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리아 미카엘라 데메지에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리아 미카엘라 데메지에르는 1809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으며, 스페인 군 장군의 딸이자 왕실 시녀의 딸로 귀족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844년 매춘에 빠진 여성을 돕기로 결심하고, 1845년 보호소를 설립하여 여성들을 지원했다. 이후 1856년 성체와 애덕의 시녀회를 창립하여 매춘 여성 구제 활동을 펼쳤으며, 1865년 발렌시아에서 콜레라에 감염된 사람들을 간호하다가 사망했다. 1934년 시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 수녀 -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스페인 인판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는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딸로, 알브레히트 7세 대공과 결혼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사후에는 총독으로서 통치하며 예술을 후원하고 세속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했다.
  •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 수녀 - 테레사 데 헤수스
    에스파냐의 로마 가톨릭 수녀이자 신비주의 작가인 테레사 데 헤수스는 카르멜회 수녀회 개혁을 주도하고 신비주의 사상으로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으며, 시성 후 여성 최초로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 교황 비오 11세가 시복한 복자 - 베르나데타 수비루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했다고 주장한 베르나데타 수비루는 가난한 방앗간 집안의 딸로 태어나 마사비엘 동굴에서 18차례의 성모 발현을 증언하여 루르드를 가톨릭 순례지로 만들었으며, 네베르 자선 수녀회 수녀로서 봉사 후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교황 비오 11세가 시복한 복자 - 요한 보스코
    요한 보스코는 이탈리아 출신의 사제이자 교육자로,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사목 활동과 청소년 교육에 헌신하며 살레시오회와 마리아 도움의 딸들 수녀회를 설립했고, 청소년, 가톨릭 출판업자, 마술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숭배받고 있다.
  • 교황 비오 11세가 시성한 성인 -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는 잉글랜드의 법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로 헨리 8세 시대에 대법관을 지냈으나 종교 개혁과 이혼에 반대하여 처형되었고, 《유토피아》를 통해 이상 사회를 묘사하여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시조로 여겨지며 가톨릭과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된다.
  • 교황 비오 11세가 시성한 성인 - 베드로 가니시오
    베드로 가니시오는 종교 개혁 시기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독일 가톨릭 재건에 헌신하여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불리는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로서, 가톨릭 교리서 집필과 헌신으로 복자 선포 후 성인이자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마리아 미카엘라 데메지에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카엘라 데메지에르
존칭 접두사성녀
이름미카엘라 데메지에르 로페스 데 디카스티요
출생일1809년 1월 1일
출생지마드리드, 스페인 왕국
사망일1865년 8월 24일
사망지발렌시아, 스페인 왕국
칭호종교인
공경 대상로마 가톨릭교회
축일8월 25일
상징수도복
수호성체 흠숭 수녀회
시복일1925년 6월 7일
시복 장소성 베드로 대성당, 이탈리아 왕국
시복자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34년 3월 4일
시성 장소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시국
시성자교황 비오 11세

2. 유년 시절

마리아 미카엘라 데메지에르 이 로페즈 데 디카스틸로는 1809년 1월 1일 스페인 독립 전쟁 중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스페인 군대의 장군이었으며, 모친은 스페인 왕비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시녀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우르술라 수녀회에서 교육받았다.[4][1] 1834년 콜레라 유행병 때에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다.

2. 1. 사교계 생활

마리아 미카엘라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의 가족은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왕실 및 사회 지도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스페인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오빠 디에고와 함께 보냈는데, 이 때 궁정 생활을 통해 사교계에 입문하였다.[4] 춤, 파티, 사교 모임, 승마 등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4][1] "호르발란 자작부인"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1]

3. 소명 탐구

마리아 미카엘라는 우르술라 수녀회에서 교육받았으며,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군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등 폭넓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했다.[1] 어린 시절 대부분을 스페인 대사이자 군인이었던 오빠 디에고와 함께 보냈으며, 춤, 사교 모임, 승마 등을 즐겼다. "호르발란 자작부인"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1834년 콜레라 유행 당시에는 병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1844년 2월 6일, 마드리드의 성 요한 하느님의 병원에서 한 소녀를 만난 것을 계기로, 속임수에 빠져 매춘으로 내몰린 여성들을 돕기 위한 쉼터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1] 1845년 4월 21일 쉼터가 문을 열었고, 많은 소녀와 여성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해 4월 21일 성체 수녀회를 창립하게 되었다.[2]

