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베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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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뤼베크 전투는 1806년 11월 6일과 7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퇴각하는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나폴레옹의 추격에 프로이센군은 뤼베크에 집결했으나,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도시가 점령당했다.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궤멸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했다. 블뤼허는 라테카우에서 항복했으며, 이 과정에서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포로를 정중하게 대우한 것이 스웨덴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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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작센 연합군을 작센 지방의 두 지역에서 동시에 격파하여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고 군대와 국가 체제 개혁의 계기를 마련한 전투이다. - 1806년 프랑스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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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베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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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나폴레옹 전쟁 중 제4차 대프랑스 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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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06년 11월 6일 |
장소 | 독일 뤼베크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Flag of France.svg|23px]]프랑스 |
교전국 2 |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23px]]프로이센 [[파일:Swedish flag naval ensign.svg|23px]]스웨덴 |
교전국 3 | [[파일:Flag of Denmark.svg|23px]]덴마크-노르웨이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랑스 | [[파일:Flag of France.svg|23px]]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파일:Flag of France.svg|23px]]조아킴 뮈라 [[파일:Flag of France.svg|23px]]장드듀 술트 |
프로이센/스웨덴 |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23px]]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
덴마크-노르웨이 | [[파일:Flag of Denmark.svg|23px]]요한 에발트 |
병력 규모 | |
프랑스 | 30,000–35,000명, 대포 90문 |
프로이센/스웨덴 | 프로이센: 17,000명, 대포 52문 스웨덴: 1,800명 총합: 15,000–18,800명, 대포 52문 |
덴마크-노르웨이 | 해당사항 없음 |
사상자 및 피해 | |
프랑스 | 1,500–2,000명 (전사, 부상, 포로) |
프로이센/스웨덴 | 6,000–9,000명 (전사, 부상, 포로) 9,000명 (11월 7일 항복) |
2. 배경
1806년 10월 14일,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져 뿔뿔이 흩어졌고, 일부 장교들은 충분한 병력과 보급품을 가지고 있음에도 프랑스군에게 항복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게르하르트 폰 블뤼허는 냉정을 유지하며 바이마르 공작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저항을 계속하려 했다.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군단은 블뤼허의 뒤를 쫓았다.
2. 1.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와 프로이센군의 후퇴
1806년 10월 14일, 나폴레옹 황제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맹렬하게 추격했고, 프로이센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궤멸 직전에 놓였다.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는 상황에서, 게르하르트 폰 블뤼허는 냉정을 유지하며 저항을 계속했다. 블뤼허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 휘하 병력의 지휘를 맡아 북쪽으로 이동하며 프랑스군에 맞섰고,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군단이 그 뒤를 쫓았다.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프로이센군은 여러 부대로 나뉘어 퇴각했다. 호엔로에-잉겔핑겐의 프리드리히 루이 공은 하르츠 산맥을 넘어 퇴각하는 부대를 이끌었고, 블뤼허와 프리드리히 아돌프 폰 칼크로이트 백작은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이들 뒤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작과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폰 비닝의 지휘 아래 12,000명의 병력이 따랐다. 한편, 오렌지 공은 10월 16일 에르푸르트 항복에서 10,000명이 넘는 프로이센군을 요아킴 뮈라 원수의 기병 군단에 항복시켰다.
뷔르템베르크의 오이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공이 지휘하는 16,000명의 예비군은 할레에 머물렀으나, 10월 17일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1군단에게 격파당하고 마그데부르크로 후퇴했다. 10월 20일, 호엔로에는 마그데부르크에서 뷔르템베르크의 군대와 합류했다. 니콜라 수르 원수는 제4군단과 뮈라와 함께 마그데부르크 외곽에 도착하여 호엔로에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0월 22일, 수르트와 미셸 네 원수의 제6군단은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했고, 호엔로에는 9,000명의 병력을 남겨두고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칼크로이트와 합류했다.

블뤼허는 튀링겐 노르트하우젠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10월 24일 잔다우에서 엘베강을 건넜다. 작센-바이마르는 바트랑겐잘차에서 뮐하우젠을 거쳐 오스테로데 암 하르츠로 행군한 후, 마그데부르크에서 수르트를 속이고 잔다우에서 엘베강을 건넜다.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는 10월 26일 알텐자운에서 훌륭한 후위 작전을 펼쳐 작센-바이마르의 병력이 안전하게 강을 건너도록 도왔다. 이때 비닝은 작센-바이마르로부터 부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호엔로에는 10월 24일 노이슈타트 안 데어 도세에 도착했고, 블뤼허는 호엔로에의 후위 부대 지휘를 맡았다. 호엔로에는 준장(Brigadier General)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쉬멜페니히 폰 데어 오예를 보내 하펠강을 따라 있는 다리들을 파괴하여 우익을 보호하려 했다.
10월 25일, 호엔로에의 주력 부대는 노이루핀과 린도 사이에 있었고, 비트슈토크와 키리츠에도 병력을 배치했다. 블뤼허의 후위 부대는 베르나도트의 선두 부대와 충돌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쉬멜페니히보다 먼저 오라니엔부르크를 점령했다.
