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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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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는 1806년 10월 14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프랑스군은 예나에서 호엔로에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격파했고, 다부 원수가 이끄는 제3군단은 아우어슈테트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주력 부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붕괴되었으며, 프랑스군은 베를린을 점령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패배는 프로이센의 군사 개혁과 독일 민족주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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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일부제4차 대프랑스 동맹
예나 전투 중 자신의 제국 근위대 척탄병을 꾸짖는 나폴레옹, 전진하라고 외쳤다는 전설이 있다. 오라세 베르네, 1836년 작품
예나 전투 중 자신의 제국 근위대 척탄병을 꾸짖는 나폴레옹, 전진하라고 외쳤다는 전설이 있다. 오라세 베르네, 1836년 작품
날짜1806년 10월 14일
장소독일 예나 및 아우어슈테트
결과프랑스의 승리
영토프로이센 점령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국
교전국 2프로이센
작센
지휘관
지휘관 1 (예나)나폴레옹 1세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장드듀 술트
장 란
미셸 네
피에르 오주로
조아킴 뮈라
지휘관 1 (아우어슈테트)루이니콜라 다부
샤를에티엔 구댕
지휘관 2 (예나)호엔로에 공
율리우스 폰 그라베르트
보글라지프 프리드리히 에마누엘 폰 타우엔치엔
에른스트 폰 뤼헬
지휘관 2 (아우어슈테트)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메타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칼크로이트 백작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
병력 규모
병력 1 (예나)전투에 투입된 40,000명, 총 76,000명
병력 1 (아우어슈테트)26,000명
총 동원 병력 166,000명
병력 2 (예나)55,000명
병력 2 (아우어슈테트)64,000명
총 동원 병력 2119,000명
피해 규모
피해 1 (예나)5,000–6,000명
피해 1 (아우어슈테트)7,052–7,100명
총 피해 1사망, 부상, 실종 또는 포로 12,600명 (사망자 1,000명)
피해 2 (예나)26,000–27,000명
피해 2 (아우어슈테트)13,000–15,000명
총 피해 2사망, 부상, 실종 또는 포로 41,000명
관련 지도

2. 배경

1805년 나폴레옹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거둔 결정적인 승리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의 와해로 이어졌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프랑스 영향력 하의 라인 동맹 결성을 통해 프랑스의 패권은 중부 독일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프랑스의 세력 확대는 인접한 프로이센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프로이센 내부에서는 반(反)나폴레옹 감정이 고조되었다.

결국 1806년 7월,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작센, 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며 프랑스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 입장을 취했다. 같은 해 8월 말, 프로이센은 프랑스 측에 라인 동맹 지역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이는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이에 프로이센은 약 13만 명의 자국 군대와 2만 명의 작센 동맹군을 합쳐 약 15만 명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동원 과정과 작전 준비에서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며 초기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선전포고를 접한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독일에 주둔 중이던 약 18만에서 20만 명 규모의 그랑 다르메 병력을 밤베르크 일대로 집결시키고, 프로이센 야전군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2. 1. 유럽 정세와 제4차 대프랑스 동맹

1805년 나폴레옹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붕괴시켰다. 이 승리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고,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라인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의 패권은 독일 중부 지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라인 동맹 지역에 약 20만 명의 프랑스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는 인접한 프로이센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주었으며, 프로이센 내부에서는 반(反)나폴레옹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이는 국왕 개인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국력 차이를 현실적으로 고려한 판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비 루이제나 프로이센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와 같은 강경파들은 계속해서 국왕에게 개전을 촉구했고,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다.

1806년 7월,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작센, 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 태세를 갖추었다. 같은 해 8월 말, 프로이센은 프랑스 측에 라인 동맹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프로이센은 약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라인 동맹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각개격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엘베강 유역에서 프랑스군을 막으며 러시아의 지원군을 기다리자는 신중론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러나 공세적인 작전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의 동원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더욱이 지휘권 소재가 불분명하여 작전 계획 수립이 지연되었고, 각 부대 간의 연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등 총체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프로이센군의 본격적인 남하가 시작된 것은 9월 말이 되어서였는데, 이러한 초기 대응의 지연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전열을 정비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프로이센의 지휘 체계는 여러 장교에게 역할이 분산되어 비효율적이었고, 신속한 연락 체계도 부족하여 명령 전달과 조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현대적인 그랑 다르메의 효율적인 구조와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선전포고를 접한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9월 말, 프로이센군의 주력 부대가 마인츠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즉시 독일에 분산되어 있던 약 20만 명의 병력을 밤베르크로 신속하게 집결시켰다. 그는 모르티에가 지휘하는 제8군단을 마인츠 방면에 배치하여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견제하고 후방 연락선을 확보하도록 하는 한편, 나머지 주력군으로는 튀링겐 근교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프로이센 야전군의 측면을 우회 기동하여 전략적으로 포위하고 일거에 격멸한다는 대담하고 기민한 작전을 수립했다.

