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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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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레오 13세(1810-1903)는 19세기 후반 가톨릭 교회를 이끈 교황으로, 교회와 현대 사회의 화해를 시도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다. 그는 이탈리아 카르피네토 로마노에서 태어나 교회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교황청 행정관과 외교관을 거쳐 1878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레오 13세는 외교 관계 개선, 과학과 종교의 조화 추구, 사회 교리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발표했다. 그는 93세의 나이로 선종했으며, 20세기에 사망한 최초의 교황이자 1295년 이후 가장 오래 산 교황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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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황 레오 13세 1878
공식 초상화, 1878
이름레오 13세
본명빈첸초 조아키노 라파엘레 루이지 페치
출생일1810년 3월 2일
출생지프랑스 제1제국 로마 카르피네토 로마노
사망일1903년 7월 20일
사망지이탈리아 왕국 로마 바티칸 궁전
서명
문장
모토Lumen in coelo (하늘의 빛)
교회 경력
교황 즉위1878년 2월 20일
교황 퇴위1903년 7월 20일
이전 직책타미아티스 명의 대주교 (1843–1846)
벨기에 교황 대사 (1843–1846)
페루자 대주교 (1846–1880)
산 크리소고노 추기경-사제 (1853–1878)
사도적 회계원장 (1877–1878)
서품1837년 12월 31일
서품자카를로 오데스칼치
주교 서임1843년 2월 19일
주교 서임자루이지 람브루스키니
추기경 서임1853년 12월 19일
추기경 서임자비오 9세
선임자비오 9세
후임자비오 10세
주교 서임
주교 1안토니오 브리간티
서임 날짜 11871년 11월 19일
주교 2카르멜로 파스쿠치
서임 날짜 21871년 11월 19일
주교 3카를로 라우렌치
서임 날짜 31877년 6월 24일
주교 4에도아르도 보로메오
서임 날짜 41878년 5월 19일
주교 5프란체스코 라토니
서임 날짜 51879년 6월 1일
주교 6장 바티스트 프랑수아 피트라
서임 날짜 61879년 6월 1일
주교 7바르톨로메오 우드록
서임 날짜 71879년 6월 1일
주교 8아고스티노 바우사
서임 날짜 81889년 3월 24일
주교 9주세페 안토니오 에르메네길도 프리스코
서임 날짜 91898년 5월 29일

2. 생애 초기

페치 형제가 자란 카르피네토 로마노의 집


페치 백작과 백작 부인, 부모

교황 레오 13세(빈첸초 조아키노 라파엘레 루이지 페치)는 1810년 3월 2일 이탈리아 중부 로마 인근의 카르피네로마노에서 백작 루도비코 페치(1767–1833)와 그의 아내 안나 프로스페리 부치(1773–1824) 백작부인의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2] 그의 형제로는 주세페와 조반니 바티스타 페치가 있었다.[58] 1818년까지 그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살았는데, "그녀를 통해 모든 영원함에 구원을 얻을 수 있기에, 종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로 여겨졌다". 그는 주세페와 함께 1824년까지 예수회비테르보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라틴어를 즐겨했으며, 열한 살 때 직접 라틴어 시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3]

1824년, 그와 주세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불려갔다. 페치 백작은 아내를 잃은 후 자녀들이 곁에 있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들은 로마에서 아버지와 함께 머물면서 예수회 로마 대학교에 다녔다. 1828년, 18세의 빈첸초는 평신도 성직자를 선택했고, 주세페는 예수회에 들어갔다. 빈첸초는 교황청 교회 아카데미에서 주로 외교와 법학을 공부했다. 1834년, 그는 여러 추기경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황의 판단에 관한 학생 발표를 했다. 그의 발표에 대해 그는 학문적 우수성 상을 받았고, 바티칸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국무원장 추기경 루이지 람브루스키니는 그를 바티칸 회중에 소개했다. 1836년, 그는 로마에서 신학 박사 학위와 민법 및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1. 유년 시절



페치 백작과 백작 부인, 부모

교황 레오 13세(빈첸초 조아키노 라파엘레 루이지 페치)는 1810년 3월 2일 이탈리아 중부 로마 인근의 카르피네로마노에서 백작 루도비코 페치(1767–1833)와 그의 아내 안나 프로스페리 부치(1773–1824) 백작부인의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2] 그의 형제로는 주세페와 조반니 바티스타 페치가 있었다.[58] 1818년까지 그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살았는데, "그녀를 통해 모든 영원함에 구원을 얻을 수 있기에, 종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로 여겨졌다". 그는 주세페와 함께 1824년까지 예수회비테르보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라틴어를 즐겨했으며, 열한 살 때 직접 라틴어 시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3]

1824년, 그와 주세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불려갔다. 페치 백작은 아내를 잃은 후 자녀들이 곁에 있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들은 로마에서 아버지와 함께 머물면서 예수회 로마 대학교에 다녔다. 1828년, 18세의 빈첸초는 평신도 성직자를 선택했고, 주세페는 예수회에 들어갔다. 빈첸초는 교황청 교회 아카데미에서 주로 외교와 법학을 공부했다. 1834년, 그는 여러 추기경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황의 판단에 관한 학생 발표를 했다. 그의 발표에 대해 그는 학문적 우수성 상을 받았고, 바티칸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국무원장 추기경 루이지 람브루스키니는 그를 바티칸 회중에 소개했다. 1836년, 그는 로마에서 신학 박사 학위와 민법 및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2. 청소년기 및 교육

1810년 3월 2일 이탈리아 중부 로마 인근의 카르피네로마노에서 루도비코 페치 백작과 그의 아내 안나 프로스페리 부치 백작부인 사이에서 일곱 자녀 가운데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2] 1818년부터 1824년까지 형 주세페 페치와 함께 비테르보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라틴어를 즐겨 11세에 라틴어 시를 직접 쓸 정도였다.[3]

1824년,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형과 함께 로마로 갔으며, 이후 형제는 부친과 함께 로마에 머물면서 예수회가 세운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편입하였다.[58] 1828년 주세페 페치는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빈첸초 페치는 교황청 교회 아카데미에서 외교와 법을 공부하였다. 1834년에는 여러 명의 추기경이 참석한 자리에서 교황의 판결문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우수 학생으로 선정되어 바티칸 당국자들의 관심을 받았다.[5] 국무원장 추기경 루이지 람브루스키니는 그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소개해주었다. 1836년에 그는 신학과 시민법, 교회법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5]

2. 3. 사제 서품

빈첸초 페치는 1828년에 비테르보 교구의 재속 성직자가 되었고, 1836년에 신학과 시민법, 교회법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37년 12월 3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베치는 형 주세페 페치와 함께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교회귀족학원에 들어가 주로 외교와 법을 공부하였으며, 1834년에는 여러 명의 추기경이 참석한 자리에서 역대 교황의 판결문들에 관한 자신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우수 학생으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3. 교황청 행정관 및 외교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페치 신부를 베네벤토교황 특사(지방 행정관)로 임명하였다.[5] 베네벤토는 교황령의 지방 가운데 가장 작은 지방으로, 주민 수는 대략 20,000명이었다. 페치는 베네벤토에서 쇠퇴하는 지역 경제, 만연한 강도들로 인한 불안, 귀족 가문들과 결탁한 마피아 또는 카모라 조직 등 각종 문제에 직면하였다. 페치는 베네벤토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귀족을 체포하고, 그의 군대를 통해 다른 귀족들도 체포하여 저항하는 자들을 사살하고 투항한 자들을 투옥시켰다. 공공질서를 회복한 후, 페치는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인근 지역과의 무역을 촉진하는 조세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페치 신부를 스폴레토페루자의 교황 특사(지방 행정관)로 임명하였다.[5] 스폴레토는 인구 10만 명, 페루자는 20만 명의 주민이 있는 지역이었다. 페루자에서 그는 부정부패와 끈질긴 싸움을 하였다.

페치는 교황의 방문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5]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며칠 동안 병원과 교육 시설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하고 질문 목록을 작성할 예정이었다.

한 제과점에서 규정된 무게보다 적은 중량으로 빵을 판매한다는 민원이 제기되자, 페치는 직접 현장으로 가서 모든 빵의 무게를 측정하고 중량 미달일 경우 가게의 빵을 압수하여 빈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5]

3. 1. 베네벤토 교황 특사 (지방 행정관)

1837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페치 신부를 베네벤토교황 특사(지방 행정관)로 임명하였다.[5] 베네벤토는 교황령의 지방 가운데 가장 작은 지방으로, 주민 수는 대략 20,000명이었다.