10월 26일, 뮈라는 체데니크에서 쉬멜페니히의 부대를 격파했다. 다음 날, 보이첸부르거 란트에서 혼란스러운 전투 끝에 호엔로에는 프랑스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10월 28일, 뮈라는 프렌츨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했고, 엠마누엘 그루시와 마르크 앙투안 드 보몽의 용기병 여단이 활약하여 호엔로에를 항복시켰다. 약 10,000명의 병사, 64문의 대포, 1,800마리의 기병 말이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후 며칠 동안, 프로이센군은 각지에서 항복했다. 10월 29일 파제발크 항복에서 4,000명이 항복했고, 앙투안 라살 장군은 슈테틴 항복을 받아냈다. 10월 30일에는 앙클람 남쪽 볼데코프에서 포병 호송대가 항복했고, 11월 1일에는 니콜라 레오나르 베케르 사단장에게 빌라의 부대가 항복했다. 같은 날 퀴스트린 요새도 항복했다.
수르트는 마그데부르크 포위를 네에게 맡기고 엘베강을 건너 북동쪽으로 향했다. 베르나도트는 10월 29일 보이첸부르크에 도착했고, 블뤼허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노이슈텔리츠로 진군했다. 베르나도트의 기병 연대를 이끌던 에티엔 모리스 제라르 대령은 블뤼허의 병사 400명을 포획하고 프로이센군이 바렌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0월 31일, 블뤼허와 비닝의 부대가 바렌 근처에서 만났다. 비닝은 로스토크로 탈출하려 했으나, 블뤼허는 보이젠부르크에서 엘베강을 다시 건너 하노버 선제후국의 카를 루트비히 폰 레코크 장군이나 마그데부르크의 프란츠 카지미르 폰 클라이스트 중장과 합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블뤼허는 자신의 군대를 두 개의 군단으로 재편성했다. 비닝은 11,000명의 제1군단을, 블뤼허는 10,000명의 제2군단을 지휘했다.
이때 블뤼허를 추격하는 프랑스군은 47,252명이었다.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 수르트의 제4군단, 그리고 루이 미셸 앙투안 사욱, 그루시, 라살, 장 조제프 앙주 도폴이 이끄는 기병대가 있었다. 뮈라와 그의 기병대는 프렌츠라우와 슈테틴에서 승리한 후 빠르게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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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프로이센군은 바렌에서 철수했다. 블뤼허는 북서쪽으로, 비닝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같은 날 프로이센군은 안 쟝 마리 르네 사바리 사단장의 제1 후사르 연대 및 제7 샤쇠르 아 슈발 연대와 교전했다. 요르크는 바렌-노젠틴 전투에서 훌륭한 전술적 지휘를 보여주었고, 장바티스트 드루에, 에를롱 백작 사단이 노젠틴 마을을 점령했지만, 요르크와 플레츠는 알트 슈베린으로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11월 2일, 사욱의 제4용기병 사단은 라테노에서 출발했고, 뮈라는 뎀민에서 서쪽으로 진격했다. 베르나도트는 노젠틴에, 수르트는 바렌에 있었다. 그날 그란친 근처에서 드루에 사단은 프로이센군 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11월 2일과 3일, 볼가스트 항구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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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오스왈드의 후위 부대는 크리비츠에서 프로이센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프랑스군은 올리비에 마쿠 리보 드 라 라피니에르 사단장의 베르나도트 제2사단 소속이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을 크리비츠에서 몰아냈지만, 피에르 와티에 여단장의 경솔한 공격으로 인해 프로이센군의 반격을 허용했다. 제라르는 포로로 잡혔고, 베르나도트는 보병 사각 진형 안으로 피신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슈베린 근처의 메우스 마을을 점령하고, 피노에서 프로이센군 1개 대대를 전멸시켰다.
11월 4일, 블뤼허는 슈베린에서 가데부쉬로 후퇴했다. 같은 날, 하멜른에서 레코크의 군단에서 온 오베르스트(Oberst)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폰 데어 오스텐이 블뤼허와 합류했고, 보베저도 그의 부대와 함께 다시 합류했다. 11월 5일, 비스마르 항구에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이때 블뤼허의 병력은 약 16,000~17,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는 100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있었다. 블뤼허는 한자 동맹의 도시 국가인 뤼베크로 후퇴하여 스웨덴군과 합류하려 했다. 11월 5일 아침, 프로이센군은 뤼베크 앞에 나타나 도시를 점령했다. 블뤼허는 시 의회에 많은 양의 물자를 요구했지만, 도시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1,800명의 스웨덴군 여단이 10월 31일 뤼베크에 입성하여 귀국을 위한 수송선을 확보하려 했다. 그들은 11월 4일에 배를 탔지만, 역풍으로 인해 트라베 강에 갇혔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군을 점령하려 했고, 수르트는 블뤼허의 후위 부대를 공격하여 뤼베크 남쪽으로 몰아냈다. 수르트와 뮈라는 뤼베크를 남쪽에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덴마크군 요한 에발트 중장은 스토켈스도르프로 진군하여 블뤼허에게 덴마크의 중립을 지키겠다고 통보했다.