2. 2. 프로이센군의 문제점

1806년 당시 프로이센군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여러 장교가 하나의 지휘직을 동시에 맡는 비효율적인 지휘 구조였다. 예를 들어 참모장 직책은 풀 장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대령, 루돌프 마센바흐 대령 세 명이 나누어 맡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스템은 지연과 복잡성을 야기하여 최종 작전 명령이 준비되기까지 한 달 이상 걸리는 결과를 낳았다.

총사령관은 명목상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였지만, 군사적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하여 실질적인 지휘는 최고 선임 장교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맡았다. 그러나 지휘권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지휘 계통에 혼란이 잦았고, 부실한 통신 및 전령 체계는 지휘 불통일과 군 간의 연계 부족 문제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연계 부족은 진군로 선택에도 악영향을 미쳐 프로이센군의 기동력을 떨어뜨렸다.

통일된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논의를 위해 다섯 개의 주요 계획이 제시되었지만, 장기간의 계획 수립과 심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프랑스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프로이센의 계획은 나폴레옹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군사 편제나 전투 교리 역시 7년 전쟁 시대와 비교해 큰 발전이 없어 프랑스군에 비해 구식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웠다. 마센바흐나 샤른호르스트와 같은 일부 선각자들이 군 개혁의 필요성을 꾸준히 주장했지만, 군부 내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했고 개혁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프로이센군이 사단 편제를 도입한 것도 1806년 동원 시점이 처음이었다.

3. 양군 전력

프랑스 대육군은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약 18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으며[1], 군단 시스템을 통해 높은 기동성과 유연성을 갖추었다.[2] 예나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이 초기 48,000명에서 시작하여 96,000명까지 병력을 집중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실제 전투에는 약 40,000명만이 투입되었다. 한편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는 다부의 제3군단이 두 배가 넘는 64,000명의 프로이센 주력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프로이센 육군은 약 14만 5천 명 규모였으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중심으로 한 지휘 체계는 혼란스러웠고 군사 시스템 또한 상대적으로 구식이었다. 예나 전투에서는 호엔로에 공작의 군대가 프랑스군의 집중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뤼헬의 지원군 15,000명이 도착하기 전에 큰 피해를 입었다. 아우어슈테트에서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직접 지휘하는 64,000명의 주력군이 다부의 단일 군단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맞았다.

3. 1. 프랑스군

프랑스군 부대 구성 및 병력
부대지휘관병력
제국근위대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약 16,000명
제1군단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약 20,000명
제3군단루이 니콜라 다부약 27,000명
제4군단니콜라 장 드 듀 술트약 32,000명
제5군단장 란약 22,000명
제6군단미셸 네약 20,000명
제7군단피에르 오주로약 17,000명
기병예비군단조아생 뮈라약 28,000명
총계약 182,000명



프랑스 혁명 이후 라자르 카르노가 시작한 일련의 군사 개혁을 통해 프랑스군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1793년 도입된 징병제는 프랑스군의 동원 병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렇게 징집된 국민병들은 단순히 숫자가 많은 것을 넘어, 강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높은 사기와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기존의 용병 중심 군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강점이었으며, 도주에 대한 우려가 적어 산병 전술과 같은 유연한 전술 운용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급격한 병력 증가는 지휘 통제의 어려움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또한,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존처럼 군대를 한곳에 집중시키는 방식은 비효율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르노는 사단 제도를 도입했다. 각 사단은 보병, 기병, 포병을 모두 갖추어 독립적인 전투 수행이 가능한 단위였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사단 제도를 더욱 발전시켜, 사단보다 상위 조직인 군단을 창설했다. 각 군단은 독자적인 병참 조직을 갖추고 있어 작전 수준에서 독립적인 행동이 가능했다. 이는 각 군단 사령관에게 더 넓은 재량권을 부여하여 전장에서의 유연성을 극대화했으며, 동시에 강화된 사령부 통신 능력을 통해 전체 군대의 일원적인 지휘 체계 또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혁신적인 군단 편제와 프랑스의 발전된 병참 처리 능력이 결합되면서, 프랑스군은 당시 유럽의 다른 군대들을 압도하는 높은 기동력과 작전 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3. 2. 프로이센군