페치는 베네벤토에서 쇠퇴하는 지역 경제, 만연한 강도들로 인한 불안[5], 귀족 가문들과 결탁한 마피아 또는 카모라 조직 등 각종 문제에 직면하였다. 페치는 베네벤토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귀족을 체포하고, 그의 군대를 통해 다른 귀족들도 체포하여 저항하는 자들을 사살하고 투항한 자들을 투옥시켰다.[5] 공공질서를 회복한 후, 페치는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인근 지역과의 무역을 촉진하는 조세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5]

3. 2. 스폴레토 및 페루자 교황 특사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페치 신부를 스폴레토페루자의 교황 특사(지방 행정관)로 임명하였다.[5] 스폴레토는 인구 10만 명, 페루자는 20만 명의 주민이 있는 지역이었다. 페루자에서 그는 부정부패와 끈질긴 싸움을 하였다.[5]

페치는 교황의 방문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5]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며칠 동안 병원과 교육 시설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하고 질문 목록을 작성할 예정이었다.[5]

한 제과점에서 규정된 무게보다 적은 중량으로 빵을 판매한다는 민원이 제기되자, 페치는 직접 현장으로 가서 모든 빵의 무게를 측정하고 중량 미달일 경우 가게의 빵을 압수하여 빈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5]

3. 3. 주벨기에 교황 대사

1843년, 조아키노 페치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벨기에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다.[6] 이 직책은 임무 완수 후 추기경 지위가 거의 보장되는 자리였다.[6] 같은 해 4월 27일, 그레고리오 16세는 페치를 다미에타대주교로 임명하고, 국무원 장관 람브루스키니에게 주교 서품을 요청했다.[6]

페치는 벨기에 왕실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루이즈마리 왕비뿐 아니라 레오폴 1세 국왕으로부터도 호의를 얻었다. 인접한 독일에도 관심을 가져 자주 방문하였고, 특히 쾰른 대성당 건축에 관심을 보였다.

브뤼셀에서 벨기에 교황 대사로 활동하던 주교 페치


1844년, 페치 대주교의 제안으로 로마 벨기에 교황 대학이 설립되었다. 100년 후인 1946년,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곳에서 공부하였다. 페치는 니컬러스 와이즈먼 주교와 함께 영국에서 수 주를 보내면서 영국 내 가톨릭교회 상황을 면밀히 검토했다.

벨기에에서는 가톨릭 다수파와 자유주의 소수파 간에 학교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페치는 가톨릭 학교를 위해 강력하게 맞서 싸울 것을 권장하였고, 가톨릭 신자들을 결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임기가 끝날 무렵, 국왕은 그에게 레오폴드 훈장의 대십자 훈장을 수여했다.[7]

4. 페루자 대교구장

1846년 페루자에 입성하는 페치 대주교


1843년, 페치는 교황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8] 1846년부터 1877년까지 그는 대중에게 인기가 많고 성공적인 페루자 대주교로 여겨졌다. 1847년, 교황 비오 9세가 교황령에서 언론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한 후,[8] 페치는 주교 재임 초기에 매우 인기가 많았지만, 언론과 그의 거처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848년에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 전역에서 혁명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2공화국, 스페인 군대는 혁명의 성과를 되돌렸지만, 페치와 가톨릭 교회는 과거의 인기를 되찾지 못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4. 1. 교구장 착좌 및 혁명

1843년 페치는 교황의 보좌로 지명되었다. 1846년부터 1877년까지 페루자의 교구장을 지내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성공한 교구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847년 교황 비오 9세는 그간 엄격한 통제를 받아왔던 언론매체에 대해 무한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매우 큰 환영을 받았다. 그 다음해인 1848년 혁명 운동이 프랑스독일, 이탈리아 등 서유럽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페치는 본래 교구장으로 착좌한 첫 해부터 대중으로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이제는 혁명의 물결이 이탈리아 전체를 덮치면서 여론의 공격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교황령의 총리인 로시는 살해당했으며,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떠나 가에타로 피신해야 했다. 그 후 몇 달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스페인에서 온 지원군이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써 이탈리아 혁명 운동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페치와 가톨릭교회는 혁명 이전과 같은 인기를 다시는 누리지 못하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4. 2. 관구 공의회 및 신학교

페치는 관구 내의 종교적 생활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구 공의회를 소집하였다.[9][10] 그는 미래의 사제가 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교를 세우는 일에 열정을 쏟았으며, 더불어 학식 있는 새로운 교수들, 특히 토마스주의를 주창하는 학자들을 임용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저명한 토마스주의 학자이자 자신의 형인 주세페 페치에게 로마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대신에 페루자에서 교수일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의 거처는 신학교 바로 옆에 있었고, 이는 학생들과의 일상적인 접촉을 용이하게 했다.

4. 3. 자선 활동

페치 대주교는 다양한 가톨릭 자선 단체를 지원하였다. 그는 소년, 소녀, 노년 여성들을 위한 노숙자 쉼터를 설립했다. 교구 전역에 저소득층을 위한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는 은행,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의 지점을 열었다. 그는 카푸친회에서 운영하는 급식소를 만들었다. 1853년 말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계속되는 지진과 홍수를 감안하여, 자신의 임명을 축하하는 모든 자원을 피해자들에게 기부했다.

페루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페치 대주교

4. 4. 추기경 서임

1853년 12월 19일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 레오 13세는 추기경단에 임명되었으며, 산 크리고노의 사제급 추기경이 되었다.[11]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를 ''인 펙토레''로 추기경에 내정하였으나,[58] 1846년 교황의 사망으로 인해 그 계획이 중단되었다.[11]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드 2세는 페치를 추기경으로 임명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11] 비오 9세는 페치를 로마 가까이에 두고 싶어 여러 차례 교외 교구를 제안했지만, 페치는 페루자를 선호하여 거절했다. 페루자 대주교는 국무원 장관인 자코모 안토넬리와 견해가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11]

4. 5. 교황권 옹호

페치 추기경은 이탈리아의 반(反)교회 정책에 맞서 교황권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이탈리아 왕국 당국이 가톨릭 수도회의 수도원과 수녀원을 몰수하여 행정 건물이나 군사 건물로 만들자, 페치는 항의했지만 온건하게 행동했다. 이탈리아 국가가 가톨릭 학교를 인수했을 때, 페치는 신학대학원을 염려하여 다른 학교의 모든 세속적인 주제를 추가하고 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신학대학원을 개방했다. 새 정부는 또한 가톨릭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고 모든 주교 또는 교황의 발언은 출판 전에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4. 6. 교황 궁무처장

1877년 8월 필리포 데 안젤리스 추기경이 선종하자 교황 비오 9세는 페치 추기경을 새 교황 궁무처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페치 추기경은 로마로 부임하였다.[12] 비오 9세는 페치에게 "몬시뇰, 저는 당신을 교회의 원로원에 소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비판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나의 교황직의 첫 번째 행동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언급은 페치와 비오 9세가 서로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정책적인 면에서 의견이 달랐다는 소문 때문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러한 추정된 반감은 증명된 적이 없다.[58]

5. 교황

### 교황 선출 (1878년)

교황 비오 9세는 1878년 2월 7일에 사망했으며,[12] 그의 말년 동안 진보 언론은 종종 이탈리아 왕국이 교황 선거에 관여하여 바티칸을 점령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과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갑작스러운 사망(1878년 1월 9일)으로 인해 정부의 관심이 분산되었다.

교황 레오 13세의 즉위식 묘사 – 1900년경 이미지


교황 레오 13세의 즉위식 초상화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들은 유럽, 특히 이탈리아의 교회-국가 관계, 교회 내 분열 및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위와 같은 문제들을 논의했다.[12] 콘클라베를 다른 곳으로 옮길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페치는 카메라를렌고로서 이를 거부했다. 1878년 2월 18일, 콘클라베가 로마에 소집되었다. 추기경 페치는 세 번째 투표에서 61표 중 44표를 얻어 선출되었고, 레오 13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12]

1878년 콘클라베는 다양한 유럽 정치 위기로 인해 이전 콘클라베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적었지만, 보수적인 비오 9세의 긴 재위 기간으로 인해 많은 추기경들이 페치에게 투표한 것은 그의 나이와 건강이 그의 교황 재위가 다소 짧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졌다.[13] 콘클라베 이후, 존 헨리 뉴먼은 "비오 9세의 후임자에게서 깊은 사색, 따뜻한 마음, 매력적인 단순함, 그리고 레오라는 이름에 걸맞는 힘을 인식하며, 비오가 더 이상 이곳에 없다는 것을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3]

페치는 주요 "''교황 유력 후보''"로 인식되었다.[13] 그러나 추기경 플라비오 키기와 토마소 마르티넬리도 잠재적 후보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페치에 반대하며 그가 확보하고 있는 투표 수에 놀란 일부 추기경들은 뭉쳐서 추기경 알레산드로 프란치에게 투표했지만, 프란치는 페치가 정식으로 선출된 마지막 투표에서 표를 얻지 못했다. 그가 선출되는 것을 막으려고 헌신한 사람들은 추기경 루이지 오렐리아 디 산토 스테파노, 피에트로 지안넬리, 키기, 로렌초 일라리오네 란디, 카를로 사코니, 라파엘레 모나코 라 발레타, 루이지 아마트 디 산 필리포 에 소르소, 그리고 요한 바티스트 프란젤린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비오 9세는 그의 죽기 전에 루이지 빌리오 추기경을 그의 후임으로 매우 선호했으며, 고인이 된 교황이 만든 많은 추기경들이 자신을 승진시킨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빌리오에게 투표하려고 했지만, 극우주의자에게 투표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유럽 강대국의 거부권을 불러일으키고 선거를 필요 이상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가 빌리오에게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있다는 초기 논의가 있었지만, 이는 일어나지 않았다.[13]

콘클라베 전에 추기경 도메니코 바르톨리니, 모나코, 빌리오, 헨리 에드워드 매닝, 로렌초 니나, 그리고 프란치(페치의 반대자들에 의해 제안됨)는 모두 페치의 출마를 지지하기로 동의했으며, 또한 다음 교황은 이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매닝과 에드워드 헨리 하워드는 외국 추기경들이 페치의 출마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동의했다.[14][13]

그는 선출되자 교육에 대한 고(故) 교황의 관심과 외국 정부에 대한 화해적인 태도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교황 레오 12세를 기념하여 "레오"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4] 새로운 교황은 어떤 이름을 사용할 것이냐는 질문에 "항상 존경해왔던 레오 12세를 기념하여 레오 13세로 하겠다"고 답했다. 그의 선출은 로마 시민과 세계에 오후 1시 15분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58] 그는 1878년 3월 3일에 즉위했다.

