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바에스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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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에바에스파냐는 1521년 아즈텍 제국 정복 이후 멕시코 독립 전쟁이 끝난 1821년까지 약 300년 동안 존재했던 스페인 제국의 부왕령이다. 멕시코시티를 수도로, 스페인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했으며,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아시아 등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은, 코치닐, 농산물 등을 생산하며 스페인 제국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으며, 가톨릭 강제 개종과 스페인-원주민 문화 융합을 겪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틈타 멕시코 독립 전쟁이 발발했고, 1821년 멕시코 제1제국 수립으로 스페인 식민 통치는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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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바에스파냐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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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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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이름 | |
일반 명칭 | 누에바에스파냐 |
시대 | 식민 시대 |
제국 | 스페인 |
지위 | 누에바에스파냐 총독령 (1521년–1535년) 스페인 제국의 부왕령 (1535년–1821년) |
건국 | 테노치티틀란 함락 (1521년 8월 13일) 아즈텍 제국 정복 (1519년–1521년) |
멸망 | 독립 선언 (1821년 9월 28일) |
국가 모토 | |
국가 | 국왕 행진곡 (1775년–1821년) |
공용어 | 스페인어, 나와틀어 |
지역 언어 | 마야어족 오토망게어족 유토아즈텍어족 애서배스카어족 수어족 프랑스어 (루이지애나) 필리핀어군 (필리핀 총독부) 차모로어 (마리아나스) 미크로네시아어군 (캐롤라인 제도) 팔라우어 (팔라우) 야프어 (야프 섬, 캐롤라인 제도)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국교) |
통화 | 스페인 식민지 레알 |
문장 및 깃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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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상징 | border border |
기타 상징 설명 | 왼쪽: 스페인 국기 (18세기): 첫 국기, 해군 및 요새 깃발,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에서 마지막으로 휘날린 깃발; 오른쪽: 부르고뉴 십자가와 왕실 또는 공국 왕관이 있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군사 깃발 (군사 깃발) |
정치 | |
수도 | 멕시코 |
정부 | 국왕 부왕 |
입법부 | 인디아스 추기경 |
국왕 (최초) | 카를로스 1세 (1521년–1556년) |
국왕 (마지막) | 페르난도 7세 (1813년–1821년) |
부왕 (최초) | 안토니오 데 멘도사 (1535년–1550년) |
부왕 (마지막) | 후안 오도노후 (정치 우두머리) (1821년) |
인구 통계 | |
1790년 | 면적: 7,657,000 제곱킬로미터, 인구: 7백만 명 |
1810년 | 인구: 8백만 명 |
역사적 사건 | |
주요 사건 | 베네수엘라가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에 합병됨 (1717년 5월 27일) 파나마가 누에바그라나다 왕국에 합병됨 (1739년)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획득 (1762년) 제3차 산일데폰소 조약 (1800년 10월 1일) 애덤스-오니스 조약 (1819년 2월 22일) 자유주의 3년으로 누에바에스파냐 왕국 폐지 (1820년 5월 31일) |
지도 | |
변천 | |
이전 국가 | 선 콜럼버스 시대 멕시코 트라스칼라 왕국 아즈텍 쿠스카틀란 왕국 토토테페크 왕국 타라스카 왕국 마야 문명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톤도 왕국 세부 라자국 마닐라 왕국 테르나테 술탄국 |
다음 국가 | 누에바그라나다 왕국 스페인령 서인도 쿠바 총독령 푸에르토리코 총독령 스페인령 동인도 필리핀 총독령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준주 오리건 컨트리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멕시코 제1제국 |
2. 역사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면서 카스티야 왕관의 지배하에 누에바에스파냐 왕국이 건설되었다.[5][6] 초기 탐험 자금은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나왔다.[5][6] 누에바에스파냐는 카스티야의 속국이었지만, 식민지가 아닌 왕국으로서 이베리아 반도의 재위 중인 군주에게 종속되었다.[7][8]
1535년 누에바에스파냐 왕국 내에 왕실 칙령에 의해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설립되었고, 부왕이 통치하였다. 부왕은 스페인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누에바에스파냐를 통치했다.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한 아즈텍 제국의 정복으로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디에스 평의회와 청문회와 같은 통치 기구가 설립되었다. 원주민들은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되었고, 스페인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혼합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스페인 정착민들은 멕시코시티, 푸에블라, 과달라하라와 같은 주요 도시를 건설하여 누에바에스파냐를 스페인 제국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사카테카스와 과나후아토에서 은이 발견되면서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치치메카 전쟁과 같은 갈등이 발생했다. 프레시디오(Presidio)(요새)와 미션(misiones)(선교지)이 북부 국경에 설립되어, 나중에 미국 남서부가 된 영토의 확장과 통제를 지원했다.