프로이센군 병력 구성
부대병력주요 지휘관
중앙군60,000명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좌익군42,000명호엔로에 공작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우익군28,000명에른스트 폰 뤼헬
예비군15,000명뷔르템베르크 공작 오이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총 병력약 145,000명



총사령관은 명목상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였으나, 군 지휘 경험이 부족하여 실질적인 지휘는 최고 선임 장교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맡았다. 그러나 지휘권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프로이센군의 지휘 계통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참모장 직책 역시 풀 장군, 샤른호르스트 대령, 마센바흐 대령 세 명이 맡는 등 지휘 구조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러한 혼란은 작전 명령 준비를 한 달 이상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통신 및 전령 시스템이 미비하여 지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각 군 간의 연계가 어려웠다. 이는 진군로 선택에 악영향을 미쳐 프로이센군의 전체적인 기동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작전 계획 수립 과정에서도 통일된 계획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계획이 논의되었지만 장기간의 계획 수립과 심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프랑스군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결국 프로이센의 계획은 나폴레옹의 움직임에 단순히 대응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군사 편성 및 전투 교리 측면에서도 프로이센군은 7년 전쟁 당시와 비교하여 큰 변화가 없어 프랑스군에 비해 구식화되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웠다. 마센바흐나 샤른호르스트와 같은 인물들이 이전부터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군 내부에서는 소수에 불과하여 개혁은 부분적으로만 실행될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이 사단 제도를 도입한 것은 1806년 동원 시가 처음이었다.

4.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기동

10월 13일 양군의 위치


프랑스군은 라이프치히드레스덴 방향으로 세 갈래로 나뉘어 분진합격 전술을 구사하며 진군했다. 제5군단과 제7군단은 예나 방면으로, 친위대, 제1군단, 제3군단은 나움부르크 방면으로, 제4군단과 제6군단은 게라 방면으로 이동하며 소규모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선봉 부대를 격파했다. 프랑스군의 접근에 프로이센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0월 9일 시점에서 프로이센군의 배치는 분산되어 있었다. 주력인 브라운슈바이크군은 바이마르에, 호엔로에군은 예나에, 뤼헬군은 에르푸르트에, 예비대인 뷔르템베르크군은 마그데부르크에 위치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뷔르템베르크군에게 주력과 합류하라고 명령하고, 뤼헬군에게는 1만 명의 분견대를 작센-바이마르 공작에게 주어 프랑스군의 후방 연락선을 위협하도록 지시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호엔로에군과 합류하여 결전을 치를 계획이었으나, 프로이센군의 고질적인 지휘 및 연락 체계의 문제로 인해 프랑스군이 먼저 접근하기 전에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의 지휘 구조는 여러 장교가 참모장 직책을 맡는 등 혼란스러웠고, 이는 작전 계획 수립을 지연시키고 통일성을 해쳐 결국 프랑스군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0월 10일 이른 아침, 장 란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제5군단이 잘펠트 근교에서 호엔로에군의 선봉 부대인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가 지휘하는 사단(약 8,000명)과 마주쳐 잘펠트 전투가 벌어졌다. 정오 무렵 프랑스 제5군단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했고, 이 과정에서 지휘관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가 전사했다. 프로이센군은 900명의 사상자와 1,800명의 포로를 내고 후퇴했으며, 프랑스군의 피해는 200명에 불과했다.

초전의 패배와 왕자의 전사는 프로이센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프랑스군의 강력함을 깨달은 프로이센 지휘부는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본국으로 후퇴하여 러시아 원군을 기다린 후 반격하자는 기존에 기각되었던 작전이 다시 거론되었으나, 철수 여부를 둘러싼 군사 회의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분열 양상을 보이며 귀중한 시간만 흘려보냈다.

10월 12일, 다부 원수의 제3군단이 나움부르크를 점령하고 시가지 서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1군단도 같은 날 저녁 남쪽에 도착해 야영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나움부르크의 함락 소식은 프로이센군을 크게 동요시켰고, 포위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결국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철수를 결심했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이를 승인했다.

10월 13일, 브라운슈바이크는 호엔로에군에게 예나 근교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하며 주력 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뤼헬군에게는 분견대를 다시 불러들여 호엔로에군과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는 주력을 이끌고 나움부르크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예나에 도착한 프랑스 제5군단은 시가지 북쪽에서 호엔로에군을 발견했다. 이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이 부대가 프로이센군의 주력이라고 오판했다. 그는 즉시 제4군단과 제6군단에게 강행군하여 본대와 합류하라고 명령하고, 자신도 친위대를 이끌고 예나로 향했다.