### 교회와 현대 사회의 화해 노력

레오 1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교회와 현대 세계 간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다.[78] 그는 과학과 종교가 공존한다는 스콜라 철학 교리를 확고히 재확인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15] 연구를 활발히 진행시켰다.[78] 또한 바티칸 비밀문서고를 개방하고, 바티칸 천문대를 재창립했다.[16]

교황관을 쓴 레오 13세.


1893년 성경 주석에 넓은 길을 열어 주었고, 1902년에는 교황청 성서위원회를 설립하였다. 1881년에는 루드비히 폰 파스토르 등 저명한 교황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가운데 인가받은 이들의 경우,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바티칸 비밀문서고를 특별히 개방하였다.[78]

그는 과학 및 역사 분석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바티칸 비밀 문서고를 개방하고, 오스트리아의 역사가 루드비히 폰 파스터가 저술한 교황청에 대한 20권 분량의 포괄적인 과학 연구를 직접 지원했다.

### 외교 관계

1878년 4월에 찍은 레오 13세의 공식 초상화


교황 레오 13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거나 개선하려 노력했다.

#### 러시아

교황 레오 13세는 재위 첫 해에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에서 교황은 황제에게 그의 나라에는 수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존중해줄 것을 조건으로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이후, 레오 13세는 그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에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이에 알렉산드르 3세는 매우 기뻐했으며, 기독교 세계의 단합을 이루자고 말하였다. 더불어 그는 교황에게 가톨릭 주교들이 정치적인 언사를 자제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탈리아를 고려하여 레오 13세가 로마-빈-베를린 동맹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파리와 상트페레트부르크 사이의 친선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자 바티칸과 러시아 간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 독일

가톨릭교회와 독일 제국 간 다툼을 다룬 빌헬름 숄츠의 풍자화. 교황과 독일 제국 재상은 서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신발을 핥으라고 함으로써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독일 제국에서는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반가톨릭 성향의 문화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레오 13세는 독일에서 가톨릭교회가 거대한 권력에 의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하였다.[83]

비스마르크가 실용주의적인 이유에서 교회와의 다툼이 심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자, 레오 13세는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독일 내 주교들과 가톨릭 정당인 독일 중앙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태에 개입했다. 분쟁은 상호 양보 하에 완화되었다. 1882년 프로이센의 사절이 다시 교황청에 파견되었다. 국제적인 존경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레오 13세에게는 적어도 부분적인 성공이었다. 독일 제국 전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제국을 주도하는 프로이센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교회를 더 이상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독일 제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들과의 싸움을 지속하길 원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는 강한 의욕에 차고 지적인 이 교황에게 개인적으로 공감했다. 관용의 제스처로 1885년 비스마르크는 태평양에 있는 캐롤라인 제도를 둘러싼 독일과 스페인의 갈등에서 중재 역할을 교황에게 제안했다. 교황의 현명한 중재 판결로 두 나라의 다툼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888년 10월 12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탈리아 여행 중에 바티칸을 방문한 일은 독일과 교황청의 화해를 결정적으로 확인해 준 사건이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치하의 프로이센에서 벌어진 반가톨릭 문화 투쟁은 1872년 예수회 법을 포함하여 독일 제국 내 가톨릭 교회에 대한 상당한 제약을 초래했다. 레오 13세의 교황 재임 기간 동안, 타협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반가톨릭 공격은 잠잠해졌다.[22]

중앙당은 독일에서 가톨릭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사회 변화의 동력이었다. 중앙당은 레오 13세가 사회 복지 입법과 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한 데서 격려를 받았다. 레오 13세의 진취적인 접근 방식은 다른 유럽 국가에서 가톨릭 행동을 장려했으며,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가톨릭 정당, 특히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의 의제에 포함되었고, 이는 사회주의 정당의 수용 가능한 대안이 되었다.

빌헬름 2세 황제는 그의 회고록[23]에서 "나와 교황 레오 13세 사이에 존재했던 우호적이고 신뢰로운 관계"에 대해 논했다. 빌헬름 2세가 레오 13세를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 교황이 독일이 가톨릭 교회의 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빌헬름 2세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 내 반가톨릭 기류 속에서도 레오 13세는 전임 교황 비오 9세의 대(對)이탈리아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추진해나갔다. 그는 1881년 7월 13일 반교권주의자들이 선종한 전임 교황 비오 9세의 시신을 탈취하여 테베레 강가에 던져 버리려고 시도했던 사건 이래 교육 영역에서의 박해와 공격 그리고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모독과 강제 몰수 등 이탈리아의 거센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켜내야만 했다.

또한 로마 문제에 있어서 그는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이탈리아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한 그는 이탈리아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부가 주도하는 선거에 불참할 것을 요청하는 등 이탈리아와의 모든 타협을 금지하는 한편 교황청의 영토 권리 폐기에 관여하는 이는 모두 파문을 내리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나섰다. 1879년 레오 13세는 교황으로 즉위한 지 처음으로 주최한 추기경회의에서 형인 주세페 페치를 추기경에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1899년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등이 이단자 조르다노 브루노를 기념하여 그가 화형당한 장소인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 한복판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동상을 만든 조각가 에토레 페라리는 프리메이슨 단원이기도 했다. 당시 여든 살의 고령이었던 레오 13세는 이를 좌시하지 않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금식 기도를 바치며 무언의 저항에 나섰다.

교황 레오 13세의 새로운 천문대 개관을 기념하는 1891년 은메달


가톨릭 교회에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레오 13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비오 9세의 정책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이어갔다. 이탈리아 정부와의 관계에서 레오는 교황청의 자의적인 바티칸 감금 입장을 유지했으며,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이 이탈리아 선거에 투표하거나 선출직에 출마해서는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는 1879년 첫 번째 추기경 회의에서 형인 주세페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이탈리아의 박해와 차별로 간주하는 교육, 가톨릭 교회의 몰수 및 침해, 교회에 대한 법적 조치, 그리고 1881년 7월 13일 반성직자 단체가 교황 비오 9세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던지려 했던 것과 같은 테러 행위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켜야 했다. 교황은 심지어 그의 거처를 오스트리아의 두 도시인 트리에스테 또는 잘츠부르크로 옮기는 것을 고려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이 생각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 프랑스

레오 13세는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3공화국을 받아들이게 하였다.[24] 대통령이 사임하자 정부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투쟁을 개시하였다. 이혼을 법적으로 허락하고 종교 교육을 추방하며 수도회가 운영하던 1만여 개의 학교를 강제로 폐쇄시켰다. 1905년 1905년 프랑스 정교 분리법에 의해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25]

레오 13세는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대부분의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이 왕당파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이 1801년 정교협약을 폐지하려 할 것을 우려했다. 람폴라 추기경의 조언에 따라 그는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화국에 "결집"할 것을 촉구했다.[24] 레오의 결정은 많은 프랑스 왕당파들을 화나게 했는데, 그들은 신앙을 위해 왕을 배신하도록 강요받는다고 느꼈다. 궁극적으로 이 조치는 프랑스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고 프랑스 내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또한 레오의 이러한 움직임은 정교협약의 최종 폐지를 막지 못했다.[25]

#### 영국

영어권 국가에서 볼 때, 교황 레오 13세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1896년 회칙 《사도적 관심》(Apostolicæ Curæ)을 반포해 성공회의 성직자 임명에 대해 성사적 무효성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더불어 1878년에는 스코틀랜드에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를 재수립하였다.[26] 1879년 5월 12일, 그는 개종한 신학자 존 헨리 뉴먼을 추기경으로 임명했고,[26] 그는 결국 2010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2019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성되었다. 1899년, 그는 비드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 기타 국가

몬세라트 수도원1880년 카탈루냐에서 1000주년을 기념했다. 1881년 9월 11일, 카탈루냐의 국경일과 맞물려 레오 13세는 몬세라트의 동정녀를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는데, 이는 카탈루냐 민족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1886년, 레오 13세는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의 불가리아 공 즉위를 환영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장남 보리스 3세의 정교회 개종을 허용하려 하자 관계가 악화되었고, 레오 13세는 페르디난트를 파문했다.

