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마사카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쓰다이라 마사카쓰는 1636년 에치젠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5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5만 석을 분할받았고, 1648년 시바하라를 마쓰오카로 개칭하고 마쓰오카 번을 입번했다. 그는 마쓰오카 번주로서, 영내 치수와 산업 발전에 힘썼으며, 1686년 후쿠이 번으로부터 독립 경영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본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후쿠이 번에 여러 차례 개입하여 갈등을 빚기도 했다. 1693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3남 마쓰다이라 무네마사가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쿠이번 사람 - 혼다 도미마사
혼다 도미마사는 미카와 출신으로 유키 히데야스를 섬겨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후추를 다스리며 지역사회에 기여한 후 도쿠가와 막부에 충성을 다한 무장이다. - 에치젠국의 번주 - 도키 요리타카
도키 요리타카는 에도 시대의 무장, 다이묘로 가미야마 번의 2대 번주를 지냈고, 오사카 성대와 다나카 번주를 역임한 후 은거하였다. - 후쿠이 마쓰다이라가 - 마쓰다이라 야스마사 (후작)
마쓰다이라 야스마사는 일본 제국의 후작이자 정치인으로, 귀족원 의원, 내대신 비서관장, 식부두 등을 역임하며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후 영국과 프랑스 유학, 귀족원 연구회 활동, 쇼와 천황 측근 활동과 저서 집필 등의 행적을 남겼다. - 후쿠이 마쓰다이라가 - 마쓰다이라 야스타카 (후작)
마쓰다이라 야스타카는 독일과 영국에서 농업을 공부한 후 일본 농업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후작위를 습작하고 귀족원 의원, 농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농업 기술 발전에 힘썼다.
마쓰다이라 마사카쓰 | |
---|---|
기본 정보 | |
씨명 |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후쿠이 가문 → 마쓰오카 가문) |
이름 | 마쓰다이라 마사카쓰 |
![]()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간에이 13년 3월 11일 (1636년4월 16일) |
사망 | 겐로쿠 6년 7월 27일 (1693년8월 28일) |
어릴 적 이름 | 센기쿠마루/센기쿠마루 |
계명 | 겐세이인덴 주시위게 마에추쇼 뎃칸료무다이코지 |
묘소 | 후쿠이현요시다군에이헤이지정 마쓰오카의 덴류지 도쿄도시나가와구미나미시나가와의 덴류지 |
관위 | 종5위하·나카쓰카사다이후, 종4위하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에쓰나, 쓰나요시 |
번 | 에치젠마쓰오카번주 |
씨족 |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후쿠이 가문 → 마쓰오카 가문) |
부모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기쿠 |
형제자매 | 마사카쓰 미치테루 나가마쓰 도쿠마쓰 마사치카 만히메 구니히메 센히메 후리히메 |
배우자 | 마쓰다이라 사다유키 삼녀 기쿠히메 하즈 가미사카 씨 아키야마 씨 등 |
자녀 | 쓰나마사 무네마사 마사즈미 요시쿠니 마사모토 스와 다다토라 정실 오타와라 기요노부 정실 세이주인 |
2. 생애
마쓰다이라 마사카쓰는 간에이 13년(1636년) 3월 11일, 에도에서 에치젠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장남(서장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다다마사가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쇼호 2년(1645년) 5만 석을 분할받아 게이안 원년(1648년) 마쓰오카 번을 세우고 초대 번주가 되었다. 번주로서 영지 내 치수 사업을 벌이고 사찰을 건립하는 등 영지 경영에 힘썼으나, 동시에 본가인 후쿠이 번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본번 문제에 개입하여 가독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겐로쿠 6년(1693년) 7월 27일, 에도 아사쿠사의 저택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물평서 『토카이코슈키』에는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하고 미소년을 좋아하며 주연을 즐겼지만, 큰 악행은 저지르지 않아 중하(中下)급의 장수라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2. 1. 출생과 성장
간에이 13년(1636년) 3월 11일, 에치젠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장남(서장자)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다가야 무라히로가 교육 담당으로 임명되었다.2. 2. 마쓰오카 번 성립
아버지 마쓰다이라 타다마사가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쇼호 2년(1645년)에 5만 석을 분할받았다. 게이안 원년(1648년)에는 기존에 시바하라(柴原)로 불리던 땅의 이름을 마쓰오카(松岡)로 고치고 마쓰오카 번을 세워 초대 번주가 되었다. 약 3년에 걸쳐 번주의 거처인 마쓰오카 관이 세워졌다. 같은 해 12월 31일, 종5위하 나카쓰카사 다이후(中務大輔)에 서임되었다.2. 3. 번주 시절
아버지 마쓰다이라 타다마사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쇼호 2년(1645년)에 5만 석을 분할 받아, 게이안 원년(1648년)에 시바하라(柴原)라고 불리던 땅을 마쓰오카(松岡)로 개칭하고 마쓰오카 번을 세웠다. 마쓰오카 관(松岡館) 건립에는 약 3년이 소요되었다. 같은 해 12월 31일, 종5위하 나카쓰카사노다이후(中務大輔)에 서임되었다. 게이안 4년(1651년)에는 형제인 미쓰미치, 마사치카와 함께 닛코의 이에미쓰 묘소 건축을 돕도록 명령받았다.조오 2년(1653년)에는 할머니 세이료인(清良院)을 기리기 위해 영지 내에 에이헤이지(永平寺)의 말사인 세이료잔 텐류지(清良山天龍寺)를 건립했다. 절의 산호(山号)인 세이료잔은 할머니의 법명에서 따왔으며, 절 이름 텐류지는 주지가 이전에 머물던 에도 시나가와의 텐류지(天龍寺)에서 유래했다. 이 절은 마쓰오카 번주 가문의 보리사(菩提寺)였으며, 후에 마사카쓰의 아들이 후쿠이 번주 자리를 계승하면서 후쿠이 번의 보리사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 전후로 영지 내 치수 사업을 시행함과 동시에 마쓰오카 관에 바깥 해자를 파고 토루(土塁)를 쌓아 성을 확충했다. 간세이 4년(1792년) 7월 27일, 마사카쓰의 백 회기를 기념하여 그의 조각상이 만들어져 텐류지에 안치되었다. 현재도 절 안에는 마사카쓰를 모시는 어상당(御像堂)이 있으며, 매년 어상제(御像祭)가 열리며 이때 일반에 공개된다.
