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먼드 풋볼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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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치먼드 풋볼 클럽은 1885년 창단된 호주식 축구 클럽으로, 현재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AFL)에 참가하고 있다. 1920년, 1921년, 1932년, 1934년, 1943년, 1967년, 1969년, 1973년, 1974년, 1980년, 2017년, 2019년, 2020년에 AFL 시니어 프리미어십에서 우승하며 총 13번의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60년대 '하피 시대'를 거치며 강팀으로 자리 잡았고, 2010년대 데미언 하드윅 감독 체제에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팬들은 "타이거스"라는 별칭으로 클럽을 응원하며,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MCG)을 홈 구장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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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먼드 풋볼 클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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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클럽 이름 | 리치먼드 풋볼 클럽 |
원어명 | Richmond Football Club |
이전 이름 | 해당 없음 |
별명 | 타이거스 |
연고지 | 빅토리아주 멜버른 |
창단 | 1885년 |
해단 | 해당 없음 |
색깔 | 노란색 검은색 |
리그 |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 |
구단주 | 해당 없음 |
회장 | 존 오루크 |
CEO | 셰인 던 |
AFL 감독 | 아뎀 예제 |
AFLW 감독 | 라이언 퍼거슨 |
VFL 감독 | 제이크 배철러 |
AFL 주장 | 토비 낸커비스 |
AFLW 주장 | 케이티 브레넌 |
VFL 주장 | 래클런 스트리트 |
우승 연도 | VFL/AFL (13): 1920, 1921, 1932, 1934, 1943, 1967, 1969, 1973, 1974, 1980, 2017, 2019, 2020 VFA (2): 1902, 1905 맥클렐랜드 트로피 (8): 1967, 1972, 1973, 1974, 1975, 1977, 1982, 2018 오스트레일리아 챔피언십 (3): 1969, 1973, 1974 리저브/VFL (10): 1929, 1946, 1954, 1955, 1966, 1971, 1973, 1977, 1997, 2019 3군/U-19 (11): 1958, 1967, 1968, 1969, 1970, 1973, 1975, 1977, 1980, 1985, 1989 VWFL (3): 2019, 2022, 2024 VWFL 리저브/개발 (1): 2022 |
구장 | AFL: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 (100,024석) AFLW/VFL: 펀트 로드 오벌 (2,800석) |
클럽 회원 | 100,420명 |
훈련장 | 펀트 로드 오벌 |
웹사이트 | richmondfc.com.a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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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정보 | |
시즌 | 2024 |
순위 | 18위 |
최고 & 공정한 선수 | 다니엘 리올리 |
최고 & 공정한 선수 명칭 | 잭 다이어 메달 |
최다 득점자 | 샤이 볼턴 (34골) |
유니폼 | |
홈 | pattern_b1: _richmond2023h pattern_so1: _hoops_black body1: FED102 shorts1: 141414 socks1: FED102 |
원정 | pattern_b2: _richmond2023h pattern_so2: _hoops_black body2: FED102 shorts2: _white socks2: FED102 |
클래시 | pattern_b3: _richmond2023c pattern_so3: _hoops_black body3: FED102 socks3: FED102 pattern_name3: 클래시 |
휠체어 풋볼 | |
리그 | VWFL (혼성) |
2. 역사
1885년 2월 20일, 리치먼드 로열 호텔에서 열린 회의에서 리치먼드 풋볼 클럽이 공식적으로 창단되었고, 곧바로 빅토리아 풋볼 협회(VFA)에 가입했다. 클럽은 리치먼드 크리켓 클럽과 푼트 로드 오벌을 공유했는데, 이 크리켓 클럽은 1856년부터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해온, 호주에서 가장 강력한 크리켓 클럽 중 하나였다.[10]
처음에 팀은 리치먼드 크리켓 클럽 스타일의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파란색 저지와 모자를 착용했다. 풋볼 클럽은 곧 공식 색상으로 노란색과 검은색을 채택했다. 1890년대부터 서포터들과 선수들은 종종 "리치먼드"라고 불렸고,[12] 1890년 ''The Age''[13], 1899년 ''The Leader'' [14], 전 클럽 비서 윌리엄 메이버리에 따르면 팀은 때때로 "와스프스(말벌)"라고 불렸다.[15] 현재 알려진 별명인 "타이거스(호랑이)"는 1908~1910년경 신문 ''펀치''[16]와 ''더 리치먼드 가디언''을 통해 처음 채택되었다.[17]
1880년대 후반, 리치먼드는 VFA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1888년에 11승으로 5위를 기록하며 잠시 가능성을 보였지만, 이후 선수들을 더 성공적인 팀에 빼앗기며 다시 하락세를 겪었다. 1890년대 초, 지역 경제가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지고 관중이 줄어들면서 VFA의 가장 강력한 클럽들은 경쟁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치먼드는 VFA 회의에서 투표 블록으로 투표하는 이 엘리트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
1896년, 리치먼드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사우스 멜버른과의 경기에서 포기했고, 시즌 후반에는 경기장에 너무 많은 선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에센던과의 전반전 점수가 무효가 되었다. 시즌 마지막 3주 동안 리치먼드의 입장료 수입은 단 5GBP에 불과했고, 시즌을 최하위로 마감했다.
1896년 10월, 6개의 강력한 클럽이 협회와 결별하여 빅토리아 풋볼 리그(VFL)를 결성했다. 당시 약체 팀으로서 팬이 적었던 리치먼드는 새로운 리그에 초대받지 못했다. 리치먼드의 성적은 세기 전환기까지 규모가 줄어든 VFA에서 즉시 개선되지 않았다.
1901년, 리치먼드는 시골 선수들을 영입하며 힘을 얻었다. 조지 "말리" 존슨은 즉각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클럽 최초의 진정한 스타 선수가 되었다. 리치먼드는 3위로 도약했고, 1902년에는 존슨의 활약으로 시즌 마지막 몇 주 동안 포트 멜버른과 1위를 다투었지만, 포트 멜버른이 윌리엄스타운에게 패배하면서 리치먼드에게 첫 번째 우승기를 안겨주었다. VFA는 프리미어십 플레이오프에서 잠재적인 대박을 놓치고, 1903년에 VFL을 따라 결승 시리즈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리치먼드에게 운명적인 결정이었다. 리치먼드는 최고의 골키퍼 잭 허친슨을 영입하고 정규 시즌 우승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두 번의 결승전에서 모두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다음 시즌, 리치먼드는 심판 앨런과 분쟁에 휘말렸다. 리치먼드는 앨런이 경기장 침입을 막지 못했고, 특히 숙적 노스 멜버른의 의심스러운 전술을 제지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1904년 9월 10일 경기에서 리치먼드 선수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노스 멜버른 선수들의 부츠 바닥에 "스파이크"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했다.[18] 두 클럽이 1904 VFA 그랜드 파이널에서 만날 예정이었을 때, 리치먼드는 앨런을 심판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VFA는 앨런을 경기의 심판으로 임명했고, 결국 그랜드 파이널은 취소되고 노스 멜버른이 기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19][20][21]
리치먼드는 VFA와 공개적으로 대립했고, 상황은 그 후 몇 년 동안 개선되지 않았다. 리치먼드는 경기장 안팎 및 관중 간의 폭력, 품위 없는 행위, 좋지 않은 스포츠 정신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이는 1896년 분열 이후 VFL보다 VFA를 더 괴롭힌 문제였다. 리치먼드는 VFL 클럽과 연습 경기를 치르면서 관계를 맺었다. 리치먼드는 자신들이 VFA의 주요 자산이며, 많은 팬을 확보했고, 5년 동안 무패를 유지했던 경쟁에서 최고의 그라운드 중 하나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05년, 리치먼드는 숙적 노스 멜버른을 꺾고 두 번째 프리미어십을 차지하며 그 지위를 확인했다. "말리" 존슨은 칼턴으로 이적했지만, 젊은 찰리 리케츠가 시즌을 지배하며 언론인들 사이에서 찬사를 받아 VFA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리케츠도 VFL로 떠났고 부상이 클럽을 강타했다. 1906~07년, 리치먼드는 우승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태에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1907년 시즌 전, 리치먼드는 질롱과의 연습 경기를 계획한 것에 대해 VFA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그 약속을 이행하여 추가 제재를 받았다. 그해 후반, VFL이 경쟁을 확대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리치먼드는 노스 멜버른보다 앞서 자리를 차지했는데, 노스 멜버른은 입찰의 일환으로 파산한 웨스트 멜버른과의 합병으로 강화되었다. 리치먼드는 1907년 10월 18일 VFL에 가입이 승인되었다.[22]
리치먼드의 VFL 초기 시즌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몇몇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지만, 많은 유망주들을 놓쳤고, 1908년 시즌 이후 조지 베넷의 사망으로 행정부가 불안정해졌다. 1916년에는 처음으로 우든 스푼을 받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리그가 4개 팀으로 축소되면서 결승전에 자동 진출했다.
1919년, 리치먼드는 처음으로 그랜드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콜링우드에게 패했다. 이후 전 주장이었던 댄 미노그를 선수 겸 코치로 영입하여 콜링우드와의 라이벌 관계를 만들었고, 1920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콜링우드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하며 복수했다. 1921년에는 마이너 프리미어였던 칼튼을 두 번의 결승전에서 꺾고 2연패를 달성했다.
1920년대에 리치먼드는 4번의 그랜드 파이널에 더 진출했지만 모두 패했다. 특히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콜링우드에게 3년 연속 그랜드 파이널에서 패배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다.
1932년, 리치먼드는 칼튼을 꺾고 다시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경기에서 윙맨 앨런 게데스는 턱뼈가 부러진 채 후반전을 뛰었다. 1934년에는 사우스 멜버른을 꺾고 우승하여 1933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1940년 시즌 전, 클럽 내부 문제로 퍼시 벤틀리 코치 교체 논의가 있었고, 잭 다이어는 VFA 이적을 고려하기도 했다.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1940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멜버른에게 크게 패배했다. 벤틀리는 코치 연임 협상에 실패하고 칼튼으로 이적하며 두 클럽 간의 라이벌 관계가 심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리치먼드는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 1942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에센돈에게 패했지만, 1943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에센돈을 꺾고 우승했다. 이 승리는 사망한 전 선수 빌 코스그로브에게 헌정되었다. 1944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는 피츠로이에게 패했다.
