드 사무실 출신인 피터 프레데릭 로빈슨(Peter Frederick Robinson)의 설계로 새로운 식당과 온실이 추가되며 파빌리언이 한 차례 더 확장되었다. 웨일스 공은 건물 주변 땅을 사들여 1803년부터 1808년까지 윌리엄 포든(William Porden)에게 의뢰해 인도 양식의 웅장한 승마 학교와 마구간을 지었다. 이 마구간은 말 60마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기존 해양 파빌리언을 압도할 정도였다.[3]
1815년부터 1822년까지 건축가 존 내시가 파빌리언을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재설계하고 대대적으로 확장했다.[4] 내시는 당시 유행하던 피크처레스크 양식을 따라 다양한 스타일을 혼합하고 의외성을 추구했다. 그 결과, 궁전은 독특한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의 외관을 갖추게 되어 브라이턴 시내에서 단연 눈에 띈다. 실내 디자인은 주로 프레데릭 크레이스(Frederick Crace)와 로버트 존스가 맡았는데, 중국풍(시누아즈리)과 인도풍(무굴 건축, 이슬람 건축 요소 포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매우 환상적이고 기발하게 꾸며졌다. 이는 당시 주류였던 고전적인 리젠시 양식과는 다른 이국주의 취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쾌락왕', '방탕왕'으로 불릴 정도로 놀이와 사치를 즐겼던[24] 조지 4세는 로열 파빌리언 건설과 완공 후 사교 활동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이는 건축, 공예, 패션, 음악 등 예술 분야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영국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25]
2. 2. 초기 건축
웨일스 공(훗날 조지 4세)은 1783년 21세의 나이로 브라이턴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브라이턴은 조지의 삼촌인 커벌랜드 공작 헨리 왕자가 거주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해변 도시였다. 헨리 왕자는 훌륭한 요리, 도박, 극장, 그리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는데, 젊은 왕자 역시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며 그와 함께 브라이턴의 그로브 하우스(Grove House)에서 지냈다. 또한, 왕자는 주치의로부터 바닷물과 신선한 공기가 자신의 통풍 치료에 좋다는 조언을 받았다.1786년, 런던의 칼턴 하우스(Carlton House) 건설로 인한 사치스러운 지출 때문에 의회의 조사를 받으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왕자는 올드 스테인(Old Steine) 근처의 소박한 농가를 임대했다. 올드 스테인은 당시 방문객들이 산책로로 이용하던 브라이턴의 풀밭 지역이었다. 런던 왕실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이 파빌리언은 왕자가 오랜 연인 마리아 피츠허버트(Maria Fitzherbert)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왕자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으나, 그녀가 로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1772년 왕실 결혼법(Royal Marriages Act 1772)에 따라 결혼이 금지되었다.
1787년, 왕자는 칼턴 하우스의 설계자였던 헨리 홀랜드에게 기존 농가 건물을 확장하도록 의뢰했다.[22] 이 건물은 중앙 로툰다 양옆으로 날개가 달린 형태의 해양 파빌리언(Marine Pavilion)으로 발전했으며, 아침 식사실, 식당, 도서관 등 세 개의 주요 방을 갖추었다. 내부는 홀랜드 특유의 프랑스풍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꾸며졌고, 비아지오 레베카(Biagio Rebecca)의 장식 그림으로 채워졌다. 1801년부터 1802년 사이에는 홀랜드의 사무실에서 일했던 피터 프레데릭 로빈슨(Peter Frederick Robinson)의 설계에 따라 새로운 식당과 온실이 추가되어 파빌리언이 더욱 확장되었다.