조오 3년(1654년) 처음으로 마쓰오카 영지에 들어갔다. 현지에서는 온화하고 영민들에게 격의 없이 대하는 성품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승마 등 무예 외에도 강에서의 물고기잡이, 가마우지를 이용한 낚시(鵜飼), 수영, 스모, 도박, 와카 등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식산흥업에 힘써 특히 주물 산업이 발전했다. 간분 3년(1663년) 12월 28일에는 종4위하로 승진했다. 조쿄 3년(1686년)에는 후쿠이 번으로부터 독립적인 경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본가인 후쿠이 번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본번에 개입하여, 훗날 후쿠이 번에서 일어나는 가독 소동의 한 원인을 만들었다. 형 미쓰미치 사후에도 동생 마사치카가 뒤를 이으면서, 마사카쓰는 끝내 후쿠이 번주가 되지 못했다.
겐로쿠 6년(1693년) 7월 27일 에도 아사쿠사의 저택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셋째 아들 마사히라(昌平, 후의 무네마사)가 뒤를 이었다.
인물평서인 『토카이코슈키(土芥寇讎記)』에 따르면,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스럽고, 미소년을 좋아하며 늘 술자리를 벌였지만, (당시까지는)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므로 중하(中下)급의 장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2. 4. 후쿠이 번과의 갈등
후쿠이 번 본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본 번의 문제에 개입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훗날 후쿠이 번에서 발생한 가독 상속 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동생인 미쓰미치가 사망한 후에도, 또 다른 동생인 마사치카가 번주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마사카쓰는 끝내 후쿠이 번의 번주가 되지 못했다.2. 5. 사망
겐로쿠 6년(1693년) 7월 27일에 에도 아사쿠사의 저택에서 58세로 사망했다. 뒤는 삼남 마사히라(후의 무네마사)가 이었다.『토카이코슈키』에 따르면,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스럽고, 미소년을 좋아하며, 항상 주연을 열었다"고 하나, "지금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므로, 중하(中下)의 장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3. 평가
당대의 기록인 『토카이코슈키』(土芥寇讎記|도카이코슈키일본어)에서는 마사카쓰에 대해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하며, 미소년을 좋아하고 늘 주연을 벌였다"고 기록하면서도, "아직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므로 중하(中下) 정도의 장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영지인 마쓰오카 번에서는 온화하고 백성들에게 격의 없이 다가가는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남아있다. 그는 영내 치수 사업을 벌이고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여 특히 주물 산업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는 후쿠이번 본가의 가독을 계승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본번의 문제에 개입하여, 훗날 벌어지는 후쿠이번 가독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4. 가계
- 아버지: 마쓰다이라 다다마사(1598년 ~ 1645년)
- 어머니: 이쿠(시라이시 씨)
- 정실: 기쿠히메(마쓰다이라 사다유키의 셋째 딸)
- * 장남: 마쓰다이라 쓰나마사(1661년 ~ 1699년)
- 측실: 하쓰(나카네 씨)
- * 삼남: 마쓰다이라 무네마사(1675년 ~ 1724년) - 옛 이름: 마사히라
- 측실: 아키야마 씨
- * 육남: 마쓰다이라 요시쿠니(1681년 ~ 1722년) - 옛 이름: 마사쿠니, 마쓰다이라 마사치카의 양자로 입적
- 측실: 우에사카 씨
- 생모 불명의 자녀
- * 사남: 마쓰다이라 마사즈미
- * 칠남: 마쓰다이라 마사토시
- * 딸: 스와 다다토라 정실
- * 딸: 오타와라 기요노부 정실
- * 딸: 세이주인 - 마쓰다이라 요시즈미 정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