1887년 4월 10일, 교황 레오 13세의 교황 헌장에 따라 미국 가톨릭 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가 설립되어 미국 가톨릭 교회의 국립 대학교가 되었다. 1889년에는 워싱턴 D.C.미국 가톨릭 대학교를 설립하고 신학 학위를 수여하는 것을 승인했다. 제임스 기번스1886년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미국 신문들은 교황 레오 13세가 미국의 공립 학교를 장악하려 한다고 비판했다.[28]

1892년, 교황 레오 13세는 바티칸 사도 문서 보관소(Vatican Apostolic Archive)를 1893년 세계 콜럼비아 박람회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념하기 위해 계획 중이던 특사 윌리엄 엘로이 커티스에게 공개했다.[30][31]

1899년 로마에서 열린 ''제1차 라틴 아메리카 평의회''와 1888년 브라질 주교들에게 보낸 회칙 ''In plurimis''(노예제 폐지에 관하여)로 기억된다. 1897년에는 사도 서한 ''Trans Oceanum''을 발표했는데, 이 서한은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의 특권과 교회 구조를 다루었다.[32]

1881년 1월, 태평양 전쟁 중 초리요스 전투 직전에 칠레군에게 교황의 축복을 내렸다. 칠레 군인들은 초리요스와 바랑코 도시들을 약탈했고, 칠레 사제들은 페루 국립 도서관에서 희귀하고 고대 판의 성경을 탐냈다.[33]

인도에 교황청 신학교라고 불리는 국립 신학교를 1893년에 설립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교황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점령했다. 1902년 필리핀 총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의 만남에서 레오 13세는 미국 정부가 필리핀의 가톨릭 수도사들로부터 토지를 구매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35]

1884년부터 동아프리카 선교를 승인했다.[26] 1887년, 피아첸차 주교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가 조직한 성 카를로 보로메오 선교사의 설립을 승인했다. 1879년 백부 선교회 (아프리카 선교회)와 관련된 가톨릭 선교사들이 우간다에 왔고, 다른 선교사들은 탄자니아(오늘날의 탄자니아)와 르완다로 갔다.[36]

1889년, 교황 레오 13세는 미국 가톨릭 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를 워싱턴 D.C.에 설립하는 것을 승인하고, 신학 학위를 수여했다.


### 신학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교황 레오 13세 재위 초기 8년 동안 그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레오 13세는 결혼과 가정, 국가와 사회 영역에서 중요한 주제를 다룬 46개의 교황 교서 및 회칙을 발표했다.

교황 레오 13세


[[File:Kardinal_Giuseppe_Pecci_JS_(cropped).jpg|thumb|145px|left|1887년의 주세페 페치. 레오 13세는 추기경단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1879년 자신의 형제이자 저명한 토마스주의자 신학자인 예수회원 주세페 페치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레오 13세는 여러 스카풀라를 인가했다. 1885년 거룩한 얼굴 스카풀라(베로니카)를 인가하고 '거룩한 얼굴 사제회'를 대총회로 승격시켰다.[37] 1893년 선한 조언의 성모 스카풀라와 성 요셉 스카풀라를, 1900년에는 예수 성심 스카풀라를 인가했다.[38]

#### 토마스주의 부흥

레오 13세는 교황의 권위를 위해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내지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 불리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인 토마스주의를 부흥시켰다. 1879년 8월 4일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를 공포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철학과 신학 체제로서 토마스주의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이는 미래의 사제들을 양성하는 교회 신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이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교육의 기준이 되었다.

교황으로서 그는 자신의 모든 권한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부흥에 사용했다. 1879년 8월 4일,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를 반포했는데, 이 회칙은 아퀴나스의 사상에 기반한 중세 신학 체계인 토미즘을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 및 신학 체계로 부활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토미즘은 사제 훈련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평신도 교육에서도 규범이 되어야 했다.

레오 13세는 이후 1879년 10월 15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천사 박사'의 완전한 저작에 대한 비평적 편집, 소위 레오네 판 출판을 지시했다. 레오네 판의 감독은 미래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Angelicum)인 ''Collegium Divi Thomae de Urbe''의 교수이자 총장이었던 토마소 마리아 지글리아라에게 맡겨졌다. 레오는 또한 1882년에 ''Angelicum''의 철학부와 1896년에 교회법 학부를 설립했다.

#### 성경 연구 장려

1893년 레오 13세는 회칙 《섭리의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을 통해 신학 공부에 있어서 성경 공부가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레오 13세의 후임자인 교황 비오 12세가 50년 후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에서 언급했다시피, 레오 13세의 회칙은 성경과 신학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매우 중요한 회칙이었다.[42] 1893년 회칙 ''구세주이신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에서 그는 신학 연구에 있어서 성서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이는 가톨릭 신학, 그리고 성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회칙이었으며, 교황 비오 12세는 50년 후 회칙 ''성령의 영감으로''(Divino afflante Spiritu)에서 이를 지적했다.[42]

#### 마리아론

레오 13세의 전임자인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내용의 무염시태를 믿을 교리로 반포하였다. 레오 13세는 전례 없이 묵주기도와 관련하여 11개의 회칙을 반포함으로써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그는 ‘묵주기도의 교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44][45][46] 1883년 레오 13세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정하고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성모 호칭 기도에 ‘묵주기도의 모후’를 추가하였다. 그는 묵주기도야말로 참되고 적합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생각했다. 1883년 9월 1일에 회칙 《최고 사도직》(Supremi Apostolatus Officio)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묵주기도가 사회악을 물리치는 효과적인 영적 무기라고 선언하였다. 성모 신심과 관련해서는 7개의 회칙을 반포하여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였다.

그의 전임자인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의 교의 선포로 인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몽소승의 교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레오 13세는 11개의 회칙에서 전례 없는 묵주 장려를 펼친 것으로 인해, 마리아 신심을 장려했다는 의미에서 묵주 교황이라고 불렸다.[44][45][46] 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몽소승 교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회칙에서 인류 구원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며, 그녀를 중재자이자 공속구원자라고 칭했다. "중재자"라는 칭호를 허용하면서도, 최근의 교황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속구원자"라는 용어 사용을 경계하고 있다.

#### 성 요셉 공경

1889년 8월 15일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Quamquam pluries》를 반포하면서 예수의 수양아버지이자 성모 마리아의 남편인 성 요셉을 그리스도인 가장(家長)의 본보기로 선포하면서, 모든 성인 가운데 성모 마리아의 다음가는 자리로 그를 높였다. 회칙에서 그는 “세계의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성 요셉에게도 열렬한 신심과 깊은 신뢰를 가지고 그 중재를 기원하는 습관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고 밝혔다. 또한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양아버지이므로 가톨릭교회 위에 가장권을 가지고 있다.”면서 “성 요셉이 성가정의 모든 것을 보필하신 것과 같이 가톨릭교회를 보호자로서 가호해 주신다.”고 설명하였다.

#### 예수 성심 공경

예수 성심 신심은 하느님이요 인간인 예수의 마음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예수의 마음’이란 그리스도의 위격에 근거하고, 그리스도의 위격(말씀의 위격)은 인성과 실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결국 예수 성심 신심은 인간적·감각적 사랑, 영적 및 주입된 초자연적 사랑, 말씀의 위격에서 나오는 신적(神的) 사랑, 즉 그리스도의 삼중적(三重的) 사랑을 상징하는 마음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는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진 가장 탁월한 신심이다.”라고 말한 레오 13세는 1899년에 예수 성심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시키고 비기독교인을 포함한 전 세계의 온 인류를 예수 성심에 봉헌하였다. 그는 회칙 《예수 성심께 대한 인류의 봉헌》에서 “예수 성심은 교회에 승리의 보증이 된다. 교회 초기에 한 청년 황제(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일컬음)가 하늘에서 십자가를 보고 승리를 얻었듯이, 오늘날 우리 앞에는 거룩하고 신적인 다른 표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니고 불꽃 가운데서 빛나는 지극히 거룩한 예수님의 심장이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거기에 두고 인류의 구원을 거기에서 찾자.”고 고무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File:Maria_Droste_zu_Vischering.jpg|thumb|right|200px|복자 마리아 드로스테 추 비셰링은 선한 목자의 자비의 성모 수녀회 소속 수녀였으며, 교황 레오 13세에게 전 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해 줄 것을 요청했다.<

5. 1. 교황 선출 (1878년)

교황 비오 9세는 1878년 2월 7일에 사망했으며,[12] 그의 말년 동안 진보 언론은 종종 이탈리아 왕국이 교황 선거에 관여하여 바티칸을 점령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과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갑작스러운 사망(1878년 1월 9일)으로 인해 정부의 관심이 분산되었다.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들은 유럽, 특히 이탈리아의 교회-국가 관계, 교회 내 분열 및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위와 같은 문제들을 논의했다.[12] 콘클라베를 다른 곳으로 옮길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페치는 카메라를렌고로서 이를 거부했다. 1878년 2월 18일, 콘클라베가 로마에 소집되었다. 추기경 페치는 세 번째 투표에서 61표 중 44표를 얻어 선출되었고 레오 13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12]