왕자는 건물 주변의 땅을 추가로 사들였고, 1803년부터 1808년까지 윌리엄 포든(William Porden)의 설계로 인도 양식의 웅장한 승마 학교와 마구간을 지었다. 이 건물들은 60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기존의 해양 파빌리언을 압도할 정도였다.[3]
이후 파빌리언은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중국산 벽지를 선물 받은 것을 계기로 당시 유행하던 시누아즈리 양식을 도입하여 전면 개조하기로 결정하고, 피크처레스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가 존 내시에게 설계를 맡겼다. 1815년부터 1822년까지 7년에 걸쳐 진행된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통해 오늘날 볼 수 있는 모습이 완성되었다.[4] 존 내시는 다양한 스타일을 혼합하고 의외성을 추구하는 피크처레스크 양식에 따라,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의 외관과 중국, 인도 스타일(무굴 건축 및 이슬람 건축 요소 포함)이 혼합된 독특하고 이국적인 내부 디자인을 선보였다. 실내 디자인은 주로 프레데릭 크레이스(Frederick Crace)와 로버트 존스가 담당했다. 이는 당시 주류였던 고전적인 리젠시 양식과는 다른 이국주의(Exoticism)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로열 파빌리언이 위치한 브라이턴은 1750년대 영국 의사 리처드 러셀이 해수욕을 건강 요법으로 주장하면서 상류 및 중산층의 휴양지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곳이다.[23] 조지 4세가 이곳에 별장을 마련하면서 브라이턴은 고급 휴양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조지 4세는 '쾌락왕', '방탕왕'으로 불릴 만큼 유흥과 사치를 즐겼으며[24], 로열 파빌리언 건설과 완공 후 사교 활동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이는 건축, 공예, 패션, 음악 등 예술 분야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영국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25]
2. 3. 존 내시의 개축
1787년,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조지 4세는 칼턴 하우스(Carlton House)의 디자이너 헨리 홀랜드에게 올드 스테인(Old Steine) 근처에 빌린 소박한 농가를 확장하도록 의뢰했다. 이는 중앙 로툰다 양옆으로 건물이 배치된 '해양 파빌리언(Marine Pavilion)'의 기초가 되었으며, 홀랜드 특유의 프랑스풍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꾸며졌다[22]. 1801년부터 1802년 사이에는 홀랜드 사무실 출신의 피터 프레데릭 로빈슨(Peter Frederick Robinson)의 설계로 새로운 식당과 온실이 추가되며 파빌리언이 더욱 확장되었다. 1803년부터 1808년 사이에는 윌리엄 포든(William Porden)이 설계한 인도 양식의 웅장한 승마 학교와 마구간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60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기존의 해양 파빌리언을 압도했다.[3]
이후 조지 4세는 중국산 벽지를 선물 받은 것을 계기로, 당시 유행하던 시누아즈리 풍으로 파빌리언을 전면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1815년부터 1822년까지 피크처레스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가 존 내시가 파빌리언의 재설계와 대대적인 확장을 맡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로열 파빌리언의 모습은 대부분 그의 작품이다.[4] 내시는 다양한 건축 양식을 혼합하고 예상치 못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피크처레스크 양식에 따라, 기존 건물을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의 독특한 외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브라이턴 시내 한가운데 자리한 이 궁전의 외관은 매우 이국적인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내부 디자인은 주로 프레데릭 크레이스(Frederick Crace)와 장식 화가 로버트 존스가 담당했으며, 중국과 인도의 무굴 건축 및 이슬람 건축 요소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당시 주류였던 리젠시 양식의 고전적인 취향과는 다른, 이국적인 것에 대한 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지 4세는 '쾌락왕', '방탕왕'으로 불릴 만큼 유흥과 사치를 즐겼으며[24], 로열 파빌리언 건설과 완공 후 사교 활동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이는 건축, 공예, 패션, 음악 등 예술 분야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영국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25]
2. 4. 브라이턴 시 매각
1830년 조지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은 윌리엄 4세 역시 브라이턴을 자주 방문하며 파빌리언에 머물렀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브라이턴과 파빌리언의 사생활 부족을 이유로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1841년 브라이턴이 철도로 런던과 연결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는 여왕의 불편함을 더했다. 게다가 파빌리언은 늘어나는 여왕의 가족들이 지내기에는 비좁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브라이턴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끊임없는 관심에 불쾌감을 느끼며 "여기 사람들은 매우 경솔하고 귀찮게 군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결국 빅토리아 여왕은 와이트 섬에 있는 오스본 하우스를 왕족의 여름 별장으로 삼기로 하고, 1845년 브라이턴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 정부는 파빌리언 건물과 부지를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 브라이턴 개선 위원회와 브라이턴 교구는 정부에 청원하여, 1850년 '브라이턴 개선(로열 파빌리언 및 부지 구매)법'(Brighton Improvement (Purchase of the Royal Pavilion and Grounds) Act 1850, 13 & 14 Vict. c. v)에 따라 파빌리언을 5.3만파운드에 시에 매각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6] 이 매각으로 얻은 자금은 오스본 하우스의 가구를 마련하는 데 사용되었다.