18세기에는 식민지 행정과 경제를 현대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부르봉 개혁이 시행되었다. 이 개혁에는 감찰구의 설립, 군사력 증강, 왕권의 중앙 집권화가 포함되었다.
19세기 초 멕시코 독립 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1810년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의 돌로레스의 함성 이후, 반란군은 11년 동안 스페인 통치에 맞서 싸웠다. 왕당파 장교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와 반란군 지도자 비센테 게레로의 동맹은 독립을 위한 성공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다. 1821년 누에바에스파냐는 공식적으로 멕시코라는 독립 국가가 되었고, 3세기에 걸친 스페인 식민 통치는 종식되었다.
2. 1. 스페인의 정복과 식민지 건설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면서 카스티야 왕관의 지배하에 누에바에스파냐 왕국이 건설되었다.[5][6] 초기 탐험 자금은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나왔다.[5][6] 누에바에스파냐는 카스티야의 속국이었지만, 식민지가 아닌 왕국으로서 이베리아 반도의 재위 중인 군주에게 종속되었다.[7][8]스페인 국왕은 누에바에스파냐의 통치자로 부왕을 임명했으며, 부왕은 왕을 대리하여 행정, 사법, 군사 등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1535년 누에바에스파냐 왕국 내에 왕실 칙령에 의해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설립되었고, 부왕이 통치하였다.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한 아즈텍 제국의 정복으로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디에스 평의회와 청문회와 같은 통치 기구가 설립되었다. 원주민들은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되었고, 스페인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혼합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 구조와 문화가 형성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스페인 정착민들은 멕시코시티, 푸에블라, 과달라하라와 같은 주요 도시를 건설하여 누에바에스파냐를 스페인 제국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초기 누에바 에스파냐의 스페인계 이주 도시는 다음과 같다.[130]
도시 | 설립 연도 | 설명 |
---|---|---|
베라크루스 | 1519년 | 작은 항구 도시 |
멕시코시티 | 1521년 ~ 1524년 |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 자리에 건설, 누에바에스파냐의 주요 이주지 |
푸에블라 | 1531년 |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스 사이에 위치 |
코리마 | 1524년 | |
케레타로 | 1531년경 | 멕시코시티 북쪽, 광대한 농지인 바히오 지역 |
과달라하라 | 1531년 ~ 1542년 | 멕시코시티 북서쪽, 이 지역의 주요 스페인계 도시 |
발라돌리드 | 1529년 | 멕시코시티 서쪽 |
안테케라 | 1526년 | 멕시코시티 남쪽, 오아하카의 중심 |
산티아고 데 과테말라 | 1524년 | |
메리다 | 1542년 | 유카탄 반도에 위치 |
캄페체 | 1541년 | 카리브해의 작은 항구 도시, 베라크루스와 해상 무역 |
사카테카스 | 1547년 | 북쪽, 은광으로 번영. 치치메카 전쟁 발생 지역. |
2. 2. 식민지 확장과 통치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누에바에스파냐는 북아메리카(현재의 미국 남서부, 멕시코 북부),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필리핀, 괌 등)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북아메리카에서는 사카테카스와 과나후아토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치치메카 전쟁과 같은 원주민과의 충돌도 발생했다. 프레시디오(Presidio)(요새)와 미션(misiones)(선교지)이 북부 국경에 설립되어, 나중에 미국 남서부가 된 영토의 확장과 통제를 지원했다.