같은 날 저녁, 나폴레옹은 다부의 제3군단에게 아폴다 방면으로 진격하여 프로이센군의 배후를 공격하라는 명령서를 보냈다. 다부는 이 명령서 사본을 베르나도트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참모총장 베르티에는 명령서에 "귀관(다부)이 퐁테 코르보 공(베르나도트)과 함께 있다면 함께 진군해도 좋으나, 황제는 그가 돈부르크에 있기를 바란다"는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이는 예나의 적을 주력으로 오인한 나폴레옹이 돈부르크 방면의 프로이센 분견대에 의한 측면 위협을 경계하고, 해당 지역 확보를 통해 적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주의사항 때문에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명령대로 돈부르크로 향하게 되었고, 다부의 제3군단은 단독으로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군 주력과 맞서게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5. 예나 전투

예나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군 주력 부대가 예나 인근에서 호엔로에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과 벌인 전투이다. 나폴레옹은 초기에 약 48,000명의 병력으로 전투를 시작했으나, 신중하게 계획된 유연한 병력 배치를 통해 일시적으로 96,000명에 달하는 국지적 우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40,000명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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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프로이센군은 전황 파악이 늦었고 대응 또한 신속하지 못했다. 뤼헬 장군이 이끄는 15,000명의 증원군이 바이마르에서 도착하기 전에 호엔로에의 군대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사실상 궤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은 약 10,0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1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뤼헬의 군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했고, 뤼헬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예나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으며, 승리한 프랑스군 역시 약 5,000명의 사상자 및 포로가 발생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자신이 프로이센군의 주력 부대와 싸워 승리했다고 판단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실제 프로이센군 주력 부대는 같은 시각 북쪽의 아우어슈테트에서 다부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제3군단과 교전하고 있었다.

5. 1. 전투 경과

아우어슈테트 전투


1806년 10월 14일,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두 곳에서 거의 동시에 전투가 벌어졌다.
아우어슈테트 전투10월 14일 이른 아침, 다부 원수가 이끄는 제3군단은 나움부르크를 출발해 서쪽으로 향했고, 같은 시각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1군단은 남쪽 도른부르크로 향했다. 프로이센군 주력 부대는 바이마르에서 나움부르크로 이동 중이었다. 오전 6시 30분, 제3군단의 선봉인 기당 사단이 자레 강을 건넜고, 오전 7시경 하센하우젠 부근에서 프로이센군과 마주쳐 교전이 시작되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양측 모두 적의 규모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부는 포로 심문을 통해 자신이 프로이센군 주력과 맞서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부는 즉시 기당 사단에게 하센하우젠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명령하고, 강 건너편에 있던 모랑 사단, 브리앙 사단, 비아라네 기병여단에게 신속히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베르나도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프로이센군 역시 블뤼허 사단을 좌익에, 슈메츠타우 사단을 우익에 배치하여 전선을 형성했다.

오전 8시, 블뤼허의 기병대가 첫 공격을 개시했다. 기당 사단은 방진을 형성하여 네 차례에 걸친 기병 돌격을 모두 막아냈다. 프로이센군은 부대 간 연계가 부족하여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다.

오전 8시 30분, 브리앙 사단이 도착하자 다부는 이들을 기당 사단의 우익에 배치했다. 비슷한 시기 프로이센군도 슈메츠타우 사단 본대가 도착하여 전력이 증강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슈메츠타우 사단을 중앙에, 바르텐슈레벤 사단과 오라네 사단 선봉을 각각 우익과 좌익에 배치했다. 이 시점 프로이센군은 약 25,000명으로 15,000명의 프랑스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다부는 능숙한 지휘로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오전 9시, 비아라네 기병여단이 도착하여 프랑스군 우익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브리앙 사단과 협력하여 프로이센군 좌익의 블뤼허 사단을 후퇴시켰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좌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우익 부대 일부를 이동시켰는데, 이는 오히려 프랑스군 중앙의 부담을 덜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다부의 뛰어난 전술 감각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오전 10시, 바르텐슈레벤 사단 본대가 도착하면서 프로이센군은 약 30,000명으로 늘어났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하센하우젠을 향해 총공격을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16,000명에 불과하여 병력 차이가 가장 크게 벌어진 위기의 순간이었으나, 다부는 침착하고 정확한 지휘로 이 공격을 막아냈다. 전투 중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슈메츠타우 장군이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이는 프로이센군의 지휘 체계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했다. 최고사령관의 부재와 구식 통신 체계로 인해 지휘권 승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지휘 통제가 붕괴되었고, 각 부대는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오전 10시 30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날 유일하게 명령을 내려 오라네 사단 본대를 전장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왕은 오라네 사단을 분할하여 양익을 지원하라는 전력 분산의 실책을 범했다. 이로 인해 양익은 일시적으로 지탱되었지만 프랑스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오전 11시, 모랑 사단이 전장에 도착하여 프랑스군 좌익에 배치되었다. 모랑 사단은 맹렬한 공격으로 투입된 오라네 사단 본대를 격파하고 계속해 바르텐슈레벤 사단도 격퇴했다. 이 양쪽 사단의 격파 직후, 곧 카를크로이드 군이 전장에 도착했다. 키하임 사단 및 아르님 사단이 투입되었지만, 오라네 사단과 바르텐슈레벤 사단의 패잔병이 전진을 방해했기에 신속한 전투 참가를 할 수 없었다.

