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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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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태어났으며,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들이자 "엘 메스티소"로 불린 마르틴 코르테스의 이부 형제였다.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펠리페 2세와 친분을 쌓았으며, 누에바에스파냐의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누에바에스파냐로 돌아온 후, 그는 부왕의 권위에 도전하고 엔코미엔다 제도를 유지하려다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스페인으로 돌아가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으며, 1589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그는 오아하카 계곡 후작령을 관리했으며, 아나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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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르난 코르테스의 문장, 오아하카 계곡 후작 1529
에르난 코르테스의 문장, 오아하카 계곡 후작 1529
작위제2대 오아하카계곡 후작
재위 기간1547년–1589년
전임자돈 에르난도 코르테스 데 몬로이
후임자돈 페르난도 코르테스 라미레스 데 아렐라노
군주카스티야 국왕 카를로스 1세
출생일1532년
출생지누에바에스파냐 쿠에르나바카
사망일1589년
배우자카탈리나 수아레스(Catalina Suárez)
도냐 후아나 데 수니가(Juana de Zúñiga)
종교천주교
가문
아버지돈 에르난도 코르테스 데 몬로이
어머니아길라르 백작영애 도냐 후아나 데 수니가
친인척마르틴 코르테스 엘 메스티소 (이복형)

2. 초기 생애

마르틴 코르테스는 현재 모렐로스주에 속하는 쿠에르나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이부 형제 마르틴 코르테스 (1523-1568)를 두었는데, 이 사람은 에르난 코르테스와 도냐 마리나 (''라 말린체'')의 아들이며, "엘 메스티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사생아로 태어난 도냐 마리나의 아들 마르틴은 적자(嫡子)인 그의 동생이 가졌던 귀족 칭호인 ''돈''을 갖지 못했다.[1] 돈 마르틴에게는 또한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 도냐 마리아 코르테스 이 수니가, 도냐 카탈리나 코르테스 이 수니가, 그리고 도냐 후아나 코르테스 이 수니가.[2]

어떤 현대적 평가는 "마르틴 코르테스는 그의 아버지와 정반대였다.... 용기, 외교적 재능, 리더십 대신, [돈] 마르틴은 자신의 출생 권리라고 주장하는 솔직한 오만함에 직면했다."라고 평가한다.[3]

돈 마르틴과 그의 형제 돈 루이스는 1540년 아버지와 함께 스페인 국왕 카를 1세와 그의 후계자 펠리페 2세를 섬기기 위해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다.[4] 젊은 시절 돈 마르틴은 펠리페 왕자와 친구가 되었고, 둘 다 반란을 일으킨 저지대 국가들에 대한 전쟁에 참여했다.[3] 아버지의 퇴위 이후 펠리페 2세가 된 펠리페 왕자와의 우정을 통해 돈 마르틴은 누에바에스파냐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했는데,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그의 정복을 기리기 위해 부여된 모든 영지와 인디언 조공은 그의 아들에게 넘겨져야 한다고 명령했다."[5]

3. 스페인에서의 생활

스페인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사촌이자 아길라르 백작 돈 페드로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의 딸인 도냐 아나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와 결혼했다.[2]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전기를 쓰도록 후원한 작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와 같이 당시 귀족과 지식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6]

4. 누에바에스파냐 귀환과 갈등

1563년, 돈 마르틴은 형제 돈 루이스, 이복 형제 마르틴 엘 메스티조와 함께 누에바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들은 특히 불만을 품은 엔코멘데로들의 "요란한 환영 행사"를 받았고, 부왕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가 그를 맞이했다.[7] 당시 멕시코 시티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시기에 돈 마르틴은 누에바에스파냐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고, 누에바에스파냐 여러 지역에 많은 엔코미엔다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아하카 계곡 후작으로서의 상속 재산도 소유하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는 코르테스에 대한 전기에서 후원자인 돈 마르틴에게 헌정하면서 젊은 후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당신은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예와 부는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당신의 상속은 아버지 에르난 코르테스의 업적을 본받고 그가 남긴 것을 잘 사용해야 할 의무를 지웁니다."[8]

"로스 파이세스 바호스"(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마르틴은 건배하는 "나쁜 습관"을 들였다. 이는 누에바에스파냐의 일부 엘리트들의 예의범절을 거스르는 행위였다.[9] 그러나 이러한 예법 위반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가 왕이 임명한 부왕 대신 누에바에스파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왕실 조사관인 헤로니모 데 발데라마의 방문을 가로챘다. 발데라마는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부왕의 영접을 받고 부왕 관저에 머물러야 했다. 마르틴의 환영 인파가 발데라마를 먼저 맞이하여 그를 설득, 부왕 대신 자신과 함께 머물도록 했다.[10]

이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부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강력한 신호였다.