1945년 이후, 뛰어난 신인 선수들이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치먼드는 1947년에 플레이오프에 한 번 진출했을 뿐, 4위 안에 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잭 다이어는 1949년 말 선수 은퇴 후 3년 동안 코치를 맡았지만, 구단은 쇄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위원회에서 은퇴를 요청했다. 1950년대 여러 코치들 아래에서, 구단은 선수 영입에 충분한 자금을 할당하지 않았고, 스타 선수들이 은퇴했을 때 이들을 대체하지 못했다. 데스 로위와 2회 브라운로 메달 수상자인 로이 라이트와 같은 주력 선수들이 떠나자 팀은 급격히 부진하여 1960년 나무 숟가락으로 시즌을 마감했다.[4]
1962년, 그레이엄 리치먼드가 클럽 비서로 임명되었다. 리치먼드는 선수 영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로이스 하트에게는 양복 한 벌과 셔츠 여섯 벌을, 케빈 바틀렛은 길거리에서 영입하는 등 저렴한 비용으로 젊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전 선수인 톰 하페이가 굴번 밸리 풋볼 리그의 셰퍼튼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주목했다. 1965년, 렌 스미스 코치가 심장마비를 겪자, 구단은 임시 코치로 잭 타이투스를 임명했다. 이후 하페이가 지원했고, 그레이엄 리치먼드의 지지로 1966년 시즌 코치로 임명되었다.[4]
1966년, 톰 하페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페이는 빅토리아 북부에서 딕 클레이, 프란시스 보크, 더그 스트랭, 존 페리 등 실력 있는 젊은 선수들을 데려왔다. 또한, 지역 출신의 케빈 바틀렛과 마이크 그린이 합류했다. 하페이는 렌 스미스의 아이디어와 전술을 인정하면서도, 공을 길게 차서 공격 라인으로 빠르게 보내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선수들의 체력 기준을 높이기 위해 프리시즌 훈련을 연장하고 주중에 세 번째 훈련 밤을 도입하여, 리치먼드는 곧 경쟁에서 가장 체력이 좋은 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리치먼드는 1966년을 강력하게 시작했지만, 두 번의 패배로 5위에 그쳤다. 이후 로이스 하트, 케빈 셰디, 프란시스 보크와 같은 새로운 선수들로 교체했다.[4]
1967년 시즌, 리치먼드는 지롱과의 클래식 그랜드 파이널에서 승리하며 24년 만에 프리미어십 가뭄을 끝냈다. 하페이는 시골에서 이름 없는 감독에서 축구계의 인물로 변모했다. 1967년의 프리미어십은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가 고득점 시대로 진입하는 전환점이 되었다.[4]
1968년 시즌에는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1969년 중반에 팀이 부진하자 하페이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지지로 시즌을 강력하게 마무리했고, 1969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칼턴을 꺾고 우승했다.[4]
1970년 플레이오프를 놓친 후, 하페이는 1972년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칼턴에게 패배했지만, 1973년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복수하고, 1974년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는 노스 멜버른을 상대로 승리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4]
1975년 쇠퇴의 조짐을 보였고, 1976년에는 7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하페이의 최악의 결과를 기록했다. 리치먼드 이사회의 갈등이 공개되었고, 하페이는 재임명을 위해 과반수 투표가 필요했지만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그라임 리치먼드가 하페이의 재임명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하페이는 즉시 사임했다.[4]
클럽은 배리 리차드슨을 2시즌 동안 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토니 주얼로 교체되었다. 리치먼드는 주얼 아래에서 1980년 VFL 그랜드 파이널에 콜링우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1982년 VFL 그랜드 파이널에 진출하여 패배한 후, 리치먼드는 드래프트 및 샐러리 캡을 포함한 현대화된 VFL의 규칙과 규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의 성공은 값비싼 선수 영입으로 인한 재정적 대가를 치렀고, 여러 최고의 선수들이 떠나는 구조 조정으로 이어졌다.[4]
1980년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숙적 콜링우드를 상대로 당시 기록적인 81점 차이로 승리하여 프리미어십을 차지한 후, 리치먼드는 드래프트 및 샐러리 캡을 포함한 현대화된 VFL의 규칙과 규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의 성공은 값비싼 선수 영입을 통해 높은 재정적 대가를 치렀고, 여러 최고의 선수들이 떠나는 구조 조정으로 이어졌다.[11]
1984년, 리치먼드는 콜링우드에서 스타 선수들을 잃은 아픔을 씻고자 존 애니에어, 크레이그 스튜어트, 필 월시 등 콜링우드 선수 세 명을 영입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거액의 계약금, 이적료, 소송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11]
리치먼드는 평범한 선수들에게도 거액의 계약을 안겨주었고, 이는 클럽 재정에 큰 타격을 입혔다. 팀 성적이 개선되지 않자, 위원회에 대한 반발이 커졌고, 리치먼드의 전통적인 정치적 안정은 위협받게 되었다. 오랜 기간 팀에 봉사해 온 빌 더럼이 조직한 반란 그룹은 전 선수이자 코치였던 배리 리처드슨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1984년 말 선거는 명확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11]
새해에도 이언 윌슨이 회장직을 유지했다. 1985년 2월, 클럽 100주년 기념행사가 다가왔지만, 극심한 불화로 인해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결국 윌슨은 리처드슨에게 회장직을 넘겼고, 리처드슨은 전 프리미어십 팀 동료였던 폴 스프롤을 태즈메이니아에서 복귀시켜 코치직을 맡겼다.[11]
리치먼드가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시즌이 진행되자 스프롤은 압박을 받았다. 리처드슨은 그의 자리를 보장했지만, 연말에 위원회는 리처드슨의 결정을 뒤집고 스프롤을 해고했다. 격분한 리처드슨은 펀트 로드를 떠났다. 절망에 빠진 리치먼드는 토니 주얼에게 다시 눈을 돌렸고, 그는 두 번째로 코치로 임명되었다. 이는 클럽 역사상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유일한 사례였다. 주얼은 4년간의 공백 기간 동안 클럽에 가해진 파괴에 대해 "서포터, 멤버, 돈 모두 사라졌다. ...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말했다.[11]
1986년, 경쟁이 확대될 예정이던 시기에 리치먼드는 몇 가지 잘못된 행보를 보였다. 리처드슨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앨런 본드라는 서호주 기업가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본드는 주식 시장에 상장하고 브리즈번으로 이전하여 클럽 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브리즈번 이전 계획이 언론에 공개되자 서포터들과 클럽 유명 인사들의 격렬한 반발로 인해 이 제안은 거의 즉시 무산되었다. 1987년 초, 본드의 클럽 재임 기간은 그가 단 한 경기도 주재하지 않고 사임하면서 웃음거리로 끝났다. 이러한 경기장 밖의 혼란은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반영되어 리치먼드는 70년 만에 두 번째로 최하위 팀으로 추락했다.[11]
새 회장이자 전 주장이었던 네빌 크로우는 클럽을 안정시키고, 클럽의 전설 케빈 바틀렛을 코치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클럽은 지출을 최소화하고 급여 상한선의 3분의 2만 지급하며 간신히 재정적으로 버텼다. 선수 명단을 개선하기 위한 영입 자금은 부족했다. 클럽은 1986년 드래프트 이후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특히 1987년 1순위 지명 선수가 리치먼드에서 단 4경기만 출전하는 등 여러 차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결국 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빠지고 금리가 17%까지 치솟자 리치먼드의 채권자들이 압박을 가해왔다. 한때는 클럽의 미납 부채에 대한 담보로 1973년과 1974년 프리미어십 트로피를 압류하려는 시도까지 벌어져 큰 망신을 샀다. 몇 년 동안 클럽의 정확한 부채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바틀렛의 뒤를 이어 앨런 진스가 코치직을 맡았고, 1993년에는 전 리치먼드 프리미어십 선수 존 노시에게 자리가 넘어갔다. 노시는 팀을 톰 헤이피 감독 시절의 단순한 롱킥 스타일로 되돌렸다. AFL에서 부여한 몇 가지 드래프트 양보와 노시의 노력으로 리치먼드는 점차 개선되었다. 1994년 AFL 결승전 진출 기회를 놓쳤지만, 1995년 AFL 시즌에는 75년 만에 최고의 시즌 초반을 보내며 예선 결승에 진출했다. 재능 있는 선수 명단과 레온 다프네(앨런 본드 사태를 제외하면 기업계 출신 리치먼드의 첫 번째 회장)가 이끄는 강력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리치먼드는 다시 정기적으로 결승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성공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리치먼드가 코칭 자리를 다시 불안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계약 기간이 1년 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노시는 구단이 거부한 계약 연장을 요구했다. 이는 구단과 관련된 일부 사람들이 에센던의 코치이자 전 리치먼드 우승 선수인 케빈 쉬디를 영입하려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결국 노시는 리치먼드를 떠나 브리즈번 베어스와 장기 계약을 맺었다. 당황한 리치먼드는 1996년 로버트 월스를 베어스의 전 코치로 임명했다. 1997년 여러 차례 굴욕적인 참패를 겪은 후, 로버트 월스는 시즌 중반에 해고된 최초의 리치먼드 코치가 되었다. 제프 기스첸의 2년 반 동안의 코칭 이후, 구단은 전 세인트킬다 주장인 대니 프롤리를 임명했다. 프롤리의 두 번째 시즌에 준결승전에 진출한 후, 리치먼드는 선수단의 강점을 과대평가하여 신인 드래프트 대신 기성 선수 영입에 만족했다. 그 후 3시즌 동안 팀은 단 18승만을 거두었다. 구단은 계속해서 프롤리를 지원했고, 그의 계약 기간을 보장했는데, 이는 이전 코치들이 받았던 대우와는 달랐다. 그러나 2004 시즌 중반(리치먼드는 4승만을 거두고 마지막 14번의 정규 시즌 경기를 모두 패배한 시즌)에 프롤리는 시즌 말에 리치먼드 코치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84년, 리치먼드는 콜링우드에서 스타 선수들을 잃은 아픔을 딛고, 존 애니에어, 크레이그 스튜어트, 필 월시 등 콜링우드 선수 세 명을 영입하며 콜링우드와의 경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거액의 계약금, 이적료, 소송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리치먼드는 평범한 선수들에게도 과도한 계약을 제시했고, 이는 클럽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팀 성적 부진과 재정 악화는 위원회에 대한 반발을 불러왔고, 전통적으로 안정적이었던 리치먼드의 정치적 상황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클럽에 헌신했던 빌 더럼은 반란 그룹을 조직하여 전 선수이자 코치였던 배리 리처드슨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1984년 말 선거는 혼란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새해에도 이언 윌슨이 회장직을 유지했다. 1985년 2월, 클럽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다가왔지만, 내부 불화로 인해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결국 윌슨은 리처드슨에게 회장직을 넘겼고, 리처드슨은 전 프리미어십 팀 동료였던 폴 스프롤을 태즈메이니아에서 복귀시켜 코치직을 맡겼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리치먼드는 계속 고전했고, 스프롤은 압박을 받았다. 리처드슨은 그의 자리를 보장했지만, 연말에 위원회는 리처드슨의 결정을 번복하고 스프롤을 해고했다. 분노한 리처드슨은 펀트 로드를 떠났다. 절망에 빠진 리치먼드는 토니 주얼에게 다시 코치직을 제안했고, 그는 클럽 역사상 두 번째로 코치직을 맡게 되었다. 주얼은 4년 간의 공백 기간 동안 클럽이 겪은 어려움에 대해 "서포터, 멤버, 돈 모두 사라졌다. ... 정말 슬픈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1986년, 경쟁이 확대될 예정이었던 시기에 리치먼드는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리처드슨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앨런 본드라는 서호주 출신의 사업가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본드는 주식 시장 상장과 브리즈번 이전을 통해 클럽 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브리즈번 이전 계획이 언론에 공개되자 서포터들과 클럽 유명 인사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1987년 초, 본드는 단 한 경기도 주재하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그의 클럽 재임 기간은 웃음거리로 끝났다. 이러한 경기장 밖 혼란은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쳐, 리치먼드는 70년 만에 두 번째로 최하위 팀으로 추락했다.