2. 2. 프랑스군의 추격
1806년 10월 14일, 나폴레옹 황제는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나폴레옹의 추격에 프로이센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궤주 상태가 되었고, 일부 프로이센 장교들은 야전군과 보급물자가 가득한 요새를 가지고 있음에도 프랑스군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르하르트 폰 블뤼허는 냉정을 유지하며 바이마르 공 휘하 병력의 지휘를 맡아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저항하려 했고,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군단이 이를 추격했다.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패배 이후, 프로이센군은 여러 부대로 나뉘어 퇴각했다. 호엔로에-잉겔핑겐의 프리드리히 루이 공은 하르츠 산맥을 거쳐 퇴각하는 부대를 지휘했고, 블뤼허와 프리드리히 아돌프 폰 칼크로이트 백작은 12,000명의 부대와 함께 호엔로에를 뒤따랐다.[1] 이들 뒤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과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폰 비닝의 지휘 아래 12,000명의 병력이 따랐다. 오렌지 공은 에르푸르트 항복에서 10,000명 이상의 프로이센군을 요아킴 뮈라 원수의 기병 군단에 항복시켰다.[2]
뷔르템베르크의 오이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공이 지휘하는 예비군 16,000명은 할레에 남아 있었으나,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1군단 20,600명이 할레 전투에서 이들을 공격했다.[3] 예비군은 마그데부르크로 후퇴했고, 호엔로에와 합류했다. 니콜라 장 드 듀 술트 원수는 제4군단과 뮈라와 함께 마그데부르크 외곽에 도착하여 호엔로에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술트와 미셸 네 원수의 제6군단은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했고, 호엔로에는 마그데부르크 근처 부르크를 거쳐 북동쪽으로 행군하여 칼크로이트와 합류했다.
블뤼허는 튀링겐 노르트하우젠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잔다우에서 엘베강을 건넜다. 작센-바이마르는 바트랑겐잘차에서 뮐하우젠으로, 그리고 오스테로데 암 하르츠로 행군한 후, 마그데부르크에서 술트를 속이는 기만전을 펼치고 잔다우에서 엘베강에 도달했다.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는 알텐자운에서 훌륭한 작전을 수행하여 프로이센 후위 부대가 작센-바이마르의 병력이 안전하게 동쪽 강둑에 도달할 때까지 술트의 선봉 부대를 막아냈다. 이때 비닝은 작센-바이마르로부터 부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호엔로에는 노이슈타트 안 데어 도세에 도착한 후, 블뤼허에게 후위 부대 지휘를 맡겼다. 호엔로에는 준장(Brigadier General)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쉬멜페니히 폰 데어 오예를 보내 하펠강을 따라 모든 다리를 파괴하여 우익을 보호하려 했다.
노이루핀과 린도 사이에 있던 호엔로에의 주력 부대는 비트슈토크로 행군했고, 키리츠에 도달했다. 블뤼허의 후위 부대는 베르나도트의 선두 부대와 충돌 후 노이슈타트 근처에 있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쉬멜페니히가 도착하기 전에 오라니엔부르크를 점령했다.
뮈라는 체데니크에서 쉬멜페니히의 부대를 격파했고, 보이첸부르거 란트에서 혼란스러운 전투 후 호엔로에는 프랑스군의 도로 차단을 돌파하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뮈라는 프렌츨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여 호엔로에를 속여 항복시켰다. 약 10,000명의 병사, 64문의 대포, 1,800마리의 기병 말이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다.
다음 날, 프로이센군 4,000명이 파제발크 항복에서 프랑스 경 기병 여단 2개에 항복했고, 앙투안 라살 장군은 슈테틴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후 소규모 프로이센 부대가 정리되었다. 앙클람 남쪽 볼데코프에서 포병 호송대가 항복했고, 니콜라 레오나르 베케르 사단장의 용기병에게 앙클람에서 무기를 내려놓았으며, 루이 다부 원수의 제3군단 여단 중 하나에 퀴스트린 요새도 항복했다.
네에게 마그데부르크 포위를 맡긴 술트는 탕에르뮌데에서 엘베강을 건너 북동쪽으로 향했다. 베르나도트는 노이슈텔리츠로 진군하여 블뤼허의 병사 400명을 포획하고 프로이센군이 바렌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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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뤼허와 비닝의 부대가 바렌 근처에서 만났다. 비닝은 로스토크 항구로 탈출하려 했으나, 블뤼허는 보이젠부르크에서 엘베강을 다시 건너 하노버 선제후국에서 카를 루트비히 폰 레코크 장군과 합류하거나 마그데부르크에서 프란츠 카지미르 폰 클라이스트 중장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블뤼허는 자신의 군대를 두 개의 군단으로 재편성했다. 비닝은 11,000명의 제1군단을, 블뤼허는 10,000명의 제2군단을 지휘했다.
이때 블뤼허를 추적하는 프랑스군은 47,252명이었다.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15,450명, 술트의 제4군단은 24,375명, 루이 미셸 앙투안 사욱 사단장은 용기병 2,550명, 그루시는 용기병 2,432명, 라살은 경 기병 785명, 장 조제프 앙주 도폴 사단장은 흉갑기병 1,660명을 이끌었다. 베르나도트는 가장 훈련된 병사 12,000명을 이끌고 전진했다. 뮈라와 그의 기병대는 프렌츠라우와 슈테틴에서 승리한 후 빠르게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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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군은 바렌에서 철수했다. 블뤼허는 프리드리히 고틀리프 폰 오스왈트 소장의 후위 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북서쪽으로, 비닝은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플레츠 대령의 후위 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서쪽으로 진군했다. 요르크의 전술적 지휘하에 프로이센군은 바렌-노젠틴 전투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베르나도트가 장바티스트 드루에, 에를롱 백작 사단을 노젠틴 마을 점령에 투입했지만, 요르크와 플레츠는 알트 슈베린으로 철수했다.
그란친 근처에서 드루에 사단은 프로이센군 500명을 따라잡아 대포 1문과 57명의 사상자를 냈고, 볼가스트 항구는 앙드레 조제프 부사르 여단장 휘하의 제22용기병 연대에 항복했다. 호엔로에의 짐 수송대 2,500명은 그루시 사단의 손에 넘어갔다.