오전 12시, 모랑 사단은 계속 전진하여 슈메타우 사단의 측면으로 향했다. 이 맹공을 저지하기 위해 빌헬름 공작의 기병 여단이 모랑 사단에 대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모랑은 신속히 방진을 조직해 이 돌격을 모두 격퇴했다. 빌헬름 공작의 기병 여단은 후퇴하고 엄호를 잃어버린 슈메타우 사단도 이윽고 붕괴되었다.

이쯤에서 다부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기당 사단, 브리앙 사단도 반격으로 전환해 지휘 계통이 붕괴되어 연계가 어려운 프로이센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기하임 사단, 아르님 사단은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며 제3군단 앞에 버텼지만 얼마 안 가 격퇴되었다. 제3군단도 기세를 타고 프로이센군을 일거에 아우어슈테트까지 몰아붙였다.

오후 1시까지 프로이센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종료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휘하에 약간의 예비 병력이 남아 있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왕은 이들을 투입하지 않고 총퇴각을 명령했다. 제3군단은 밤까지 추격을 계속해 프로이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군 제3군단은 총병력의 ¼인 7,000명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프로이센군은 병력 13,000명과 대포 115문이란 막대한 피해가 생겼다. 다부의 제3군단은 실제 2배의 적군을 상대로 2배의 피해를 입힌 것이었다. 이 정도의 병력 차를 극복한 전투 사례는 전사상에서도 희박하였고, 나폴레옹 전쟁 중에서는 거의 사례가 없다. 프랑스군의 질적 우위도 승리의 요인 중 하나이지만, 다부의 걸출한 전술 지휘 능력이 있지 않았다면 이 승리는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근처에 있던 베르나도트 원수는 다부의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단으로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다.
예나 전투
예나 전투에서 포획된 프로이센 깃발을 든 프랑스 드라군


당대 많은 대담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프랑스 기병 지휘관 중 가장 유명한 요아킴 뮈라 원수가 전투 중 돌격을 이끌고 있다.


같은 날 예나 근처에서는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주력 부대가 호엔로에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격돌했다. 나폴레옹은 초기 48,000명의 병력으로 시작했으나, 유연한 병력 운용을 통해 국지적으로 96,000명에 달하는 우위를 확보했다. 다만 실제 전투에는 약 40,000명만이 참여했다.

전투는 10월 14일 아침, 프랑스군의 양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중앙 공격 부대가 준비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생틸레르 장군이 프로이센군 좌익을 공격하여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 원수는 그의 기동을 완료했고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위치를 잡았다. 그러나 위치를 잡은 후 네는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전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판명되었다. 네의 첫 공격은 성공했지만, 그는 지나치게 확장되었고 프로이센 포병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프로이센 장군은 위기에 처한 돌출부를 인지하고 반격을 명령했고, 네의 군대를 포위했다. 네는 모든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사각형 방진을 형성했다. 나폴레옹은 네의 상황을 인지하고 라네 원수에게 공격 중심에서 네를 돕기 위해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 행동은 프랑스 중앙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네를 구출할 때까지 황실 근위대를 프랑스 중앙을 지키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적응력은 나폴레옹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였다. 그는 황실 근위대를 직접 지휘하여 전투 상황에 따라 그들에게 위치를 명령할 수 있었다. 구출 작전은 성공했고, 네의 부대는 전투에서 후퇴할 수 있었다. 비록 프랑스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프로이센 지휘관들은 프랑스의 약점을 파고들려는 주도권을 잡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그들의 몰락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프로이센 보병의 무활동은 포병과 경보병의 사격에 노출되게 했다. 한 프로이센 장군은 나중에 "마을 입구 주변 지역은 가장 끔찍한 유혈 사태와 학살의 현장이었다"고 기록했다.