새 회장이자 전 주장이었던 네빌 크로우는 클럽을 안정시키고, 클럽의 전설 케빈 바틀렛을 코치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클럽은 지출을 최소화하고 급여 상한선의 3분의 2만 지급하며 간신히 재정적으로 버텼다. 선수 명단을 개선하기 위한 영입 자금은 부족했다. 클럽은 1986년 드래프트 이후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특히 1987년 1순위 지명 선수가 리치먼드에서 단 4경기만 출전하는 등 여러 차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결국 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빠지고 금리가 17%까지 치솟자 리치먼드의 채권자들이 압박을 가해왔다. 한때는 클럽의 미납 부채에 대한 담보로 1973년과 1974년 프리미어십 트로피를 압류하려는 시도까지 벌어져 큰 망신을 샀다. 몇 년 동안 클럽의 정확한 부채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바틀렛의 뒤를 이어 앨런 진스가 코치직을 맡았고, 1993년에는 전 리치먼드 프리미어십 선수 존 노시에게 자리가 넘어갔다. 노시는 팀을 톰 헤이피 감독 시절의 단순한 롱킥 스타일로 되돌렸다. AFL에서 부여한 몇 가지 드래프트 양보와 노시의 노력으로 리치먼드는 점차 개선되었다. 1994년 AFL 결승전 진출 기회를 놓쳤지만, 1995년 AFL 시즌에는 75년 만에 최고의 시즌 초반을 보내며 예선 결승에 진출했다. 재능 있는 선수 명단과 레온 다프네(앨런 본드 사태를 제외하면 기업계 출신 리치먼드의 첫 번째 회장)가 이끄는 강력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리치먼드는 다시 정기적으로 결승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성공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리치먼드가 코칭 자리를 다시 불안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계약 기간이 1년 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노시는 구단이 거부한 계약 연장을 요구했다. 이는 구단과 관련된 일부 사람들이 에센던의 코치이자 전 리치먼드 우승 선수인 케빈 쉬디를 영입하려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시는 리치먼드를 떠나 브리즈번 베어스의 장기 계약을 받아들였다. 리치먼드는 당황하여 1996년 로버트 월스를 베어스의 전 코치로 임명했다. 1997년 여러 차례 굴욕적인 참패를 겪은 후, 로버트 월스는 시즌 중반에 해고된 최초의 리치먼드 코치가 되었다. 제프 기스첸의 2년 반의 코칭 이후, 구단은 전 세인트킬다 주장이었던 대니 프롤리를 임명했다. 프롤리의 두 번째 시즌에 준결승전에 진출한 후, 리치먼드는 선수단의 강점을 과대평가하여 신인 드래프트 대신 기성 선수 영입에 만족했다. 그 후 3시즌 동안 팀은 단 18승만을 거두었다. 구단은 계속해서 프롤리를 지원했고, 그의 계약 기간을 보장했는데, 이는 그의 이전 코치들이 대우받았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2004 시즌 중반(리치먼드는 4승만을 거두고 마지막 14번의 정규 시즌 경기를 모두 패배한 시즌)에 프롤리는 시즌 말에 리치먼드 코치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2. 1. 창단과 VFA 시절 (1885–1907)
1885년 2월 20일, 리치먼드 로열 호텔에서 열린 회의에서 리치먼드 풋볼 클럽이 공식적으로 창단되었다. 곧바로 빅토리아 풋볼 협회(VFA)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클럽은 1856년부터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해온 호주에서 가장 강력한 크리켓 클럽 중 하나인 리치먼드 크리켓 클럽과 푼트 로드 오벌을 공유했다.[10]처음에 팀은 리치먼드 크리켓 클럽 스타일의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파란색 저지와 모자를 착용했다. 풋볼 클럽은 곧 공식 색상으로 노란색과 검은색을 채택했다. 1890년대부터 서포터들과 선수들은 종종 "리치먼드"라고 불렸고,[12] 1890년 ''The Age''[13], 1899년 ''The Leader'' [14], 전 클럽 비서 윌리엄 메이버리에 따르면 팀은 때때로 "와스프스(말벌)"라고 불렸다.[15] 현재 그들이 알려진 별명인 "타이거스(호랑이)"는 1908~1910년경 신문 ''펀치''[16]와 ''더 리치먼드 가디언''을 통해 처음 채택되었다.[17]
1880년대 후반, 리치먼드는 VFA에서 인상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1888년의 유망한 시즌(11승으로 5위) 이후 클럽은 후퇴하여 선수들을 더 성공적인 팀에 빼앗겼다. 1890년대 초 지역 경제가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지고 관중이 줄어들면서 VFA의 가장 강력한 클럽 중 일부가 경쟁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리치먼드는 VFA 회의에서 일반적으로 투표 블록으로 투표하는 이 엘리트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
1896년, 리치먼드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기 위해 사우스 멜버른과의 경기에서 포기했으며, 시즌 후반에는 경기장에 너무 많은 선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에센던과의 전반전 점수가 무효가 되었다. 시즌 마지막 3주 동안 리치먼드의 입장료 수입은 단 5GBP에 불과했고, 시즌을 최하위로 마쳤다.
1896년 10월, 6개의 강력한 클럽의 카발은 협회와 결별하여 빅토리아 풋볼 리그(VFL)를 결성했다. 고전하는 클럽으로서 추종자가 적었던 리치먼드는 새로운 리그에 합류하라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리치먼드의 성적은 세기 전환기까지 줄어든 VFA에서 즉시 개선되지 않았다.
타이거스는 1901년에 상당한 시골 선수 영입으로 힘을 얻었다. 조지 "말리" 존슨은 즉각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클럽 최초의 진정한 스타 선수였다. 리치먼드는 3위로 도약했고, 1902년에는 존슨이 럭을 지배하면서 리치먼드는 시즌 마지막 몇 주 동안 포트 멜버른과 1위를 다투었지만, 포트 멜버른은 윌리엄스타운에게 패배하여 리치먼드에게 첫 번째 우승기를 안겨주었다. 프리미어십 플레이오프에서 잠재적인 대박을 놓친 VFA는 VFL을 따라 1903년에 결승 시리즈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타이거스에게 운명적인 결정이었다. 경쟁에서 최고의 골키퍼 잭 허친슨을 영입하고 정규 시즌 우승으로 시즌을 마친 리치먼드는 두 번의 결승전에서 모두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했다.
다음 시즌, 클럽은 심판 앨런과 분쟁에 휘말렸는데, 타이거스는 앨런이 경기장 침입을 막지 못했고, 특히 숙적 노스 멜버른의 의심스러운 전술을 제지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1904년 9월 10일 경기에서 리치먼드 선수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치먼드 선수들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필드 심판 앨런은 노스 멜버른 선수들의 부츠 바닥에 "스파이크"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합법적인 공식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했다.[18] 두 클럽이 1904 VFA 그랜드 파이널에서 만날 예정이었을 때 리치먼드는 앨런을 심판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VFA는 리치먼드의 허세를 간파하고 앨런을 경기의 심판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그랜드 파이널이 취소되고 노스 멜버른이 기권으로 우승을 차지했음을 의미했다.[19][20][21]
리치먼드는 이제 VFA와 공개적으로 대립했고, 상황은 그 후 몇 년 동안 개선되지 않았다. 클럽은 폭력(경기장 안팎 및 관중 간), 품위 없는 행위 및 좋지 않은 스포츠 정신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이는 1896년 분열 이후 경쟁 관계인 VFL보다 VFA를 더 괴롭힌 문제였다. 리치먼드는 VFL 클럽과 연습 경기를 치르면서 관계를 맺었다. 리치먼드는 자신들이 VFA의 주요 자산이며, 많은 추종자를 구축했으며, 5년 동안 무패를 유지했던 경쟁에서 최고의 그라운드 중 하나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05년, 리치먼드는 두 번째 프리미어십으로 그 지위를 확인했는데, 이번에는 숙적 노스 멜버른을 물리쳤다. "말리" 존슨은 칼턴으로 이적했지만, 젊은 찰리 리케츠가 시즌을 지배했고 언론인들 사이에서 찬사를 받아 VFA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리케츠도 VFL로 떠났고 부상이 클럽을 강타했다. 1906~07년, 타이거스는 우승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태에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클럽은 1907년 시즌 전에 질롱과의 연습 경기를 계획한 것에 대해 VFA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그 약속을 이행하여 추가 제재를 받았다. 그해 후반, VFL이 경쟁을 확대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리치먼드는 노스 멜버른보다 앞서 자리를 차지했는데, 노스 멜버른은 입찰의 일환으로 파산한 웨스트 멜버른과의 합병으로 강화되었다. 리치먼드는 1907년 10월 18일 VFL에 가입이 승인되었다.[22]
2. 2. VFL 참가와 초기 성공 (1908–1944)
리치먼드의 VFL 초기 시즌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몇몇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지만, 많은 유망주들을 놓쳤고, 1908년 시즌 이후 조지 베넷의 사망으로 행정부가 불안정해졌다. 1916년에는 처음으로 우든 스푼을 받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리그가 4개 팀으로 축소되면서 결승전에 자동 진출했다.1919년, 리치먼드는 처음으로 그랜드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콜링우드에게 패했다. 이후 전 주장이었던 댄 미노그를 선수 겸 코치로 영입하여 콜링우드와의 라이벌 관계를 만들었고, 1920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콜링우드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하며 복수했다. 1921년에는 마이너 프리미어였던 칼튼을 두 번의 결승전에서 꺾고 2연패를 달성했다.
1920년대에 리치먼드는 4번의 그랜드 파이널에 더 진출했지만 모두 패했다. 특히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콜링우드에게 3년 연속 그랜드 파이널에서 패배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다.
1932년, 리치먼드는 칼튼을 꺾고 다시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경기에서 윙맨 앨런 게데스는 턱뼈가 부러진 채 후반전을 뛰었다. 1934년에는 사우스 멜버른을 꺾고 우승하여 1933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1940년 시즌 전, 클럽 내부 문제로 퍼시 벤틀리 코치 교체 논의가 있었고, 잭 다이어는 VFA 이적을 고려하기도 했다.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1940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멜버른에게 크게 패배했다. 벤틀리는 코치 연임 협상에 실패하고 칼튼으로 이적하며 두 클럽 간의 라이벌 관계가 심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리치먼드는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 1942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에센돈에게 패했지만, 1943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에센돈을 꺾고 우승했다. 이 승리는 사망한 전 선수 빌 코스그로브에게 헌정되었다. 1944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는 피츠로이에게 패했다.