오스왈드의 후위 부대는 크리비츠에서 프러시아 승리라고 불리는 작전을 벌였다. 프랑스 보병은 올리비에 마쿠 리보 드 라 라피니에르 사단장의 베르나도트의 제2사단에서 왔다. 미셸 마리 파크토와 니콜라 조제프 메종 여단장은 제8경 보병 연대와 제45, 54선 보병 연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자크 루이 프랑수아 들라이스트르 드 티이 여단장의 제2, 4 후사르 연대와 제5 샤쇠르 아 슈발 연대와 기병 및 보병 포병 1개 포대로 지원받았다. 모두 6,500명의 프랑스군과 대포 12문이 있었다.
메종은 격렬한 전투 끝에 오스왈드의 병력을 크리비츠에서 몰아냈다. 피에르 와티에 여단장은 경 기병과 함께 마을에서 앞으로 질주했다. 와티에는 프로이센군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그들의 대응은 용기병의 돌격이었다. 프랑스 기병은 경솔하게 카빈총을 발사했고 오스왈드의 반격에 쓸려갔다. 제라르는 포로로 잡혔고 베르나도트는 보병 사각 진형 안으로 피신해야 했다. 용기병은 결국 파크토의 보병에 의해 저지되었다. 프랑스군은 슈베린 근처의 메우스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작전 중에 프랑스군은 피노에서 프로이센군을 포위해 전멸시켰다.
블뤼허는 슈베린에서 가데부쉬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하멜른에서 레코크의 군단에서 블뤼허와 합류했고, 보베저도 그의 부대와 함께 다시 합류했다. 비스마르 항구에서 프랑스군은 기병 700명을 포획했다고 주장했고, 프로이센군은 기병 367명이 항복했다고 인정했다. 프로이센군은 우세돔 후사르 연대 10번과 판비츠 소령 휘하의 블뤼허의 짐 수송대 일부였다.
블뤼허의 병력은 약 16,000~17,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100문의 포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가데부쉬의 위치는 강력했지만, 프로이센군은 병사들이 배고프고 끊임없는 행군에 지쳐 싸움을 거부했다. 그는 한자 동맹의 도시 국가인 뤼베크로 후퇴하기로 결정했고, 그곳에서 스웨덴군과 합류하길 희망했다. 프로이센군은 뤼베크 앞에 나타나 도시를 점령했다. 시청에서 시 의회에 연설하면서 블뤼허는 자신의 군대를 위해 많은 양의 음식, 음료, 사료, 통화를 요구했지만, 도시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800명의 스웨덴군 여단이 뤼베크에 입성하여 귀국을 위해 수송선을 확보하려 했다. 그들이 배를 탔을 때, 역풍에 의해 트라베 강에 갇혔다. 스웨덴군을 점령하려는 베르나도트는 트라베 강 어귀에 대대 하나를, 메종 휘하의 다른 부대를 슐루투프에 파견했다. 술트는 로게도르프에서 블뤼허의 후위 부대 중 하나를 공격하여 뤼베크 남쪽으로 몰아냈다. 술트는 진격하여 라체부르크에서 프로이센군 300명을 포획했다. 그와 뮈라는 뤼베크를 남쪽에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덴마크군 요한 에발트 중장의 지휘를 받은 부대가 스토켈스도르프로 진군했다. 에발트는 블뤼허에게 무력으로 자신의 국가의 중립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통보했다.
2. 3. 뤼베크로의 집결
1806년 10월 14일, 나폴레옹 황제는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후, 프랑스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이 추격으로 프로이센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궤주 상태에 빠졌고, 일부 장교들은 야전군과 보급물자가 충분한 요새를 가지고도 프랑스군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르하르트 폰 블뤼허는 냉정을 유지하며 바이마르 공 휘하 병력의 지휘를 맡아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저항을 계속하려 했고,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군단이 이를 추격했다.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참패 이후, 궤멸된 프로이센 군대는 여러 부대로 나뉘어 퇴각했다. 호엔로에-잉겔핑겐의 프리드리히 루이 공은 하르츠 산맥을 넘어 퇴각하는 부대를 지휘했고, 블뤼허와 프리드리히 아돌프 폰 칼크로이트 백작은 12,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1][2]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과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폰 비닝은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뒤따랐지만, 이들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한편, 오렌지 공은 10월 16일 에르푸르트 항복에서 10,000명 이상의 프로이센군을 조아킴 뮈라 원수의 기병 군단에 항복시켰다.[3]
뷔르템베르크의 오이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공이 지휘하는 16,000명의 예비군은 할레에 남아 있었으나, 10월 17일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1군단에게 할레 전투에서 패배하고 마그데부르크로 후퇴하여 호엔로에와 합류했다. 니콜라 장드듀 술트 원수의 제4군단과 뮈라는 마그데부르크 외곽에 도착하여 호엔로에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0월 22일, 술트와 미셸 네 원수의 제6군단은 마그데부르크 요새를 포위했고, 호엔로에는 9,000명의 병력을 남겨 요새를 지키게 한 후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탕어뮌데에서 엘베강을 건넌 칼크로이트와 합류했다.