1878년 콘클라베는 다양한 유럽 정치 위기로 인해 이전 콘클라베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적었지만, 보수적인 비오 9세의 긴 재위 기간으로 인해 많은 추기경들이 페치에게 투표한 것은 그의 나이와 건강이 그의 교황 재위가 다소 짧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졌다.[13] 콘클라베 이후, 존 헨리 뉴먼은 "비오 9세의 후임자에게서 깊은 사색, 따뜻한 마음, 매력적인 단순함, 그리고 레오라는 이름에 걸맞는 힘을 인식하며, 비오가 더 이상 이곳에 없다는 것을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3]

페치는 주요 "''교황 유력 후보''"로 인식되었다.[13] 그러나 추기경 플라비오 키기와 토마소 마르티넬리도 잠재적 후보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페치에 반대하며 그가 확보하고 있는 투표 수에 놀란 일부 추기경들은 뭉쳐서 추기경 알레산드로 프란치에게 투표했지만, 프란치는 페치가 정식으로 선출된 마지막 투표에서 표를 얻지 못했다. 그가 선출되는 것을 막으려고 헌신한 사람들은 추기경 루이지 오렐리아 디 산토 스테파노, 피에트로 지안넬리, 키기, 로렌초 일라리오네 란디, 카를로 사코니, 라파엘레 모나코 라 발레타, 루이지 아마트 디 산 필리포 에 소르소, 그리고 요한 바티스트 프란젤린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비오 9세는 그의 죽기 전에 루이지 빌리오 추기경을 그의 후임으로 매우 선호했으며, 고인이 된 교황이 만든 많은 추기경들이 자신을 승진시킨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빌리오에게 투표하려고 했지만, 극우주의자에게 투표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유럽 강대국의 거부권을 불러일으키고 선거를 필요 이상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가 빌리오에게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있다는 초기 논의가 있었지만, 이는 일어나지 않았다.[13]

콘클라베 전에 추기경 도메니코 바르톨리니, 모나코, 빌리오, 헨리 에드워드 매닝, 로렌초 니나, 그리고 프란치(페치의 반대자들에 의해 제안됨)는 모두 페치의 출마를 지지하기로 동의했으며, 또한 다음 교황은 이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매닝과 에드워드 헨리 하워드는 외국 추기경들이 페치의 출마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동의했다.[14][13]

그는 선출되자 교육에 대한 고(故) 교황의 관심과 외국 정부에 대한 화해적인 태도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교황 레오 12세를 기념하여 "레오"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4] 새로운 교황은 어떤 이름을 사용할 것이냐는 질문에 "항상 존경해왔던 레오 12세를 기념하여 레오 13세로 하겠다"고 답했다. 그의 선출은 로마 시민과 세계에 오후 1시 15분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58] 그는 1878년 3월 3일에 즉위했다.

5. 2. 교회와 현대 사회의 화해 노력

레오 1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교회와 현대 세계 간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다.[78] 그는 과학과 종교가 공존한다는 스콜라 철학 교리를 확고히 재확인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15] 연구를 활발히 진행시켰다.[78] 또한 바티칸 비밀문서고를 개방하고, 바티칸 천문대를 재창립했다.[16]

1893년 성경 주석에 넓은 길을 열어 주었고, 1902년에는 교황청 성서위원회를 설립하였다. 1881년에는 루드비히 폰 파스토르 등 저명한 교황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가운데 인가받은 이들의 경우,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바티칸 비밀문서고를 특별히 개방하였다.[78]

그는 과학 및 역사 분석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바티칸 비밀 문서고를 개방하고, 오스트리아의 역사가 루드비히 폰 파스터가 저술한 교황청에 대한 20권 분량의 포괄적인 과학 연구를 직접 지원했다.

5. 3. 외교 관계



교황 레오 13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거나 개선하려 노력했다.

  • '''러시아'''


교황 레오 13세는 재위 첫 해에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서신을 보내 러시아 내 수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를 존중해줄 것을 조건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레오 13세는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에 대리인을 파견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기뻐하며 기독교 세계의 단합을 이루자고 말했고, 교황에게 가톨릭 주교들이 정치적 언사를 자제하도록 요청했다. 레오 13세가 이탈리아를 고려하여 로마-빈-베를린 동맹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파리와 상트페레트부르크 사이의 친선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자 바티칸과 러시아 간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 '''독일'''


독일 제국에서는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반가톨릭 성향의 문화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레오 13세는 독일에서 가톨릭교회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83] 비스마르크가 교회와의 다툼 심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자, 레오 13세는 독일 내 주교들과 독일 중앙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태에 개입했고, 분쟁은 상호 양보 하에 완화되었다. 1882년 프로이센 사절이 다시 교황청에 파견되었다. 레오 13세는 프로이센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교회를 보호했다.

비스마르크는 교황에게 공감하여 태평양 캐롤라인 제도를 둘러싼 독일과 스페인의 갈등 중재를 교황에게 제안했고, 교황의 중재로 다툼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888년 10월 12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바티칸을 방문하여 독일과 교황청의 화해를 확인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치하 프로이센의 반가톨릭 문화 투쟁은 1872년 예수회 법 등으로 독일 제국 내 가톨릭 교회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했다. 레오 13세 재임 기간 동안 타협이 이루어져 반가톨릭 공격은 잠잠해졌다.[22]

중앙당은 레오 13세의 사회 복지 입법과 노동자 권리 지지에 격려받았다. 레오 13세의 접근 방식은 유럽 국가에서 가톨릭 행동을 장려했으며,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 의제에 포함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의 대안이 되었다.

빌헬름 2세 황제는 회고록[23]에서 레오 13세와의 우호적 관계를 언급하며, 교황이 독일을 가톨릭 교회의 칼이라 칭했으나,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 내 반가톨릭 기류 속에서 레오 13세는 전임 교황 비오 9세의 정책 대부분을 추진했다. 1881년 7월 13일 반교권주의자들의 교황 비오 9세 시신 탈취 시도 이후, 교육, 성당, 수도원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켜야 했다.

로마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고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하며 이탈리아 정부에 도전했다.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부 선거 불참을 요청하고, 교황청 영토 권리 폐기 관여자는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1879년 레오 13세는 형인 주세페 페치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1899년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등이 이단자 조르다노 브루노 동상을 캄포 데 피오리 광장에 건립하자, 레오 13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금식 기도로 저항했다.

레오 13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비오 9세의 정책을 이어갔다. 바티칸 감금 입장을 유지하며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의 선거 참여를 금지했다. 1879년 형 주세페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박해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켜야 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교황의 거처 이전 제안을 거절했다.

  • '''프랑스'''


레오 13세는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3공화국을 받아들이게 하였다.[24] 대통령 사임 후 정부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투쟁을 개시, 이혼 허용, 종교 교육 추방, 수도회 학교 폐쇄를 단행했다. 1905년 프랑스 정교 분리법으로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25]

레오 13세는 프랑스 제3공화국이 1801년 정교협약을 폐지하려 할 것을 우려, 람폴라 추기경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화국에 "결집"할 것을 촉구했다.[24] 레오의 결정은 많은 프랑스 왕당파들을 화나게 했다. 이 조치는 프랑스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고 영향력을 감소시켰으며, 정교협약 폐지를 막지 못했다.[25]

  • '''영국'''


영어권 국가에서 교황 레오 13세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1896년 회칙 《사도적 관심》(Apostolicæ Curæ)을 반포해 성공회 성직자 임명의 성사적 무효성을 선언한 것이다. 1878년 스코틀랜드에 가톨릭 교계제도를 재수립했다.[26] 1879년 개종 신학자 존 헨리 뉴먼을 추기경으로 임명했고,[26] 뉴먼은 2010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 2019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성되었다. 1899년 비드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 '''기타 국가'''


몬세라트 수도원1880년 카탈루냐에서 1000주년을 기념했다. 1881년 9월 11일, 레오 13세는 몬세라트의 동정녀를 카탈루냐 수호성인으로 선포, 카탈루냐 민족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1886년, 레오 13세는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의 불가리아 공 즉위를 환영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장남 보리스 3세의 정교회 개종을 허용하자 관계가 악화, 레오 13세는 페르디난트를 파문했다.