2. 3. 전후 침체와 하피 시대 (1945–1982)
1945년 이후, 뛰어난 신인 선수들이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치먼드는 1947년에 플레이오프에 한 번 진출했을 뿐, 4위 안에 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잭 다이어는 1949년 말 선수 은퇴 후 3년 동안 코치를 맡았지만, 구단은 쇄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위원회에서 은퇴를 요청했다. 1950년대 여러 코치들 아래에서, 구단은 선수 영입에 충분한 자금을 할당하지 않았고, 스타 선수들이 은퇴했을 때 이들을 대체하지 못했다. 데스 로위와 2회 브라운로 메달 수상자인 로이 라이트와 같은 주력 선수들이 떠나자 팀은 급격히 부진하여 1960년 나무 숟가락으로 시즌을 마감했다.[4]1962년 그레이엄 리치먼드가 클럽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리치먼드는 선수 영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완을 발휘하여 로이스 하트에게는 양복 한 벌과 셔츠 여섯 벌을, 케빈 바틀렛은 길거리에서 영입하는 등 저렴한 비용으로 젊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전 선수인 톰 하페이가 굴번 밸리 풋볼 리그의 셰퍼튼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주목했다. 1965년 렌 스미스 코치가 심장마비를 겪자, 구단은 임시 코치로 잭 타이투스를 임명했다. 이후 하페이가 지원했고, 그레이엄 리치먼드의 지지로 1966년 시즌 코치로 임명되었다.[4]
1966년, 톰 하페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페이는 빅토리아 북부에서 딕 클레이, 프란시스 보크, 더그 스트랭, 존 페리 등 실력 있는 젊은 선수들을 데려왔다. 또한, 지역 출신의 케빈 바틀렛과 마이크 그린이 합류했다. 하페이는 렌 스미스의 아이디어와 전술을 인정하면서도, 공을 길게 차서 공격 라인으로 빠르게 보내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선수들의 체력 기준을 높이기 위해 프리시즌 훈련을 연장하고 주중에 세 번째 훈련 밤을 도입하여, 리치먼드는 곧 경쟁에서 가장 체력이 좋은 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리치먼드는 1966년을 강력하게 시작했지만, 두 번의 패배로 5위에 그쳤다. 이후 로이스 하트, 케빈 셰디, 프란시스 보크와 같은 새로운 선수들로 교체했다.[4]
1967년 시즌, 리치먼드는 지롱과의 클래식 그랜드 파이널에서 승리하며 24년 만에 프리미어십 가뭄을 끝냈다. 하페이는 시골에서 이름 없는 감독에서 축구계의 인물로 변모했다. 1967년의 프리미어십은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가 고득점 시대로 진입하는 전환점이 되었다.[4]
1968년 시즌에는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1969년 중반에 팀이 부진하자 하페이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지지로 시즌을 강력하게 마무리했고, 1969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칼턴을 꺾고 우승했다.[4]
1970년 플레이오프를 놓친 후, 하페이는 1972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칼턴에게 패배했지만, 1973 VFL 그랜드 파이널에서 복수하고, 1974년에는 노스 멜버른을 상대로 승리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4]
1975년 쇠퇴의 조짐을 보였고, 1976년에는 7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하페이의 최악의 결과를 기록했다. 리치먼드 이사회의 갈등이 공개되었고, 하페이는 재임명을 위해 과반수 투표가 필요했지만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그라임 리치먼드가 하페이의 재임명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하페이는 즉시 사임했다.[4]
클럽은 배리 리차드슨을 2시즌 동안 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토니 주얼로 교체되었다. 리치먼드는 주얼 아래에서 1980년에 콜링우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1982 VFL 그랜드 파이널에 진출하여 패배한 후, 리치먼드는 드래프트 및 샐러리 캡을 포함한 현대화된 VFL의 규칙과 규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의 성공은 값비싼 선수 영입으로 인한 재정적 대가를 치렀고, 여러 최고의 선수들이 떠나는 구조 조정으로 이어졌다.[4]
2. 4. 재정 위기와 현대화 (1983–2009)
1980년에 숙적 콜링우드를 상대로 당시 기록적인 81점 차이로 승리하여 프리미어십을 차지한 후, 리치먼드는 드래프트 및 샐러리 캡을 포함한 현대화된 VFL의 규칙과 규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의 성공은 값비싼 선수 영입을 통해 높은 재정적 대가를 치렀고, 여러 최고의 선수들이 떠나는 심각한 구조 조정으로 이어졌다.[11]1984년, 리치먼드는 스타 선수들을 콜링우드로 잃은 데 대한 아픔을 씻고자 존 애니에어, 크레이그 스튜어트, 필 월시 등 세 명의 콜링우드 선수를 영입하면서 콜링우드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거액의 계약금과 이적료는 물론이고, 고액의 소송 비용까지 지불해야 했다.[11]
리치먼드는 또한 몇몇 평범한 선수들에게 거액의 계약을 안겨주었고, 이는 클럽의 재정 상황에 큰 타격을 입혔다. 팀 성적이 개선되지 않자, 위원회에 대한 반발이 커졌고, 리치먼드의 전통적인 정치적 안정은 위협받게 되었다. 오랜 기간 팀에 봉사해 온 빌 더럼이 조직한 반란 그룹은 전 선수이자 코치였던 배리 리처드슨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1984년 말 선거는 명확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11]
새해에도 이언 윌슨이 회장직을 유지했다. 1985년 2월, 클럽의 100주년 생일이 다가왔지만, 극심한 불화로 인해 기념 행사는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결국 윌슨은 리처드슨에게 회장직을 넘겼고, 리처드슨은 전 프리미어십 팀 동료였던 폴 스프롤을 태즈메이니아에서 복귀시켜 코치직을 맡겼다.[11]
리치먼드가 계속해서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시즌이 진행되자 스프롤은 압박을 받았다. 리처드슨은 그의 자리를 보장했지만, 연말에 위원회는 리처드슨의 결정을 뒤집고 스프롤을 해고했다. 격분한 리처드슨은 혼란에 빠진 펀트 로드를 떠났다. 절망에 빠진 리치먼드는 토니 주얼에게 다시 눈을 돌렸고, 그는 두 번째로 코치로 임명되었다. 이는 클럽 역사상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유일한 사례였다. 주얼은 4년 간의 공백 기간 동안 클럽에 가해진 파괴에 대해 "서포터들은 떠났고, 멤버들은 떠났고, 돈도 떠났습니다. ...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11]
경쟁이 확대될 예정이던 1986년, 리치먼드는 몇 가지 잘못된 행보를 보였다. 리처드슨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앨런 본드라는 활발한 서호주 기업가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본드는 주식 시장에 상장하고 브리즈번으로 이전하여 클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브리즈번 이전 계획이 언론에 공개되자 서포터들과 클럽 유명 인사들의 격렬한 반발로 인해 이 제안은 거의 즉시 무산되었다. 1987년 초, 본드의 클럽 재임 기간은 그가 단 한 경기도 주재하지 않고 사임하면서 웃음거리로 끝났다. 이러한 경기장 밖의 혼란은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반영되어 리치먼드는 70년 만에 두 번째로 최하위 팀으로 추락했다.[11]
2. 5. 하드윅 시대와 왕조 구축 (2010–2023)
1984년, 리치먼드는 스타 선수들을 콜링우드로 잃은 아픔을 딛고, 존 애니에어, 크레이그 스튜어트, 필 월시 등 콜링우드 선수 세 명을 영입하며 콜링우드와의 경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거액의 계약금, 이적료, 소송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리치먼드는 평범한 선수들에게도 과도한 계약을 제시했고, 이는 클럽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팀 성적 부진과 재정 악화는 위원회에 대한 반발을 불러왔고, 전통적으로 안정적이었던 리치먼드의 정치적 상황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클럽에 헌신했던 빌 더럼은 반란 그룹을 조직하여 전 선수이자 코치였던 배리 리처드슨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1984년 말 선거는 혼란스러운 결과를 낳았다.새해에도 이언 윌슨이 회장직을 유지했다. 1985년 2월, 클럽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다가왔지만, 내부 불화로 인해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결국 윌슨은 리처드슨에게 회장직을 넘겼고, 리처드슨은 전 프리미어십 팀 동료였던 폴 스프롤을 태즈메이니아에서 복귀시켜 코치직을 맡겼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리치먼드는 계속 고전했고, 스프롤은 압박을 받았다. 리처드슨은 그의 자리를 보장했지만, 연말에 위원회는 리처드슨의 결정을 번복하고 스프롤을 해고했다. 분노한 리처드슨은 펀트 로드를 떠났다. 절망에 빠진 리치먼드는 토니 주얼에게 다시 코치직을 제안했고, 그는 클럽 역사상 두 번째로 코치직을 맡게 되었다. 주얼은 4년 간의 공백 기간 동안 클럽이 겪은 어려움에 대해 "서포터, 멤버, 돈 모두 사라졌다. ... 정말 슬픈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1986년, 경쟁이 확대될 예정이었던 시기에 리치먼드는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리처드슨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앨런 본드라는 서호주 출신의 사업가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본드는 주식 시장 상장과 브리즈번 이전을 통해 클럽 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브리즈번 이전 계획이 언론에 공개되자 서포터들과 클럽 유명 인사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1987년 초, 본드는 단 한 경기도 주재하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그의 클럽 재임 기간은 웃음거리로 끝났다. 이러한 경기장 밖 혼란은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쳐, 리치먼드는 70년 만에 두 번째로 최하위 팀으로 추락했다.
새 회장이자 전 주장이었던 네빌 크로우는 클럽을 안정시키고 클럽의 전설 케빈 바틀렛을 코치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클럽은 지출을 최소화하고 급여 상한선의 3분의 2만 지급하며 간신히 재정적으로 버텼다. 선수 명단을 개선하기 위한 영입 자금은 부족했다. 클럽은 1986년 드래프트 이후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특히 1987년 1순위 지명 선수가 리치먼드에서 단 4경기만 출전하는 등 여러 차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결국 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빠지고 금리가 17%까지 치솟자 리치먼드의 채권자들이 압박을 가해왔다. 한때는 클럽의 미납 부채에 대한 담보로 1973년과 1974년 프리미어십 트로피를 압류하려는 시도까지 벌어져 큰 망신을 샀다. 몇 년 동안 클럽의 정확한 부채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바틀렛의 뒤를 이어 앨런 진스가 코치직을 맡았고, 1993년에는 전 리치먼드 프리미어십 선수 존 노시에게 자리가 넘어갔다. 노시는 팀을 톰 헤이피 감독 시절의 단순한 롱킥 스타일로 되돌렸다. AFL에서 부여한 몇 가지 드래프트 양보와 노시의 노력으로 리치먼드는 점차 개선되었다. 팀은 1994년 AFL 결승전 진출 기회를 놓쳤지만, 1995년에는 75년 만에 최고의 시즌 초반을 보내며 예선 결승에 진출했다. 재능 있는 선수 명단과 레온 다프네(앨런 본드 사태를 제외하면 기업계 출신 리치먼드의 첫 번째 회장)가 이끄는 강력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리치먼드는 다시 정기적으로 결승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성공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리치먼드가 코칭 자리를 다시 불안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계약 기간이 1년 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노시는 구단이 거부한 계약 연장을 요구했다. 이는 구단과 관련된 일부 사람들이 에센던의 코치이자 전 리치먼드 우승 선수인 케빈 쉬디를 영입하려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결국 노시는 리치먼드를 떠나 브리즈번 베어스와 장기 계약을 맺었다. 당황한 리치먼드는 1996년 로버트 월스를 베어스의 전 코치로 임명했다. 1997년 여러 차례 굴욕적인 참패를 겪은 후, 로버트 월스는 시즌 중반에 해고된 최초의 리치먼드 코치가 되었다. 제프 기스첸의 2년 반 동안의 코칭 이후, 구단은 전 세인트킬다 주장인 대니 프롤리를 임명했다. 프롤리의 두 번째 시즌에 준결승전에 진출한 후, 리치먼드는 선수단의 강점을 과대평가하여 신인 드래프트 대신 기성 선수 영입에 만족했다. 그 후 3시즌 동안 팀은 단 18승만을 거두었다. 구단은 계속해서 프롤리를 지원했고, 그의 계약 기간을 보장했는데, 이는 이전 코치들이 받았던 대우와는 달랐다. 그러나 2004 시즌 중반(리치먼드는 4승만을 거두고 마지막 14번의 정규 시즌 경기를 모두 패배한 시즌)에 프롤리는 시즌 말에 리치먼드 코치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2. 6. 왕조 이후 (2024-현재)
예상했던 성공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리치먼드가 코칭 자리를 다시 불안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계약 기간이 1년 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노시는 구단이 거부한 계약 연장을 요구했다. 이는 구단과 연관된 일부 사람들이 에센던의 코치이자 전 리치먼드 우승 선수인 케빈 쉬디를 영입하려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시는 리치먼드를 떠나 브리즈번 베어스의 장기 계약을 받아들였다. 리치먼드는 당황하여 1996년 로버트 월스를 베어스의 전 코치로 임명했다. 1997년 여러 차례 굴욕적인 참패를 겪은 후, 로버트 월스는 시즌 중반에 해고된 최초의 리치먼드 코치가 되었다. 제프 기스첸의 2년 반의 코칭 이후, 구단은 전 세인트킬다 주장이었던 대니 프롤리를 임명했다. 프롤리의 두 번째 시즌에 준결승전에 진출한 후, 리치먼드는 선수단의 강점을 과대평가하여 신인 드래프트 대신 기성 선수 영입에 만족했다. 그 후 3시즌 동안 팀은 단 18승만을 거두었다. 구단은 계속해서 프롤리를 지원했고, 그의 계약 기간을 보장했는데, 이는 그의 이전 코치들이 대우받았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2004 시즌 중반(리치먼드는 4승만을 거두고 마지막 14번의 정규 시즌 경기를 모두 패배한 시즌)에 프롤리는 시즌 말에 리치먼드 코치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3. 클럽 문화
리치먼드는 헌신적인 대규모 서포터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클럽의 홈 경기와 원정 경기에 모두 참석하는 개인 응원단도 포함된다.[90] 1890년대에 클럽은 300명 이상의 시즌 티켓을 판매한 적이 없었지만, VFA에서의 성공으로 팬층이 구축되었고, VFL에 1908년에 가입했을 때 회원 수는 약 2,000명이었다.