오후 1시경, 나폴레옹은 결정적인 움직임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측면 부대에 프로이센 측면을 돌파하고 프랑스 중앙 부대가 프로이센 중앙 부대를 짓밟는 동안 주요 중앙 부대를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측면에 대한 공격은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측면이 무너진 프로이센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나폴레옹은 또 다른 전투에서 승리했다. 총 프로이센군은 10,0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15,000명의 전쟁 포로가 생겼으며, 150문의 대포를 잃었다. 예나 전투 막바지에 뤼헬 장군이 이끄는 15,000명의 프로이센 증원군이 바이마르에서 도착하기 전에 호엔로에의 군대는 궤멸되었고, 뤼헬의 군대 역시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격파당하고 뤼헬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는 치열한 전투였으며, 프랑스군은 5,000명이 사망, 부상 또는 포로로 잡혔다. 나폴레옹은 실수로 자신이 프로이센군의 주력 부대와 맞섰다고 믿었다.

5. 2. 결과

대포 115문총합약 12,000명약 38,000명
대포 115문


6. 아우어슈테트 전투

예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북쪽의 아우어슈테트에서는 다부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제3군단이 예상치 못하게 프로이센군 주력 부대와 마주쳤다. 이 프로이센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고 있었으며, 원수 묄렌도르프와 칼크로이트를 포함한 약 64,000명 규모였다.

다부 원수는 나폴레옹의 본대가 있는 예나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에카르츠베르가를 경유해 남하하던 중 프로이센군 주력과 조우했다. 두 배가 넘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부의 훈련되고 규율 잡힌 제3군단은 격렬한 전투 끝에 프로이센군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낸 후 공세로 전환하여 프로이센군을 패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치명상을 입고 슈메타우 장군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어, 프로이센 지휘 체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한편, 다부와 함께 나폴레옹 지원 명령을 받았던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1군단은 인근 도른부르크를 경유하고 있었다. 두 전투의 포성이 들리는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도트는 논란 속에 다부 군단을 지원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서면 명령만을 따랐다.

6. 1. 전투 경과

예나에서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주력 부대가 호엔로에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과 격돌했다. 나폴레옹은 초기 48,000명의 병력으로 시작했으나, 유연한 부대 운용을 통해 96,000명까지 병력을 늘려 국지적인 우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는 약 40,000명만이 투입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상황 파악과 대응이 늦었고, 루헬 장군의 지원군 15,000명이 도착하기 전에 호엔로에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궤멸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은 10,0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고 1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뒤늦게 도착한 루헬의 군대 역시 프랑스군의 공격에 격파당하고 루헬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예나 전투는 치열했으며, 프랑스군 역시 약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상대했다고 착각했다.

한편, 북쪽의 아우어슈테트에서는 다부 원수의 제3군단이 예상치 못하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주력 부대(약 64,000명)와 마주쳤다. 다부와 베르나도트 원수는 나폴레옹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베르나도트는 다부와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아우어슈테트에서의 전투는 10월 14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의 제3군단은 두 배가 넘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과 규율을 바탕으로 프로이센군 주력을 격파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장교와 사병 포함 7,052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프로이센군은 13,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며 참패했다.

한편, 베르나도트 원수는 두 전투의 포성이 들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부를 지원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서면 명령만을 고수하며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이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6. 2. 결과

두 곳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피해는 병력 38,000명과 대포 227문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예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0명의 사상자 및 포로가 발생했다. 용병 위주로 구성된 프로이센군은 한번 무너지자 재편성이 어려워 프랑스군의 추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사실상 이 전투의 패배로 프로이센군은 붕괴되었으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 원수의 제3군단은 두 배가 넘는 프로이센 주력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 보고를 믿지 않았으나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부에게 "무인의 제1 소질인 탁월한 용기와 견실한 성격을 발휘했다"고 극찬하며 1808년 아우어슈테트 공작 칭호를 수여했다.