블뤼허는 튀링겐 노르트하우젠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10월 24일 잔다우에서 엘베강을 건넜다. 작센-바이마르는 바트랑겐잘차에서 뮐하우젠, 오스테로데 암 하르츠를 거쳐 잔다우에서 엘베강에 도달했다.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는 10월 26일 알텐자운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작센-바이마르의 병력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술트의 선봉 부대를 막아냈다. 이때 비닝은 작센-바이마르로부터 부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10월 24일, 호엔로에는 노이슈타트 안 데어 도세에 도착했고, 블뤼허는 호엔로에의 후위 부대 지휘를 맡았다. 호엔로에는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쉬멜페니히 폰 데어 오예 준장에게 기동 부대를 보내 하펠강과 운하 네트워크를 따라 다리를 파괴하여 우익을 보호하도록 했다.
10월 25일, 호엔로에의 주력 부대는 노이루핀과 린도 사이에 있었고, 비트슈토크에는 폰 슈베린의 기병대와 폰 하겐의 보병 여단이, 키리츠에는 루돌프 에른스트 크리스토프 폰 빌라의 기병-보병 여단이 있었다. 블뤼허의 후위 부대는 베르나도트의 선두 부대와 충돌 후 노이슈타트 근처에 있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쉬멜페니히보다 먼저 오라니엔부르크를 점령했다.
10월 26일, 뮈라는 체데니크에서 쉬멜페니히의 부대를 격파했고, 다음 날 보이첸부르거 란트에서 혼란스러운 전투 끝에 호엔로에는 프랑스군의 도로 차단을 돌파하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10월 28일, 뮈라는 프렌츨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했다. 엠마누엘 그루시의 용기병 여단이 호엔로에의 부대를 통과했고, 마르크 앙투안 드 보몽의 제3 용기병 사단은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투스 공 휘하의 후위 부대를 항복시켰다. 뮈라는 프로이센군이 포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엔로에를 속여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약 10,000명의 병사, 64문의 대포, 1,800마리의 기병 말이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다.
3. 전투
1806년 11월 5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중립 도시였던 한자 동맹 소속 뤼베크로 진입하여 도시의 유력자들에게 돈과 식량을 강요했다.[1] 다음날, 베르나도트 원수의 프랑스군이 뤼베크 성벽을 공격했고, 곧 니콜라 술트 원수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거칠고 혼란스러운 전투가 벌어졌다.[1] 프랑스군은 도시를 공략하고 프로이센군을 몰아냈으며, 분산된 프로이센군은 각지에서 고립되거나 격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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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 베르나도트 군단은 젤름스도르프(Selmsdorf)에서 프로이센군과 충돌하여 비스마르에서 온 호송대를 항복시켰다. 마리 프랑수아 루이에(Marie François Rouyer) 여단장은 슐루투프 근처에서 스웨덴 수송선을 가로막아 600명의 스웨덴군을 항복시켰다.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과 술트의 제4군단은 뤼베크 공격에 참여했다. 오전 6시, 술트의 기병대와 뮈라가 이끄는 라살의 여단은 남쪽 접근로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여 200명을 생포하고 뤼베크 안으로 쫓아냈다. 뮐렌토어를 방어하던 포는 프랑스 기병대를 격퇴했다. 술트 군단과 사훅의 용기병대가 도착했고, 포병은 남쪽 문에서 프로이센군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thumb를 배경으로 시장 광장에서 전투를 보여줌|뤼베크 전투, 시장 광장에서의 전투를 보여주는 그림, 배경에는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가 있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나도트의 선두 부대가 프로이센 후위 부대를 북쪽 문으로 밀어냈다. 드루에의 ''티레르''는 부르크토어 동쪽의 갈겐부르크를 확보하고 대포를 집결시켰다. 베르나도트는 드루에 사단을 왼쪽에, 리보 사단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뒤퐁은 오른쪽을 지원했다. 프랑수아 베를레 여단장은 드루에의 제27 경보병 연대를 이끌고 생 제르트루드 교회에 맞서 싸웠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이 저지되었지만, 프로이센군 포병 지휘관이 부상을 입어 효율성이 떨어졌다. 두 번째 시도는 교회 마당을 점령했지만, 베를레 부대는 벨뷰 포대의 측면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 연기 속에서 94 선형 보병 연대가 작은 요새를 점령하고 반원형 위치를 돌격하여 포병대 전체를 점령했다. 오후 1시경, 프로이센 방어군은 프랑스군에 이어 부르크토어를 통해 도망쳤다. 베르나도트는 드루에에게 트라베강 다리를 점령하도록 지시하고, 리보에게 뮐렌토어의 방어군을 역으로 공격하도록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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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뤼허는 북쪽 방어가 안전하다고 믿고 뮐렌토어 근처 골든 엔젤 여관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그는 리보의 산병대에 의해 기습을 받아 아들과 카를 폰 뮈플링 남작과 겨우 탈출했지만, 참모총장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나머지 참모들은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시장과 쾨니히슈트라세를 통과하며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고, 요르크가 부상을 입고 많은 프로이센군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술트는 레발에게 혹스터토어를 점령하고, 르그랑에게 뮐렌토어를 공격하도록 보냈으며, 생틸레르를 예비대로 유지했다. 뮐렌토어를 방어하던 프로이센군은 리보 사단에 의해 후방에서 공격받았지만 격렬하게 반격했다. 2,000명의 프로이센군이 항복했고 뮈라의 기병대는 문을 통해 거리로 돌격했다. 혹스터토어 방어군 ''오슈타인'' 연대도 기병대와 보병대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오후 3시 30분, 프랑스군은 뤼베크를 확고하게 장악했지만,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되었다.