1532년 잉카 제국 정복 이후, 남아메리카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었고, 이후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1717년),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1776년)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에 스페인령 동인도가 건설되었고, 마닐라-아카풀코 간 갤리온 무역을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간 교역이 이루어졌다. 주요 무역품은 비단, 향신료, 금·은, 도자기 등이었다.[134] 필리핀은 누에바에스파냐 내에서 하나의 행정 구역인 필리핀 총독령이 되었다.[134]
누에바에스파냐는 스페인 국왕이 임명한 부왕이 다스렸으며, 그 아래 여러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각 지역에는 총독령(Captaincies general) 또는 아우디엔시아(Audiencia, 고등법원)가 설치되어 자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주요 총독령과 아우디엔시아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명칭 | 설립 연도 |
---|---|---|
총독령 | 산토도밍고 | 1535년 |
총독령 | 필리핀 | 1565년 |
총독령 | 푸에르토리코 | 1580년 |
총독령 | 쿠바 | 1608년 |
총독령 | 과테말라 | 1609년 |
총독령 | 유카탄 | 1617년 |
총독령 | 프로빈시아스 인터나스 사령부 | 1776년 (종속 총독령) |
총독령 | 스페인 플로리다(La Florida) 총독령 | - |
총독령 | 스페인 루이지애나(Luisiana) 총독령 | - |
아우디엔시아 |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 1511년 (1526년부터 실질 운영, 부왕령보다 앞서 설립) |
아우디엔시아 | 멕시코(Mexico) | 1527년 (부왕령보다 앞서 설립) |
아우디엔시아 | 파나마(Panama) | 1538년~1543년 (최초) |
아우디엔시아 | 과테말라(Guatemala) | 1543년 |
아우디엔시아 | 과달라하라(Guadalajara) | 1548년 |
아우디엔시아 | 마닐라(Manila) | 1583년 |
2. 3. 부르봉 개혁과 식민지 통치 강화
18세기 스페인 왕실은 부르봉 개혁(Bourbon Reforms)을 통해 부왕령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인텐덴시아(Intendant)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만들었다. 이러한 조치는 제국 경제를 개선하고 지역 엘리트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15][16]개혁에는 공동체 문제에 대한 공공 참여 개선, 원주민과 스페인인에게 미개발 토지 분배, 부패한 지역 왕실 관리들의 관행 종식, 무역과 광업 장려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이미 스페인에서 채택되었고 프랑스 정부가 만든 모델과 유사한 영토 분할 시스템을 구축했다.[15][16]
인텐덴시아 설립은 부왕령과 총독령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왕립 청문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경제 문제에 대한 개입, 중앙 집권적인 정치, 그리고 그들의 많은 기능을 인텐던트에게 강제로 양도해야 하는 것 때문에 이 개혁에 반대했다.[17][18]
뉴에스파냐에서 이 구역들은 일반적으로 중부, 남부, 북부에서 이전에 발전한 지역이나 주에 해당했다.[17][18] 많은 인텐덴시아의 경계는 독립 후 멕시코 주의 경계가 되었다. 인텐덴시아는 1764년부터 1789년 사이에 설립되었으며, 본토에는 1786년에 가장 많은 수가 설립되었다.[19][20]
1786년에 설치된 인텐덴시아는 다음과 같다.
2. 4. 멕시코 독립과 누에바에스파냐의 종말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 본국이 혼란에 빠지자, 누에바에스파냐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810년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신부의 돌로레스의 함성 이후, 반란군은 11년 동안 스페인 통치에 맞서 싸웠다.[14] 왕당파 장교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와 반란군 지도자 비센테 게레로의 동맹은 독립을 위한 성공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다. 1821년 누에바에스파냐는 공식적으로 멕시코라는 독립 국가가 되었고, 3세기에 걸친 스페인 식민 통치는 종식되었다.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독립군이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면서 멕시코 제1제국이 수립되었고, 누에바에스파냐는 해체되었다. 이후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멕시코, 미국, 중앙아메리카 국가 등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3. 행정 구역
누에바에스파냐는 멕시코시티를 수도로 하는 부왕령으로, 부왕이 통치했다. 행정 구역은 크게 왕국(Reino), 총독령(Capitanía General), 주(Provincia) 등으로 나뉘었으며, 이들은 스페인 국왕에게 종속되는 "인디언 왕국"이라고 불렸다.
상급 법원인 아우디엔시아(audiencias)는 스페인 식민지 주요 지역에 설립되었다. 신스페인에서는 부왕령 설치 이전인 1527년에 상급 법원이 설립되었다. 초대 아우디엔시아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라이벌인 누뇨 데 구스만(Nuño de Guzmán)이 이끌었으며, 그는 법원을 이용하여 코르테스의 권력과 재산을 박탈했다. 스페인 왕실은 초대 아우디엔시아를 해산하고 제2 아우디엔시아를 설립했다.[14]
신스페인의 아우디엔시아는 산토도밍고(1511년 설립, 1526년부터 실질적으로 운영, 부왕령보다 앞서 설립), 멕시코(1527년 설립, 부왕령보다 앞서 설립), 파나마(1538~1543년, 최초), 과테말라(1543년), 과달라하라(1548년), 마닐라(1583년)에 있었다.