1887년 4월 10일, 교황 헌장에 따라 미국 가톨릭 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가 설립되어 미국 가톨릭 교회 국립 대학교가 되었다. 1889년 워싱턴 D.C.미국 가톨릭 대학교를 설립, 신학 학위 수여를 승인했다. 제임스 기번스1886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미국 신문들은 교황 레오 13세가 미국 공립 학교를 장악하려 한다고 비판했다.[28]

1892년, 교황 레오 13세는 바티칸 사도 문서 보관소(Vatican Apostolic Archive)를 1893년 세계 콜럼비아 박람회 특사 윌리엄 엘로이 커티스에게 공개했다.[30][31]

1899년 로마에서 열린 ''제1차 라틴 아메리카 평의회''와 1888년 브라질 주교들에게 보낸 회칙 ''In plurimis''(노예제 폐지에 관하여)로 기억된다. 1897년 사도 서한 ''Trans Oceanum''을 발표,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의 특권과 교회 구조를 다루었다.[32]

1881년 1월, 태평양 전쟁 중 초리요스 전투 직전 칠레군에게 교황의 축복을 내렸다. 칠레 군인들은 초리요스와 바랑코 도시들을 약탈했고, 칠레 사제들은 페루 국립 도서관에서 희귀 성경을 탐냈다.[33]

인도에 교황청 신학교를 1893년에 설립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교황이었으며,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점령했다. 1902년 필리핀 총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의 만남에서 레오 13세는 미국 정부의 필리핀 가톨릭 수도사 토지 구매를 허용하지 않았다.[35]

1884년부터 동아프리카 선교를 승인했다.[26] 1887년, 성 카를로 보로메오 선교사 설립을 승인했다. 1879년 백부 선교회 (아프리카 선교회) 선교사들이 우간다에 왔고, 다른 선교사들은 탄자니아(오늘날의 탄자니아)와 르완다로 갔다.[36]

5. 3. 1. 러시아

교황 레오 13세는 재위 첫 해에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에서 교황은 황제에게 그의 나라에는 수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존중해줄 것을 조건으로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이후, 레오 13세는 그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에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이에 알렉산드르 3세는 매우 기뻐했으며, 기독교 세계의 단합을 이루자고 말하였다. 더불어 그는 교황에게 가톨릭 주교들이 정치적인 언사를 자제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탈리아를 고려하여 레오 13세가 로마-빈-베를린 동맹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파리와 상트페레트부르크 사이의 친선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자 바티칸과 러시아 간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5. 3. 2. 독일



독일 제국에서는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반가톨릭 성향의 문화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레오 13세는 독일에서 가톨릭교회가 거대한 권력에 의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하였다.[83]

비스마르크가 실용주의적인 이유에서 교회와의 다툼이 심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자, 레오 13세는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독일 내 주교들과 가톨릭 정당인 독일 중앙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태에 개입했다. 분쟁은 상호 양보 하에 완화되었다. 1882년 프로이센의 사절이 다시 교황청에 파견되었다. 국제적인 존경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레오 13세에게는 적어도 부분적인 성공이었다. 독일 제국 전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제국을 주도하는 프로이센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교회를 더 이상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독일 제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들과의 싸움을 지속하길 원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는 강한 의욕에 차고 지적인 이 교황에게 개인적으로 공감했다. 관용의 제스처로 1885년 비스마르크는 태평양에 있는 캐롤라인 제도를 둘러싼 독일과 스페인의 갈등에서 중재 역할을 교황에게 제안했다. 교황의 현명한 중재 판결로 두 나라의 다툼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888년 10월 12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탈리아 여행 중에 바티칸을 방문한 일은 독일과 교황청의 화해를 결정적으로 확인해 준 사건이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치하의 프로이센에서 벌어진 반가톨릭 문화 투쟁은 1872년 예수회 법을 포함하여 독일 제국 내 가톨릭 교회에 대한 상당한 제약을 초래했다. 레오 13세의 교황 재임 기간 동안, 타협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반가톨릭 공격은 잠잠해졌다.[22]

중앙당은 독일에서 가톨릭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사회 변화의 동력이었다. 중앙당은 레오 13세가 사회 복지 입법과 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한 데서 격려를 받았다. 레오 13세의 진취적인 접근 방식은 다른 유럽 국가에서 가톨릭 행동을 장려했으며,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가톨릭 정당, 특히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의 의제에 포함되었고, 이는 사회주의 정당의 수용 가능한 대안이 되었다.

빌헬름 2세 황제는 그의 회고록[23]에서 "나와 교황 레오 13세 사이에 존재했던 우호적이고 신뢰로운 관계"에 대해 논했다. 빌헬름 2세가 레오 13세를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 교황이 독일이 가톨릭 교회의 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빌헬름 2세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5. 3. 3.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 내 반가톨릭 기류 속에서도 레오 13세는 전임 교황 비오 9세의 대(對)이탈리아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추진해나갔다. 그는 1881년 7월 13일 반교권주의자들이 선종한 전임 교황 비오 9세의 시신을 탈취하여 테베레 강가에 던져 버리려고 시도했던 사건 이래 교육 영역에서의 박해와 공격 그리고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모독과 강제 몰수 등 이탈리아의 거센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켜내야만 했다.

또한 로마 문제에 있어서 그는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이탈리아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한 그는 이탈리아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부가 주도하는 선거에 불참할 것을 요청하는 등 이탈리아와의 모든 타협을 금지하는 한편 교황청의 영토 권리 폐기에 관여하는 이는 모두 파문을 내리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나섰다. 1879년 레오 13세는 교황으로 즉위한 지 처음으로 주최한 추기경회의에서 형인 주세페 페치를 추기경에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1899년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등이 이단자 조르다노 브루노를 기념하여 그가 화형당한 장소인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 한복판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동상을 만든 조각가 에토레 페라리는 프리메이슨 단원이기도 했다. 당시 여든 살의 고령이었던 레오 13세는 이를 좌시하지 않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금식 기도를 바치며 무언의 저항에 나섰다.

가톨릭 교회에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레오 13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비오 9세의 정책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이어갔다. 이탈리아 정부와의 관계에서 레오는 교황청의 자의적인 바티칸 감금 입장을 유지했으며,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이 이탈리아 선거에 투표하거나 선출직에 출마해서는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는 1879년 첫 번째 추기경 회의에서 형인 주세페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이탈리아의 박해와 차별로 간주하는 교육, 가톨릭 교회의 몰수 및 침해, 교회에 대한 법적 조치, 그리고 1881년 7월 13일 반성직자 단체가 교황 비오 9세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던지려 했던 것과 같은 테러 행위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켜야 했다. 교황은 심지어 그의 거처를 오스트리아의 두 도시인 트리에스테 또는 잘츠부르크로 옮기는 것을 고려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이 생각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5. 3. 4. 프랑스

레오 13세는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3공화국을 받아들이게 하였다.[24] 대통령이 사임하자 정부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투쟁을 개시하였다. 이혼을 법적으로 허락하고 종교 교육을 추방하며 수도회가 운영하던 1만여 개의 학교를 강제로 폐쇄시켰다. 1905년 1905년 프랑스 정교 분리법에 의해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25]

레오 13세는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대부분의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이 왕당파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이 1801년 정교협약을 폐지하려 할 것을 우려했다. 람폴라 추기경의 조언에 따라 그는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화국에 "결집"할 것을 촉구했다.[24] 레오의 결정은 많은 프랑스 왕당파들을 화나게 했는데, 그들은 신앙을 위해 왕을 배신하도록 강요받는다고 느꼈다. 궁극적으로 이 조치는 프랑스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고 프랑스 내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또한 레오의 이러한 움직임은 정교협약의 최종 폐지를 막지 못했다.[25]

5. 3. 5. 영국

영어권 국가에서 볼 때, 교황 레오 13세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1896년 회칙 《사도적 관심》(Apostolicæ Curæ)을 반포해 성공회의 성직자 임명에 대해 성사적 무효성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더불어 1878년에는 스코틀랜드에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를 재수립하였다.[26] 1879년 5월 12일, 그는 개종한 신학자 존 헨리 뉴먼을 추기경으로 임명했고,[26] 그는 결국 2010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2019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성되었다. 1899년, 그는 비드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5. 3. 6. 기타 국가

몬세라트 수도원1880년 카탈루냐에서 1000주년을 기념했다. 1881년 9월 11일, 카탈루냐의 국경일과 맞물려 레오 13세는 몬세라트의 동정녀를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는데, 이는 카탈루냐 민족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1886년, 레오 13세는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의 불가리아 공 즉위를 환영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장남 보리스 3세의 정교회 개종을 허용하려 하자 관계가 악화되었고, 레오 13세는 페르디난트를 파문했다.

1887년 4월 10일, 교황 레오 13세의 교황 헌장에 따라 미국 가톨릭 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가 설립되어 미국 가톨릭 교회의 국립 대학교가 되었다. 1889년에는 워싱턴 D.C.미국 가톨릭 대학교를 설립하고 신학 학위를 수여하는 것을 승인했다. 제임스 기번스1886년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미국 신문들은 교황 레오 13세가 미국의 공립 학교를 장악하려 한다고 비판했다.[28]

1892년, 교황 레오 13세는 바티칸 사도 문서 보관소(Vatican Apostolic Archive)를 1893년 세계 콜럼비아 박람회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념하기 위해 계획 중이던 특사 윌리엄 엘로이 커티스에게 공개했다.[30][31]

1899년 로마에서 열린 ''제1차 라틴 아메리카 평의회''와 1888년 브라질 주교들에게 보낸 회칙 ''In plurimis''(노예제 폐지에 관하여)로 기억된다. 1897년에는 사도 서한 ''Trans Oceanum''을 발표했는데, 이 서한은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의 특권과 교회 구조를 다루었다.[32]

1881년 1월, 태평양 전쟁 중 초리요스 전투 직전에 칠레군에게 교황의 축복을 내렸다. 칠레 군인들은 초리요스와 바랑코 도시들을 약탈했고, 칠레 사제들은 페루 국립 도서관에서 희귀하고 고대 판의 성경을 탐냈다.[33]

인도에 교황청 신학교라고 불리는 국립 신학교를 1893년에 설립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교황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점령했다. 1902년 필리핀 총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의 만남에서 레오 13세는 미국 정부가 필리핀의 가톨릭 수도사들로부터 토지를 구매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35]

1884년부터 동아프리카 선교를 승인했다.[26] 1887년, 피아첸차 주교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가 조직한 성 카를로 보로메오 선교사의 설립을 승인했다. 1879년 백부 선교회 (아프리카 선교회)와 관련된 가톨릭 선교사들이 우간다에 왔고, 다른 선교사들은 탄자니아(오늘날의 탄자니아)와 르완다로 갔다.[36]

5. 4. 신학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교황 레오 13세 재위 초기 8년 동안 그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레오 13세는 결혼과 가정, 국가와 사회 영역에서 중요한 주제를 다룬 46개의 교황 교서 및 회칙을 발표했다.