블뤼허는 ''쿤하임'' 제1 연대를 홀스텐토어를 공격하도록 보냈지만, 드루에 부대는 이미 다리와 서쪽 방어를 점령한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을 격퇴하고 바트 슈바르타우로 후퇴시켰다.
3. 1. 뤼베크의 방어 태세
블뤼허 군대는 대부분 뤼베크에서 밤을 보냈다. 프로이센 장군은 남쪽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드라군 연대 하나와 기병 포병대 절반을 모이슬링에 배치했다. 제2군단의 제2사단 소속의 발타자르 빌헬름 크리스토프 폰 (융-)라리쉬 소장은 도시 북쪽의 트라베를 방어했다. 오스발트 휘하의 블뤼허의 후위 부대는 북쪽 문 밖에 머물렀고, 1개 엽기병 연대는 남쪽 문 밖에 머물렀다.[1]뤼베크는 한때 강력한 요새였지만, 1806년까지 방어 시설이 부분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성벽 앞의 젖은 해자는 공격자에게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트라베 동쪽에는 도시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부르크토어(Burgtor)로 알려진 북쪽 문은 트라베강과 바케니츠강 사이의 좁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남쪽 문은 뮐렌토어(Mühlentor, 제분소 문)라고 불렸고 동쪽 문은 휜스터토어라고 불렸다. 트라베 서쪽 강둑에는 홀스텐토어(Holstentor)라는 문이 하나뿐이었다. 바케니츠는 도시 동쪽 측면의 대부분을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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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뤼허는 부르크토어에서 8문의 포를 문 앞에 있는 반원형 요새에 배치하고 문 근처에 대포 2문을 더 설치했다. 그는 교차 사격으로 어떤 공격자도 제압하기 위해 벨뷰(Bellevue) 요새에 포 4문을 더 배치했다. 오스발트의 후위 부대 외에도 다른 보병들이 방어에 투입되었다. 블뤼허는 부르크토어 구역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소장의 지휘하에 두었다. 그는 4~5개 대대와 6파운더 포대로 뮐렌토어를 방어했다. 혹스터토어는 보병 연대 1개, 기병 포병 2문, 연대 포 4문이 지켰다. 다른 병력은 한스 크리스토프 폰 나츠머 소장의 지휘 하에 예비대로 남아 있었고, 총 17개 대대와 52문의 포가 뤼베크를 방어했다. 시의회 대표단이 블뤼허에게 도시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키자, 프로이센군은 그들을 무시하고 싸울 것이라고 맹세했다.
나츠머, 라리쉬, 오스발트 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사단 | 연대 | 구성 |
---|---|---|
나츠머 제1사단 | 제27 보병 연대 차머 (Tschammer), 제51 보병 연대 카우프베르크 (Kauffberg), 제54 보병 연대 나츠머 (Natzmer), 제55 보병 연대 만슈타인 (Manstein), 제9 드라군 연대 헤르츠베르크 (Hertzberg) | 각 2개 대대, 5개 중대, 보병 포병 1개 포대, 기병 포병대 절반 |
라리쉬 제2사단 | 제4 보병 연대 칼크로이트 (Kalckreuth), 제7 보병 연대 오슈타인 (Owstein), 제53 보병 연대 융-라리쉬 (Jung-Larisch), 제21 보병 연대 브라운슈바이크 (Brunswick)의 제2대대, 제10 드라군 연대 헤이킹 (Heyking) | 각 2개 대대, 5개 중대, 기병 포병대 |
오스발트 | 제8 후사르 연대 블뤼허 (Blücher), 슐멜링 (Schmeling)과 비어에게 (Vieregg) 근위 보병대대, 여러 척탄병 대대 | 10개 중대, 기병 포병대 절반 |
3. 2. 프랑스군의 공격
1806년 11월 5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중립 도시였던 한자 동맹 소속 뤼베크로 진입하여 도시의 유력자들에게 돈과 식량을 강요했다.[1] 다음날, 베르나도트 원수의 프랑스군이 뤼베크 성벽을 공격했고, 곧 니콜라 술트 원수의 지원군이 도착했다.[1]블뤼허 군대는 대부분 뤼베크에서 밤을 보냈다. 프로이센군은 도시 북쪽의 트라베를 방어했고, 후위 부대는 북쪽 문 밖에, 1개 경기병 연대는 남쪽 문 밖에 머물렀다. 뤼베크는 한때 강력한 요새였지만, 1806년에는 방어 시설이 부분적으로 해체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성벽 앞의 젖은 해자는 공격자에게 큰 장애물이었다. 트라베 동쪽에는 도시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북쪽 문은 부르크토어(Burgtor)로, 남쪽 문은 뮐렌토어(Mühlentor, 제분소 문), 동쪽 문은 휜스터토어라고 불렸다. 트라베 서쪽 강둑에는 홀스텐토어(Holstentor)라는 문이 하나뿐이었다.