아우디엔시아 관할구역에는 이전에 설립된 더 작은 행정구역인 주(gobernaciones, 대략 주(provinces)에 해당)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아델란타도(adelantados)라고 알려진 정복자(conquistador)-총독들이 원래 설립한 것이었다. 군사적 위협을 받는 주들은 필리핀 총독령(1574년 설립)과 과테말라 총독령(1609년 설립)과 같이 특정 수준의 자치권을 가진 군사 및 정치적 지휘권을 갖는 총독령(captaincies general)으로 그룹화되었다.
지방 차원에서는 토착 지역과 스페인 지역 모두에 걸쳐 200개가 넘는 행정구역이 있었는데, 이들은 ''코레히도르''(알칼데 마요르로도 알려짐) 또는 ''카빌도''(시의회)가 이끌었으며, 둘 다 사법 및 행정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부르봉 왕가는 코레히도르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인텐단테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광범위한 재정 권한은 부왕, 주지사, 카빌도의 권한을 침해했다.
1776년 북부 지역은 내륙 지방 총사령관령(Comandancia General de las Provincias Internas)의 관할로 재편되었다.
3. 1. 왕국 (Reino)
아즈텍 제국의 스페인 정복 이후, 카스티야 왕관의 지배하에 신세계 왕국으로서 누에바에스파냐 왕국이 건설되었다. 초기 탐험 자금은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나왔다.[5][6] 누에바에스파냐는 카스티야의 속국이었지만, 식민지가 아닌 왕국이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재위 중인 군주에게 종속되었다.[7][8]군주는 해외 영토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토에 대한 주권뿐만 아니라 재산권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모든 권력은 군주로부터 나왔다. 왕실은 해외 영토에 있는 가톨릭 교회에 대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왕실 후원권을 통해 교리 외 모든 측면에서 교회를 감독했다. 1535년 10월 12일 왕실 칙령에 의해 누에바에스파냐 왕국 내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설립되었으며, 왕의 "대리인" 또는 대리자로 임명된 부왕이 통치하였다. 이것은 신세계 최초의 부왕령이었으며, 18세기 부르봉 개혁까지 스페인 제국이 대륙에서 운영한 두 개의 부왕령 중 하나였다.
3. 2.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며 스페인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총독령을 다스렸다. 총독은 모든 지역에 대한 행정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안은 여러 지역을 통치하는 지역 정부 기관이 처리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로 상급 법원이었지만 행정 및 입법 기능도 가진 ''아우디엔시아''였다. 각 아우디엔시아는 행정 사항(사법 사항은 제외)에 대해서는 누에바에스파냐 총독에게 책임이 있었지만, 인디에스 의회에도 직접 보고했다.총독령은 2단계 행정 구역이었으며, 이들은 부왕령으로부터 비교적 자치적이었다. 부왕은 자신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남아 있는 주들의 총독이었다. 산토도밍고(1535), 필리핀(1565), 푸에르토리코(1580), 쿠바(1608), 과테말라(1609), 유카탄(1617), 프로빈시아스 인터나스 사령부(1776)(종속 총독령에 해당)가 있었다. 3단계 행정 구역인 두 개의 총독령이 설립되었는데, 스페인 플로리다 총독령과 스페인 루이지애나 총독령이었다.
18세기 부르봉 개혁의 일환으로, 스페인 왕실은 부왕령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인텐덴시아(Intendant)라 불리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만들었다.[15] 제국 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역 엘리트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개혁에는 공동체 문제에 대한 공공 참여 개선, 원주민과 스페인인에게 미개발 토지 분배, 부패한 지역 왕실 관리들의 관행 종식, 무역과 광업 장려, 그리고 이미 스페인에서 채택되었고 프랑스 정부가 만든 모델과 유사한 영토 분할 시스템 구축 등이 포함되었다.[16]
인텐덴시아 설립은 부왕령과 총독령에서 강력히 저항받았는데, 이는 개혁이 채택되었을 때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반대와 유사했다. 왕립 청문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경제 문제에 대한 개입, 중앙 집권적인 정치, 그리고 그들의 많은 기능을 인텐던트에게 강제로 양도해야 하는 것 때문에 이 개혁에 반대했다. 뉴 에스파냐에서 이 구역들은 일반적으로 중부, 남부, 북부에서 이전에 발전한 지역이나 주에 해당했다.[17][18]
많은 인텐덴시아의 경계는 독립 후 멕시코 주의 경계가 되었다. 인텐덴시아는 1764년부터 1789년 사이에 설립되었으며, 본토에는 1786년에 가장 많은 수가 설립되었다.[19][20]
설립년도 | 인텐덴시아 |
---|---|
1764년 | 아바나 |
1766년 | 뉴올리언스 |
1784년 | 푸에르토리코 |
1786년 | 멕시코, 베라크루스, 푸에블라데로스앙헬레스, 과달라하라, 과나후아토, 사카테카스, 산루이스포토시, 소노라, 두랑고, 오악사카, 과테말라, 산살바도르, 코마야과, 레온, 산티아고데쿠바, 푸에르토프린시페 |
1789년 | 메리다 |
3. 3. 주 (Provincia)
누에바에스파냐는 여러 주(Provincia)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이들 주는 스페인 국왕에 종속되는 "인디언 왕국"이라고 불렸다. 1776년 북부 지역은 내륙 지방 총사령관령의 관할로 재편되었다.- 누에바 나바라 (Nueva Navarra): 현재의 시날로아 주와 소노라 주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에우세비오 키노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땅이었으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출신지인 스페인의 나바라 지방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서부 내륙 지방의 일부가 되었다.