[[File:Kardinal_Giuseppe_Pecci_JS_(cropped).jpg|thumb|145px|left|1887년의 주세페 페치. 레오 13세는 추기경단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1879년 자신의 형제이자 저명한 토마스주의자 신학자인 예수회원 주세페 페치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레오 13세는 여러 스카풀라를 인가했다. 1885년 거룩한 얼굴 스카풀라(베로니카)를 인가하고 '거룩한 얼굴 사제회'를 대총회로 승격시켰다.[37] 1893년 선한 조언의 성모 스카풀라와 성 요셉 스카풀라를, 1900년에는 예수 성심 스카풀라를 인가했다.[38]

== 토마스주의 부흥 ==

레오 13세는 교황의 권위를 위해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내지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 불리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인 토마스주의를 부흥시켰다. 1879년 8월 4일,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를 공포하여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철학과 신학 체제로서 토마스주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이는 미래의 사제들을 양성하는 교회 신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이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교육의 기준이 되었다.

레오 13세는 1879년 10월 15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천사 박사'의 완전한 저작에 대한 비평적 편집, 소위 레오네 판 출판을 지시했다. 레오네 판의 감독은 토마소 마리아 지글리아라에게 맡겨졌다. 레오는 또한 1882년에 ''Angelicum''의 철학부와 1896년에 교회법 학부를 설립했다.

== 성경 연구 장려 ==

1893년 레오 13세는 회칙 《섭리의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을 통해 신학 공부에 있어서 성경 공부가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레오 13세의 후임자인 교황 비오 12세가 50년 후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에서 언급했다시피, 레오 13세의 회칙은 성경과 신학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매우 중요한 회칙이었다.[42]

== 마리아론 ==

레오 13세는 묵주기도와 관련하여 11개의 회칙을 반포함으로써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여 ‘묵주기도의 교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44][45][46] 1883년 레오 13세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정하고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성모 호칭 기도에 ‘묵주기도의 모후’를 추가하였다. 1883년 9월 1일에 회칙 《최고 사도직》(Supremi Apostolatus Officio)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묵주기도가 사회악을 물리치는 효과적인 영적 무기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몽소승 교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회칙에서 인류 구원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며, 그녀를 중재자이자 공속구원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최근의 교황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속구원자"라는 용어 사용을 경계하고 있다.

== 성 요셉 공경 ==

1889년 8월 15일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Quamquam pluries》를 반포하면서 성 요셉을 그리스도인 가장(家長)의 본보기로 선포하면서, 모든 성인 가운데 성모 마리아 다음가는 자리로 그를 높였다. 회칙에서 그는 “세계의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성 요셉에게도 열렬한 신심과 깊은 신뢰를 가지고 그 중재를 기원하는 습관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고 밝혔다.

== 예수 성심 공경 ==

예수 성심 신심은 하느님이요 인간인 예수의 마음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레오 13세는 1899년에 예수 성심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시키고 비기독교인을 포함한 전 세계의 온 인류를 예수 성심에 봉헌하였다. 그는 회칙 《예수 성심께 대한 인류의 봉헌》에서 “예수 성심은 교회에 승리의 보증이 된다."라고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마리아 드로스테 추 비셰링 백작 부인이자 선한 목자의 자비의 성모 수녀회 원장 수녀인 마리아 수녀로부터 전 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회칙 ''Annum sacrum''(1899년 5월 25일)에서 1899년 6월 11일에 전 인류를 예수 성심께 봉헌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회칙은 또한 모든 가톨릭 주교단이 성 금요일 신심을 장려하고, 6월을 성심 성월로 지정하며, 예수 성심께 봉헌 기도를 포함하도록 권장했다.[40]

5. 4. 1. 토마스주의 부흥

레오 13세는 교황의 권위를 위해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내지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 불리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인 토마스주의를 부흥시켰다. 1879년 8월 4일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를 공포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철학과 신학 체제로서 토마스주의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이는 미래의 사제들을 양성하는 교회 신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이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교육의 기준이 되었다.

교황으로서 그는 자신의 모든 권한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부흥에 사용했다. 1879년 8월 4일,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를 반포했는데, 이 회칙은 아퀴나스의 사상에 기반한 중세 신학 체계인 토미즘을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 및 신학 체계로 부활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토미즘은 사제 훈련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평신도 교육에서도 규범이 되어야 했다.

레오 13세는 이후 1879년 10월 15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천사 박사'의 완전한 저작에 대한 비평적 편집, 소위 레오네 판 출판을 지시했다. 레오네 판의 감독은 미래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Angelicum)인 ''Collegium Divi Thomae de Urbe''의 교수이자 총장이었던 토마소 마리아 지글리아라에게 맡겨졌다. 레오는 또한 1882년에 ''Angelicum''의 철학부와 1896년에 교회법 학부를 설립했다.

5. 4. 2. 성경 연구 장려

1893년 레오 13세는 회칙 《섭리의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을 통해 신학 공부에 있어서 성경 공부가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레오 13세의 후임자인 교황 비오 12세가 50년 후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에서 언급했다시피, 레오 13세의 회칙은 성경과 신학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매우 중요한 회칙이었다.[42] 1893년 회칙 ''구세주이신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에서 그는 신학 연구에 있어서 성서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이는 가톨릭 신학, 그리고 성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회칙이었으며, 교황 비오 12세는 50년 후 회칙 ''성령의 영감으로''(Divino afflante Spiritu)에서 이를 지적했다.[42]

5. 4. 3. 마리아론

레오 13세의 전임자인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내용의 무염시태를 믿을 교리로 반포하였다. 레오 13세는 전례 없이 묵주기도와 관련하여 11개의 회칙을 반포함으로써 묵주기도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그는 ‘묵주기도의 교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44][45][46] 1883년 레오 13세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정하고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성모 호칭 기도에 ‘묵주기도의 모후’를 추가하였다. 그는 묵주기도야말로 참되고 적합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생각했다. 1883년 9월 1일에 회칙 《최고 사도직》(Supremi Apostolatus Officio)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묵주기도가 사회악을 물리치는 효과적인 영적 무기라고 선언하였다. 성모 신심과 관련해서는 7개의 회칙을 반포하여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였다.

그의 전임자인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의 교의 선포로 인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몽소승의 교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레오 13세는 11개의 회칙에서 전례 없는 묵주 장려를 펼친 것으로 인해, 마리아 신심을 장려했다는 의미에서 묵주 교황이라고 불렸다.[44][45][46] 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몽소승 교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회칙에서 인류 구원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며, 그녀를 중재자이자 공속구원자라고 칭했다. "중재자"라는 칭호를 허용하면서도, 최근의 교황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속구원자"라는 용어 사용을 경계하고 있다.

5. 4. 4. 성 요셉 공경

1889년 8월 15일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Quamquam pluries》를 반포하면서 예수의 수양아버지이자 성모 마리아의 남편인 성 요셉을 그리스도인 가장(家長)의 본보기로 선포하면서, 모든 성인 가운데 성모 마리아의 다음가는 자리로 그를 높였다. 회칙에서 그는 “세계의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성 요셉에게도 열렬한 신심과 깊은 신뢰를 가지고 그 중재를 기원하는 습관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고 밝혔다. 또한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양아버지이므로 가톨릭교회 위에 가장권을 가지고 있다.”면서 “성 요셉이 성가정의 모든 것을 보필하신 것과 같이 가톨릭교회를 보호자로서 가호해 주신다.”고 설명하였다.

5. 4. 5. 예수 성심 공경

예수 성심 신심은 하느님이요 인간인 예수의 마음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예수의 마음’이란 그리스도의 위격에 근거하고, 그리스도의 위격(말씀의 위격)은 인성과 실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결국 예수 성심 신심은 인간적·감각적 사랑, 영적 및 주입된 초자연적 사랑, 말씀의 위격에서 나오는 신적(神的) 사랑, 즉 그리스도의 삼중적(三重的) 사랑을 상징하는 마음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는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진 가장 탁월한 신심이다.”라고 말한 레오 13세는 1899년에 예수 성심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시키고 비기독교인을 포함한 전 세계의 온 인류를 예수 성심에 봉헌하였다. 그는 회칙 《예수 성심께 대한 인류의 봉헌》에서 “예수 성심은 교회에 승리의 보증이 된다. 교회 초기에 한 청년 황제(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일컬음)가 하늘에서 십자가를 보고 승리를 얻었듯이, 오늘날 우리 앞에는 거룩하고 신적인 다른 표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니고 불꽃 가운데서 빛나는 지극히 거룩한 예수님의 심장이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거기에 두고 인류의 구원을 거기에서 찾자.”고 고무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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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3세는 때때로 새로운 신학적 영역에 진입하면서 여러 차례 봉헌을 수행했다. 그는 마리아 드로스테 추 비셰링 백작 부인이자 포르투갈 포르투에 있는 선한 목자의 자비의 성모 수녀회 수녀원의 원장 수녀인 마리아 수녀로부터 전 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해 달라는 많은 편지를 받은 후, 계시와 성전을 바탕으로 이 청원을 검토하도록 신학자 그룹에 위임했다. 이 조사의 결과는 긍정적이었으며, 그리하여 회칙 ''Annum sacrum''(1899년 5월 25일)에서 그는 1899년 6월 11일에 전 인류를 예수 성심께 봉헌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회칙은 또한 모든 가톨릭 주교단이 성 금요일 신심을 장려하고, 6월을 성심 성월로 지정하며, 예수 성심께 봉헌 기도를 포함하도록 권장했다.[40] 그가 전 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한 것은 비그리스도교인을 봉헌하는 데 있어 신학적 과제를 제시했다. 1850년경부터 다양한 수도회와 국가들이 성심께 자신을 봉헌해 왔으며, 이는 당시 가톨릭 세계에서 흔한 관행이었다.