1990년 청산 위협을 받자 서포터들은 "Save Our Skins" 캠페인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부채를 갚기 위해 뭉쳤다.[79] 2011년에는 클럽의 부채를 줄이고 필드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풋볼 부서에 대한 지출을 늘릴 수 있도록 ''파이팅 타이거 펀드''를 시작했다.[80]
2013년, 리치먼드는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60,000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The Roar is Back'' 회원 모집 프로모션을 시작했고, 2013년 6월 24일, 리치먼드 최고 경영자 브렌든 게일은 회원 수가 60,000명을 넘어섰다고 확인했다.[81][82]
2014년에는 콜링우드와 호손에 이어 AFL에서 세 번째로 큰 회원 기반을 갖게 되었고,[85] 2015년에 70,809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이 기록은 다시 깨졌지만, 여전히 총 회원 수에서 3위를 차지했다. 2015년에 평균 49,841명의 AFL 최고 관중을 기록했으며, 홈 관중은 2015 AFL 시즌에 평균 53,236명으로 가장 많았다.
2017 AFL 그랜드 파이널 우승 이후, 2018 리치먼드 풋볼 클럽 시즌에 100,726명의 회원을 등록하면서 100,000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86][87] 2022 AFL 시즌에 웨스트 코스트 이글스에 의해 추월되기 전까지 호주 스포츠 팀 중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했으며,[88] 6년 연속 100,000명 이상의 회원 수를 기록했다.[89]
시즌 | 티켓 회원 | 순위 | 결승 진출 | 우승 | 평균 홈 경기 관중 | 평균 원정 경기 관중 | 평균 결승전 관중 | 평균 시즌 관중 | 시즌 총 관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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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101,349 | 13 | 50,646 | 47,581 | 49,180 | 1,131,144 | ||||||
2022 | 100,535 | 7 | 46,485 | 39,465 | 35,013 | 42,975 | 980,456 | |||||
2021 | 105,084 | 12 | 30,116* | 37,243* | 33,705* | 606,081* | ||||||
2020 | 100,420 | 3 | 3,850 | 8,125 | 22,470 | 10,108 | 161,735** | |||||
2019 | 103,358 | 3 | 59,987 | 41,682 | 77,305 | 54,011* | 1,350,275* | |||||
2018 | 100,726 | 1 | 61,175 | 47,452 | 93,203 | 57,554* | 1,381,298* | |||||
2017 | 72,669 | 3 | 55,958 | 37,201 | 96,436 | 52,562* | 1,314,058* | |||||
2016 | 72,278 | 13 | 41,155 | 40,684 | 40,920 | 900,237 | ||||||
2015 | 70,809 | 5 | 49,877 | 45,974 | 90,186 | 49,841* | 1,146,335* | |||||
2014 | 66,122 | 8 | 43,196 | 33,147 | 49,886 | 38,712* | 890,377* | |||||
2013 | 60,321 | 5 | 50,901 | 43,671 | 94,690 | 49,477* | 1,137,980* | |||||
2012 | 53,027 | 12 | 41,319 | 37,909 | 39,614 | 871,504 | ||||||
2011 | 40,184 | 12 | 42,784 | 38,606 | 40,695 | 895,290 | ||||||
2010 | 35,960 | 15 | 37,452 | 38,434 | 37,943 | 834,744 | ||||||
2009 | 36,985 | 15 | 43,165 | 35,822 | 39,493 | 868,855 | ||||||
2008 | 30,820 | 9 | 43,548 | 41,452 | 42,500 | 935,002 | ||||||
2007 | 30,044 | 16 | 38,255 | 44,400 | 41,327 | 909,203 | ||||||
2006 | 29,406 | 9 | 42,929 | 34,849 | 38,889 | 855,556 | ||||||
2005 | 28,029 | 12 | 35,800 | 37,189 | 36,495 | 802,885 | ||||||
2004 | 27,133 | 16 | 35,378 | 32,984 | 34,181 | 751,982 | ||||||
2003 | 25,101 | 13 | 35,630 | 39,901 | 37,766 | 830,841 | ||||||
2002 | 27,251 | 14 | 32,796 | 37,759 | 35,278 | 776,113 | ||||||
2001 | 26,501 | 4 | 46,129 | 42,532 | 66,203 | 46,955* | 1,173,875* | |||||
2000 | 26,869 | 9 | 44,012 | 33,617 | 38,814 | 853,916 | ||||||
1999 | 29,047 | 12 | 40,533 | 39,936 | 40,235 | 885,159 | ||||||
1998 | 27,092 | 9 | 44,307 | 48,768 | 46,537 | 1,023,821 | ||||||
1997 | 24,975 | 13 | 34,515 | 36,713 | 35,614 | 783,517 | ||||||
1996 | 20,308 | 9 | 38,624 | 38,737 | 38,680 | 850,966 | ||||||
1995 | 14,647 | 3 | 41,952 | 37,844 | 75,168 | 44,184* | 1,104,607* | |||||
1994 | 8,229 | 9 | 33,968 | 24,787 | 29,377 | 646,301 | ||||||
1993 | 9,918 | 14 | 24,853 | 23,552 | 24,202 | 484,041 | ||||||
1992 | 8,158 | 13 | 20,888 | 22,255 | 21,572 | 474,575 |
'''굵은 글씨'''는 클럽 기록이다.* 1995, 2001, 2017, 2019년에 3번의 결승전, 2018년에 2번의 결승전, 2013, 2014, 2015년에 1번의 결승전 포함.** 2020년 관중 수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2021년 시즌 후반기의 관중 수도 퍼스 경기를 제외하고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3. 1. 서포터
리치먼드는 헌신적인 대규모 서포터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클럽의 홈 경기와 원정 경기에 모두 참석하는 개인 응원단도 포함된다.팬 기반 구축은 리치먼드에게 느린 과정이었다. 1890년대에 클럽은 300명 이상의 시즌 티켓을 판매한 적이 없었지만, VFA에서의 성공으로 팬층이 구축되었고, VFL에 1908년에 가입했을 때 회원 수는 약 2,000명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에서 클럽은 리치먼드 주민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성공적인 타이거스는 대공황 동안 고난을 겪었던 억압받는 노동자 계층에게 긍정적인 동기였다. 이 시기에 리치먼드 커뮤니티는 거의 절반이 가톨릭 신자였으며, 이러한 인구 통계는 선수와 임원들 사이에서도 클럽에 반영되었다.
멜버른이 전후 시대에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리치먼드 서포터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동부 교외에 집중되었고, 결국 클럽의 대도시 신규 회원 모집 구역을 형성했다. 실제로 웨이벌리 파크 구장의 초기 개발 과정에서 타이거스는 이러한 이유로 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만드는 것을 고려했다. 1950년대의 암울한 시기를 거친 후 리치먼드는 홈 경기를 MCG로 옮겨 많은 팬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 출석률을 거의 두 배로 늘렸다. 타이거스는 1980년대 중반까지 다른 클럽보다 이러한 이점을 유지했지만, 부실한 행정으로 인해 클럽의 모든 분야에서 하락세가 나타났다. 클럽이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회원 수는 10,000명 이상에서 3,000명 미만으로 급감했다.
팬들의 가장 큰 충성심은 1990년에 나타났다. 청산 위협을 받자 서포터들은 "Save Our Skins" 캠페인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부채를 갚기 위해 뭉쳤다.[79] 2011년에 클럽은 클럽의 부채를 줄이고 필드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풋볼 부서에 대한 지출을 늘릴 수 있도록 ''파이팅 타이거 펀드''를 시작했다.[80]
2013년에 클럽은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60,000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The Roar is Back'' 회원 모집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성공적인 캠페인 이후, 2013년 6월 24일, 리치먼드 최고 경영자 브렌든 게일은 회원 수가 60,000명을 넘어섰다고 확인했다.[81][82] 클럽은 이러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한정판 기념 셔린 풋볼을 제작했으며, 2013년 6월 29일 펀트 로드 오벌에서 열린 '60,000명의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BBQ/훈련 모임'에서 가족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다. 2013년 공식 회원 수는 60,321명이었다.[83]
통계 목적으로 6월 30일은 회원 수의 마감일이지만, 회원 모집은 계속된다. 2013년 6월 30일 이후, 클럽은 "2014년 회원으로 가입하고 2013년의 남은 기간을 무료로!" 라는 특별 제안으로 2013년과 2014년 회원 자격을 묶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84] 66,122명의 2014년 회원[85]으로 인해 리치먼드는 콜링우드와 호손(각각 80,793명과 68,650명)에 이어 AFL에서 세 번째로 큰 회원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2015년에 클럽이 70,809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다시 깨졌으며, 여전히 총 회원 수에서 3위를 차지했다. 클럽은 2015년에 평균 49,841명의 AFL 최고 관중을 기록했으며, 홈 관중은 2015 AFL 시즌에 평균 53,236명으로 가장 많았다.