- 바하 캘리포르니아 (Baja California) 또는 비에하 캘리포르니아 (Vieja California): 바하 캘리포르니아 반도. 처음에는 예수회, 후에는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의 땅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서부 내륙 지방의 일부가 되었다.
- 알타 캘리포르니아 (Alta California) 또는 누에바 캘리포르니아 (Nueva California): 현재의 미국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애리조나 주, 유타 주 및 콜로라도 주와 와이오밍 주 일부를 포함한다. 16세기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의 탐험 이후 방문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18세기 후반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의 탐험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서부 내륙 지방의 일부를 구성한다. 옛날에는 바하 캘리포르니아와 구별이 없었다( 라스 캘리포르니아스 참조).
- 산타페 데 누에보 메히코 (Santa Fe de Nuevo México): 현재의 미국 뉴멕시코 주 및 텍사스 주 서부, 콜로라도 주 남부, 그리고 캔자스 주와 오클라호마 주 일부를 포함한다. 후안 데 오냐테의 탐험에 의해 설립되어, 후에 누에바 에스파냐에 편입되었다. 과달라하라 아우디엔시아가 관할하였지만, 18세기 후반에 서부 내륙 지방의 일부가 되었다.
-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 (Nueva Extremadura):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독립 후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 주(코아우일라 주, 텍사스 주)를 포함한다. 1687년에 설치되어 공식 명칭은 "산 프란시스코 데 코아우일라 이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 주(Provincia de San Francisco de Coahuila y Nueva Extremadura)"였다. 엑스트레마두라 지방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세기에 재편성되어 동부 내륙 지방을 구성하였다.
- 누에보 산탄데르 (Nuevo Santander): 현재의 타마울리파스 주와 텍사스 주 남부. 1746년에 성립되어 1776년에 동부 내륙 지방의 일부가 되었다. 스페인의 도시 산탄데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누트카 지역 (Territorio de Nutka): 18세기 후반에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그 후에는 포기되었다. 현재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와 미국 워싱턴 주, 오리건 주, 아이더호 주, 그리고 몬태나 주와 와이오밍 주 일부를 포함한다. 오리건 컨트리도 참조.
이론상으로는 뛰어난 통치 체제였지만, 실제로는 부왕의 권한이 각 지역 총독과 아우디엔시아의 독립성 때문에 제한되었다. 부왕의 권한은 대략 메히코 중부와 남부, 북쪽은 산 루이스 포토시에서 남쪽은 테우안테펙 지협까지로 한정되었다.