5. 엔코멘데로들의 음모

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는 엔코미엔다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새로운 법(1542년)에 반대하여 누에바 에스파냐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이끌었다.[11] 그는 엔코미엔다 소유주들이 정복자의 후손으로서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왕국은 귀족 집단 형성을 막고 엔코미엔다 상속을 제한하여 이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564년 부왕 루이스 데 벨라스코 사망 후, 마르틴 코르테스는 멕시코 시 의회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565년에는 그를 누에바 에스파냐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란 모의가 있었으나,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실패했다. 1566년 공모자들이 배신당하면서 마르틴 코르테스와 관련자들이 체포되었고, 주요 공모자 두 명은 처형되었다.[9]

이후 재판 과정과 처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5. 1. 재판과 처벌

그는 1542년 새로운 법에 의해 폐지될 예정이었던 엔코미엔다의 폐지를 막기 위해 일부 엔코미엔다 소유주들과 함께 운동을 이끌었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더 큰 자치권을 요구했다.[11] 엔코미엔다 소유주들은 왕국에 부유하고 광대한 영토를 제공한 정복자들의 후손이었으며, 따라서 엔코미엔다를 통해 얻은 봉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유지하려 했다. 왕국은 그 권력과 특권을 거스르는 귀족 집단의 형성을 점점 더 반대했고, 엔코미엔다의 상속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은 정복자 집단의 부와 권력의 근원을 점차 없애기 위한 기제였다.

1564년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부왕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가 사망하자, 돈 마르틴은 멕시코 시 의회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왕령의 독립에 대한 암시가 있었다. 1565년, 한 중요한 정복자의 두 아들이 정복자 집단의 이익 보호를 단순히 옹호하는 것을 넘어 반란을 일으키고 돈 마르틴을 누에바 에스파냐의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관찰자 후안 수아레스 데 페랄타에 따르면, 돈 마르틴은 공모자들과 완전히 뜻을 같이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말리지도 않았다.[12] 돈 마르틴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이 음모는 처음에는 연기되었다가 결국 포기되었다. 1566년 7월 16일, 공모자들이 배신당하여 돈 마르틴, 그의 형제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알론소 데 아빌라를 포함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두 명의 주요 공모자는 사형을 선고받고 참수되었다.[9]

돈 마르틴의 재판에서 그는 왕에 대한 반역과 반란을 선동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 설문서에 따르면, 그는 아우디엔시아 (고등 법원)를 전복하고 판사들을 암살하려 했으며, 자신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왕이 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재판을 위한 설문서는 1566년 9월과 11월에 작성되었다. 루이스 데 벨라스코의 형제와 아들을 포함하여, 그가 음모에 참여했다는 강력한 증인들이 있었다. 변호를 위해 다양한 지지자들이 증언했다.[14]

국왕은 식민지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는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판사 알론소 데 무뇨스를 파견했다. 무뇨스는 "공포 통치를 시작했다. 수백 명의 스페인 정착민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수십 명이 참수되었다."[15] 무뇨스는 스페인으로 소환되어 감옥에 갇혔다.[16] 1567년 11월 15일, 새로운 부왕 돈 가스톤 데 페랄타가 도착했다. 코르테스 형제들은 사형을 면했다. 실패한 엔코미엔다 소유주의 음모와 그 여파는 해당 집단의 실질적인 권력의 종말이었다.

참수를 면했던 돈 마르틴은 1567년 4월, 왕에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며, 그는 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친구였다. 그는 누에바 에스파냐를 떠나기 전에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스페인 도착 후 50일 이내에 왕에게 출두해야 했다.[17] 돈 마르틴은 짧은 기간 동안 가택 연금되었지만,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석방되었으며, 그의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마드리드에서 사치스러운 삶을 재개했다.[15] 그는 1574년까지 한동안 상속 재산을 잃었다.[18]

6. 오아하카 계곡 후작령 관리

스페인으로 망명하면서, 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는 광대한 오아하카 계곡 후작령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 유능한 관리자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관리자("총독") 직은 9년 동안 최고 입찰자에게 임대되었고, 이들은 수입을 보장하는 대가로 행정, 재정, 사법 등 영지의 사실상 모든 측면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가졌다.[20] 누에바에스파냐예수회 영지와 마찬가지로, 마르케사도는 멕시코 중부와 남부에 흩어져 있는 개별 아시엔다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단위로 관리되었으며, 이윤을 위해 운영되는 기업이었다.[21] 관리자들은 영지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처리했다. 툴레인 대학교의 라틴 아메리카 도서관이 소장한 코덱스인 "아타테펙 토지 청구 [후작으로부터 토지 구획을 되찾기 위한 청원]"에는 그에 대한 소송이 묘사되어 있다.[22]

7. 결혼과 자녀

배우자자녀
아나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


참조

[1] 문헌
[2] 문헌
[3] 문헌
[4] 문헌
[5] 문헌
[6] 문헌
[7] 문헌
[8] 문헌
[9] 문헌
[10] 문헌
[11] 문헌
[12] 문헌
[13] 문헌
[14] 문헌
[15] 문헌
[16] 문헌
[17] 문헌
[18] 문헌
[19] 문헌
[20] 문헌
[21] 문헌
[22] 웹사이트 Mexican Pictorial Manuscripts http://lal.tulane.ed[...] 201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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