1847년부터 1848년까지는 프랑스벨기에에서 빈첸시오 아 바울 수녀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고해 사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57년부터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레가 고해 사제를 맡았고, 그 이전에는 예수회 소속 호세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가 1847년부터 고해 사제로 있었다.[1][2]

3. 1. 자선 활동의 시작

마리아 미카엘라는 수년 간 앞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인생의 진로를 찾고 있었다. 부친에게서 전사의 기질을 물려받아 고난에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모친에게서 섬세하고 연민 가득한 심성을 물려받아 병약하고 어려운 처지의 빈민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선 활동과 귀족 생활을 병행하였다. 또한 성체 조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졌다. 이는 훗날 그녀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1]

1846년경 초상화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사의 기질과 관대한 성품으로 훗날 힘든 전투를 치를 준비를 갖추었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섬세하고 자비로운 마음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사회적 지위로 인한 평범한 삶과 자선 활동을 번갈아 가며 생활했다. 또한 성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훗날 그녀의 사역에 영감을 주었다.[1]

4. 자선 활동

마리아 미카엘라는 35세 때인 1844년, 마드리드의 하느님의 성 요한 병원에서 사기를 당해 매춘과 빈곤에 빠진 은행원의 외동딸을 만났다. 이 만남을 계기로 다른 여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그녀는, 이들을 돕기 위해 1845년 4월 21일,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연줄을 활용하여 곤경에 처한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를 개소하였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 보호소에서 도움을 받았다.

4. 1. 성체와 애덕의 시녀회 설립

마리아 미카엘라는 1844년 마드리드에 있는 하느님의 성 요한 병원을 방문했을 때, 한 은행원의 어린 외동딸을 만났다. 그 소녀는 사기를 당해 매춘부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경제적으로 빈곤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다른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들의 상황을 알게 된 마리아 미카엘라는 그녀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연줄을 통해 곤경에 처한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보호소를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 보호소는 1845년 4월 21일 공식적으로 개소하였으며, 수많은 젊은 여성이 보호소를 찾아와 도움을 구하였다.[1] 마리아 미카엘라는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856년 성체와 애덕의 시녀회를 설립하였다. 성체와 애덕의 시녀회는 1860년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종교 단체로서 공식 인가를 받았다.[2]

4. 2. 콜레라 희생과 죽음

마리아 미카엘라는 1834년 콜레라 유행병 동안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고, 1865년 발렌시아에서 콜레라에 감염된 성체와 애덕의 시녀회 수녀들과 여성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콜레라에 감염되어 선종하였다.[1][2] 그녀의 유해는 1891년에 수도회 모원으로 이장되었다.[2]

5. 시성

마리아 미카엘라는 1934년 시성되었다.[4] 성인 시성 절차는 교황 레오 13세 치하인 1902년 8월 19일에 시작되었으며, 그녀는 하느님의 종으로 칭해졌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2년 6월 11일에 그녀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여 가경자로 선포하였다. 같은 교황은 1925년 6월 7일에 그녀에게 귀속된 두 개의 기적을 확인하고 그녀를 복자로 시복했다. 이후 두 개의 기적이 더 확인되면서 1934년 3월 4일에 그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참조

[1] 웹사이트 Saint María Micaela of the Blessed Sacrament http://catholicsaint[...] Saints SQPN 2016-08-24
[2] 웹사이트 Saint Maria Michela del SS. Sacramento http://www.santiebea[...] Santi e Beati null
[3] 간행물 Revisiting The Vincentian Family Tree https://via.library.[...] 2008-03-01
[4] 웹인용 St. Maria Michaela Desmaisieres http://www.catholic.[...] 2014-01-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