리치먼드의 2017 AFL 그랜드 파이널 우승 이후, 클럽은 2018 리치먼드 풋볼 클럽 시즌에 28,000명 이상으로 회원 기록을 경신했고, 100,726명의 회원을 등록하면서 100,000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86][87] 또한 2022 AFL 시즌에 웨스트 코스트 이글스에 의해 추월되기 전까지 호주 스포츠 팀 중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했다.[88] 리치먼드는 6년 연속 100,000명 이상의 회원 수를 기록했다.[89]
시즌 | 티켓 회원 | 순위 | 결승 진출 | 우승 | 평균 홈 경기 관중 | 평균 원정 경기 관중 | 평균 결승전 관중 | 평균 시즌 관중 | 시즌 총 관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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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101,349 | 13 | 50,646 | 47,581 | 49,180 | 1,131,144 | ||||||
2022 | 100,535 | 7 | 46,485 | 39,465 | 35,013 | 42,975 | 980,456 | |||||
2021 | 105,084 | 12 | 30,116* | 37,243* | 33,705* | 606,081* | ||||||
2020 | 100,420 | 3 | 3,850 | 8,125 | 22,470 | 10,108 | 161,735** | |||||
2019 | 103,358 | 3 | 59,987 | 41,682 | 77,305 | 54,011* | 1,350,275* | |||||
2018 | 100,726 | 1 | 61,175 | 47,452 | 93,203 | 57,554* | 1,381,298* | |||||
2017 | 72,669 | 3 | 55,958 | 37,201 | 96,436 | 52,562* | 1,314,058* | |||||
2016 | 72,278 | 13 | 41,155 | 40,684 | 40,920 | 900,237 | ||||||
2015 | 70,809 | 5 | 49,877 | 45,974 | 90,186 | 49,841* | 1,146,335* | |||||
2014 | 66,122 | 8 | 43,196 | 33,147 | 49,886 | 38,712* | 890,377* | |||||
2013 | 60,321 | 5 | 50,901 | 43,671 | 94,690 | 49,477* | 1,137,980* | |||||
2012 | 53,027 | 12 | 41,319 | 37,909 | 39,614 | 871,504 | ||||||
2011 | 40,184 | 12 | 42,784 | 38,606 | 40,695 | 895,290 | ||||||
2010 | 35,960 | 15 | 37,452 | 38,434 | 37,943 | 834,744 | ||||||
2009 | 36,985 | 15 | 43,165 | 35,822 | 39,493 | 868,855 | ||||||
2008 | 30,820 | 9 | 43,548 | 41,452 | 42,500 | 935,002 | ||||||
2007 | 30,044 | 16 | 38,255 | 44,400 | 41,327 | 909,203 | ||||||
2006 | 29,406 | 9 | 42,929 | 34,849 | 38,889 | 855,556 | ||||||
2005 | 28,029 | 12 | 35,800 | 37,189 | 36,495 | 802,885 | ||||||
2004 | 27,133 | 16 | 35,378 | 32,984 | 34,181 | 751,982 | ||||||
2003 | 25,101 | 13 | 35,630 | 39,901 | 37,766 | 830,841 | ||||||
2002 | 27,251 | 14 | 32,796 | 37,759 | 35,278 | 776,113 | ||||||
2001 | 26,501 | 4 | 46,129 | 42,532 | 66,203 | 46,955* | 1,173,875* | |||||
2000 | 26,869 | 9 | 44,012 | 33,617 | 38,814 | 853,916 | ||||||
1999 | 29,047 | 12 | 40,533 | 39,936 | 40,235 | 885,159 | ||||||
1998 | 27,092 | 9 | 44,307 | 48,768 | 46,537 | 1,023,821 | ||||||
1997 | 24,975 | 13 | 34,515 | 36,713 | 35,614 | 783,517 | ||||||
1996 | 20,308 | 9 | 38,624 | 38,737 | 38,680 | 850,966 | ||||||
1995 | 14,647 | 3 | 41,952 | 37,844 | 75,168 | 44,184* | 1,104,607* | |||||
1994 | 8,229 | 9 | 33,968 | 24,787 | 29,377 | 646,301 | ||||||
1993 | 9,918 | 14 | 24,853 | 23,552 | 24,202 | 484,041 | ||||||
1992 | 8,158 | 13 | 20,888 | 22,255 | 21,572 | 474,575 |
'''굵은 글씨'''는 클럽 기록이다.* 1995, 2001, 2017, 2019년에 3번의 결승전, 2018년에 2번의 결승전, 2013, 2014, 2015년에 1번의 결승전 포함.** 2020년 관중 수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2021년 시즌 후반기의 관중 수도 퍼스 경기를 제외하고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리치먼드 공식 응원단은 멜버른 또는 타 지역에서 열리는 모든 리치먼드 경기에 참여하는 열정적인 지지자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호주의 각 주에도 서포터 그룹이 있다.[90]
3. 2. 유니폼
리치먼드의 현재 홈 유니폼 디자인은 검은색 바탕에 유니폼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이어지는 노란색 띠가 특징이다. 어두운 색상의 유니폼을 입는 팀과의 원정 경기에서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띠가 있는 디자인을 사용한다.구단은 첫 시즌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얇은 노란색과 검은색 띠가 있는 파란색 유니폼을 입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는 스포츠 의류 회사인 BLK가 구단의 유니폼을 제작했으며, 2014년 이전에는 KooGa Australia로 알려졌다가 2016년 11월에 회사가 파산했다.[64] 푸마(Puma SE)가 구단의 온-필드 및 오프-필드 의류를 제작한다.[65] 푸마로 변경되면서 사용되는 노란색은 지난 몇 년 동안 사용되었던 띠보다 약간 더 밝아졌다.
리치먼드의 유니폼은 역사에 걸쳐 변화해왔다.
1885–86 | 1887–1900 | 1900–06 | 1907 | 1908–09 | 19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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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1914–18 | 1919–23 | 1924–28 | 1929–77 | 1978–2000 | 2001–03 |
---|---|---|---|---|---|
-- | -- | -- | -- | -- | -- |
2004–2016 | 2017–present |
---|---|
-- | -- |
3. 3. 클럽 송
1962년 이전, 리치먼드 풋볼 클럽에는 공식 클럽 송이 없었다. 대신 원정 경기에서 선수들은 "With a Hat on One Side"[66], "Barefoot Days"[67] 등 다양한 곡들을 불렀다. 1950년대에는 씬멘(The Thinmen)과 파티 올스타(The Party Allstars)가 "Onward the Tigers"(1962년 이전)[68]라는 음반을 발매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호주 부시 발라드 "왈칭 마틸다" 곡조에 맞춰 클럽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았다.[69] 1962년, 리치먼드 풋볼 클럽의 플레전트 선데이 모닝(Pleasant Sunday Morning) 행사에 정기적으로 출연했던 카바레 가수이자 탭댄서 겸 단역 배우였던 잭 말콤슨(Jack Malcomson)[70]은 위원 알프 바넷(Alf Barnett)으로부터 공식 클럽 송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1912년 지그펠드 폴리즈의 쇼 곡 "Row, Row, Row"(모나코/제롬)를 개작하여 "We're From Tigerland"를 만들었다. 현재 클럽에서 사용 중인 곡은 페이블 싱어스(The Fable Singers)가 1972년에 녹음하고 2018 시즌 시작을 위해 발매된 수정 버전으로, 리치먼드 세기의 팀 선수인 케빈 바틀렛과 매튜 리처드슨의 목소리가 포함되었다.[71][72] 이 곡은 말콤슨의 원래 가사 "skin"을 "shin"으로 대체했다.[73][74] 2014년, ''헤럴드 선''은 이 곡을 모든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AFL) 팀의 클럽 송 중 최고로 선정했다.[75] "Tigerland"는 경기에서 이 곡이 연주될 때 클럽 팬들이 외치는 "Yellow and black"이라는 구절로 유명하다.[76]: ''오, 우리는 타이거랜드에서 왔네''
: ''맹렬한 기세로, 우리는 타이거랜드에서 왔네''
: ''어떤 날씨에도, 미소를 띠며 우리를 보게 될 걸세''
: ''머리와 정강이를 걸고''
: ''뒤쳐져도, 신경쓰지 마''
: ''우리는 싸우고 싸워 이길 거야''
: ''우리는 타이거랜드에서 왔으니까''
: ''마지막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우리는 결코 약해지지 않아''
: ''옛날 호랑이처럼''
: ''우리는 강하고 대담해''
: ''우리는 타이거에서 왔네''
: ''노란색과 검은색''
: ''우리는 타이거랜드에서 왔네''[77]
4. 경기장
리치먼드의 홈 구장은 정규 시즌에 대부분의 홈 경기를 치르는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MCG)이다. MCG는 100,024명의 수용 인원을 가지고 있으며, 구단은 일반적으로 빅토리아 주 클럽, 특히 에센던, 콜링우드, 칼턴 및 호손과 같은 라이벌 팀과의 경기에서 많은 관중을 동원한다.
구단은 또한 멜버른에서 서포터 기반이 더 작은 지역 및 주간 클럽과의 홈 경기를 더 작은 규모의 도클랜드 스타디움에서 치르며, 2011년 이후 매년 한 번씩 해당 구장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 리치먼드의 훈련장과 운영 기지는 MCG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펀트 로드 오벌(현재는 스윈번 센터)에 있다.
5. 기타
Richmond Football Club영어은 1885년에 창단되어 1908년에 빅토리아 풋볼 리그(VFL)에 합류한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클럽이다.