반면, 베르나도트 원수의 제1군단은 다부 군단을 지원하지도, 예나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아 비판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처벌을 고려했으나, 그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옛 약혼녀였던 데지레 클라리를 배려하여 실행하지 않았다. 베르나도트에 대한 비판에는 반론도 존재한다. 도른부르크 주변의 험난한 지형이나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지원이 불가능했다는 주장, 혹은 나폴레옹 자신의 오판에 따른 명령 때문에 제3군단이 위기에 처했으며, 나폴레옹이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다부 원수는 베르나도트의 행동에 분노하여 결투 직전까지 갔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명령은 다부와의 합류를 전제로 했고, 다부와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던 베르나도트가 의도적으로 지원을 회피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예나에 입성한 나폴레옹을 본 당시 예나 대학 교수였던 철학자 헤겔은 "세계정신이 말에 올라타 통과하고 있다"(Weltseele zu Pferde|벨트젤레 추 페르데ger)고 평했다.

7. 베르나도트의 행동 논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다부 원수가 칭송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베르나도트 원수는 질책을 받았다.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제1군단은 다부의 제3군단을 지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예나의 주전장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제1군단은 비교적 느린 속도로 행군하여 도른부르크를 거쳐 10월 14일 저녁에야 아폴다에 도착했다. 이러한 지체는 프로이센군 주력을 놓칠 수 있는 위험을 야기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처벌까지 고려했으나, 베르나도트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옛 약혼녀였던 데지레 클라리를 배려하여 처벌은 보류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베르나도트에 대한 비판에는 여러 반론이 존재한다. 도른부르크 주변의 지형이 험난하여 행군이 어려웠다는 점, 설령 강행군했더라도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주장 등이 제기된다. 또한, 다부 군단의 위기는 나폴레옹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명령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다부 원수는 지원 없이 방관한 베르나도트에게 크게 분노하여 결투 직전까지 갔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명령은 기본적으로 다부 군단과의 합류를 지시한 것이었다는 반박도 있다. 근처에서 아군 군단이 격전을 벌이고 있음을 인지하고도 지원하지 않은 것은 베르나도트 개인의 판단 착오라는 것이다. 베르나도트와 다부 사이의 개인적인 경쟁 관계와 다부가 베르나도트보다 하급자였다는 점이 이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8. 결과 및 영향

프랑스군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두 곳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로이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프로이센군은 병력 38,000명과 대포 227문을 잃는 등 괴멸적인 피해를 보았다. 용병으로 구성된 프로이센군은 한번 무너지자 재편성이 어려워 프랑스군의 추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프로이센군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는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받는다.

다부의 부관으로부터 아우어슈테트 전투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사실 확인 후 다부를 극찬하며 1808년 아우어슈테트 공작(Duc d'Auerstaedt프랑스어) 칭호를 수여했다. 반면, 베르나도트 원수는 다부 군단을 지원하지도, 예나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아 나폴레옹의 질책을 받았다. 베르나도트의 행동에 대해서는 명령 해석의 모호함, 지형적 어려움, 시간적 제약 등의 반론도 있으며, 일부 역사가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실책을 덮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부와의 개인적인 불화 등 베르나도트 개인의 판단 착오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예나 전투 후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베를린 입성'' by 샤를 메니에. 전투 후 베를린에 입성하는 프랑스군


전투 후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본토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10월 16일 에르푸르트 항복을 시작으로, 17일에는 베르나도트가 할레 전투에서 프로이센 예비군을 격파하며 일부 명예를 회복했다. 10월 25일 프랑스군은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으며, 나폴레옹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다부에게 선두 입성의 영예를 주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프렌츠라우 전투(10월 28일), 파제발크 항복, 볼데코(10월 30일), 안클람(11월 1일), 볼가스트(11월 3일), 비스마르(11월 5일) 등에서 프로이센군을 연달아 격파하거나 항복시켰다. 블뤼허가 이끄는 마지막 남은 프로이센 야전 병력 약 21,000명은 프랑스군의 끈질긴 추격 끝에 뤼베크에서 뤼베크 전투(11월 6일~7일)를 치렀으나 결국 포위되어 블뤼허를 포함한 9,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마그데부르크 포위전 역시 11월 11일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최종적으로 프로이센군은 사망 24,000명, 포로 140,000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완전히 무너졌다.

1806년 예나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본 예나 대학교 교수 헤겔은 "세계 정신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Weltseele zu Pferdede)"라고 평했다.