1860년에는 파빌리언에 인접한 왕실 마구간이 콘서트홀로 개조되었으며, 이곳은 현재 브라이튼 돔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이턴 시는 이 건물을 집회실 용도로 활용했다. 파빌리언 매각 당시, 원래 있던 비품과 가구의 대부분은 왕실의 명령에 따라 제거되어 버킹엄 궁전이나 윈저 성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860년대 후반, 빅토리아 여왕은 사용하지 않던 많은 비품을 브라이턴으로 반환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이 더 많은 가구를 돌려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브라이턴 시는 파빌리언을 조지 4세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50년대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00점이 넘는 가구 품목을 영구적으로 대여해주면서 복원 작업에 큰 힘이 되었다. 시는 방을 복원하고, 스터드 벽을 다시 설치하며, 일부 원래 비품과 가구 조각의 복제품을 제작하는 등 광범위한 복원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20년에는 로열 파빌리언 및 박물관의 건물과 소장품 관리 및 운영 주체가 브라이튼 & 호브 시의회에서 새로운 자선 단체인 '로열 파빌리언 & 박물관 트러스트'(Royal Pavilion & Museums Trust)로 이전되었다.[7][8]
2. 5.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로열 파빌리언은 브라이튼의 다른 장소들과 함께 군 병원으로 개조되었다.[9] 1914년 12월부터 1916년 1월까지, 인도군의 아프고 부상당한 병사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쿠다다드 칸, 샤하마드 칸, 미르 다스트와 같이 많은 빅토리아 십자 훈장 수여자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파빌리언 병원은 인접한 돔과 콘 익스체인지까지 포함하여 운영되었는데, 이 건물들은 과거 왕실 마구간 단지의 일부였다.
파빌리언 병원은 2개의 수술실과 720개 이상의 병상을 갖추고 있었으며, 총 2,300명 이상의 인도군 병사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환자들의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심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병원 부지에는 9개의 각기 다른 주방이 설치되어, 병사들은 자신과 같은 카스트 구성원이자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요리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무슬림 병사들에게는 메카 방향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동쪽 잔디밭 공간이 제공되었고, 시크교 병사들을 위해서는 부지 내에 텐트 형태의 구르드와라가 마련되었다.[10]
당시 영국 제국 정부는 파빌리언 병원을 영국령 인도 출신 부상병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선전의 장으로 활용했다. 국가의 공식적인 인가를 받아, 화려했던 궁전의 방들이 병동으로 개조된 모습을 담은 일련의 사진들이 제작되기도 했다.[11] 1915년 7월에는 허버트 키치너 경이, 같은 해 8월에는 국왕 조지 5세가 병사들을 방문하여 미르 다스트를 포함한 여러 병사들에게 군사 훈장을 수여했다.
인도 병사를 위한 군 병원은 1916년 1월 말에 문을 닫았다. 이는 대부분의 영국 인도군이 프랑스의 서부 전선에서 철수하여 중동 지역으로 재배치된 데 따른 조치였다.
파빌리언은 1916년 4월에 다시 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팔다리를 잃은 영국 군인들을 치료하는 '사지 절단 병동'으로 운영되었다. 이곳에서는 병사들의 신체적 치료뿐만 아니라, 기술 및 직업 훈련을 통해 사회 복귀를 돕는 재활 프로그램에도 중점을 두었다. 파빌리언 병원은 1920년 여름까지 운영되었고, 이후 건물은 브라이튼 시에 반환되었다.
1921년에는 인도 스타일로 디자인된 새로운 정문이 공개되었다. 이는 전쟁 중 파빌리언에서 치료받았던 인도 병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파티알라의 마하라자가 기증한 것이다.[12]
2. 6. 현재
1830년 조지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윌리엄 4세 역시 브라이튼을 자주 방문하며 파빌리언에 머물렀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브라이튼과 파빌리언의 사생활 부족을 싫어했다. 1841년 브라이튼이 철도로 런던과 연결되면서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졌고, 늘어나는 여왕의 가족들에게 파빌리언은 비좁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브라이튼에서 자신이 받는 끊임없는 관심에 불쾌감을 느껴 "여기 사람들은 매우 경솔하고 귀찮게 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5]
빅토리아 여왕은 와이트 섬에 있는 오스본 하우스를 위해 부지를 매입했으며, 그곳은 왕족의 여름 별장이 되었다. 1845년 브라이튼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후, 정부는 건물과 부지를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 브라이튼 개선 위원회와 브라이튼 교구는 1850년 '브라이튼 개선(로열 파빌리언 및 부지 구매)법'(13 & 14 Vict. c. v)에 따라 파빌리언을 5.3만파운드에 시에 매각하도록 정부에 성공적으로 청원했다.[6] 이 매각 대금은 오스본 하우스의 가구를 마련하는 데 사용되었다.