4. 경제
누에바에스파냐의 경제는 정복 초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엔코미엔다 제도를 통해 원주민의 노동력과 공물을 기반으로 경제가 운영되었다. 이 시스템은 원주민에 대한 억압과 착취로 이어졌지만, 곧 사회 상류층은 하층민들의 노동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주교는 원주민을 대체할 흑인 노예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16세기부터 은 광업이 발전하면서 누에바에스파냐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은은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광산 노동력은 흑인 노예와 원주민 임금 노동으로 구성되었다. 코치닐 염료 또한 중요한 수출품이었으며, 그 생산은 거의 전적으로 원주민들이 담당했다. 카카오와 인디고 역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중요한 수출품이었으나, 해적과 밀수 때문에 유럽 국가들과의 직접적인 교역보다는 부왕령 내에서 주로 사용되었다.[22]
누에바에스파냐는 베라크루스와 아카풀코 두 주요 항구를 통해 해외 무역을 했다. 베라크루스는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였고, 아카풀코는 태평양 연안에서 마닐라 갈레온 무역의 종착역이었다. 필리핀의 마닐라는 남중국해 근처의 주요 항구였다. 이 항구들은 아시아에서 마닐라 갈레온을 통해 스페인 본토까지 이어지는 해외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 동안 스페인은 누에바에스파냐에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얻었지만, 유럽 전쟁에 자원을 소모하고 해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본국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지역별 발전 패턴이 나타났다. 유럽인들은 아즈텍 제국의 중심지였던 멕시코 중부에 정착했고, 남부 지역은 원주민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지만 유럽인들의 유입은 적었다. 북부는 원주민 인구가 희박하고 유럽인도 거의 없었으며, 19세기에 미국의 확장주의에 취약해졌다.
4. 1. 광업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은광 개발은 스페인 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사카테카스와 과나후아토 등지에서 은광이 개발되었는데,[21] 은 채굴은 흑인 노예 노동과 원주민 임금 노동에 의존했다.[21] 이는 식민지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탁스코의 은광은 아즈텍 시대부터 채굴되었는데, 멕시코의 다른 광산 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은 원주민 정착 지역 밖에 있었다. 멕시코 북부의 광산 노동력은 흑인 노예 노동과 원주민 임금 노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징용 노동은 없었다.[21] 광산 지역으로 끌려온 원주민들은 멕시코 중부 여러 지역 출신이었고, 북부 출신도 소수 있었다. 이들은 공통된 민족 정체성이나 언어가 없어 빠르게 히스패닉 문화에 동화되었다. 광산 작업은 어렵고 위험했지만, 임금이 좋아 원주민 노동력이 유입되었다.[21]
18세기에 부르봉 개혁으로 광업이 부흥하면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은 스페인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16세기에 사카테카스, 과나후아토, 산루이스포토시, 이달고와 같은 중요한 광산 중심지가 설립되었으나, 17세기에 여러 이유로 쇠퇴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은광은 왕실 금고 수입 면에서 다른 모든 스페인 해외 영토를 능가했다.
4. 2. 농업
초기에는 엔코미엔다 제도를 통해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농업 생산이 이루어졌다.[21] 멕시코 중부와 바히오 지역에서는 밀, 옥수수 등 곡물 생산이 활발했고, 푸에블라에서는 섬유 산업이 발달했다. 베라크루스, 오악사카 등지에서는 사탕수수, 코치닐, 인디고 등 상품 작물 재배가 이루어졌다.[22] 특히 코치닐은 은 다음으로 누에바에스파냐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으며, 그 생산은 거의 전적으로 원주민 재배자들의 손에 있었다.
4. 3. 무역
누에바에스파냐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베라크루스는 대서양 무역의 주요 항구였으며, 아카풀코는 마닐라 갤리온 무역을 통해 아시아와 연결되는 태평양 무역의 거점이었다.[134]1565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필리핀에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산미겔(현재 세부)을 건설하였고,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는 필리핀에서 멕시코까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효율적으로 항해하는 루트를 발견했다. 1571년에는 마닐라가 스페인령 동인도의 수도가 되면서 마닐라-아카풀코 갤리온 무역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비단, 향신료, 도자기 등 아시아 상품이 누에바에스파냐로 유입되었고, 은, 코치닐 등 아메리카 상품이 아시아로 수출되었다.[134]
마닐라 갤리온을 통해 아시아에서 온 상품들은 태평양을 건너 아카풀코로 운송된 후, 육로를 통해 베라크루스로 이동하여 인디아스 함대에 의해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졌다.