블뤼허는 부르크토어에 8문의 포를 배치하고, 벨뷰(Bellevue) 요새에 추가로 포 4문을 배치하여 공격자를 제압하려 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소장이 부르크토어 구역을 지휘했으며, 뮐렌토어는 4~5개 대대와 6파운더 포대로 방어했다. 혹스터토어는 보병 연대 1개, 기병 포병 2문, 연대 포 4문이 지켰다. 총 17개 대대와 52문의 포가 뤼베크를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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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에 행군을 시작한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젤름스도르프(Selmsdorf)에서 프로이센군과 충돌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비스마르에서 온 호송대를 항복시켰다. 한편, 마리 프랑수아 루이에(Marie François Rouyer) 여단장은 슐루투프 근처에서 스웨덴 수송선을 가로막아 600명의 스웨덴군을 항복시켰다.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에는 피에르 뒤퐁 드 레탕의 제1사단, 리보의 제2사단, 드루에의 제3사단, 틸리의 경 기병대와 장 바티스트 에블레의 포병 예비대가 포함되었다. 술트의 제4군단은 3개의 보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오전 6시, 술트의 기병대와 뮈라가 이끄는 라살의 여단은 남쪽 접근로에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여 200명을 생포하고 뤼베크 안으로 쫓아냈다. 뮐렌토어를 방어하던 포는 프랑스 기병대를 격퇴했다. 술트의 군단과 사훅의 용기병대가 도착했고, 그들의 포병은 남쪽 문에서 프로이센군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thumb를 배경으로 시장 광장에서 전투를 보여줌|뤼베크 전투, 시장 광장에서의 전투를 보여주는 그림, 배경에는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가 있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나도트의 선두 부대가 프로이센 후위 부대를 북쪽 문으로 밀어냈다. 드루에의 ''티레르''는 부르크토어 동쪽의 갈겐부르크를 확보하고 대포를 집결시켰다. 베르나도트는 드루에 사단을 왼쪽에, 리보 사단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뒤퐁은 오른쪽을 지원했다. 프랑수아 베를레 여단장은 드루에의 제27 경보병 연대를 이끌고 생 제르트루드 교회에 맞서 싸웠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이 저지되었지만, 프로이센군 포병 지휘관이 부상을 입어 효율성이 떨어졌다. 두 번째 시도는 교회 마당을 점령했지만, 베를레의 부대는 벨뷰 포대의 측면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 연기 속에서 94 선형 보병 연대가 작은 요새를 점령하고 반원형 위치를 돌격하여 포병대 전체를 점령했다. 오후 1시경, 프로이센 방어군은 프랑스군에 이어 부르크토어를 통해 도망쳤다. 베르나도트는 드루에에게 트라베강 다리를 점령하도록 지시하고, 리보에게 뮐렌토어의 방어군을 역으로 공격하도록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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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뤼허는 북쪽 방어가 안전하다고 믿고 뮐렌토어 근처의 골든 엔젤 여관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그는 리보의 산병대에 의해 기습을 받아 아들과 카를 폰 뮈플링 남작과 겨우 탈출했지만, 그의 참모총장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나머지 참모들은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시장과 쾨니히슈트라세를 통과하며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요르크가 부상을 입고 많은 프로이센군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술트는 레발에게 혹스터토어를 점령하고, 르그랑에게 뮐렌토어를 공격하도록 보냈으며, 생틸레르를 예비대로 유지했다. 뮐렌토어를 방어하던 프로이센군은 리보 사단에 의해 후방에서 공격받았지만, 격렬하게 반격했다. 마침내 2,000명의 프로이센군이 항복했고 뮈라의 기병대는 문을 통해 거리로 돌격했다. 혹스터토어의 방어군인 ''오슈타인'' 연대도 기병대와 보병대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오후 3시 30분까지 프랑스군은 뤼베크를 확고하게 장악했지만,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되었다.
블뤼허는 ''쿤하임'' 제1 연대를 홀스텐토어를 공격하도록 보냈지만, 드루에의 부대는 이미 다리와 서쪽 방어를 점령한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을 격퇴하고 바트 슈바르타우로 후퇴시켰다.
4. 결과
뤼베크 전투의 결과는 프로이센군에게 매우 참혹했다. 프랑스군은 뤼베크 시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프로이센군은 막대한 인명 및 물자 피해를 입었다. 블뤼허 원수는 결국 항복했고, 많은 프로이센군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3]
이 전투에서 베르나도트는 포로로 잡힌 스웨덴군을 관대하게 대우하여 스웨덴 유력 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훗날 그가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하는 계기가 되었다.[2]
4. 1. 프로이센군의 궤멸
프랑스군의 피해는 정확히 남아있지 않으나, 전투의 격렬함을 고려하면 약 1,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프로이센군은 2,000명 가량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추가로 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블뤼허 휘하의 참모장인 샤른호르스트 장군 역시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2] 뤼베크 시는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했다.11월 7일, 라테카우에서 블뤼허 원수는 보병 4,000명과 기병 3,800명으로 구성된 잔여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이때 블뤼허 원수는 40,000명의 프랑스 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그는 "나는 탄약과 식량이 없기 때문에 항복하는 것이다. - 블뤼허"[3]라고 기록했다.
프랑스 원수들은 뤼베크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손실을 전사상 3,000명, 포로 5,000~6,000명으로 추산했다. 역사가 디그비 스미스는 뤼베크에서의 프로이센군 손실을 전사상 2,000명, 추가로 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기록했다. 보병 연대 "오슈타인", "참머", "나츠머"는 전멸했으며, 22문의 대포를 잃었다. 프랑스군은 30,000명에서 3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프랑스 역사가 알랭 피게아르는 프로이센군과 스웨덴군이 24개의 기, 2개의 군기를 잃었으며, 최소 50문의 대포를 잃었다고 언급했다. 프랑스군의 전체 손실은 전사상 1,500명으로, 이틀 전에 부상을 입고 11월 8일에 사망한 제4군단 포병 지휘관 피에르-엘리자베스 페테스 드 몽카브리에 대령이 포함되었다.