리치먼드는 2017년에 37년 만에 프리미어십 우승을 차지했다. 더스틴 마틴은 같은 시즌에 프리미어십 메달, 브라운로 메달, 노르스미스 메달을 모두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고, 데미안 하드윅은 AFL 코치 협회 올해의 코치로 선정되었다.[39] 2018년에는 18승 4패의 기록으로 마이너 프리미어십을 획득했지만, 예선 결승전에서 콜링우드에 패하며 그랜드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44][45]
2019년에는 그랜드 파이널에서 그레이터 웨스턴 시드니를 89점 차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마틴은 두 번째 노르스미스 메달을 획득했고, 말리온 피켓은 1952년 이후 처음으로 AFL 그랜드 파이널에서 시니어 데뷔를 한 선수가 되었다.[91]
2020년에는 지롱을 31점 차로 꺾고 4년 만에 세 번째 프리미어십을 차지했다. 마틴은 역사상 최초의 3회 노르스미스 메달리스트가 되었다.[78]
'''1908년 이후 클럽 행정'''[78]
연도 | 회장 | 최고 경영자 | 재무 |
---|---|---|---|
2025- | 존 오루크 | 셰인 던 | 티나 데 영 |
2023-2024 | 존 오루크 | 브렌던 게일 | 티나 데 영 |
2018–2022 | 페기 오닐 | 브렌던 게일 | 티나 데 영 |
2013–2018 | 페기 오닐 | 브렌던 게일 | 로버트 달턴 |
2010–2012 | 게리 마르치 | 브렌던 게일 | 로버트 달턴 |
연도 | 회장 | 총괄 관리자 | 재무 |
2006–2009 | 게리 마르치 | 스티브 라이트 | 게리 캐머런 |
2005 | 클린턴 케이시, 게리 마르치 | 스티브 라이트 | 게리 캐머런 |
2004 | 클린턴 케이시 | 이안 캠벨, 스티브 라이트 | 게리 캐머런 |
2003 | 클린턴 케이시 | 이안 캠벨 | 게리 캐머런 |
2001–2002 | 클린턴 케이시 | 마크 브레이쇼 | 게리 캐머런 |
2000 | 클린턴 케이시 | 마크 브레이쇼 | 테리 그리그 |
1999 | 레온 다프네 | 짐 말론 | 테리 그리그 |
1995–1998 | 레온 다프네 | 짐 말론 | 키스 밀러 |
1994 | 레온 다프네 | 카메론 슈왑, 말 브라운, 짐 말론 | 키스 밀러 |
1993 | 네빌 크로우, 레온 다프네 | 카메론 슈왑 | 키스 밀러 |
1991–1992 | 네빌 크로우 | 카메론 슈왑 | 키스 밀러 |
1989–1990 | 네빌 크로우 | 카메론 슈왑 | 마이클 험프리스 |
1988 | 네빌 코위 | 리처드 도겟, 카메론 슈왑 | 마이클 험프리스 |
1987 | 앨런 본드, 네빌 크로우 | 리처드 도겟 | 마이클 험프리스 |
1986 | 빌 더럼 | 케빈 딕슨, 리처드 도겟 | 존 맥코맥, 마이클 험프리스 |
1985 | 이안 윌슨, 배리 리처드슨 | 케빈 딕슨 | 존 맥코맥 |
1981–1984 | 이안 윌슨 | 케빈 딕슨 | 론 카슨 |
1980 | 이안 윌슨 | 리처드 도겟 | 리처드 도겟 |
1979 | 이안 윌슨 | 가레스 앤드루스, 리처드 도겟 | 가레스 앤드루스, 리처드 도겟 |
1978 | 이안 윌슨 | 가레스 앤드루스 | 가레스 앤드루스 |
연도 | 회장 | 서기 | 재무 |
---|---|---|---|
1977 | 이안 윌슨 | 맥스 스케일스, 가레스 앤드루스 | 맥스 스케일스, 가레스 앤드루스 |
1974–1976 | 이안 윌슨 | 앨런 슈왑 | 앨런 슈왑 |
1973 | 알 보드 | 앨런 슈왑 | 앨런 슈왑 |
1972 | 알 보드 | 앨런 슈왑 | 팻 케넬리, 앨런 슈왑 |
1971 | 레이 던, 알 보드 | 앨런 슈왑 | 팻 케넬리 |
1970 | 레이 던 | 앨런 슈왑 | 론 카슨 |
1969 | 레이 던 | 앨런 슈왑 | 그레이엄 리치몬드 |
1968 | 레이 던 | 그레이엄 리치먼드, 앨런 슈왑 | 론 카슨, 그레이엄 리치몬드 |
1966–1967 | 레이 던 | 그레이엄 리치몬드 | 론 카슨 |
1965 | 레이 던 | 그레이엄 리치몬드 | 그레이엄 리치몬드 |
1964 | 레이 던 | 그레이엄 리치몬드 | I 캐머런 |
1963 | 모리 플레밍 | 그레이엄 리치몬드 | 빌 텀스 |
1962 | 모리 플레밍 | 빌 텀스, 그레이엄 리치몬드 | 빌 텀스 |
1960–1961 | 모리 플레밍 | 빌 텀스 | 빌 텀스 |
1959 | 모리 플레밍 | 빌 텀스 | 빌 퀸 |
1958 | 해리 다이크, 모리 플레밍 | 빌 텀스 | 빌 퀸 |
1956–1957 | 해리 다이크 | 빌 텀스 | 빌 퀸 |
1955 | 해리 다이크 | 헥터 링우드-스미스, 빌 텀스 | 빌 퀸 |
1953–1954 | 해리 다이크 | 모리 플레밍 | 빌 퀸 |
1952 | 해리 다이크 | 모리 플레밍, 헥터 링우드-스미스 | 빌 퀸 |
1950–1951 | 해리 다이크 | 모리 플레밍 | 빌 퀸 |
1949 | 해리 다이크 | 모리 플레밍 | 잭 스미스, 빌 퀸 |
1947–1948 | 해리 다이크 | 모리 플레밍 | 잭 스미스 |
1940–1946 | 해리 다이크 | 모리 플레밍 | 찰리 터너 |
1939 | 바니 허버트 | 모리 시핸 | 찰리 터너 |
1938 | 루 로버츠 | 존 스미스 | 찰리 터너 |
1937 | 루 로버츠 | 존 스미스 | 조지 스미스 |
1936 | 루 로버츠 | 존 스미스 | 조스 랭던 |
1932–1935 | 바니 허버트 | 존 스미스 | 조스 랭던 |
1925–1931 | 잭 아처 | 퍼시 페이지 | 조스 랭던 |
1924 | 잭 아처 | 퍼시 페이지 | 에이브 아론스 |
1921–1923 | 알프 우드 | 빌 메이버리 | 에이브 아론스 |
1919–1920 | 알프 우드 | 빌 메이버리 | 잭 아처 |
1917–1918 | 프랭크 튜더 | 빌 메이버리 | 잭 아처 |
1913–1916 | 프랭크 튜더 | 빌 로스 | 잭 아처 |
1912 | 프랭크 튜더 | 조지 비치크로프트 | 제임스 맥더멋 |
1909–1911 | 프랭크 튜더 | 앤드루 맨지 | 아치 맥네어 |
1908 | 조지 베넷 | 앤드루 맨지 | 아치 맥네어 |
'''리치먼드 세기의 팀'''[91]
'''명예의 전당'''[92][93][94]
이름 | 범주 | 리치먼드에서의 경력 | 헌액 연도 | 불멸의 선수 연도 |
---|---|---|---|---|
잭 배곳 | 선수 | 1927–35 | 2019 | |
닐 발메 | 선수 | 1970–79 (선수), 2017–현재 (행정) | 2010 | |
빌 바로트 | 선수 | 1961–70 | 2007 | |
케빈 바틀렛 | 선수 | 1965–83 (선수), 1988–91 (감독) | 2002 | 2004 |
퍼시 벤틀리 | 선수 | 1925–40 (선수), 1934–40 (감독) | 2002 | |
마틴 볼거 | 선수 | 1930–39 (선수), 1940–75 (행정) | 2005 | |
프란시스 보크 | 선수 | 1967–81 (선수), 1982–83 (감독), 1992–94 (행정) | 2002 | 2005 |
조엘 보든 | 선수 | 1996–09 | 2022 | |
론 브랜턴 | 선수 | 1953–62 | 2006 | |
웨인 캠벨 | 선수 | 1991–2005 | 2013 | |
딕 클레이 | 선수 | 1966–76 (선수), 1985 (행정) | 2002 | 2023 |
데이비드 클로크 | 선수 | 1974–82, 1990–91 | 2007 | |
로저 딘 | 선수 | 1957–73 (선수) | 2002 | 2019 |
도널드 돈 | 선수 | 1917–28 | 2015 | |
잭 다이어 | 선수 | 1931–49 (선수), 1941–52 (감독), 1949–53, 1956–63 (행정) | 2002 | 2002 |
알렉 에드먼드 | 선수 | 1899–1907 | 2007 | |
토니 프리 | 선수 | 1987–96 | 2019 | |
앨런 게데스 | 선수 | 1925–35 | 2007 | |
마이클 그린 | 선수 | 1966–75 | 2004 | |
패디 기네인 | 선수 | 1958–68 | 2023 | |
클라리 홀 | 선수 | 1912–22, 1924 (선수), 1924–29, 1932–35 (행정) | 2006 | |
리처드 딕 해리스 | 선수 | 1934–44 (선수), 1964 (감독) | 2004 | |
로이스 하트 | 선수 | 1967–77 (선수), 1977 (행정) | 2002 | 2008 |
프랭크 휴즈 | 선수 | 1914–23 (선수), 1927–32 (감독) | 2004 | |
휴 제임스 | 선수 | 1909–16, 1919–23 | 2005 | |
짐 제스 | 선수 | 1976–88 | 2008 | |
스탠 저드킨스 | 선수 | 1928–36 | 2022 | |
머빈 킨 | 선수 | 1972–84 | 2005 | |
매튜 나이츠 | 선수 | 1988–2002 | 2011 | |
마크 리 | 선수 | 1977–91 | 2010 | |
레이 마틴 | 선수 | 1930–40 | 2010 | |
배질 맥코맥 | 선수 | 1925–36 (선수), 1955–71 (행정) | 2004 | |
레오 메렛 | 선수 | 1940–49 | 2022 | |
빌 모리스 | 선수 | 1942–51 | 2002 | |
조 머독 | 선수 | 1927–36 | 2011 | |
크리스 뉴먼 | 선수 | 2002–15 | 2022 | |
존 노디 | 선수 | 1963–70 (선수), 1993–95 (감독) | 2011 | |
톰 오할로란 | 선수 | 1925–34 | 2013 | |
케빈 오닐 | 선수 | 1930–41 | 2008 | |
맥스 오피 | 선수 | 1942–54 (선수), 1956 (감독) | 2004 | |
제프 레인즈 | 선수 | 1976–82 | 2008 | |
매튜 리처드슨 | 선수 | 1993–2009 | 2015 | |
마이클 로치 | 선수 | 1977–89 | 2002 | |
데스 로위 | 선수 | 1946–57 (선수), 1961–63 (감독) | 2004 | |
하벨 로위 | 선수 | 1948–57 | 2015 | |
배리 롤링스 | 선수 | 1979–86 | 2015 | |
케빈 시디 | 선수 | 1967–79 | 2002 | |
지미 스미스 | 선수 | 1917–26 | 2023 | |
이안 스튜어트 | 선수 | 1971–75 | 2013 | |
빅 소프 | 선수 | 1910–25 (선수), 1927–35 (행정) | 2002 | 2015 |
잭 타이터스 | 선수 | 1926–43 (선수), 1965 (감독) 1944–77 (행정) | 2002 | 2019 |
웨인 왈시 | 선수 | 1968, 1972–78 | 2013 | |
데일 웨이트먼 | 선수 | 1978–93 | 2002 | |
브라이언 우드 | 선수 | 1972–82 | 2006 | |
로이 라이트 | 선수 | 1946–59 | 2002 | |
톰 헤이피 | 공헌자 | 1953–58 (선수), 1966–76 (감독) | 2002 | 2003 |
댄 미노그 | 공헌자 | 1920–25 (선수), 1920–25 (감독) | 2002 | |
찰리 백하우스 | 공헌자 | 1891–1905 (선수), 1894, 1900, 1902 (행정) | 2002 | |
찰리 칼렌더 | 공헌자 | 1924–86 (시설 관리자/행정) | 2002 | |
제임스 찰스 | 공헌자 | 1885–88, 1896 (창립자/행정) | 2002 | |
앨런 쿡 | 공헌자 | 1949–58 (선수), 1967–84 (행정) | 2006 | |
네빌 크로우 | 공헌자 | 1957–67 (선수), 1987–93 (행정/회장) | 2002 | |
레이 던 | 공헌자 | 1940–71 (행정/회장) | 2002 | |
바니 허버트 | 공헌자 | 1909–12, 1914–21 (선수), 1932–35, 1939 (행정/회장) | 2004 | |
토니 주얼 | 공헌자 | 1964–70 (선수), 1979–81, 1986–87 (감독), 1994–2003 (행정) | 2002 | |
배리 리처드슨 | 공헌자 | 1965–74 (선수), 1977–78 (감독), 1985 (회장) | 2004 | |
그레이엄 리치먼드 | 공헌자 | 1962–86 (행정) | 2002 | |
앨리스 윌스 | 공헌자 | 1950–81 (?) (서포터 그룹/행정) | 2002 | |
이안 윌슨 | 공헌자 | 1969–85 (행정) | 2010 | |
브렌던 게일 | 공헌자 | 1990-2001 (선수), 2009–24 (행정) | 2024 |
5. 1. 여자 풋볼 팀 (AFLW)
리치먼드 풋볼 클럽은 여자부 최고의 전국 리그인 AFL 여자부 대회에 팀을 출전시키고 있다. 클럽은 2020년에 리그에 참가했다. 2018년과 2019년 두 시즌 동안 클럽은 주 리그 수준의 VFL 여자부 대회에도 팀을 출전시켰다.[115]개발 경로를 포함한 이 프로그램은 현재 여자 풋볼 운영 매니저인 케이트 시핸이 감독하고 있다.