1860년에는 인접한 왕실 마구간이 콘서트홀로 개조되어 현재 브라이튼 돔으로 알려져 있다. 시는 이 건물을 집회실로 사용했다. 파빌리언의 원래 비품과 가구 대부분은 매각 당시 왕실의 명령에 따라 제거되어 버킹엄 궁전이나 윈저 성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860년대 후반 빅토리아 여왕은 사용하지 않던 많은 비품을 브라이튼에 반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조지 5세와 메리 여왕도 더 많은 가구를 반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브라이튼 시는 파빌리언을 조지 4세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100점 이상의 가구 품목을 영구 대여받아 복원 작업에 힘을 얻었다. 시는 방 복원, 스터드 벽 재설치, 일부 원래 비품 및 가구 조각의 복제품 제작 등 광범위한 복원 프로그램을 수행했다.
2020년에는 로열 파빌리언 및 박물관의 건물 및 소장품 관리 및 운영이 브라이튼 & 호브 시의회에서 새로운 자선 단체인 로열 파빌리언 & 박물관 트러스트로 이전되었다.[7][8]
브라이튼 시가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로열 파빌리언을 매입한 것은 이곳이 관광 명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열 파빌리언은 개인 저택에서 시 소유의 공공 명소로 탈바꿈했다. 오늘날 매년 약 40만 명이 로열 파빌리언을 방문한다. 로열 파빌리언 내부에서는 일반 촬영과 사진 촬영이 허용된다.[13] 궁전 내 많은 유물들은 대여된 상태이며, 특히 국왕으로부터 대여된 것들이 많다.[14]
로열 파빌리언은 결혼식 장소로도 허가받았다. 2014년 3월 29일, 로열 파빌리언은 2013년 동성 커플 법 통과 이후 영국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동성 결혼 중 하나를 주최했다.[15][16]
3. 건축
크렘린 대궁전을 본뜬 외관과 달리 내부는 중국풍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건축 재료로 당시 최신 기술인 주철이 사용된 것이 특징이다.
3. 1. 주요 시설
크렘린 대궁전을 본뜬 돔과 열주가 인상적인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대나무, 용, 연꽃, 탑과 같은 중국적인 상징과 그림, 문양이 곳곳에 사용되어 서양과 동양이 뒤섞인 독특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는 방문객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의도된 것이다.건축 재료로는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주철이 사용된 점이 특징이다. 주철은 건물의 구조뿐만 아니라, 가늘고 장식적인 기둥이나 겉보기에는 대나무처럼 보이는 계단 난간 등에도 활용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건물이 공공 건축물 중 철이 외부로 노출된 채 사용된 최초의 사례라고 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입구 홀, 살롱, 회랑, 연회장, 음악실 등이 있으며, "킹스 아파트먼트"라고 불리는 왕의 개인적인 거실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3. 2. 건축 기술
로열 파빌리언 건축에는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주철이 사용된 것이 특징이다. 주철은 건물 구조뿐만 아니라, 가늘고 장식적인 기둥이나 겉보기에는 대나무처럼 보이는 계단 난간 등에도 활용되었다. 연구자들은 공공 건축에서 철이 외부로 노출된 채 사용된 첫 사례로 이 건물을 꼽기도 한다.4. 로열 파빌리언 정원

로열 파빌리언 정원은 파빌리온 부지에 위치해 있으며, 다양한 식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건축가 내시(Nash)의 원래 리젠시 시대 모습을 되살려 복원되었으며, 영국에서 완전히 복원된 유일한 리젠시 시대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은 원예 책임자와 자원봉사자를 포함한 트러스트의 정원 팀에 의해 유기농 방식으로만 관리된다.[17]
이 정원은 특히 여름철에 거리 공연가들이 자주 이용하며, 정원 내에는 카페도 운영되고 있다.[18]
정원은 사적 공원 및 정원 등록부에 2급으로 등재되어 있다.[19] 그러나 2017년 10월,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정원의 독창적인 특징들이 보기 흉한 울타리, 쓰레기통, 표지판, 조명 등으로 인해 훼손되고 가려져 '위험' 상태에 있다고 평가했다.[20] 이에 브라이턴 앤 호브 시의회는 정원의 미래에 대한 대중 상담을 시작했다. 2017년 한 해 동안 시의회에 보고된 20,000건 이상의 범죄 및 반사회적 행위(음란 행위 및 약물 남용 포함) 목록이 공개되면서, 정원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야간에 폐쇄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21]
5. 한국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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