프랑스군의 공세는 11월 7일에도 계속되었다. 파델루게에서 술트의 기병대가 비츨레벤 대위 휘하의 보병 4개 중대와 2문의 대포를 생포했다. 그루시의 드래곤 기병대는 보르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고트힐프 폰 엔데 소령의 부대를 생포했다. 크렘펠스도르프에서 엔데는 360명의 병력과 4문의 대포를 항복시켰다. "바일리오즈" 흉갑 기병 제5연대는 슈테케니츠에서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날 저녁 슈바르타우에서 뢰벤 대령은 베르나도트에게 1,5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
도시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뤼베크를 철저히 약탈했다. 베르나도트와 다른 상급 장교들은 부하들을 억제하려 했지만, 프랑스 군인들은 폭주했다. 역사가 프랜시스 로레인 페트레는 중립 도시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한 블뤼허의 결정이 뤼베크 약탈의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언급했다.
날이 밝자 블뤼허는 라테카우에 잔여 병력과 함께 있었다. 그는 35,000명의 프랑스군에게 포위되었고, 저항이 불가능했기에 항복을 요청했다. 그는 베르나도트, 술트, 뮈라에게 항복했지만, 문서 끝에 "나는 빵도 탄약도 없기에 항복한다 - 블뤼허"라는 진술을 덧붙였다.
피게아르는 블뤼허가 총 8,000명에서 9,000명의 병력과 80문의 대포와 함께 항복했다고 진술했다. 11월 8일, 트라베뮌데에 있던 프로이센 분견대는 리보에게 항복했다. 드루에는 펠레의 부대를 추격하여 12일에 보이첸부르크에서 그를 항복시켰다.
베르나도트는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들을 정중하게 대우하여 스웨덴 당국에 알려졌다. 그는 카를 오토 뫼르너 남작 등과 함께 훗날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2. 뤼베크 약탈
뤼베크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약탈, 강간, 살인"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도시를 철저히 유린했다.[2] 베르나도트 등 상급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제지하려 노력했고, 베르나도트는 직접 칼을 빼들고 여러 가옥을 지키기도 했지만, 프랑스군은 통제 불능 상태였다.[3] 앙투안-앙리 조미니, 기욤 마티외, 콩트 뒤마와 같은 당대 작가들도 프랑스군의 만행을 기록했다. 역사학자 프랜시스 로레인 페트레는 중립 도시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한 블뤼허의 결정이 뤼베크 약탈의 부분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4. 3. 블뤼허의 항복
11월 7일 라테카우(Ratekau)에서 블뤼허 원수는 보병 4,000명과 기병 3,800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군에 항복하였다. 블뤼허는 40,000명의 프랑스군에게 포위된 상태였으며, 탄약과 식량이 부족하여 항복한다고 기록했다.[3]프랑스 원수들은 뤼베크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손실을 전사상 3,000명, 포로 5,000~6,000명으로 추산했다. 역사가 디그비 스미스는 프로이센군 전사상 2,000명, 포로 4,000명으로 기록했다. "오슈타인", "참머", "나츠머" 보병 연대는 전멸했으며, 22문의 대포를 잃었다. 프랑스 역사가 알랭 피게아르는 프로이센군과 스웨덴군이 24개의 기, 2개의 군기를 잃었으며, 최소 50문의 대포를 잃었다고 언급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1,5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11월 8일 사망한 제4군단 포병 지휘관 피에르-엘리자베스 페테스 드 몽카브리에(Pierre-Elisabeth Peytes de Montcabrié) 대령이 포함되었다.[2]
블뤼허는 라테카우에서 8,000명에서 9,000명의 병력과 80문의 대포와 함께 항복했다. 항복한 프로이센 부대는 다음과 같다.
유형 | 부대명 |
---|---|
보병 | 쿤하임 제1연대 (4), 칼크로이트 제4연대 (4), 알트-라리쉬 제26연대 (2), 보르케 제30연대 (4), 카우프베르크 제51연대 (4) |
기병 | 베렌 흉갑 기병 제2연대 (5), 카테 드래곤 기병 제4연대 (2), 쾨니긴 드래곤 기병 제5연대 (1), 헤르츠베르크 드래곤 기병 제9연대 (5), 하이킹 드래곤 기병 제10연대 (5), 보베저 드래곤 기병 제14연대 (1) |
11월 8일, 트라베뮌데에 있던 프로이센 분견대가 항복했다. 12일에는 보이첸부르크에서 펠레가 420명의 병력과 반 개 마병 포대와 함께 항복했다.
포로로 잡힌 스웨덴인 문제와 관련하여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유력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베르나도트는 포로가 된 구스타프 뫼르너 백작과 그의 장교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1810년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었고, 1818년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했다.
4. 4. 베르나도트와 스웨덴
베르나도트는 포로로 잡힌 스웨덴인들과의 협상을 통해 처음으로 스웨덴 유력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2] 그는 포로가 된 구스타프 뫼르너 백작과 그의 장교들(주로 외스테르예틀란드 출신)을 정중하게 대우했고, 뫼르너 백작에게는 자신의 숙소를 제공하는 등 극진히 예우했다.이러한 베르나도트의 행동은 훗날 스웨덴 왕위 계승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10년 신분 의회는 베르나도트를 스웨덴 왕세자로 선출했고, 1818년 그는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했다. 뫼르너 백작과 그의 조카 카를 오토 뫼르너 남작은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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