리치먼드는 여자 풋볼과의 역사가 희박하며, 20세기에 단 두 번의 여자 경기에만 클럽이 관여했다. 첫 경기는 1923년에 열렸으며, "타이그레스"라는 팀이 클럽의 주니어 남자 팀(커브스)과 대결하여 VFL 팀의 주 간 여행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그 시대의 여자 대 남자 자선 경기에서 그랬듯이, 남자 팀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릎에 장애물을 걸고 경기에 참가했다.[108] 진지하지 않은 경기에서 여자 팀(9.14 (68))은 커브스 팀(0.1 (1))을 이겼다.[109][110] 1933년 8월, 리치먼드와 칼턴 교외를 대표하는 팀 간의 여자 경기가 자선 경기로 열렸다. 칼턴 팀이 클럽 자체와 연관되어 있었지만, 리치먼드는 그들의 명칭으로 경기를 한 팀과 연관되지 않았다. 칼턴의 홈 구장인 프린세스 파크에서 열린 이 경기는 약 10,000명의 관중을 모았고, 로열 멜버른 병원을 위한 VFL 휴식 주간 카니발의 일환으로 기금을 모았다.[111]
2016년, 리치먼드는 곧 창설될 호주 여성 풋볼 리그(AFL Women's)에 참가하기 위한 라이선스를 입찰한 13개의 호주 풋볼 리그(AFL) 클럽 중 하나였다. 이 클럽은 최종적으로 라이선스를 획득하지 못한 5개 클럽 중 하나였지만, 추후 확장에 참여할 수 있는 임시 라이선스를 받았다.[112] 이듬해, 그들은 다시 입찰하여 2020년에 개최될 리그의 네 번째 시즌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113] 클럽의 첫 번째 선수 계약은 2019년 4월 확장 선수 영입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전 주장 케이티 브레넌을 영입했다. 그녀는 리그 첫 시즌에 클럽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114]
2017년 10월, 리치먼드는 2018 VFL 위민스 시즌에 팀을 출전시킬 수 있는 라이선스를 받았다.[115] 그들은 그 시즌에 10개의 빅토리아주에 기반을 둔 모든 AFL 클럽을 포함하여 총 13개 클럽 중 하나였다. 이 리그는 겨울 시즌에 운영되었다(AFLW 경쟁과는 별개로). 전 남자 VFL 어시스턴트 코치인 톰 헌터가 2017년 11월 팀의 헤드 코치로 임명되었고, 2018년과 2019년 시즌 동안 그 역할을 수행했다.[116] 제스 케네디는 2018년 5월 팀의 초대 주장을 맡았다.[117] 2020년 시즌이 코로나19 범유행의 영향으로 취소된 후, 이 클럽은 두 시즌 동안 경쟁에 참여했으며 포트 멜버른 풋볼 클럽과의 제휴를 맺고 경쟁에서 철수했다.[118]
'''리치먼드 AFLW 명예의 전당'''
시즌 | 순위 | 승–패–무 | 플레이오프 | 코치 | 주장 | 최우수 선수 | 최다 득점자 |
---|---|---|---|---|---|---|---|
2020 | 14위 ^ | 0–6–0 | DNQ | 톰 헌터 | 케이티 브레넌 | 모니크 콘티 | 코트니 웨이크필드 (4) |
2021 | 10위 | 3–6–0 | DNQ | 라이언 퍼거슨 | 케이티 브레넌 | 모니크 콘티 | 케이티 브레넌 (14) |
2022 (S6) | 11위 | 3–7–0 | DNQ | 라이언 퍼거슨 | 케이티 브레넌 | 모니크 콘티 | 케이티 브레넌 (14) |
2022 (S7) | 4위 | 7–2–1 | 준결승 진출 | 라이언 퍼거슨 | 케이티 브레넌 | 모니크 콘티 | 코트니 웨이크필드 (14) |
2023 | 10위 | 5–5–0 | DNQ | 라이언 퍼거슨 | 케이티 브레넌 | 모니크 콘티 | 케이티 브레넌 (14) |
^ 순위는 두 컨퍼런스로 나뉘었습니다. 숫자는 정규 시즌에서 클럽의 전체 순위를 나타냅니다.
'''리치먼드 VFLW 명예의 전당'''[119][120]
시즌 | 최종 순위 | 감독 | 주장 | 최우수 선수 | 최다 득점자 |
---|---|---|---|---|---|
2018 | 12위 | 톰 헌터 | 제시카 케네디 | 제시카 케네디 | 케이트 딕슨 (9) |
2019 | 4위 | 톰 헌터 | 제시카 케네디 | 모니크 콘티 | 테일라 스탈 (19) |
5. 2. 휠체어 풋볼 팀
리치먼드는 2018년 빅토리아 휠체어 풋볼 리그가 시작된 이래로 팀을 출전시켰다.[121] 2018년 준우승을 한 후, 2019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22] 코로나19 범유행으로 2020년과 2021년 시즌이 중단되어 2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이후, 리치먼드는 2022년에 두 번째 리그 우승[123]과 개발 리그 우승[124]을 차지했다.년도 | 대회 | 상대팀 | 점수 | 장소 |
---|---|---|---|---|
2019 | 빅토리아 휠체어 풋볼 리그 | 콜링우드 | 9.7 (61) – 7.5 (47) | 보로다라 스포츠 단지 |
2022 | 빅토리아 휠체어 풋볼 리그 | 에센돈 | 17.8 (110) – 12.8 (80) | 멜버른 스포츠 앤 아쿠아틱 센터 |
2024 | 빅토리아 휠체어 풋볼 리그 | 콜링우드 | 13.4 (82) – 9.5 (59) | 멜버른 스포츠 앤 아쿠아틱 센터 |
년도 | 대회 | 상대팀 | 점수 | 장소 |
---|---|---|---|---|
2022 | VWFL 개발 리그 | 에센돈 | 12.4 (76) – 9.4 (58) | 멜버른 스포츠 앤 아쿠아틱 센터 |
6. 기록
프리미어십 | |||
대회 | 팀 | 우승 | 우승 연도 |
---|---|---|---|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 | 시니어 | 13 | 1920, 1921, 1932, 1934, 1943, 1967, 1969, 1973, 1974, 1980, 2017, 2019, 2020 |
리저브 (1919–1999) | 9 | 1929, 1946, 1954, 1955, 1966, 1971, 1973, 1977, 1997 | |
19세 이하 (1946–1991) | 11 | 1958, 1967, 1968, 1969, 1970, 1973, 1975, 1977, 1980, 1985, 1989 | |
빅토리안 풋볼 리그 | 시니어 (1885–1907) | 2 | 1902, 1905 |
리저브 (2014–현재) | 1 | 2019 | |
기타 타이틀 및 영예 | |||
맥클렐랜드 트로피 | 시니어 | 8 | 1967, 1972, 1973, 1974, 1975, 1977, 1982, 2018 |
호주 챔피언십 | 시니어 | 3 | 1969, 1973, 1974 |
VFL 나이트 시리즈 | 시니어 | 1 | 1962 |
번개 프리미어십 | 시니어 | 1 | 1953 |
최종 순위 | |||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 | 마이너 프리미어십 | 9 | 1920, 1933, 1934, 1943, 1944, 1967, 1974, 1982, 2018 |
그랜드 파이널 진출 | 11 | 1919, 1927, 1928, 1929, 1931, 1933, 1940, 1942, 1944, 1972, 1982 | |
우든 스푼 | 8 | 1916, 1917, 1960, 1987, 1989, 2004, 2007, 2024 |
승-패 기록 | 경기 수: 2,301 | 승: 1,179 패: 1,099 무: 23 |
최고 득점 | 222 (34.18) | vs. #redirect, 1980년 16라운드, 시드니 크리켓 그라운드 |
최저 득점 | 8 (0.8) | vs. #redirect, 1961년 16라운드, 정션 오벌 |
최대 승리 점수 차 | 168점 | vs. 노스 멜버른 풋볼 클럽, 1931년 2라운드, 펀트 로드 오벌 |
최대 패배 점수 차 | 157점 | vs. 질롱 풋볼 클럽, 2007년 6라운드, 텔스트라 돔 |
최대 경기 관중 수 | 119,165명 | vs. 칼튼 풋볼 클럽, 1969년 결승전,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 |
최대 정규 시즌 경기 관중 수 | 92,436명 | vs. 콜링우드 풋볼 클럽, 1977년 4라운드,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 |
기록 | 기록 | 선수 | 상대 | 경기 |
---|---|---|---|---|
골 | 14 | 더그 스트랭 | 노스 멜버른 | 1931년 2라운드, 펀트 로드 오벌 |
디스포절 | 46 | 로버트 와일리 | 칼턴 | 1980년 8라운드, MCG |
킥 | 38 | 케빈 바틀렛 | 지롱 | 1974년 17라운드, 웨이버리 파크 |
핸드볼 | 28 | 네이선 폴리 | 브리즈번 | 2011년 6라운드, MCG |
마크 | 23 | 조엘 보우든 | 포트 애들레이드 | 2008년 13라운드, 풋볼 파크 |
태클 | 14 | 잭 그레이엄 | 칼턴 | 2019년 21라운드, MCG |
셰인 턱 | 포트 애들레이드 | 2010년 10라운드, 풋볼 파크 | ||
앵거스 그레이엄 | 포트 애들레이드 | 2010년 10라운드, 풋볼 파크 | ||
히트 아웃 | 56 | 토비 낸커비스 | 멜버른 | 2017년 5라운드, MCG |
클리어런스 | 15 | 웨인 캠벨 | 프리맨틀 | 2000년 19라운드, WACA 그라운드 |
인사이드 50s | 14 | 케인 존슨 | 웨스턴 불독스 | 2003년 17라운드, 독클랜드 스타디움 |
리바운드 50s | 16 | 조엘 보우든 | 애들레이드 | 2006년 8라운드, 독클랜드 스타디움 |
원 퍼센터 | 19 | 알렉스 란스 | 지롱 | 2016년 21라운드, MCG |
연도 | 대회 | 상대 | 점수 | 경기장 |
---|---|---|---|---|
1929 | VFL 리저브스 | 질롱 | 12.8 (80) – 7.15 (57)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46 | VFL 리저브스 | 피츠로이 | 7.15 (57) – 7.14 (56)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54 | VFL 리저브스 | 멜버른 | 10.20 (80) – 4.9 (33)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55 | VFL 리저브스 | 풋스크레이 | 13.18 (96) – 9.12 (66)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66 | VFL 리저브스 | 콜링우드 | 14.11 (95) – 13.12 (90)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71 | VFL 리저브스 | 에센던 | 14.14 (98) – 8.18 (66)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73 | VFL 리저브스 | 질롱 | 17.18 (120) – 8.12 (60)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77 | VFL 리저브스 | 풋스크레이 | 19.18 (132) – 10.15 (75)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1997 | AFL reserves | 호손 | 17.12 (114) – 10.10 (70) |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
2019 | VFL | 윌리엄스타운 | 8.10 (58) – 7.13 (55) | Ikon 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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