5. 5. 사회 교리

교황 레오 13세는 교회와 현대 사회 간의 소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며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즉 그는 무조건적인 사상의 자유 혹은 의사표현의 자유, 무조건적인 집필의 자유나 신앙의 자유를 요구 내지는 옹호한다든가 또는 용납하는 행위는 심각한 불법 행위라고 밝혔다. 즉 이러한 자유에 대한 거의 무절제에 가까운 요구들이 원래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권리인양 당연시 하는 생각을 경계했던 것이다.

레오 13세는 교회와 국가 그리고 예식의 자유를 분리하려고 하는 탈종교화된 국가 형태를 배격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교회와 국가,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분리한다는 것은 종교적 무분별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명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레오 13세는 국가법 차원에서 국교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전통적 입장을 재천명하였다. 그의 칙서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에 권위와 고유한 일치의 기원은 신적인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더구나 교회는 어떤 정부와도 적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레오 13세는 공동선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제도를 수용하고 정치에 참여하며 출판의 자유로운 제도를 이용하여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이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제목의 회칙을 내렸다. 《새로운 사태》는 당대의 사회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한 최초의 교황 문헌이다. 교황은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의 환상과 함께 자본주의의 문제점 역시 강력히 비판하였다.

18세기 이후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노사관계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극소수가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대다수는 빈곤에서 허덕이는 부(富)의 양극화는 당시에도 골치 아픈 사회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태》는 교회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계급의 동맹이 아니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과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보장 등 노동자의 적법한 요구를 지지한다고 언명했다. 《새로운 사태》가 ‘노동헌장’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다.

《새로운 사태》는 노동자 문제에 대한 언급에 앞서 먼저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유재산권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천부적인 권리라는 점,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태》는 이어 자본가와 고용주가 지켜야 할 의무들을 제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의무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는 것이다. 노동자와 고용주가 양자 합의로 계약을 체결하고 임금을 결정하더라도 기본적인 정의(正義)는 항상 반영돼야 한다. 임금은 노동자가 검소한 생활, 최소한의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부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태》는 특히 분배 정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부유한 계층이 자기 생활에 필수적인 것과 신분 유지에 필요한 것 이외의 나머지 재화와 소유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마땅한 의무라는 것이다. 또한 국가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분배 정의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준수해 모든 계층의 시민들을 공평하게 보살펴주는 일이라고 했다. 이후 사회교리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사회 불의, 가난과 빈부격차, 인권 침해와 차별, 폭력과 전쟁 등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예언직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5. 5. 1. 교회와 국가 관계

교황 레오 13세는 교회와 현대 사회 간의 소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며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즉 그는 무조건적인 사상의 자유 혹은 의사표현의 자유, 무조건적인 집필의 자유나 신앙의 자유를 요구 내지는 옹호한다든가 또는 용납하는 행위는 심각한 불법 행위라고 밝혔다. 즉 이러한 자유에 대한 거의 무절제에 가까운 요구들이 원래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권리인양 당연시 하는 생각을 경계했던 것이다.

레오 13세는 교회와 국가 그리고 예식의 자유를 분리하려고 하는 탈종교화된 국가 형태를 배격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교회와 국가,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분리한다는 것은 종교적 무분별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명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레오 13세는 국가법 차원에서 국교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전통적 입장을 재천명하였다. 그의 칙서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에 권위와 고유한 일치의 기원은 신적인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더구나 교회는 어떤 정부와도 적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레오 13세는 공동선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제도를 수용하고 정치에 참여하며 출판의 자유로운 제도를 이용하여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이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5. 5. 2. 회칙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제목의 회칙을 내렸다. 《새로운 사태》는 당대의 사회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한 최초의 교황 문헌이다. 교황은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의 환상과 함께 자본주의의 문제점 역시 강력히 비판하였다.

18세기 이후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노사관계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극소수가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대다수는 빈곤에서 허덕이는 부(富)의 양극화는 당시에도 골치 아픈 사회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태》는 교회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계급의 동맹이 아니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과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보장 등 노동자의 적법한 요구를 지지한다고 언명했다. 《새로운 사태》가 ‘노동헌장’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다.

《새로운 사태》는 노동자 문제에 대한 언급에 앞서 먼저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유재산권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천부적인 권리라는 점,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태》는 이어 자본가와 고용주가 지켜야 할 의무들을 제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의무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는 것이다. 노동자와 고용주가 양자 합의로 계약을 체결하고 임금을 결정하더라도 기본적인 정의(正義)는 항상 반영돼야 한다. 임금은 노동자가 검소한 생활, 최소한의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부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태》는 특히 분배 정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부유한 계층이 자기 생활에 필수적인 것과 신분 유지에 필요한 것 이외의 나머지 재화와 소유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마땅한 의무라는 것이다. 또한 국가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분배 정의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준수해 모든 계층의 시민들을 공평하게 보살펴주는 일이라고 했다. 이후 사회교리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사회 불의, 가난과 빈부격차, 인권 침해와 차별, 폭력과 전쟁 등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예언직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6. 죽음

레오 13세는 19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교황인 동시에 20세기에 선종한 최초의 교황이다.[63] 1903년 7월 20일 93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으며,[63] 선종 당시 레오 13세는 그의 전임자인 교황 비오 9세에 이어 세 번째로 재위기간이 긴 교황으로 기록되었다. 2020년에 퇴위 후의 베네딕토 16세가 넘어설 때까지 1295년 이후 가장 오래 산 교황 경험자였다. 공식적으로 레오 13세는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그 뒤에 출혈성 흉막염이 따랐다.[62]

교황 레오 13세의 무덤


레오 13세는 1903년 6월 30일, 약간의 소화불량 증세를 보여 피마자유를 복용했지만, 7월 3일 바티칸 정원에서 산책하던 중 감기에 걸렸고, 곧 폐렴으로 악화되었다.[57][59] 7월 5일, 의사는 폐의 간질화가 오른쪽 폐의 상엽과 중엽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했다.[57] 7월 6일에는 폐렴이 왼쪽 폐로 퍼졌다는 보고가 있었고, 교황은 산소 공급을 받았다.[58] 7월 7일, 허약한 교황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햇빛을 한 번 더 보고 싶습니다."라며 창문의 덧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60] 7월 10일에는 헝가리 순례자들을 맞이할 정도로 호전되었으나, 곧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다.[59]

레오 13세의 유해는 역대 교황 대부분이 안장된 성 베드로 대성전이 아닌, 로마 주교로서 교황의 주교좌 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 안장되었다.[70][71]

7. 평가

레오 13세는 교회와 현대 사회의 화해를 추구하고 학문 진흥, 외교 관계 개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통해 가톨릭 사회 교리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2] 교황 바오로 6세는 레오 13세를 "위대하고 현명"하며, 자신이 물려받은 "목회적 시각과 접근 방식"의 "첫 번째 스승"이라고 칭송했다.[72]

레오 13세는 19세기 가톨릭 교회가 근대 사상과 과학 사상을 부정하던 상황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 사상을 통해 신앙과 과학 사상이 공존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는 바티칸 도서관 자료를 일반에 공개하고 신학교 설립에 힘썼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공화제 프랑스를 처음으로 인정한 교황이 되었다.[77]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신자들에게 국정 선거 투표를 포기하도록 하는 등 "바티칸의 죄수"라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최초의 사회 회칙이자 가톨릭 사회 교리/Catholic social teaching영어의 선구로 꼽히는 『노동헌장』을 발표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착취와 과도한 자본주의를 경고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1896년 교황 서한으로 성공회의 성직자 서품의 사도 계승을 부정했다.[77]

레오 13세 시대에 가톨릭 교회는 수도회 발족 및 규모 확대, 선교사 파견 등을 통해 세계 선교의 열정을 강화했으며, 세계 각지에 많은 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는 25년간 교황직을 수행했으며, 1903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1295년 이후 역대 최고령 교황 퇴위 기록을 세웠고, 2020년 베네딕토 16세가 넘어설 때까지 1295년 이후 가장 오래 산 교황 경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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