쾨니히스베르크로 피신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항전을 계속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의 폴란드 침공과 이후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를 거치며 결국 1807년 7월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루이제 왕비가 직접 나서 온건한 처분을 요청했지만 나폴레옹은 냉담했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 영토와 폴란드 영토를 상실하고, 의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았으며, 육군 병력은 4만 명으로 제한되는 등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오랜 굴욕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예나 다리(Pont d'Iéna)는 파리에 있으며, 예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 참패는 프로이센에게 봉건적인 국가 및 군사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혁이 시급함을 절감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투에 참전했던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클라우제비츠 등은 이후 프로이센 군사 개혁의 핵심 인물이 되어 군제 개혁을 주도했다. 이러한 군사 개혁과 민간 개혁은 프로이센을 근대 국가로 변모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훗날 프랑스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고 유럽 대륙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프랑스 지배하에서의 굴욕과 이에 대한 저항은 독일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기념하여 파리에 예나 다리(Pont d'Iéna)를 건설했다. 예나 인근에는 나폴레옹과 프랑스 원수들의 이름을 딴 하이킹 코스가 조성되었으며, 코스페다 마을에는 전투 기념 박물관이 있다. 매년 10월 전투 기념행사가 열리며, 2006년에는 2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투 재현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9. 전후

나폴레옹의 베를린 입성(Charles Meynier)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을 격파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본토로 빠르게 진격하여 10월 25일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아우어슈테트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다부 원수에게 가장 먼저 베를린에 입성하는 영예를 주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 다부 군단 단독으로 프로이센 주력을 격파했다는 보고를 믿지 않았으나, 사실 확인 후 그를 '아우어슈테트 공작'으로 임명하며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예나 전투에서 활약한 원수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11월 말까지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전역을 거의 장악했고, 프로이센군은 사망자 24,000명, 포로 140,000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등이 이끄는 일부 부대는 끝까지 저항을 이어갔다.

한편, 전투 당시 베르나도트 원수의 소극적인 행동은 논란이 되었다. 그는 다부 군단을 지원하라는 명확한 명령을 받지 못했고, 나폴레옹의 다른 지시를 따랐다고 주장했으나, 결과적으로 아우어슈테트에서 고전하던 다부를 돕지 못했다. 이 일로 다부와 베르나도트 사이에는 깊은 갈등이 생겼으며,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그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전 약혼녀였던 데지레 클라리와의 관계 때문에 처벌은 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베르나도트는 이후 할레 전투에서 프로이센 예비군을 격파하며 일부 명예를 회복했다.

프랑스군의 추격은 계속되어 10월 16일 에르푸르트 항복을 시작으로, 프렌츠라우 전투(10월 28일), 파제발크 항복, 슈테틴 함락 등 프로이센군의 주요 거점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블뤼허가 이끄는 마지막 남은 프로이센 야전군은 프랑스군의 끈질긴 추격 끝에 뤼베크에서 포위되었고, 11월 7일 뤼베크 전투에서 패배하여 블뤼허를 포함한 9,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11월 11일에는 마그데부르크 요새마저 함락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로 피신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러시아군 역시 이후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 결국 프로이센은 루이제 왕비가 협상에 나섰으나 나폴레옹의 냉담한 반응 속에 불리한 조약을 맺어야 했다.

1807년 7월 체결된 틸지트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은 엘베강 서쪽 영토와 폴란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또한 1808년 파리 조약으로 군대 규모도 4만 2천 명으로 제한되는 등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가혹한 조약 조건은 프로이센 내부에 강력한 반(反)프랑스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9. 1. 프로이센의 개혁

1806년 프로이센군은 여러 장교가 지휘를 분담하는 구조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참모장 직책은 풀 장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대령, 루돌프 마센바흐 대령 세 명이 동시에 맡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는 작전 명령 준비에 한 달 이상이 걸리는 등 지연과 복잡성을 야기했다. 또한 통일된 작전 계획 수립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5개의 주요 계획이 논의되었지만, 장기간의 계획 수립 과정에서 주도권은 프랑스군에게 넘어갔고, 결국 프로이센의 계획은 나폴레옹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수동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예나 전투.

9. 2. 독일 민족주의의 발흥

이 전투는 프로이센이 봉건적인 국가 체제와 군대 조직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클라우제비츠와 같이 훗날 프로이센 개혁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 이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 이들의 경험은 이후 군사 개혁뿐만 아니라 민간 부문의 개혁으로 이어졌고, 프로이센을 근대적인 국가로 변모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일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회복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여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상황은 프로이센인들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민족적 자존심의 상처를 극복하고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은 독일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과 민족적 자긍심 회복 노력은 이후 독일 통일 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참조

[1] 웹사이트 Dokumentation über 210. Jahrestag gewinnt Preis beim Fimfestival – Arbeitsgemeinschaft »Jena 1806« e.V. http://www.jena1806.[...] 2023-05-10
[2] 웹사이트 Bewegte Bilder, bewegende Bilder https://www.augsburg[...] 201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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