5. 사회와 문화
베라크루스는 누에바에스파냐의 관문이자 멕시코만 연안의 유일한 항구였으며, 험준한 지형은 지역 개발과 누에바에스파냐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항구에서 중앙 고원으로 가는 길은 좁고 미끄러워 노새 떼에게 위험했고, 운송 제약으로 인해 고부가가치 상품만 운송되었다.[35] 이는 식량, 직물 등 대량 생산품의 지역 생산을 촉진시켰고, 누에바에스파냐는 설탕과 밀을 상당량 생산했지만 식민지 내에서만 소비되었다.[36]
카리브해 항구 도시 베라크루스는 덥고 유해한 기후로 인해 인구가 적었고,[37] 많은 스페인 상인들은 할라파의 쾌적한 기후를 선호했다. 할라파는 1722년부터 1776년까지 왕실 무역 박람회 개최지로 지정되어 아카풀코 항구를 통한 아시아 상품과 카디스 항구를 통한 유럽 상품 중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38]
스페인 사람들은 시트랄테페틀 화산 동쪽의 온화한 기후 지역인 오리사바에도 정착했다. 오리사바는 고도가 다양했지만, 대부분 온화한 기후였다.[39] 코르도바는 도망친 노예들의 약탈로부터 스페인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가스파르 얀가가 이끄는 자치 정착지가 인정받아 얀가 시가 되었다.[40]
유럽 질병은 베라크루스 지역의 원주민 인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스페인 사람들은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노동력을 대체했다. 일부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 인구 감소로 비어 있는 농지를 소유했고, 1530년대 초부터 사탕수수 생산이 시작되었다. 초대 총독 안토니오 데 멘도사는 오리사바에 대농장을 설립했다.[41]
원주민들은 사탕수수 재배를 거부하고 생계 작물 재배를 선호했으며, 흑인 노예 노동은 사탕수수 농장 발전에 중요했다. 1580년에서 1640년 사이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이 스페인 시장에 접근하면서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이들은 베라크루스 지역에 많이 남았다. 1700년 이후에도 흑인 노예는 코르도바 노동 부문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코르도바 농촌 대농장은 인구의 20%가 아프리카 노예 노동에 의존했다.[42]
1765년 왕실은 담배에 대한 독점권을 만들어 농업과 제조업에 영향을 미쳤다. 담배는 가치 높고 수요가 많은 제품이었으며, 왕실은 담배 재배 지역을 제한하고 완제품 공장과 유통 매장을 설립하여 세수입을 확보했다.[44] 독점권 설립으로 왕실 수입은 증가했지만, 담배 소비 증가와 함께 빈곤율도 증가했다.[46] 1787년 부르봉 개혁 기간 동안 베라크루스는 인텐덴시아가 되었다.
5. 1. 인종 구성



1793년,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처음으로 전국 단위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인구 조사는 레비야히헤도 백작의 명령에 따라 "레비야히헤도 인구 조사"라고 불린다. 인구 조사 원자료 대부분은 분실되었고, 관련 정보는 훔볼트와 같은 학자들의 논문과 현장 조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총 인구 추정치는 3,799,561명에서 6,122,354명까지 다양하다.[121][122] (최근 자료에 따르면 1810년 누에바에스파냐 인구는 500만~550만 명이었다)[123] 민족 구성 비율은 유럽인 18~23%, 메스티소 21~25%, 아메리카 원주민 51~61%, 아프리카인 6,000~10,000명으로 나타났다. 약 3세기에 걸친 식민화 과정에서 유럽인과 메스티소 인구는 증가했지만, 원주민 인구는 세기당 13~17% 감소했다. 이는 원주민의 높은 사망률과 관련이 있는데, 스페인 도시 외곽 지역에 거주하거나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인텐덴시아/지역 | 유럽인 인구 (%) | 원주민 인구 (%) | 메스티소 인구 (%) |
---|---|---|---|
멕시코 (멕시코주와 수도만) | 16.9% | 66.1% | 16.7% |
푸에블라 | 10.1% | 74.3% | 15.3% |
오악사카 | 06.3% | 88.2% | 05.2% |
과나후아토 | 25.8% | 44.0% | 29.9% |
산 루이스 포토시 | 13.0% | 51.2% | 35.7% |
사카테카스 | 15.8% | 29.0% | 55.1% |
두랑고 | 20.2% | 36.0% | 43.5% |
소노라 | 28.5% | 44.9% | 26.4% |
유카탄 | 14.8% | 72.6% | 12.3% |
과달라하라 | 31.7% | 33.3% | 34.7% |
베라크루스 | 10.4% | 74.0% | 15.2% |
발라돌리드 | 27.6% | 42.5% | 29.6% |
누에보 메히코 | ~ | 30.8% | 69.0% |
비에하 캘리포니아 | ~ | 51.7% | 47.9% |
누에바 캘리포니아 | ~ | 89.9% | 09.8% |
코아우일라 | 30.9% | 28.9% | 40.0% |
누에보레온 | 62.6% | 05.5% | 31.6% |
누에보 산탄데르 | 25.8% | 23.3% | 50.8% |
텍사스 | 39.7% | 27.3% | 32.4% |
틀락스칼라 | 13.6% | 72.4% | 13.8% |
~유럽인은 메스티소 범주에 포함됨.
식민지 지역 외부에 거주하는 원주민 인구 조사는 부정확했지만, 누에바에스파냐 당국은 그들을 피지배민으로 간주했다. 다른 식민 국가들과 달리, 누에바에스파냐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시민/피지배민으로 간주했다.[125]
독립 후, 식민지 카스타 제도는 폐지되었고 공식 문서에서 인종 분류가 사라졌다. 1921년까지 인종이 기록된 인구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당시 조사 결과를 부정확한 것으로 간주한다.[128][129] 최근 멕시코 정부의 인종·민족 조사에 따르면, 주요 민족 그룹의 인구 증가 추세는 1793년 인구 조사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스페인 정착민들은 천연두, 홍역, 장티푸스 등 전염병을 아메리카 대륙에 가져왔다. 스페인 정착민들은 면역력이 있었지만, 원주민들은 항체가 없어 전염병에 취약했다. 16세기 동안 멕시코 원주민 인구는 800만~2000만 명에서 200만 명 미만으로 감소했다. 17세기 초, 누에바에스파냐는 인구 감소 지역이었다.
5. 2. 카스타 제도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카스타 제도'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5. 3. 종교와 문화
스페인은 가톨릭을 강제로 전파하고 원주민의 전통 신앙을 억압했지만, 원주민 문화와 가톨릭 신앙이 혼합된 독특한 종교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멕시코시티 대성당, 푸에블라 대성당 등 식민지 시대 건축물은 스페인 바로크 양식과 원주민 예술이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아메리카 신대륙 최초의 인쇄소는 1539년 인쇄업자 후안 파블로스(Giovanni Paoli)에 의해 멕시코로 가져왔다.[121] 멕시코에서 인쇄된 최초의 책은 "''산 후안 클리마코의 영적 사다리''"라는 제목이었다. 1568년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는 ''신스페인 정복의 진실된 역사''를 완성했다.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후안 루이스 데 알라르콘 등 뛰어난 작가들은 스페인 문학에 기여했다.[121] 1693년 돈 카를로스 데 시구엔사 이 곤고라는 신스페인 최초의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 볼란테''를 발행했다.[121]
페드로 마르티네스 바스케스와 로렌초 로드리게스는 수도, 오코틀란, 푸에블라 및 일부 외딴 은광 도시에서 추르게레스크 양식으로 알려진 시각적으로 격렬한 건축물을 만들어냈다.[121] 마누엘 데 추마야, 후안 구티에레스 데 파딜라, 안토니오 데 살라사르를 포함한 작곡가들은 1500년대 초부터 바로크 음악 시대까지 활동했다.[121]
6. 유산
16세기 중반, 사카테카스와 과나후아토, 그리고 나중에 산루이스포토시에서 광산 매장량이 발견되면서 바히오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이 상업적 농업 지역에는 스페인 마을 네트워크가 설립되었고, 케레타로는 섬유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주민들은 바히오로 이주하여 아시엔다(hacienda)와 란초(rancho)에서 거주 직원으로 일하거나 토지를 임대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 원주민들은 빠르게 스페인화되었지만, 경제적 계층 구조의 최하층에 머물렀다.[65]
원주민들의 노동력 부족으로 스페인 아센다도(hacendado, 대농장주)들은 노동자를 유치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했다. 토지 소유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이는 원주민들을 붙잡아두기 위한 강제가 아니라 기본 임금 노동 외에 고용 조건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다.[66][67] 1775년 산루이스포토시의 스페인 관리자는 "거주 직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멕시코시티와 북부 도시들을 뒤져 파란색 프랑스 리넨을 찾아야 했다"고 언급했다.[68]
후기 식민지 시대에, 임대는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바히오 중심 지역의 많은 비원주민들에게 토지 소유주 고용을 보완했다. 바히오 임차인들은 호황기에 번영했지만, 가뭄과 기타 재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71] 산루이스포토시에서는 임대가 적고 토지 소유주 고용이 표준이었다. 19세기 초 가뭄과 흉작이 계속되자 이달고의 1810년 그리토(grito, 독립 선언)는 산루이스포토시보다 바히오에서 더 많은 호소력을 가졌다. 바히오에서는 토지 소유주들이 임차인들을 퇴거시키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임차인을 선호하면서, 토지 소유주와 임차인 사이의 이전의 상호 이익 패턴이 붕괴되었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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